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역할분담

(25. 2. 12. 여성시대 사연 방송)

by 가득

요즘 나에게 핫한 챗지피티에게 묻는다. 음성대화와 상담도 가능한 요 아이가 대견하다.


"오늘 2호 바둑 대회가 있는데 누군가는 같이 나가야 하거든? 근데 남편과 나 둘 다 집에서 쉬고 싶다고 하는데 어떡하지?"

"중요한 일이라면, 두 분 중 한 분이 양보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상황을 잘 이야기하고, 다음에 다른 기회에 서로 쉴 수 있도록 조율해 보세요."

답변이 그럴듯하지만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직설적으로 묻는다.


"내가 어제 와인을 마셨더니, 컨디션이 안 좋아. 막 어지럽고 토할 것 같고 그래. 한 시간 동안 운전을 못 할 것 같아. 근데 우리 남편이 변비가 심한데 똥이 마려워가지고 힘들 것 같대. 네가 생각할 때는 누가 나가서 운전하는 게 낫다고 생각해?"

"신체 상태가 더 나은 분이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상황을 이야기하고, 다음 기회를 조율해..."

"그러니까. 어떤 신체 상태가 더 나은지 봐봐. 토할 것 같고 어지러운 신체 상태랑 똥이 마려운 신체 상태."

"이런 상황에서는 두 분 다 어려우시겠지만, 가능하면 서로 이해하고 양보하는 방향으로..."

"그러니까 네가 판단할 때는 누가 좀 더 낫겠냐고."

"두 상황 모두 쉽지 않은데..."

"네 의견을 말해달라고!"

"컨디션이 조금이라도 나은 분이..."

"그러니까 누가 컨디션이 조금이라도 나은 것 같냐고!!!!!!!"

"말씀하신 상황으로 보면, 화장실이 급한 상황이 더 빨리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와우... 이겼다. 화가 난 듯한 내 말투에 당황해 내가 원하는 답을 말해줬나 보다. 어쨌든 챗지피티의 판단으로 남편이 가기로 한다.

남편은 나가면서 대신 설거지와 빨래를 다 널어놓으라고 말하며 나간다. 해놓지 않으면 일주일 동안 나 혼자 다 해야 한다며 아이들을 증인으로 세운다. 남편의 집안일 업무 중 3분의 2를 나한테 떠넘길 셈이다.

남편이 나가며 5만 원만 달란다. 빨래 널기를 5만 원으로 퉁쳤다. 설거지만 하면 되겠지만 지금 컨디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남아 있던 1호가 상업지구에 가고 싶다고 말한다. 오락실에 가서 엄마와 한 판 해서 아도겐, 워리어겐으로 엄마를 날려 KO 시키고 싶단다. 지난번에 2호와 하다가 된통 얻어맞고 내내 KO를 당했다. 내가 직접 당한 건 아니지만 기분이 나빴다. 안지려고 얼마나 버튼을 두드려댔는지 손도 아프고, 어깨도 한동안 많이 아팠다.

머리를 썼다.
"대신 네가 설거지를 하면 엄마가 이따가 오락실 같이 가줄게."

아이가 신나 하며 설거지를 한다. 손도 빠르다. 벌써 다 했단다. 나보다 깨끗이 한 것 같다며 마구마구 칭찬을 해준다.


내친김에 빨래 널기도 시킨다. 심심하면 분명 나한테 놀아달라고 할 테니, 심심할 시간을 최대한 없애야 한다. 칭찬에 기분 좋아진 아이가 빨래도 널겠다고 한다.

"탈탈 털어서 널어야 해."
마치 무슨 과학적인 특별한 현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구겨진 티를 탈탈 털어 쫘악 펴진 모습을 보여준다. 아이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인다. 이쪽저쪽 잘 털어서 너는 모습이 기특하다고 또 마구 칭찬을 해준다.

거의 누워서 입만 일하고 있으니 이렇게 편할 수가 없다. 그래, 어느 책에선가 시스템이 잘 돌아가게 만들어야 한다고 했는데... 이런 시스템, 아주 괜찮군.


그새 아이는 빨래 널기도 끝냈다.
"이야, 너 군대 가면 완전 사랑받겠다."

내가 군대를 가봤나. 아무 말이나 막 던진다. 그래도 아이는 좋아한다.
"어떻게 이렇게 손이 야무져? 손도 작은데 똑 부러지게 일을 잘하네." 말하며 손가락으로 걷은 빨래들을 가리킨다.

"빨래도 개?"

"응. 저것만 하면 완전 완벽하겠어. 너는 진짜 다 잘해. 완전 척척박사!"
엄지손가락을 두 개 치켜들고 "짱짱!"을 외친다.

아이는 빨래도 갠다. 이쯤 되니, 이따가 오락실에서 나의 모든 체력을 불태워야겠다고 생각한다. 아니지. 대충 열심히 하는 척, 억울한 척하며 KO만 많이 당해주면 된다. 한 시간은 아이와, 나머지 한 시간은 남편과 지난번 못 깬 보글보글 게임 백 번째 판을 깨야겠다.


1호가 어느새 다 갰다며 보여준다.
"종류별로 갰어. 이건 수건, 이건 엄마 옷, 이건 우리 옷, 이건 아빠 옷."

개기도 잘 갰다.
"어머나,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개? 누구한테 배운 거야? 와, 진짜 우리 1호 부인한테 나중에 사랑받겠어. 빨래도 잘 개지, 설거지도 잘하지. 나중에 회사 가면 승진도 엄청 빨리 될껄. 대리, 과장, 부장....."

"그렇겠지.."

체념한듯 힘들었던 아이는 같이 침대로 가서 눕자고 한다. 이게 웬 떡이냐! 생각하며 침대에 발랑 눕는다.

아이와 끌어안고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아이가 내 숨을 따라 긴 숨을 내쉰다. 함께 큭큭거리며 미소 짓는다.


평화로움도 잠시,

"엄마, 이제 오락실 가자." 응? 벌써?

순간 멈칫한다.

"엄마 지금 힘든데.."

"엄마가 힘들면 내가 쉽게 KO 시킬 수 있을 텐데.."

"아이. 그럼 재미가 없지. 엄마가 아우 힘들어 아우 힘들어하면서 인상을 막 이렇게 이렇게 찌푸리고 윽 토할 것 같아 하면서 손가락 하나만 겨우겨우 까딱이고 그러다 막 기계에다 토하고 그렇게 하는 게 좋겠어. 아님 엄청 신나 하면서 같이 열심히 막 이렇게 이렇게 두드리면서 너랑 재밌게 막 응? 막 워리어겐 아도겐 하면서 응? 막 엎어치고 매다 꽂고 냅다 던지고 막 응? 그렇게 하는 게 좋겠어?"

지금 안 가겠다는 일념으로 손동작 발동작 표정연기를 마구 하며 말한다.

"2번"


휴. 통했다. 다행이다. 하지만, 이 평화가 또 얼마 안갈 것 같아 불안하다.


전화벨이 울린다. 2호 친구다.

"너 누구야?"

"나 1호. 2호 바둑대회 갔어."

"응. 나와서 같이 눈싸움 하고 놀자."

"나 못나가는데.. 엄마랑 같이 오락실..."

가!가라고!! 손가락으로 오케이 사인을 마구 날린다.

"어. 알았어. 지금 나오라구? 두시간반이나 놀자구? 안되는..."

괜찮아. 가! 가라고!! 또 오케이 사인을 마구 날린다.


밖에서 따뜻하게 오래 있으라고 방수장갑, 목도리, 장화를 챙겨준다.

아이가 현관문을 나선다. 나도 모르게 야호 소리를 질렀다.

현관문을 빼꼼 열고 아이가 말한다. "엄마 지금 야호라고 한거 같은데..."

"아. 아니야. 언능 다녀와~"


호호. 완벽한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