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탈피
9장
굴뚝 - 1장 고공 농성하던 장소
고진옹과 허수인이 올라와 있다.
허수인 결국 돌고 돌아 제자리에 왔구나.
고진옹, 아래를 내려다보며.
고진옹 근행이가 저기서 손을 흔들었는데. 멀어서 잘 안 보이는데도 (울컥하며) 이상하게 근행이는 금방 알아봤는데.
허수인 하늘에서 성호형 만났겠다.
고진옹 성호형이랑 같이 <로보트 태권V> 부를 때가 제일 행복했다고, 그게 마지막 말이었어.
허수인 관련 문서를 언론사와 경찰에 다 보냈으니 수사가 들어가겠지.
고진옹 고맙다.
허수인 회사가 누적적자를 왜 방치했는지, 매각하려는 계획이 왜 은밀히 진행되는지 드러나면 갑자기 해고된 사람들의 억울함이라도 풀리겠지.
고진옹 넌 흔들리지 않는구나.
사이.
고진옹 다 잃었어. 마누라도, 아들도, 집도, 직장도, 동료도. 뭘 위해 살았는지 모르겠어.
허수인 네가 제자리에 돌아온 것처럼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올 거야.
고진옹 희망이 없어도 노조에 남아 있는 게 맞는 거였을까?
허수인 끝까지 함께 복직할 날을 꿈꾸고 투쟁했어야지.
고진옹 그런 날이 오지 않을 게 뻔하다 해도?
허수인 그렇게 단정 짓는 순간, 세상에 지는 거야. 오게 해야지. 불가능할 거 같아도 노력해야지. 그게 우리 삶의 이유잖아.
고진옹 네가 부럽다.
허수인 수많은 만화영화를 봐. 악의 무리는 항상 나쁜 방식으로 세상을 지배하려 하잖아. 그럴 때마다 의로운 영웅들이 나타나 무찌르고. 그래야 영화도 세상도 제대로 돌아가니까. 하지만 그 영웅들, 죄다 죽을 만큼 고생해. 그래도 결코 포기하지 않지. 왜? 악의 무리에게 세상을 내줄 순 없으니까.
고진옹 …….
허수인 삶이 녹록지 않고, 의로움을 알아주는 사람도 없는 것 같고, 너만 억울하게 사는 것 같지?
고진옹, 울컥한다.
허수인 그렇지 않아. 다 알고 있어.
고진옹 그럴까?
허수인 그럼. 그게 이 세상을 나빠지지 않게 지탱하고 있거든. 엄청 깊은 뿌리야. 비록 지금은 약해 보여 낙담할 수 있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아. 너의 의로움이 이어지고 계속 전달되면서 세상이 아주 조금씩 좋아지는 거거든.
고진옹 네 말이 다 맞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네 말이 다 맞았으면 좋겠다.
사이.
고진옹 드문드문 세상이 나한테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을 했어. 그래도 그때마다 네가 있어서 얼마나 든든했는지 몰라.
핸드폰 울리고. 고진옹 받는다.
고진옹 윤미야? 맞아. 다시 굴뚝에 올라왔어. 아래?
고진옹, 아래를 보고 윤미가 서 있는 곳을 향해 손을 흔든다.
고진옹 뉴스?
고진옹이 뉴스를 틀면.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뉴스
75m 굴뚝 위에서 1년이 넘게 농성을 벌였던 미래자동차 고진옹 씨가 내려온 지 한 달이 지난 오늘, 다시 굴뚝 위에 섰습니다. 고 위원장은 미래자동차 집단해고에 저항하며 홍성호 씨와 함께 굴뚝에 올랐고, 홍성호 씨가 먼저 내려간 후, 홀로 372일 동안 시위를 이어갔습니다. 사측이 합의하겠다는 통보를 듣고 내려왔으나 합의가 불발되었고, 최근 사측의 고소로 체포영장이 발부된 상태입니다.
고 위원장은 굴뚝에 오르기 전, 여러 언론사와 경찰에 투서를 넣은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한우근 사장이 회삿돈을 빼돌리고 적자가 쌓이자 이를 숨긴 채, R&B 회사에 비밀 매각을 시도했다는 사실과 그 과정에서 무리하게 노조를 정리하려 했다는 주장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이 협정을 위해 안상태 국회의원이 R&B 회사로부터 불법 선거자금을 받은 것에 대해 수사를 촉구하는 내용입니다.
고진옹, 핸드폰에 대고.
고진옹 아니야. 이건 다 수인이 한 거야. (허수인을 똑바로 쳐다보며) 혼자라니? 난 혼자인 적 없었는데. 아니야. 내 앞에 분명히 있어. 허수인. 허수인이 죽었다니? (황당한 웃음) 언론사와 경찰에도 다 이 친구가 제보했어. 난 지금 당신이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어. 내가 했다고? 내가 제보한 거라고? (허수인이 고개를 끄덕인다) 허수인 때문에 고공농성을 시작했다니. 성호형이랑 수인이랑 나랑 셋이 시작했어. 성호형이 먼저 내려간 후에도 1년 넘게 둘이…… (사이) 아니야. 우린 항상 함께 있었…….
고진옹, 전화 끊고.
고진옹 아니지? 윤미가 네가 고공농성 하다 죽었대. 그래서 내가 시작한 거래.
허수인 너 혼자 고공농성 할 때 날 불러냈어.
고진옹,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얼얼하다.
허수인 두려움에 날 부른 거야. 나도 그랬으니까.
고진옹 넌 항상 당당하고 저돌적이고…… 흔들리지 않고, 그런 모습이었…….
허수인 네가 원하는 모습이지. 네가 지키고 싶던 모습. 그렇게 날 만든 거야.
고진옹, 침을 삼키고.
허수인 하지만 이제 날 불러내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넌 충분히 단단해졌으니까.
고진옹이 허수인에게 다가가려 하자 허수인 뒤로 물러난다.
고진옹 수인아.
허수인, 그대로 건물 밖으로 나간다. 허공에 그대로 서 있다.
고진옹 말도 안 돼.
고진옹이 허수인에게 달려가려 하자 허수인 그대로 사라지고.
고진옹을 막고 들어오는 홍성호.
고진옹 형.
홍성호, 고진옹에게 다가가 등을 툭 치며.
홍성호 뭐 해? 굴뚝농성 시작하려면 플래카드부터 걸어야지.
고진옹, 홍성호가 가져다주는 플래카드를 내건다.
커다란 플래카드가 굴뚝 아래로 펼쳐진다.
‘미래자동차 누적적자, 은밀한 매각협정 수사를 착수하라.’
‘국회의원 안상태 불법 후원금 수수혐의 조사하라.’
고진옹 (플래카드 가리키며) 낭만적인 개소리지?
홍성호 왈왈왈왈왈~ 세상을 지키는 개소리지.
고진옹 형. 수인이가, 수인이가…….
홍성호 다 네가 불러들이는 거야.
고진옹, 홍성호 말의 의미를 파악하려 노력한다.
홍성호 사내대장부가 이렇게 높은 곳까지 올라온 이상, 뭐라도 얻어내야지. 그러려면 열정적으로다가, 열정적으로다가 움직여야 해. 절대 지치면 안 돼. 여기 올라와서 축지법과 비행술 수련을 한다 생각해.
홍성호, 고진옹에게 자세를 잡아주며.
홍성호 기억하지? 더 빨리 움직여. (발에 맞춰 리듬을 타며 노래를 부른다) ‘달려라 달려 로보트야 / 날아라 날아 태권브이 / 정의로 뭉친 주먹 로보트 태권 / 용감하고 씩씩한 우리의 친구.’ 노래도 부르고.
고진옹, 노래를 한다.
홍성호 더 크게.
고진옹과 홍성호 함께 노래 부른다. 노랫소리 커진다.
홍성호 축지법과 비행술! 우린 로보트 태권브이처럼 나는 거야.
어느새 둘은 칼군무처럼 똑같은 동작을 하고 있다.
홍성호 김 박사가 그랬지. 로보트 태권브이가 완성되는 날, 지구의 평화가 완성될 수 있다! 하하하!
고진옹 우리가 로보트 태권브이처럼 싸우는 날, 우리의 평화가 완성될 수 있다!
홍성호 우하하하하! 우하하하하하! 이렇게 나는 거야.
앞질러 가던 홍성호, 비행기가 이륙하듯, 빠른 걸음 뒤 비행술로 날아간다. 사라진다.
고진옹, 홍성호와 같은 동작, 점점 몸이 뜨는 것 같다.
조명 점점 어두워지고.
고진옹 형, 몸이 점점 뜨고 있어. 나도 드디어 비행술을 익혔나 봐.
암전.
어둠 속에 고진옹을 응원하듯 노래 신나게 울려 퍼진다.
달려라 달려 로보트야
날아라 날아 태권브이
정의를 위해 키운 로보트 태권
이 세상에 당할 자 있을까 보냐
평화의 사도 사명을 띠고
악의 로보트 때려 부순다
멋지다 신난다 태권브이 만만세
무적의 우리 친구 태권브이
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