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기억

by 가득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 터는 오래전 산동네라고 불리던 곳이었다. 산언저리에 있는 동네에 작고 허름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는데, 그 중간 어디쯤 우리 집이 있었다. 동네 제일 아래쪽 버스가 드문드문 다니는 도로가 옆에는 작은 시장이 있었다. 굽어진 좁은 구도로는 여전하지만, 시장이 있던 그 자리에 지금은 상가가 지어져 다양한 학원과 병원 마트 등이 들어서 있다.


시장엔 양쪽으로 기다랗게 작은 가게들이 들어서 있었다. 시장 입구에서 왼쪽으로 처음 보이는 가게가 나의 엄마 미용실이었다. 엄마는 내가 국민학교 2학년 때 열심히 공부하더니 미용사 자격증을 땄다. 그리고 그 당시 내게는 꽤 먼 거리에 있는 찜질방에서 미용실 보조로 일을 시작했다. 그러더니 2년 후, 시장 골목에 미용실을 떡 차렸다. "엄마, 이제 미용실 원장님이다." 말씀하시는 엄마의 모습과 그 용기가 멋지게 보였다. 한편으론, 과연 엄마에게 머리를 맡기는 손님이 있을까 싶어 고개가 갸우뚱했다. 나라면 공짜로도 안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엄마가 대충 아무렇게나 말고, 깎으면 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 당시 시장 안의 건어물 가게, 슈퍼, 양품점, 시계방, 만둣가게, 채소 가게, 문구점, 신발 집, 양장점에 '대왕'이나 '순희네' 등의 이름이 붙어있었던 것처럼, 엄마 미용실에도 커다란 다홍색 간판에 흰색 글자로 소라미용실이라 쓰여 있었다. 엄마는 아무 연관 없는 '소라'라는 이름이 그저 이뻐 보여서 선택했고, 그렇게 불렸다. "소라야, 밥 뭇나. 같이 묵자." "소라야, 나 머리 좀 해줘. 결혼식에 갈 거니까 이쁘게 말아 올려줘야 해." 내가 아는 엄마를 부르는 말은 늘 00 엄마였는데,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무척이나 낯설면서 재미있었다.


시장은 오가는 사람들로 북적였고, 가게에 드나드는 손님들을 나는 소파에 앉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엄마는 예쁘게 옷을 차려입고, 드라이로 머리를 올리고, 화장을 한 고운 모습으로 손님들을 맞았다. 그때 엄마 나이 마흔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 환하게 웃으며 손님을 맞는 엄마의 모습이 예뻤다. 시장 분위기처럼 엄마도 활기가 넘쳤다. 그 활기에 나도 웃음이 났다. 엄마가 미용실을 차린 것이 정말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가끔 파마하다 말고 잠시 집에 다녀오겠다며 보자기를 머리에 둘러쓴 채 도망가서 안 오는 사람이 종종 있어도, 머리가 마음에 안 든다고 다시 해달라고 앉아서 구시렁구시렁 대는 사람들이 있어도 엄마는 그런 것쯤은 아무렇지 않았다. 엄마는 점을 빼주거나, 눈썹 문신을 할 때 마음에 안 드는 손님이 있으면 바늘로 더 아프게 콕콕 찔러줄 만큼 강단이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미용실도 떡 차릴 수 있었던 거다. 대범한 성격의 엄마는 우리 남매 때문에 더욱 강한 슈퍼울트라파워 우먼으로 살고 있었다.


가게에 손님이 있으면 백 원만 달라고 조르는 우릴 보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돈통에서 돈이 나오는 걸 우리는 귀신같이 알았다. 신호등 사탕과 동그란 딱지를 사지 않고 모은 돈으로 처음 엄마 생신 선물을 살 때 스타킹을 추천해 준 양품점 아줌마 아들은 후에 내 수학 과외 선생님이 되었다. 양품점 옆 가게 슈퍼집 딸은 공부를 잘한다고 소문이 자자했는데, 어느 날부터 우리 시에 처음 생긴 남녀공학 교복을 입고 미용실 앞을 왔다 갔다 하는 게 멋져 보여 나도 그 똥색 마이를 입으려고 열심히 공부했다. 양장점 아줌마 아들도 나와 같은 똥색 마이를 입고 학교에 다녔는데, 어느 비가 많이 내리는 저녁에 나를 집에 데려다주느라 흠뻑 젖었던 한쪽 어깨를 보고 어찌나 설렜는지 모른다.


동네가 재개발되면서 시장이 사라졌다. 엄마 미용실도 사라졌다. 우리 집도 사라졌다. 시장 앞에 늘 서 있던 과일 트럭 털보 아저씨도 사라졌다. 시장 이야기들이 멈추었다. 모두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자리에서 사느라 바빴다. 단지가 들어서고 다시 사람들은 모여들었지만, 시장은 이제 없다. 흘러 흘러 이십 년 만에 다시 이곳에 살게 되자 그동안 생각하지 못했던 시장이 몹시 그리워졌다. 엄마 미용실로 내달리던 나와 내 동생의 숨찬 뜀박질도, 미용실에 하루 종일 함께 있다 문을 닫으면 먼저 집 앞으로 달려가 있던 똘똘한 방울이의 쌕쌕 대는 숨소리도, 모든 것들이 변화된 이 안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쉰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17층 아줌마가 오늘도 나를 보고 환히 웃는다. 화장을 곱게 하고, 멋진 등산복을 입고 건강하고 활기찬 웃음과 함께 나에게 말을 건넨다. 아줌마와 헤어지며 오늘도 생각한다. 어릴 때, 참새방앗간인 듯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만수 문방구 아줌마, 나를 기억하시는 걸까.

작가의 이전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