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양반을 기다리는 시간, 백수는 정신승리가 필요했다.
숏츠 알고리즘에 뜬 영상에 귀와 눈이 열린다. '영화는 우리를 뜨겁게 만드는 술과 같고 책은 차갑게 만드는 물과 같다' 이동진 평론가의 말이다. 과연 그렇다. 즉각적이면서 빠르고 강렬한 영화 속 장면들이 눈을 관통해 어느새 심장에 이르면 그 화기에 나도 모르게 뜨거워질 때가 더러 있었다. 그리고 책을 펼쳐 천천히 숨 고르듯 문장 하나하나를 음미하면 일상의 과한 자극 속에서 흥분하던 세포 하나둘씩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교양을 쌓고 이성을 자극하는 일만큼 영화가 책을 따라올 수 없다는 그 말이 정말 그럴싸하다. 폰을 내려두고 나는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그러다 문득 혼잣말을 한다. '아내는 지금쯤 뭐 하려나...'
책을 펴고 숨 고르듯 한 장씩 넘겨가며 활자를 들숨으로 들이마신다. 간신히 가슴아래까지 눌러놓지만 이내 날 숨 한 번에 자음과 모음 모두 토해져 쏟아지는 날이 바로 오늘이다. 창 밖을 내다보니 회색의 구름진 세상에 도시가 봄날의 색채를 잃었다. 오후부터 강풍을 동반한 거센 비가 내리니 안전에 각별히 신경 쓰라는 주의문자가 오전부터 울려댔지만 초록색 나무와 풀들은 더욱 뚜렷해 보인다. 뭔가 그 선명함 때문에 책을 던져놓고 망설임 없이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 뚜렷한 자극이 백수인 내게 더욱 촘촘한 무엇인가에 대해서 얘기하는 듯 하지만 글로 표현은 어렵다. 거점에 도착하면 어플에서 20원씩 주는 동네 다섯 곳을 크게 한 바퀴 내달린다. 예전 같으면 한 걸음에 내달렸을 그 거리를 오분도 채 안돼 폐 속이 거칠어졌음을 느끼고 속도를 낮춘다. 꺼끌 해진 들숨과 저릿한 폐를 느끼며 선명함에 대한 이해가 바로 목표를 세우고 행동하는 것이었음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다시 혼잣말을 했다. '백 원 벌었다...'
최근 몇 달 '부부가 둘 다 놀고 있습니다'와 같은 책마냥 아내와 나는 삼시세끼 차려먹으며 어떤 계절의 냄새, 오전과 오후 그리고 늦은 저녁의 색깔을 상상할 수 있는, 촉감이 만연한 시공간에서 지냈다. 다만 여름의 헐렁한 냉장고 바지 같은 시간을 지나 아내는 특별한 재능을 인정받고 어제부터 빼곡한 세상으로 첫 출근을 시작했다. 아내와 달리 범인의 재능을 갖고 있던 나는 면접에서 연이은 n번째 탈락을 하고 홀로 남겨진 씁쓸한 날이기도 했다. 친절함을 베풀었던 면접관들 덕분에 생채기가 크지 않았고 후시딘 같은 몇 마디의 충고에 쓰라림도 견딜만하다. 다만 급여가 사라진 n번째 달이 쏜살같이 내달리지 않기를 바라는 조바심이 빼꼼히 고개를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교양을 쌓아서 조바심이 까치발로도 넘보지 못하도록 큰 벽을 세우겠다는 벽돌공의 일념으로 읽히지 않는 책을 다시 집어들고 혼잣말을 한다. '정신승리가 필요하다...'
식용유가 한 컵 담긴 잔에 부어진 물마냥 내 정신은 기름표면에서 부유하며 책과 섞이지 못한다. 단지 글자만을 껌벅이며 쳐다본다. 그렇게 부유하는 표면 위에서 정신 차려 보면 활자는 사라지고 어느새 망상의 세계를 자유롭게 거닐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정신승리를 위한 백수의 당연한 여정인 것이다.
탄력 없이 넓고 듬성한 공간을 백수라는 시간이 느긋하게 걷고 있다. 중력에 따라 공간이 왜곡되어 시간이 빨라지거나 느려지는 상대성 이론처럼 백수의 시공간은 상대적으로 더디고 느리다. 이 시공간 너머의 세상은 사회라는 시스템이 지배하며 빼곡하고 팽팽한 공간이다. 그곳의 무거운 압력을 견디기 위해 서둘러 움직이고 빠르게 지나치는 이들을 보며 백수는 위협을 느끼기도 동시에 안도감을 받는다. 언제 차례가 올지 모르는 입석금지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퇴근길, 피로에 잘게 구겨진 하루가 등에 무겁게 눌러앉았고, 저들도 인지하지 못한 채 꼬깃해지는 표정. 그들이 살아가는 시공간은 그렇게 빠르게 흐르기에 백수가 사는 세상보다 급속하게 늙어간다. 백수는 다행히 아직까지 이곳에서 젊음을 유지하고 안전하다. 그 안도감에 나는 문득 생각한다. '아내는 곧 퇴근을 준비하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