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막다른 곳
8장
한우근 사장실 / 고진옹 집 / 안상태 국회의원 사무실
(간단한 소도구와 조명으로 번갈아 가며 장소를 이동한다)
한우근 사장실
한우근과 서지만 앉아 있고, 고진옹 서 있다.
한우근 고진옹 씨, 제가 기회를 한 번 더 드렸잖아요. 고진옹 씨가 사람들 희망퇴직에 사인하고 조용히 정리하게 만든다고 약속했잖아요.
서지만 회사 밖에서 난리가 났어요. 기자들이 소설을 『천일야화』처럼 쏟아내고 있습니다. 어쩔 거예요?
고진옹 저는 회사 규정을 전달하고 그들이 빨리 정리하게끔 조언만 했습니다.
한우근 조언을 듣고 자살하나요? 조언을 듣고 가족과 동반자살을 해요?
고진옹 지금 제 탓이라는 건가요?
서지만, 서류를 고진옹에게 내밀며.
서지만 고진옹 씨와 면담했던 사람들의 증언이에요.
고진옹, 서류를 가져다 넘겨 본다.
서지만 보면 알겠지만, 하나같이 고압적 태도였다, 위압적인 말투였다, 배신감에 괴로웠다, 그날 이후로 불면에 시달렸다 등등. 당신 면담에 불만이 차고도 넘쳐요.
고진옹 말도 안 돼.
서지만 본인은 그런 의도가 아니었을지라도 상대방은 충분히 그렇게 느낄 수 있어요. 그리고 이렇게 한두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의 진술이 일치하고 있습니다.
고진옹 지금 이러는 이유가 뭐죠?
서지만 회사를 그만뒀으면 합니다.
고진옹 예?
서지만 해고입니다.
한우근 실추된 이미지를 복구하는 게 아니라, 먹칠에 덧칠을 했어요. 우리 인연은 여기서 끝났습니다.
한우근 사장실 조명 어두워지고 무대 한쪽―고진옹 집―에 조명 들어온다.
고진옹 집
이윤미, 의자에 앉아 있다.
이윤미 잠깐 떨어져 지내자.
고진옹 왜?
고진옹, 이윤미에게 다가간다.
이윤미 다가오지 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고진옹 너도 다른 사람이랑 같은 생각이구나.
이윤미 혼란스러워.
고진옹 너까지 왜 그래? 너 변했구나.
이윤미 아니. 난 안 변했어. 변한 건 당신이야.
사이.
이윤미 당신, 근행이 자살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어?
고진옹 난 근행이 위하는 길을 생각한 거야. 믿어줘.
이윤미 당신 정말 왜 그래?
고진옹 난 당신이랑 준호랑 잘 살고 싶었어. 그 마음뿐이었어. 가장으로 미안하고 미안해서, 더 이상 무책임해지지 않으려고 방법을 찾은 거야.
이윤미 잘 사는 게 뭔지 몰라? 힘들어도 당신이 굴뚝에 있을 때가, 난 더 잘 살고 있는 느낌이었어.
고진옹 그래? 내가 그 지옥 속에 갇혀 있어야 당신은 더 행복해? 당신이 단 하루라도 굴뚝에 있어 봤어? 내가 그곳을 갔다 왔기 때문에 그만둘 마음을 먹은 거야. 왜? 소용없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으니까.
이윤미 당신 너무 멀리 있는 것 같다. 예전엔 같은 길을 걷는 느낌이었는데.
고진옹 왜 날 이해 못 하고, 자꾸 밀어내는데?
이윤미 당신은 변하는 시대에 발맞췄고, 난 아직 구닥다리 시대에 머물러 있나 봐.
고진옹 윤미야, 가지 마. 제발 내 옆에 있어줘.
이윤미 당신, 이해도 안 되고 용서도 안 될 거 같아. 그래서 같이 있기 힘들어.
고진옹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가족이 나한텐 전부야. 제발 이러지 마.
이윤미 근행이 폐암이었대.
고진옹, 말문이 막힌다.
이윤미 어머니도 아픈데 본인도 아프니 눈앞이 캄캄했겠지.
고진옹, 그대로 무릎이 꺾인다.
이윤미 난 근행이한테 평생 속죄하며 살 거야.
고진옹 집 조명 어두워지고, 무대 다른 쪽―국회의원 사무실―에 조명 들어온다.
국회의원 사무실
안상태 앉아 있다.
안상태 너 은혜 갚으라고 했지?
고진옹, 안상태에게 달려가 멱살을 잡는다.
고진옹 네가 우리한테 해준 게 뭐야? 너 출세하려고 순진한 우릴 이용하기밖에 더 했어?
안상태, 거칠게 고진옹 손을 뿌리치고.
안상태 너, 일하라고 돈 벌라고 복직시켜준 거지, 자살 독려하라고 넣어준 건 아니잖아.
고진옹 이렇게 일 터지면 나를 방어막으로 이용하려는 계획이었어?
안상태 너 큰일 났다. 열패감이 크니까 피해의식에 사로잡혔나 봐.
고진옹 날 왜 인사팀에 넣었는데?
안상태 네가 사람들을 위로하고 설득할 줄 알았지.
고진옹 툭하면 말 바꾸는 네 말을 믿으라고?
안상태 지금 너 때문에 모든 사람이 골치 아파졌어.
고진옹 나 때문에?
안상태 나도 머리 터질 거 같아.
고진옹, 답답하다.
안상태 그러게 조용히 잘 처리하지. 왜 이렇게 되게 만들어.
고진옹 훗! 그래. 결국 다 나 때문이구나. 다.
안상태 오해하지 마.
안상태, 태도를 바꾸어서 자못 부드러워진다.
안상태 일이 커졌다, 진옹아. 일단 네가 인정하고, 차선책을 모색하자.
고진옹 뭘 인정해?
안상태 네가 도근행 씨한테 제안했던 것들이 큰 압박이 됐을 거라는…….
고진옹, 어이없어 코웃음을 친다.
안상태 네 일자리, 준호 일자리, 내가 다 알아봐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나만 믿어.
고진옹 널 믿으라고? 한우근 잡아서 재선 노릴 계산하는 널 믿으라고? 노조 잠잠하게 해준다고 환심 사려고 노력한 널 믿으라고?
안상태 날 그렇게 의심했다면, 넌 왜 응했는데?
고진옹 …….
안상태 난 진심으로 널 도와주려고 한 것뿐이야. 네가 잘못해서 사람들 괴롭히니까 이런 일이 터진 거고.
고진옹 야~~~~~
고진옹, 소리 지르며 안상태에게 달려드는데.
그때, 보좌관들 들어온다.
보좌관, 놀라며 고진옹 잡아채 말리고.
고진옹, 계속 안상태에게 달려들려 한다.
안상태 잘 결정해라. 회사에서 너한테 소송 건다고 준비 중이래. 내가 너 하는 거 봐서 말려는 보겠는데, 사장이 말을 들을지 모르겠다.
고진옹 두고 봐. 네 흑심, 내가 낱낱이 밝혀줄 테니까.
안상태 네가 동료들 압박하는 녹취록도 나왔어. 들려줘?
고진옹 개수작 부리지 마. 난 진심으로, 정말 그들을 위한 말만 했어.
안상태 너나 수작 부리지 마. 만약, 아직 네 편이 있다면 그건 나니까.
고진옹이 달려들자 보좌관들이 강하게 막아서고.
안상태 내가 충고했잖아. 시대가 바뀌었으니 머리를 쓰라고. 억지만 부리지 말고.
보좌관들, 고진옹 양팔을 잡아 밖으로 내쫓는다.
암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