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사치

by 가득

청소를 시작했다. 오후에 병원을 다녀오면 2호 바둑선생님이 도착할 시간이라 그 전에 끝내야한다. 1호가 날리던 종이비행기들이 널려있다. 직선으로 뻗는 비행기, 가다가 유턴해서 돌아오는 비행기, 날자마자 내리꽂는 비행기, 아이에겐 신기한 모험조각이 나에겐 모두 쓰레기가 된다. 읽다가 여기저기 던져둔 만화책과 책들을 줍느라 허리가 아프다. 2호가 깨뜨린 태블릿 유리 조각들도 어딘가 남아 있을 것 같다. 야구선수가 꿈이었던 2호의 꿈이 바둑기사로 바뀐 후 바둑알들은 야구공처럼 여기저기 날아다녀 구석에 박힌다. 2호가 1호에게 던져주다 뚜껑이 빠지며 쇼파밑으로 쏟아져 들어간 영양제들 중 몇알도 남아있을지 모른다. 남편이 걷어 넣은 바구니 속 빨래들은 아이들의 발에 차여 쏟아져나와있었고, 아침에 싸준 주먹밥에 붙은 김들은 아이들의 바쁜 몸놀림과 함께 여기저기 떨어져 있다. 남편은 오늘도 여전히 식탁위에 바나나껍질과 계란껍질을 놓아두고 나갔고, 욕실 앞에도 수건과 팬티가 어김없이 늘어져있다. 기절하듯 잠들었더니 집안꼴이 말이 아니다.

죽기 직전에도 청소하는 악몽을 꾸다 죽을 것 같다. 누군가는 청소하는 시간이 즐겁고 좋다는데 이해할 수 없다. 내 삶과 시간이 누군가에게 야금야금 도둑맞는 것 같은 기분이다.

무선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밀리의 서재에서 '순수의 시대'라는 제목을 검색했다. 다행히 오디오북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겠지 하며 시작 버튼을 누른다. 어색한 번역체와 AI음성 호흡 때문에 귀에 쏙쏙 박히지 않는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그냥 듣는다. 시간이 흐르니 그래도 들을만 하다. 이야기에 집중하다보니 청소가 그다지 힘들지 않게 느껴진다. 아이스커피를 한 모금씩 마실때마다 손이 닿은 곳이 깨끗해질때 마다 조금씩 마음이 가벼워진다. 이야기는 재밌는데 한번씩 흐름을 놓치다보니 책을 여유로운 마음으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쇼파에 편하게 몸을 누이고, 넘치는 시간속에서, 천천히 읽어내려갈 마음의 여유와 함께 그렇게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

그럴 수 있는 때가 있었다. 날이 좋은 어느 날, 쇼파에 발랑 누워 어느 누구의 침해도 받지 않으며, 조용히 책을 곱씹어 읽으며 희열을 느끼던 그런. 넘치는 시간과 체력과 최소한의 책임과 자유로움 속에서 문장에 밑줄을 그어가며 나도 이런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던. 그래서 문예창작과에 은근슬쩍 원서를 들이밀어보던 그런 때. 은희경의 새의 선물은 처음으로 교과서가 아닌 책에 밑줄을 긋게 만들었던 인생소설이었다. 책에 밑줄을 긋다가 허기가 지면 어떠한 죄책감(건강에 대한)도 없이 끓여먹었던 라면의 꿀맛도. 아마도 내 인생에 가장 행복한 장면은 그 때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책과 글과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은 나에게는 여유이며, 또 다른 이름의 사치이며, 행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인지 모르지만 바쁜 하루하루 속 오디오북일지라도 책을 읽고, 생각이란 걸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고, 이렇게 글을 쓰는 지금. 이런 시간을 내 인생에 몇번 가지지 못했기에. 늘 갈망했지만 다른 할일들과 부족한 시간, 마음의 조급함으로 하지 못했던 그 '사치'를 지금 누리고 있으니 나는 지금 행복한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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