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함은 시크함 뒤에서 더 돋보이게 마련이다. 추운 겨울 앙상했던 뾰족하고 새침한 가지들이 봄 햇살에 하품을 하며 숨겨놨던 다정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긴 겨울 눈꽃이라도 피어야 앙상한 가지에 눈길을 주던 사람들은 아기 봄꽃이 왔다며 너도나도 설레어한다. 세상에 꽃보다 다정한 것이 있을까. 무리 지어 흐드러지게 피어나도, 시멘트 벽 사이 홀로 당당히 피어나도 꽃은 언제나 다정하다. 화려한 꽃잎 사이 그윽한 향기까지, 다정함은 악수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을 부드럽게 감싸 안는다.
유년 시절, 옥상 항아리 옆에는 해마다 같은 자리에서 맨드라미 한 송이가 피었다. 마루에 앉아 옥상과 처마 사이로 하늘을 올려다보면 흑백사진 속 고운 자줏빛으로 홀로 당당하게 피어난 맨드라미가 다정하게 나를 위로했다. 그 뿐이랴. 대문 앞 사과상자 속에서 피어난 분꽃은 딸랑거리는 귀걸이가 되어 나를 공주로 만들어주고, 화단의 사루비아는 내게 달콤한 꿀을 주는 낭만이었다.
십여 년 전, 한 남자는 내게 시시때때로 꽃다발을 한 아름씩 선물했다. 어느 날은 빨간 장미를, 어느 날은 노란 프리지아를. 빨간 다정함을 받은 날엔 그와 눈을 마주치며 활짝 웃었고, 노란 다정함을 받은 날엔 나도 모르게 그의 손을 잡았다. 세월이 흘러 그 남자를 닮은 작은 아이가 봄 햇살처럼 웃으며 들꽃을 내게 건넸다. 나는 아이의 작은 귀에 노란 꽃을 꽂아주고, 얼굴을 맞대며 웃음꽃 피어나는 그 시간을 박제했다.
꽃은 삶을 다정으로 채운다. 인생 가장 아름다운 신부는 수줍은 부케와 하나 되어 화사하게 빛나고, 졸업식 후 새 출발을 하는 이들은 꽃과 함께 축하와 응원을 받는다. 하지만, 꽃처럼 예쁜 나이일 때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꽃이, 나이가 드니 축하받을 일도 드물고, 다정했던 이들도 시들해져 그런가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다. 그래서인가. 길을 걷다 멈춰 꽃에게 눈 맞추어 인사를 건네고, 분홍빛 촌스러웠던 꽃무늬 옷에 눈길이 가나보다.
나를 낳아준 나이든 여자의 마음을 알게 된 나는 날이 좋은 어느 날 그녀를 수국꽃밭으로 안내했다. 곱게 차려입은 발랄한 여인은 색색깔의 수국에 볼을 맞댔다. 핑크빛 수국, 보랏빛 수국, 초록빛 수국 앞에서 여인은 너무나 행복한 나머지 그날 그곳에서 찍은 사진을 영정사진으로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색색깔의 고운 수국꽃밭에서 화사하게 웃고 있는 모습으로 그녀의 마지막을 함께할 이들에게 다정함을 전하고 싶은가 보았다. 아마도 나는 사진 속 그녀를 보며 오래전 어느 날의 그녀를 떠올릴 것이다. 아기를 낳고 눈을 떴을 때 고생했다며 나에게 한아름 꽃을 안겨주고 안아주던, 아기를 갓 낳은 나에게 "아가"라고 불렀던 그때의 엄마를 말이다.
봄이 올 때까지는 살아있으면 좋겠다고 말하던 지인이 있었다. 그도 봄의 다정함을 느끼고 싶었던 걸까. 아픔의 고통이 견디기 힘들어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울부짖었던 그도 마음이 잔잔해 지는 어느 순간엔 봄이 빨리 오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가 떠나고 나니 문득 궁금해진다. 봄을 기다리던 그에게 꽃을 한 아름 안겨주었다면 유난히 추운 겨울에 가버린 그가 좀 덜 추웠을까.
길을 걷다가 헐벗은 산 중턱에 산소 하나를 보았다. 방금 누가 놓아두고 간듯한 싱싱한 꽃이 눈에 띄었다. 봄을 기다리던 누군가의 산소인가. 그렇다면 틀림없이 기뻐할 것이다. 꽃을 본 남자는 자기를 닮은 작은 아이에게 물었다. 아빠 죽으면 뭐 가져올 거야? 아이가 말했다. 사이다. 사이다를 엄청 많이 뿌려 줄 거야. 하늘나라 가면 이제 마음껏 마셔도 되잖아. 아픈 몸 때문에 사이다를 먹지 못하는 게 한이라던 남자는 껄껄껄 웃었다. 아이는 곧이어 나를 향해 말했다. 엄마는 꽃을 좋아하니까 꽃밭에다 묻어 줄게. 아이의 다정함에 순간 꽃길을 걷는 기분이 되었다. 유난히 길게 느껴지던 겨울이었다. 봄이 온다. 다정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