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 알베르 카뮈
그리고 페스트에 희생당한 사람들 편에서 증언하기 위해서,
그들이 감내해야 했던 불의와 폭력에 대한 기억 하나만이라도 남겨 두기 위해서, 그리고 사람들이 재앙 한가운데서 배우는 것,
즉 인간에게는 경멸보다 감동할 점이 더 많다는 사실만이라도 말하기 위해서
지금 여기서 끝을 맺으려는 이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 페스트, 알베르 카뮈
일기와 글의 차이가 무엇일까. 글을 쓰자고 했기에 글을 쓰자고 생각하면서 일기가 아닌 글을 쓰자, 그렇다면 일기와 글의 차이는 무엇인가, 일기는 하루를 기록하고 그에 대한 생각이나 잡다한 감정을 정리하지 않은 채 결론을 내지 않은 채 내버려둬도 괜찮은 편린이나 조각 혹은 그런 문장들의 연속이라고 한다면 글은 그렇지 않다. 뭐라도 말을 하고자 쓰기 시작했고 그랬기에 뭐라도 말을 뱉어야 하는 것이 글이다. 생각의 초점과 생각의 상세내역, 구성, 흐름등이 읽혀야 하고 글이 끝나면 이 사람이 무슨 생각으로 이 글을 썼는지 동의나 공감은 못해도 의도는 알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오늘 중학생 독서 과외를 하며 다룬 책 <페스트>에서 발견한 멋진 문장으로 글을 써보기로 했다.
과외를 할 때면 늘 아이에게 먼저 '어땠어?'라고 물어보는 편이다. 이 질문은 상당히 난처한데 '어떠했느냐'가 포함하고 있는 질문의 범위가 무척이나 넓기 때문에, 좋았느냐 싫었느냐 재밌었느냐 없었으냐 감동적이었느냐를 포함해서 취향이었는지 취향이 아니었는지 다 읽기는 했는지 잘 읽혔는지 등등, 무엇을 물었는지 사실 잘 모르겠는 질문이 된다. 그래도 오늘 과외를 한 아이는 어느덧 일 년이 되어가면서 나의 '어떠했느냐'라는 질문은 저 모든 걸 통칭해서 묻는 사실상 자기가 어떤 답을 해도 되는 열린 질문이라는 걸 알기에 편하게 답해줬다. "명작인 이유를 알겠다."
카뮈의 <페스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 구성이 조금 독특하고 재밌다. 꼭 데칼코마니처럼 인물들이 짜여있는데 가령 의사 류를 두고 랑베르와 코타르가 '이타와 자기중심'으로 갈리고, 랑베르가 타루와 '외부인과 내부인'으로 갈리고, 판느루와 카르텔이 '페스트를 해결할 것인가 해석할 것인가'로 나뉘어 딱 절반으로 접어 찍은 그림 같다.
카뮈가 <페스트>의 인물을 그렇게 구성한 것은 '폐쇄된 한 마을에서 일어나는 극한 공포의 상황에서 인간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다양한 위치와 상태(삶에서의)로 놓고 보여주기 위함이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코타르를 두고 '나쁘다'라고 단언할 수 없는데, '내 삶에 존재하던 비극의 수위가 타인과 같아졌을 때 혹은 세상의 비극이 내 개인의 비극보다 넘쳐 내 비극은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에 우리는 적어도 더이상 외롭지 않을 것이고, 약간의 이기적인 안도와 함께 비극이 불투명하게 번지는 경험을 할 테니까. 코타르에 대해서 아이는 "외로웠는데, 다른 사람들이 자기만큼 비극적이게 되니까 안심했을 것 같아요." 라고 말했다.
아이에게 카뮈의 <페스트>가 명작인 이유는 '도덕적이고 인생에서 배워야 할 점이 있기에 꼭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하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라고 했다. 약자와 강자, 악인과 선인이 또렷하게 구분되어 전후의 관계가 명확한 이야기들만 읽다가 '어느날 갑자기 느닷없이 찾아온 재앙 앞에 무너져 가는 인간 군상'의 모습은 아이에게 새로웠을 것이고, 중학생인 청소년으로서 좀 더 입체적인 삶의 모습을 느꼈으리라고 선생인 나는 생각했다.
<페스트> 수업을 하면서 나는 이 말을 가장 많이 자주 반복했는데, 바로 "나라면 이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어떤 행동을 했을까? 할 수 있었을까? 라는 질문이 들었다, 그런 질문을 카뮈에게서 받았다고 느꼈다."는 말이었다. 우리는, 당신은 모든 재앙 앞에서 자신의 비극을 덤덤히 삼킨 채 하루하루를 성실히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재앙에 저항하는 '류'가 될 것인가 아니면 재앙에 벌어진 아구의 입 같은 달콤한 이득에 손을 뻗어 '코타르'가 될 것인가, 그도 아니면 신에게서 그 뜻을 찾고 <페스트>가 출몰한 이유를 해석하는 판느루가 될 것인가? 나에게 <페스트>는 내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내 인간의 모습을 체험하며 곱씹는 연습장 같은 이야기였다.
따라서 오늘 이 글을 <페스트>에 등장하는 멋진 구절을 가지고 써보려 마음을 먹은 것인데,
그리고 페스트에 희생당한 사람들 편에서 증언하기 위해서, 그들이 감내해야 했던 불의와 폭력에 대한 기억 하나만이라도 남겨 두기 위해서, 그리고 사람들이 재앙 한가운데서 배우는 것, 즉 인간에게는 경멸보다 감동할 점이 더 많다는 사실만이라도 말하기 위해서 지금 여기서 끝을 맺으려는 이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 <페스트>, 알베르 카뮈
그 이유는 아이가 빌린 책에서는 이 단락의 가장 멋진 문장의 단어 '감동'이 '찬양'으로 번역되어 있었고, (즉 인간에게는 경멸보다 찬양할 점이 더 많다는 사실만이라도) 나는 이 문장을 읽었을 때에 오랜 염증처럼 따라다닌 인간 나 자신에 대한 옅은 경멸의 얇은 피막이 녹아내리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수많은 내 인간의 모습을 체험하고 곱씹은 연습장을 나설 때에 도장 문에 달린 문판에 '인간에게는 경멸보다 찬양할 점이 더 많다는 사실'이 적혀 있다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찬양할 점을 위해 걷지 않을 이가 있을까.
카뮈는 <페스트>가 소설 보다는 '기록물'로 분류 되길 바랐다고 한다. 실제로 책은 이 모든 이야기를 '하나의 기록'으로 취급하며 마무리 된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의 공포를 매일 매 순간 극복하며 지내야 하는 폐쇄된 마을에서의 하루하루에 이어진 희생과 감내해야 했던 폭력과 불의 그 한가운데서도 인간의 눈부신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기록은 오늘 조그마한 내 삶의 망망대해에 반작이는 등대로 남았다.
매일 쏟아지는 비극과 재난들 속에 어떤 삶을 선택해야 할지 매순간 선택의 기로에 오르며 시험 당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작은 등대는 무엇일지. 그 답이 이 글과 함께 조금은 더 선명해진 내일이 오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