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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Nov 18. 2023

엄마에게 딸은

어떤 생명도 슬프지 않기를

최근에 손주를 안은 지인이 있다.

2.3kg의 작은 생명이 품 안으로 들어왔다.

27년 전  꼬물거리는 손가락을 움켜쥐던 아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집안의 반대가 심해 마음고생을 많이 한 뒤에 얻은 귀한 아이라 두 집안의 기쁨은 컸지만

작은 걱정도 함께 왔다.

작은 머릿속에 혈전이 있어 수술은 불가하고 혈전을 녹여내는 약물 처방으로 추이를 지켜보자고 했다 한다.

산후조리원으로 가야 할 산모는 아이 곁에서 밤을 지새우고

딸과 사위에게 모진 말로 일관했던 친정 엄마는 눈물로  미암함을 표했다 한다.

딸아이가 잘살기를 바라는 엄마 마음으로 행한 모진 말들이 고스란히 엄마의 짐으로 되돌아왔다.


자신의 독한 말 때문에 아이가 그런 건 아닌가 하는 죄책감에.


딸아이 가진 죄인이라 했던가.



친정어머니가 생각났다.


27년 전  큰아이를 낳을 때 양수가 먼저 터져 유도분만을 했다.

첫 아이라 과장님 특진으로 일반 진료보다 높은 의료비를 내고 출산을 준비해 왔다.

결국엔 아무 의미 없는 지출이 되었지만.

엄마 마음은 사소한 부분에서도  비용을 마다하지 않기에.



일요일 새벽  아래가  뜨끈해지며 양수가 먼저 터지고 `이제  그날이 왔구나`

긴장 속에 가방을 챙겨 병원으로 향했다.

양수는 터졌지만 진통이 오지 않아 유도 분만을 해야 했다. 

당시는  무통 마취가 유행일 때라,

진통을 두려워하는 산모들은 무통마취를 겁 없이  요청했다.


홀로 어두운 병실에 다른 몇몇의 산모들과 함께  누워 있었는데

자연스레 주어져야 할  힘이 사라진 나는, 아이가 나오도록  힘껏 아이를 밀어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고

10시간여의 시간을 허망하게 보낸 뒤, 결국엔 응급 수술을 하게 되었다.


아이가 숨을 안 쉬게 되니 갑자기 바빠진 의료진들이 보호자를 부르고

수술 서약서 읽을 겨를도 없이 사인을 하고

그 급박한 과정이 무서워 나는 울고 불고

 

마취를 하면 숨이 끊어져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것을 알게 된 건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응급상황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니.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둔 병실 티브이에서 계속 다이애너 비 사망 소식이 들려오고

옆 침대 위 산모가 고통에 블라인드를 잡아 뜯는 소리,

간호사들이 와서 그 산모를 나무라는 소리

한동안 소리를 지르며 악을 써대던 산모  두 어명이 출산을 위해 이동한 뒤에도 나는 병실에 누워 있었다.


그렇게 작은 생명이 내게 왔고 , 출산 과정에 호흡이 어려웠던 아이는 내 품이 아닌 인큐베이터에 눕게 되었다.



내가 처음 본 아이는 머리 왼쪽이 면도되어 있고 파르스름한 머리 위에  링거 바늘이 꽂혀 있었다.

Basal ganglia 부위에 이상이 있으니

백일이 되어 목을 가누는지가 관건이라고 했다.

무엇을 알았고 어떤 생각을 할 수 있었겠나!


그저 눈물로 누가 나 좀 알아줬으면.

누가 나 좀 살려줬으면 했다.


나는 7일 , 아이는 10일을 병원에 있다  퇴원을 했다.

친정에서 몸조리를 하면서

아이만 보면 눈물이 나는 내게 엄마는

삼시 세끼   미역국 한 사발을 끓여주셨다.

걱정 말라는 말만 연거푸 하시면서.


엄마도  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평범한 사람인데 무슨 말로 나를 위로할 수 있었을까.

그저 내 딸이 걱정되고

내 딸이 음식을 못 넘기면 그것이 마음 아프고.

다른 아이와 다를 바 없어 보이니

 ``잘 커 갈 거야. 힘들게 낳은 아이가 나중에 효도한대``... 라며

우는 딸을 달래 줄 밖에...


그렇게 매일매일이 눈물의 연속이었고

``그래도 밥을 안 먹으면 아이 모유 못주니 먹어야지.``

``네가 기운내야 아이도 잘 크지.``

``지금 잘 자고 잘 먹고 괜찮으니 잘 클 거다.``


내가 곡기를 끊고 울고 있으면

엄마도 수저를 놓고 같이 울었다.

1달 후 아이와 함께 시댁으로 들어가

지옥 같은 시간을 버티며 백일을 기다렸다.

다행히 목을 가누고 정상적인 모습을 보여 그나마 걱정은 덜게 되었다.

그래도 MRI에서 보였던 이상 징후가 걱정되기는 했지만

병원에선 더 이상 염려 안 해도 된다고 하니 일단은 안심이 되었다.

완전히 근심이 사라진 건  학교 입학 전 MRI 재 촬영 후였다.



지인의  손주를 보며

딸 가진 죄인(?)이었던 엄마를 생각했다.

순산을 못해서 딸이 아파하고 있는데 아무런 도움이 안 돼서


그래서 엄마는 나와 함께 아파하고 슬퍼하고 밤잠 못 이루며 손주를 얼러주고 달래주었다.


내가 아파 엄마를 돌아보지 않았고, 그래서 엄마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해

퇴원 후, 딸의 절망을 오롯이 다 받아내신 엄마가 무슨 잘못인가 싶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 그냥  일어난 일일뿐인데

받아들이는 엄마는 그게   자신의 탓인 양  밤낮으로 마음고생을 함께 해주셨다.


딸아이가 시집가면 내 마음도 똑같아질까?


지인 친정 부모님이  딸에게 너무도 미안해하며 우신다는 얘기에


그러지 않으셔도 좋다는,

할 만큼 다 하셨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그 나이까지 잘  키워 시집까지 보내셨는데. 이젠 그만 아이에게서 자유로워지시라.

아이는 잘 클 것이다라고 말씀 전해드리고 싶다. 27년 전 내 아들이  잘 자라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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