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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May 17. 2024

밀가루지짐

5월이 시작되자 길게만 느껴지던 베트남의 건기가 끝을 보고 있다.

비가 오기 시작하면 지열을 식혀주는 빗줄기에

사람들은 숨을 고른다.


비가 온다.

세차게 내리는 비가 온다.

창 밖으로  알록달록한 우산이  하나둘.

하교하는 아이들을 데리러 나온 엄마들의 기다림이다.



갑자기 시작된 비는 우산도 소용없을 만큼  다리를 적셔버리지만

그럼에도 손에 부여잡은 우산대를 단단히 부여잡고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엄마는 안 그랬다.


베트남의 비는 하루종일 내리는 비가 아니어서

우산을 가지고 가지 않은 날에도, 잠시 기다리면 비를 맞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의 비는 여우비가 아니라면  

그치기를 기대하면 낭패보기 십상이다.


기억 속에 갑작스러운 비가 오는 날엔

난 매번 비를 맞고

집까지 걸어가야 했다.


아이걸음으로 20분 넘는 거리를

거의 매번  우산 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지, 고학년에 접어들어서였는지



시작은 기억에 없지만

엄마는 매번 우리를 데리러 오는 수고를 하지 않았다.


그때는 그랬다.


준비 없이 간  어떤 날

비가 내리면

가방을 우산 삼아 뛰다가 걷다가

집까지 가는 길은 너무 멀었다.


그래도 그 길이 슬프거나 노엽지는 않았다.

먹고사는 게 바빴던 그 시절

아이들에게 쏟는 신경보다

세상살이가 더 팍팍했던 시절


우리 엄마들은 그런 사소한 일엔 무신경하기도 했던 것 같다.

아이들도 그래서 빠른 포기를 배운 거 같기도......


골목 어귀에 접어들면

벌써부터 고소한 기름냄새가 코끝으로 전해져 왔다.


벨을 누르면 엄마가 마루 귀퉁이에서 수건을 건네준다.

그 수건으로 발을 닦고 손도 닦고

가방에서 떨어지는 물도 닦아내고

그런 뒤에도

까치발로 목욕탕까지 가서 발을 깨끗이 씻어야 했다.

깔끔한 성격의 엄마는 젖은 발로 집안을 돌아다니는 걸 무척이나 싫어했다.


비 맞고 온 딸이 걱정스러운 게 아니라

방이 더럽혀질 것을 염려하는 엄마

그래도

기분 나빴던 기억이 없음은


고소한 그 기름 냄새 때문이었을까.

침샘을 자극하는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



옷을 갈아입고

주방으로 달려간다.

널찍한 프라이팬 한가득

엄마는 지짐(이)을 부치고 계셨다.(경상도에선 찌짐이라 부르는 게 더 친숙했지만)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달콤한 냄새를 마구 풍겨대며 침흘리게 만들던  지짐은

탄 듯 안 탄 듯 바삭하게 구워내면 먹을 때 더 맛있었다.


동글 납작하게 구워낸 지짐은

새우도, 오징어도, 파 한쪽도 양파 한조각도 없는

밀가루 반죽으로 만든다.


밀가루에 설탕 듬뿍, 소금 약간,

그리고 넉넉하게 두른 기름의 맛.


그게 다였다.

엄마는 비가 올 때면

학교로 우리를 데리러 오는 대신

밀가루 반죽을 멀겋게 해서 널찍한 프라이팬에

지짐을 해주시곤 했다.


고소하면서도 달달했던,

출출해진  우리들의 허기를 채워주던

지짐은 눈 깜짝할 새 한 판 두 판 없어져갔다.

바삭한 테두리는 먼저 먹는 게 임자.

쟁탈전이 벌어질라치면 머릿 수대로 잘 뜯어주셨다.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은 밀가루 찌짐인데,

제과점 단팥빵 못지않게 맛나다.

덜 달게 느껴지면 하얀 설탕을 찍어 먹으면 그게 또 별미라.


앉은자리에서 몇 판이나 먹었는지

엄마가 구워내는 즉시 게 눈 감추듯 잘도 먹는다.


비와 우산과 밀가루 지짐

엄마는 비 맞고 오는 딸 대신에 지짐을 선택하신 거다.


우리 자매는 거기에 불만이 없었다.

몇 번 투덜댄 적도 있었겠지만

집에선 고소하고 달달한 지짐이 우리를 기다릴 테니 투덜거림은 짧았다.

우리 입을 지짐으로 막은 엄마의 고단수일까?ㅎ


비만 오면 그때 먹은 지짐의 냄새, 색깔, 맛과 느낌이 떠오른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비가 오는 날

밀가루 지짐을 구워준 적이 있었다.

아무것도 넣지 않은 밀가루 지짐

엄마와는 달리 핫케잌 가루도 살짝 섞어 반죽을 만들었다.


빵도 떡도, 모든 게 풍족해진 요즘 아이들에게 지짐이 어떻게 느껴질지 궁금했다.

다행히 아이들은 군말 없이 잘 먹었다. 설탕까지 듬뿍 찍어가면서.

설탕의 힘인지도 모르겠다.


``외할머니는 비만 오면 이걸 부쳐주셨어. 맛 어때?

아무것도 안 들어 있는데 맛이 괜찮아?``

``응 엄마.. 맛있어.

다음에 또 먹을래.``

달달하고 고소한 맛이 나쁘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릴 적 먹던 소중한 기억과 같이 했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때 그 시절

옹기종기 모여 앉아 먹던 그 감성을 우리 아이들도 추억할 수 있을까.


비가 오는 날엔

엄마가 부쳐주던

그 지짐이가 먹고 싶다.



더 이상 지짐을 하지 않는 엄마에게선 지짐의 냄새가 남아있다.

맛난 음식을 아무리 먹어도  어렸던 내가 언니 동생과 함께 나눠 먹던

그 고소함을 추억하는 건 함께한 우리들 모습 때문이다.


엄마도 우리도 젊고 어렸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간 속에서

따뜻한 지짐이만큼 따뜻했던 주방의 훈기가 느껴진다.


아무런 걱정 없이 지짐이만 즐기면 되었던 내가 있다.

우리 자매가 있다.


다 커버린 우리에겐

나이 드신 엄마와 세상 온갖 걱정을 끌어안고 사는 우리들이 남았다.


지짐이 주는 기억들이 머릿속을 채우던 걱정거리를 몰아내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 든 오후다.



소중한 것들은 그리 오래 머물지 않는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잎싹은 모든 것을 빠뜨리지 않고 기억해야만 했다.

간직할 것이라고는 기억밖에 없으니까-황선미`마당을 나온 암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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