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계탕과 권태기
며칠 전은 복날이었다. 복날엔 삼계탕이 빠질 수 없다. 결혼 전 나의 원가족은 삼계탕을 즐겨 먹었다. 커다란 냄비에 인삼, 대추, 황기, 마늘을 넣고 닭을 푹 삶는다. 펄펄 끓어 국물이 뽀얗게 올라오면 엄마는 닭고기만 꺼내서 쟁반에 놓고 살을 찢어 주셨다. 뜨거운 연기가 올라오는 닭다리를 들고 소금에 살짝 찍어서 먹으면 고기가 어찌나 부드럽고 맛난 지 온 식구가 먹는 것에 집중하느라 거친 숨소리뿐 말이 없었다. 고기를 먹는 사이 엄마는 찹쌀이 풀어진 국물에 야채를 넣고 푹 끓여 닭죽 한 그릇씩을 우리 앞에 놓아주셨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죽까지 든든하게 먹고 나면 여름 보양은 그야말로 완벽했다.
한여름 복날에 우리에게 이 일은 꼭 거쳐야 하는 중요한 이벤트 같았다. 건강한 음식을 다 같이 맛있게 먹으며 뭔가 하나가 된 기분도 들었다. 마치 삼계탕을 먹어치우는 하나의 팀 같았달까. 마지막 남은 국물까지 싹 다 마시고 나면 서로가 하나의 음식으로 똘똘 뭉친 거 같기도 했다. 까다로운 인격들이 모여 뭐든 맞기가 쉽지 않았는데 유독 유일하게 맞았기에 삼계탕을 먹는 그 시간이 더 특별하게 생각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편이 가족의 일원으로 들어온 후 분위기가 달라졌다. 남편은 물에 빠진 고기를 절대 먹지 않는 사람이다. 나중에 들으니, 시어머니는 당신이 싫어하시는 삼계탕을 가족에게 한 번도 끓여주신 적이 없다고 했다. 삼계탕을 먹는 우리 가족만의 특별한 시간에 모두가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처음 시작은 배려였다. 새 신랑이 싫어하는 음식을 굳이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남편이 먹고 싶어 하지 않으니 나도 굳이 삼계탕을 끓이고 싶지 않았고, 먹지 않는 것에 익숙하게 되었다. 그저 한 번씩 아 오늘이 복날이구나 하며 그때를 그리워하며 그냥 그렇게 그날을 지나 보냈다. 그렇게 삼계탕을 먹지 않게 된 것이 어언 십 년이 되었다. 한 번씩 양서방이 삼계탕을 먹을 줄 알면 참 좋았을 텐데 하고 장모는 아쉬운 마음의 소리만 내뱉었을 뿐이다. 양서방은 삼계탕 하나 때문에 완전한 우리 가족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전에 남편과 옥신각신 했다. 사소한 다툼과 전혀 상관이 없는 내용이지만, 나는 삼계탕을 먹지 않는 사람과 괜히 결혼했다고 생각했다. 행복하게 느껴지지 않는 모든 원인이 오로지 그것 때문인 것만 같다. 인삼과 전복을 넣고 끓인 삼계탕이 냄비에 남아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남아서는 안 되는, 싹싹 비워져야 하는 삼계탕이 남았기 때문에. 누군가가 맛있게 먹는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기 때문에, 행복해야 하는 그 시간이 오염되었기 때문에, 괜한 분노가 삼계탕으로 향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물론, 굳이 맞지 않는 것을 억지로 끼워 맞출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왕이면 블록이 딱 들어맞듯이 잘 맞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에 자꾸만 아쉬워진다. 니은 자 블록이 디긋자 블록인 척하며 내 삶에 끼어들었을 때, 나는 왜 그 긴 세월을 니은자 블록인 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던 건지. 왜 이제와서 본색을 드러내냐고 항의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남편에게 정말 밉다고 소리쳤다. 당신이 생각하는 거 이상으로 정말 정말 싫다고. 남편은 개의치 않았다. 곧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붕어처럼 뻐끔거릴 나를 잘 알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삼계탕 때문이었다. 다 먹어치우지 못한 냄비에 남은 삼계탕 말이다. 그것이 하루 종일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