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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컹리 Sep 03. 2018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97 채사장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p.39

   여기에서 생산수단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다. 생산수단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그것이 다른 사람의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는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사실 원시 시대의 돌 조각은 생산수단이라고 할 수 없다. 진정한 생산수단은 영토와 토지 혹은 대농장이나 근대에 나타날 공장같은 것들이다. 영토, 토지, 대농장, 공장이 돌 조각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혼자서 소유할 수는 있지만 혼자서 운영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서 거대한 땅의 주인은 A 혼자일 수 있지만, A 혼자서는 그 땅을 경작할 수가 없다. 그래서 A는 B를 고용해야 한다. 즉 생산수단은 노동을 대신할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특징을 갖는 것이다. 이는 대농장이나 공장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생산수단을 소유한 A는 자신의 생산수단에서 대신 일하는 B에게 어떻게 대가를 지불하는가? A가 소유한 생산물에서 지불한다. 그렇다면 A가 소유한 생산물은 어디서 왔는가? 그것은 B의 노동력에서 왔다. 여기에 생산수단의 진정한 의미가 있다. 생산수단은 소유자가 타인의 노동력을 이용하게 함으로써 사회적 관계를 왜곡시킨다.

   정말 무엇인가 이상한 것 같다. B는 바보인가? B는 자신이 노동해서 만들어낸 생산물을 모두 A에게 주고 A는 그 중에서 일정량만을 B에게 돌려준다. 노동은 오직 B 혼자서 했는데, B의 노동의 결과물인 생산물은 A와 B가 나눈다. A가 생산수단을 소유했다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B는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이건 아니다 싶었다. 뭔가 잘못되었고 부당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중략) A도 B의 눈빛이 예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곧 알아챘다. 조금만 뭐라 해도 B는 가자미눈을 해가지고 쏘아보는 것이었다. 이러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A는 어느 날 B를 불렀다. B는 구시렁거리며 또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A가 B를 가까이 불러 B의 귀에 대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건 비밀인데, 너만 알고 있어. 나, 사실은 신이다." (중략)

 

   '신'은 요청된다. 지배자는 신을 부른다. 신이 진짜로 응답을 하거나 말거나 그건 중요하지 않다. 신이 진짜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는 지배자의 관심사가 아니다. 지배자 자신이 부를 수 있는 '신'이라는 언어만 있으면 된다. 왜냐하면 신은 지배자가 사회를 지배할 권리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독단적으로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을 지닌 자일수록, 그의 신앙은 절실하다.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있다. 지배자에 의해 신이 요청된다고 해서, 혹은 지배자가 자신의 지배에 신을 이용한다고 해서, 이것이 신이 부재함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중략)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역사적, 정치적으로 신의 문제를 고려했을 때, 신의 이름이 정치를 위해 사용되었을 혐의가 짙다는 것이다.

   이렇게 고대 노예제사회는 종교를 통해 그 지배체계를 공고히 하며 막을 내린다. 고대 노예제사회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토지와 영토라는 생산수단을 지배자가 독점하고, 그 독점의 정당성을 종교에서 찾았다는 것이다. 고대 노예제사회는 구체적으로 고대 이집트, 고대 그리스ㆍ로마 등 정치와 종교가 일치했던 제정일치사회들을 말한다.




p.50

   이렇게 영주들 간에 전쟁이 빈번해지자, 영주들은 자신의 장원을 방어하기 위해 성을 축조하기 시작했다. 벽이 두껍고 높은 성이 있어야 적들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세 시대를 거친 사회는 성을 소유하게 되었다. 중세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장원을 소유한 영주들이 끝없이 싸우면서 성이 필요했던 것이다. 유럽이나 중국, 일본에 성이 있는 것은 그들이 중세를 거쳤기 때문이다. 반면 영주들에 의해 지방으로 권력이 분산되지 않고 국왕 중심의 집권적 체제를 유지했던 한반도에는 거대한 성이 없다.


    A는 국왕이 되어 지배자의 삶을 살았고, B는 농노로서 평이한 삶을 살았다. 기본적으로 중세의 모습은 고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명확하고 사회는 매우 안정되어 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A는 더 이상 자기 스스로를 신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세가 그리스도교의 문화권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에서의 신은 인간의 모습을 한 신이 아니라, 인간이 감히 엄두를 낼 수 없는 우주의 창조주로서 절대적인 지위를 갖는 유일무이한 존재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는 사회에서는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국왕은 신이 아니라 신으로부터 통치의 권한을 인정받은 존재였다. 그 권한은 성직자가 인정해주었고, 그 대가로 국왕은 성직자의 생활을 보장해주었다. A는 생산수단이라는 물질적 측면과 종교적 인정이라는 정신적 측면 모두에게 권력의 정당성을 획득했다. 따라서 B는 A의 지배에 불만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만큼 사회가 안정되고 견고했던 것이다. 이러한 안정적 사회가 가능했기에 중세는 천 년이라는 긴 기간동안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런데 중세 후기가 되면 견고했던 사회적 분위기는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첫 번째 원인은 상업의 발달에서 찾을 수 있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무역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부를 축적한 상인 계층이 등장했다. 이들은 고대와 중세의 유일한 생산수단인 토지와 영토 그리고 장원을 이용하지 않고서도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당연히 이들은 생산수단을 소유한 지배층의 권력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으며, 또 스스로도 자유로워지려 노력했다.

   두 번째 원인은 공장의 발생에서 찾을 수 있다. 18세기가 되면서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을 발명했다. 증기기관은 물을 끓여서 발생한 수증기로 터빈을 움직여서 기계를 작동시켰다. (중략)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공장의 의미다. 공장은 시장에 내다 팔 수 있는 많은 양의 생산물을 만들어낸다. 즉 공장은 새로운 생산수단이다. 그런데 앞에서 우리는 생산수단과 생산물이라는 물질적 가치가 비물질적인 사회적 관계로서의 권력을 발생시킨다는 것을 알았다. 즉 공장이라는 생산수단을 소유한 B는 권력을 가젝 된 것이다. 이렇게 생산수단을 소유한 계급을 '부르주아'라고 부른다. 부르주아의 뜻 자체가 생산수단을 소유한 사람들을 의미한다. 부르주아는 다른 말로 자본가계급, 시민계급, 유산계급이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국왕인 A는 아직도 장원이라는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고, 이를 통해 막강한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B는 공장이라는 새로운 생산수단을 통해 권력을 갖게 되었다. 시대와 사회는 하나인데, 구너력은 둘이다. 구권력은 신권력과 충동할 수밖에 없었다.


p.54

   산업과 상업으로 부를 축적한 부르주아 계급은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정치 참여에는 한계가 있었다. 구권력이 이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인 동시에, 구권력의 지배를 정당해주는 신과 같은 이론적 토대를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신권력은 자신들의 정치ㆍ사회 참여를 정당화해줄 신을 대신할 이론적 토대가 필요해졌다. 그렇다면 신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현실에서의 신의 역할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현실 세계를 설명해주는 역할이고, 다른 하나는 사후 세계를 주관하는 역할이다. 우선 신은 현실 세계를 설명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우리는 누구인지, 왜 세상에는 나쁜 사람이 있고 착한 사람이 있는지, 왜 어떤 사람은 잘살고 어떤 사람은 못사는지, 신은 모든 현실의 물음에 대한 궁극적인 대답이다. 다음으로 신은 사후 세계를 주관하는 역할을 한다. 현실의 삶은 유한하고 짧다. 그런데 죽음 이후의 삶은 현실에서의 죗값에 따라 신에 의해 영원히 결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의 짧은 삶은 고통스럽고 힘들지라도 참고 견딜 만한 것이다. 나를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들은 사후에 신이 대신 처벌해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궁극적 처벌자이자 평가자인 신의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

   부르주아가 왕을 거부하기 위해서는 왕의 권위를 정당화해주는 신부터 극복해야 한다. 다시 말해, 신의 역할을 대신해줄 만한 무엇인가를 찾아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부르주아는 인간의 '이성'으로 신의 역할을 완벽하게 대체했다. 이성은 신이 독점했던 두 가지 역할을 충분히 대신할 수 있었다. 우선 이성은 현실의 물음에 답을 준다. 우리는 진화를 통해 여기에 왔으며, 다른 생물종들과 다르지 않은 생물학적인 존재다. 우리가 땅에 발 딛고 사는 것은 중력이라는 힘 때문이고, 힘은 질량과 가속도의 곱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 중력은 만유인력의 다른 표현인데, 만유인력은 우주 전체의 작동 원리다. 이렇게 이성은 신을 배제하고도 현실의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 다음으로 이성은 인간의 사후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사후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의식과 정신에 대해 말할 수는 있어도 영혼에 대해 말하는 것은 경험적 근거가 없는 비과학적인 태도이고, 종교의 환상에 젖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혼이 없으므로 사후도 없다. 죽음은 신체 기능의 정지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p.60

   생산수단에서 노동자를 고용하는 문제점에 대해서는 앞서 논의한 바 있다. 다시 요약하자면, 부르주아는 프롤레타리아의 노동력으로 생산물을 얻고, 그 생산물을 판매한 금액의 일정 부분은 자신이 쓰고 나머지를 프롤레타리아에게 지급한다. 실제로 노동하는 건 플롤레타리아뿐이다. 부르주아는 생산수단을 소유했다는 이유만으로 노동하지 않고도 부를 축적한다. 이 문제를 다시 반복하는 것은 이 문제가 현대 사회의 근본적 갈등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이때나 오늘날에나 사회 갈등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p.64

   자본주의는 공장을 기반으로 하기에, 공장의 대량생산이라는 특징이 공급과잉이라는 자본주의의 특성을 만든다. 이제 자본주의의 특성을 자세히 알아보려 한다. 

   공장은 끝없이 생산물을 쏟아낸다. 공장이라는 생산수단이 있기 전인 중세에 물건을 사기 위해서는 제작자에게 필요한 물품을 미리 주문했다가 완성된 이후에 받을 수 있었다. 즉 수요가 있는 만큼 공급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근대가 되면 상황은 바뀐다. 공장은 주문이 있기 전에 미리 물품을 대량으로 생산해낸다. 물품이 필요한 사람은 기다릴 필요 없이 시장에 가서 이미 생산된 물품을 구입하면 된다. 이러한 특성, 즉 물품을 구입하려는 욕구보다 이미 생산된 물품이 더 많은 상태가 자본주의의 특성이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특성은 '공급이 수요보다 많은 상태'다. 이는 다른 말로 공급과잉, 초과공급이라고도 부른다. 공급이 수요보다 많은 상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면 오늘날의 백화점과 마트를 생각하면 된다.


p.67

   자, 당신이 공장주이거나 CEO라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지금 수요보다 공급이 많은 상태이니, 해결 방안은 논리적으로 두 가지 밖에 없겠다. 하나는 공급을 줄이는 방법, 다른 하나는 수요를 늘리는 방법이다. 간단하다. 우선 공급을 줄이는 방법부터 생각해보자. 공급을 줄인다는 것은 공장 가동을 멈추는 것이다. 이건 앞에서 말했듯 좋은 방법이 아니다. 공장을 멈춘다는 것은 고정비용의 부담을 전제하는데, 고정비용만 계속 지불하느니 공장을 가동하는 게 이익이다. 이제 해결 방안은 하나뿐이다. 수요를 늘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요를 늘릴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가? 역시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구두의 가격을 낮춰 소비를 유도하는 것이다. 특별히 다른 방안은 없을 듯하다. 물론 신제품 개발이나 광고비용 확대, 사업 효율성 개선 등의 부수적인 방법이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들은 본질적인 해결 방안이 아니다. 수요를 확대할 수 있는 '시장 개척'과 '가격 인하'라는 두 가지 해결 방안이 그나마 가장 궁극적인 방안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방안이 근대와 현대의 역사를 어떻게 변화시켜갔는지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중략) 

   식민지를 개척하는 제국주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p.77

   사실 오늘날의 자본주의를 유지해주는 핵심 요소는 두 가지다. 하나는 전쟁이고, 다른 하나는 유행이다. 전쟁과 유행은 자본주의라는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쌍둥이 형제라 할 수 있다. 전쟁이 공급과잉의 문제를 단번에 해소하듯, 유행은 필요를 뛰어넘는 막대한 소비를 창출해서 공급과잉 문제를 해소한다.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옷과 핸드백들이 매년 옷장 구석에 쌓여가거나 쓰레기통으로 향한다. 전쟁과 유행 없이 자본주의를 유지하기는 어렵다.


p.80

   사회 전체적으로 공급과잉의 문제는 발생하고 있었고, 모든 산업에서 가격을 낮추기 위한 노동자 해고 사태가 일어나고 있었고, 모든 산업에서 가격을 낮추기 위한 노동자 해고 사태가 일어나고 있었다. 문제는 노동자는 노동자인 동시에 소비자라는 것이다. 해고당한 소비자는 소비 능력을 상실한 소비자와 동일하다. 다시 말해서, 사회 전체적을 실업자가 늘어나면서 사회 전반의 소비가 줄어들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때 소비가 줄어든다는 말은 상대적으로 공급량이 더 많아진다는 것이고, 공급량을 줄이기 위해서는 다시 모든 산업에서 가격 인하 경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또 가격을 인하하기 위해서 노동자를 해고해야 하고, 해고된 노동자가 다시 소비 능력을 상실한 소비자가 되어 수요를 창출하지 못하는 악순환에 빠진다.

   사회는 경기침체의 하수구 속으로 회전하며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실업자는 늘어갔고, 문을 닫는 공장과 기업들이 속출했다. 이 문제가 폭발한 것이 뉴욕 증시가 대폭락하면서 세계경제 전체를 무너뜨린 1929년의 세계 경제대공황이다.


p.99

   B는 노동자들을 모았다. C1, C2, C3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모였다.

   업무 시간 외에 부르는 것도 임금에 포함되는 것이냐는 둥, 쉬는 시간도 보장해주지 않느냐는 둥, 노동자들은 불만의 소리를 높였다. B는 짜증이 났지만 속마음을 숨기고, 최대한 근엄하고 숭고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존경하는 노동자 여러분, 여러분이야말로 진정한 애국자입니다. 멀리 다른 나라에서는 독재자들이 공산주의를 앞세워 국민들을 억압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은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공산주의가 우리나라에까지 검은 마수를 뻗치려 하고 있는 지금과 같은 국가적 비상시국에,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열심히 자신의 소임을 다하시는 노동자 여러분을 뵐 때마다 저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B가 갑자기 순수건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B가 계속해서 말했다.

   "아직은 국가적으로 비상시기인 까닭에 여러분께 더 많은 것을 돌려 드리지 못하지만, 우리 공동의 적인 공산주의만 사라진다면, 국가와 기업은 여러분의 수고에 보답할 것입니다. 선조들이 지켜낸 조국을 위해 함께 싸워나갑시다."

   B가 연설을 마치고 내려오면서 곁눈질로 보니, 노동자들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웅성거리고 있었다. B는 마음이 놓였다. C1이 C2와 C3에게 말했다.

   "뭐야, 너희가 말한 공산주의가 반국가적인 그런 거였어?"

   C2와 C3는 당황했다.

   다음날부터 노동자들은 묵묵히 맡은 일을 열심히 했다.


   '국가'는 요청된다. 국가라는 개념은 신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지배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고 특히 '애국'에 대한 강요는 지배자들을 편리하게 한다. 그래서 애국은 국가적 차원에서 장려되고 교육된다. 애국자와 국가유공자에 대한 보상과 기념 절차에 국가적 차원의 지원이 이루어지고, 사회는 이들을 지칭하는 어휘를 검열하고 교정한다. 반대로 애국과 거리가 먼 사람들에게는 공공연한 정치ㆍ사회적 압력이 가해지고, 이들을 지칭하는 어휘들에는 거칠고 모욕적이며 배타적인 언어들이 허용된다.

   그러나 '국가'에 대한 요청은 자본주의만의 특성은 아니다. '신'을 요청할 수 없는 모든 지배 권력은 애국을 장려한다. 합리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혹은 지적 대화를 하려는 사람이라면, '신'과 '국가'에 대해 객관적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신'과 '국가'에 대해 객관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이 '신'과 '국가'의 존재를 부정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신'과 '국가'의 객관적인 의미를 초월해서 사회ㆍ정치적으로 과장되고 포장된 의미가 나에게 강요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신중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냉전시대에 대해서 알아보고 있다. 냉전은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의 대결과 갈등을 의미한다. 우리가 물은 것은 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대결해야 하는가였다. 그리고 그것이 자본주의의 특성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알았다. 자본주의는 공급과잉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시장이 필요한데, 공산주의의 호가장은 시장의 축소를 의미하므로 자본주의에 위협적이었다. 두 번의 세계대전이 시장 확보를 위한 전쟁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냉전의 위기도 시장 확보가 문제 된 것이다. 또한 공산주의의 이념적 특성이 자본주의를 내적으로 붕괴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까닭에 자본주의가 이를 경계할 수밖에 없음을 보았다. 그리고 냉전의 당사국들이 지배와 통제를 위한 필요로써 '국가'와 '애국'의 개념을 민중에게 강요한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p.131

   이것이 바로 애덤 스미스가 말한 자유 시장의 자율적인 조정 능력이다. 애덤 스미스는 이를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표현했다. 가격을 결정해주는 국가나 신과 같은 절대자는 없으나 아메리카노의 가격은 어던 드러나지 않는 조정 능력에 의해 알아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아메리카노의 가격은 경쟁으로 인해 인하의 압박을 받지만, 판매자가 망하지 않는 선에서 교묘하게 결정된다. 이것은 공급자와 소비자 모두에게 이익이다. 공급자는 당연히 아메리카노를 팔아서 이익을 얻을 것이고, 소비자는 공급자들 간의 경쟁을 통해서 질 좋고 값싼 아메리카노를 마실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자율적으로 조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이익이 되는 자유 시장에 대해서 국가가 개입해야 할 이유나 근거는 없다. 정부의 개입이 없는 자유 시장에 대한 신뢰, 이것이 초기 자본주의의 특징이다.


p.142

   수요는 없는데 물가는 오르는 상황. 다시 말해, 경기는 침체하는데 인플레이션이 발생한 이 상황을 어려운 말로 '스태그플레이션'이라고 한다. 이런 거지 같은 상황은 우리가 앞에서 봤던 자본주의의 특성으로 인해 발생했던 상황과 정반대다. 기억이 잘 안다고? 다시 기억을 더듬어보자. 자본주의의 특성은 공급이 수요보다 많은 것이었다. 그래서 수요를 창출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수요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시장을 개척하거나, 가격을 낮춰야 한다. 가격을 낮춰야 경쟁하는 업체들보다 가격경쟁력을 높일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 정상적인 시장에서는 수요가 줄어들면 가격을 낮춰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수요가 다시 늘어나서 시장이 정상화된다. 하지만 위의 상황은 비정상적이다. C는 어떤 결정을 했는가? 수요가 줄었지만 아메리카노의 가격을 인상했다. 왜 이런 문제가 발생했는가? 정부가 노동자의 권익 보호를 위해 너무 과도하게 시장에 개입했기 때문이다. C는 급변하는 시장의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면서 경제 활동을 해야 하늗데 정부의 규제로 인해 그렇게 할 수 없었고, 시장의 상황이 비정상적으로 왜곡되어 그 결과 사회 전체의 침체가 발생한 것이다.


p.153

   생산수단을 소유한 사람은 생산수단을 이용해서 다른 이들을 고용하고 이를 통해 이득을 얻지만, 자신은 직접 노동에 참여하지 않는다. 물론 자본가는 자신의 생산수단이 정상적으로 운영되는지, 지속적인 이윤을 창출하는지 끊임없이 확인해야 한다. 또한 변화하는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투자하고 감축하는 모든 활동에 대한 막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 사실이다. 다만 다른 노동자처럼 생산에 직접 참여하거나 노동의 시간과 공간에 구속되지 않을 뿐이다.

   정리해보면, 생산수단을 소유한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우선 소유자가 부를 축적할 수 있게 한다. 이에 따라 노동자와의 소득격차는 계속 벌어진다. 다음으로 소유자가 노동에 직접 참여하지 않게 한다. 생산수단의 소유자는 직접적인 노동이 요구되지 않는다.


p.192

   세계에 대한 관점의 차이는 타인에 대한 평가를 다르게 한다. 세상이 그나마 안정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회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문제의 원인이 개인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회가 안정적인데 문제가 발생한 것이니, 그 문제는 사회의 잘못이 아니라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개인의 일탈 행위라고 보는 것이다. 반대로 세상이 문제가 많고 불안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회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문제의 원인을 개인이 아닌 사회에서 찾는다. 왜냐하면 사회가 이미 문제를 내포하고 있으므로, 정상적인 개인이라도 그 부조리한 상황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는 것이다.


p.210

   중도를 주장하는 민주당은 현재 새누리당에 맞서 진보적 입장과 중도적 입장을 견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도표에서 보듯 실제로는 어쨌거나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보수 정당이다. 따라서 세계의 보편적인 보수와 진보의 개념을 통해 판단하자면, 민주당은 엄밀히 말해 보수 정당의 위치에 서게 된다. 한국이 전 세계에서 신자유주의를 대표하는 국가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의 제1정당이든 제2정당이든, 어쨌거나 누가 집권을 한다 해도 한국은 여전히 자본주의 사회의 모습을 유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p.212

   비리와 부패의 문제가 아니라 이론적이고 이념적인 측면에서라면 선한 정당도, 악한 정당도 없다. 각 정당은 우리 사회의 특정 계층의 입장을 대변할 뿐이다. 새누리당이 자본가와 기업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욕할 일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진보 정당들이 서민과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비난할 필요도 없다. 욕먹고 비난받아야 하는 사람들은 정치인이나 정당이 아니라, 어떤 정당이 자신을 대변하는지 모르고 투표를 하는 사람들이다.


p.216

   이러한 미디어의 수익 구조의 특성은 한국 사회에서 보수 정당이 지속적으로 승리할 수 있는 중요한 원인을 제공한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듯이 대중은 미디어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미디어는 정보를 얻는 수단을 넘어 준거의 틀로 작용한다.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을 선택하는 데 신중하지 않은 대중은,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이미지를 토대로 선호 정당을 결정한다. 미디어에 나타나는 정치인의 외모, 편집된 말, 전문가의 평가를 사실로 받아들이고 신뢰한다.

   민주주의 초기에 자유와 평등을 강조했던 자유주의자 존 스튜어트 밀은 보통선거권을 두려워해서 자본가는 4표, 노동자는 1표의 투표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에 의해 사회가 필연적으로 공산화되이라 우려했던 것이다. 하지만 1인 1투표제가 시행되는 한국은 공산화되지 않았고, 오히려 오랜 시간을 보수 정당이 집권해오고 있다. 이런 한국의 상황을 본다면 밀은 당혹스러워할 것이다. 그는 미디어의 영향력을 상상하지 못했다. 대중은 생각보다 나약하고 무관심해서 자신의 이익과 권리가 무엇인지 스스로 판단하기 귀찮아한다. 미디어는 그 틈으로 파고들어 대중이 봐야 할 곳을 친절하고 세련되게 가르쳐준다.


p.219

   20세기에 호르크하이머를 주축으로 결성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 이론은 대중매체의 오락적 기능이 갖는 부정적인 측면을 정확하게 지적했다. 비판 이론에 따르면 미디어의 오락적 기능은 대중들에게 사회 체제의 압박을 숨기고 도피하게 기능한다. 미디어의 말초적인 가십거리들이 사회 변화를 가로막는 강력한 기제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커뮤니케이션의 내용'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의 형태'가 문화를 결정함을 밝혔다. 즉 미디어의 편성 전반이 비정치적이라면 미디어의 내용이 아니라 형태로 보아 그건 정치적 제스처로 의심해볼 만하다.


p.227

   다음으로 종교는 왜 보수에 위치하는가? 종교를 보수에 배치한 이유도 군을 보수에 배치한 이유와 유사하다. 종교는 그것이 어떤 종교이건 상관없이 기본적으로 그 사회를 안정화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스도교, 이슬람, 불교 할 것 없이 기본적으로 종교는 사회의 체제를 인정한다. 현재의 체제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종교적 교리는 없다. 종교의 공통된 관심사는 자아에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개인이 어떤 문제적 상황에 처했을 때, 종교에서 "너에게 문제가 발생한 것은 너의 잘못이 아니라 사회의 문제이니 사회를 바꿔야 한다"라고 가르치는 경우는 없다. 반대로 종교는 개인이 처한 문제 상황을 해결하는 방법으로써 자기 내면의 성찰과 반성을 요구한다.


   이처럼 문제의 원인을 사회가 아닌 개인에게 돌리는 사고방식은 그 사회의 문제를 은폐함으로써 대중의 사회적 불만을 잠재우는 역할을 한다. 마르크스가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라고 말한 의미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아편이 개인이 처한 삶의 고통을 허구적 환상으로 회피하게 하듯이, 종교 역시 심리적 안정을 통해 민중이 느끼는 사회적 불만을 해소함으로써 부조리에 대한 저항과 불만을 억제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종교는 치열한 실천적 저항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행위의 가치를 폄하하고, 사후 세계나 내면 세계라는 개인적인 관심사를 부각함으로써, 사회로 향해야 마땅한 정당한 분노를 안으로 삭히도록 한다. (중략)


   군과 종교를 보수로 묶음으로써, 이질적으로 보이는 두 집단이 공존 가능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볼 때, 군과 종교는 공존하기 어려운, 근원적인 측면에서 너무나도 다른 집단이다. 군은 합법적으로 적에 대한 사살 행위의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는 집단이고, 반면 종교는 살생과 대립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대에는 부대마다 종교 시설이 있다. 물론 이에 대해 신앙이라는 이상과 적과의 대립이라는 현실의 괴리가 이런 부자연스러운 현상을 만든 것뿐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다. 하지만 종교와 군이 공유하는 공통적인 성질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러한 공존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종교와 군이 공유하는 공통분모는 그들이 보수적 성향을 지향한다는 점에 있다. 기득권과 자본가의 재산을 보호하고 해당 사회와 국가를 유지하려 한다는 점에서 종교와 군은 이해를 같이 한다.


p.263

   우선 플라톤은 당연히 뛰어난 통치자에 의한 독재를 주장할 것이다. 그런데 그가 이러한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의 국가 개념이 지금과는 달랐기 때문일 수 있다. 사실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인 폴리스는 현대의 한국처럼 복잡하고 거대한 근대적 의미의 국가는 아니었다. 차라리 윤리적인 전통적 공동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아테네의 인구는 대략 30만 명 정도로, 이 중 시민은 일부에 불과했다. 즉 건너 건너 다 아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정치적인 삶과 윤리적인 삶이 엄밀히 분리되긴 어려웠다. 따라서 당시 그리스인들이 개인적으로 윤리적인 사람이 공동체도 윤리적으로 운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착한 친구가 반장도 잘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다. 여기서 윤리적인 사람이 의미하는 건 덕이 있는 사람이다. 덕은 규정하기 애매하지만 '이상을 실현하는 인격적 능력' 정도로 생각하자. 그리고 고대 그리스에서는 '덕'과 '지혜'가 구분되지 않았다. 즉 지혜로운 사람은 덕이 있고, 덕이 있는 사람은 곧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이렇게 지혜롭고 덕이 있는 사람이 윤리적으로 사회를 운영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플라톤은 지혜와 덕이 일치된 사람인 철인이 정치를 해야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만약 현대 사회에서도 인격과 지혜를 갖춘, 절대 부패하지 않고 사회를 성장시킬 수 있는 사람을 선출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에게 모든 정치적 의사 결정을 맡기는 것이 좋지 않을까? 이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앞서 논의했던, 경제체제의 구분과 정치에서의 보수/진보의 구분을 고려해본다면, 완벽하고 이상적인 엘리트를 선별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체제로서의 엘리트주의는 명백한 한계를 갖는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현대 사회에서 이상적인 개인에 의한 독재와 엘리트 정치는 실현될 수 없다. 이상적인 개인이 없어서인가? 그런 것이 아니다. 아무리 이상적인 개인을 찾아냈다고 해도 이상적인 정치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근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상적인 정치라는 것이 애초에 없기 때문이다. 앞서 정치에 대해 논하며, 정치란 경제체제를 무엇으로 선택하는지에 대한 문제임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완벽한 경제체제가 없는 한 완벽한 정치체제도 없다. 경제체제는 어쩔 수 없이 특정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게 되며, 그만큼 다른 집단의 이익을 희생시킨다. (중략)


   이상적 개인에 의한 이상적 정치는 실현 불가능하다. 독재자나 민주주의자나 어쩔 수 없이 특정 집단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고, 이로써 필연적으로 소외되고 희생되는 집단이 생긴다. 모두를 만족시킬 이상적인 정치는 없다. 따라서 이상적인 독재자, 엘리트는 불필요하다. 정치에서 요구되는 것은 뛰어난 인물이 정답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익에서 충돌하는 이해당사자들이 대화와 협의를 통해 이견을 조율할 절차가 마련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익의 직접적인 당사자가 정치에 직접 참여할 여건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는 엘리트주의의 비현실성을 압도한다.

   그래서 독재와 엘리트주의가 현실화되었을 때, 사회 전반에 심각한 문제점을 일으킨다. 첫째, 특정 집단의 이익을 대변함으로써 그것이 자본가이건 노동자이건 이익 분배에서 배제된 다른 집단의 불만을 고조시킨다. 둘째, 엘리트주의는 스스로의 완전무결성을 유지하기 위해 그런 불만을 가진 집단을 필연적으로 억압한다. 셋째, 이런 억압을 정당화하거나 대중에게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권력자는 정보를 은폐하거나 왜곡한다. 넷째, 정보의 은폐와 왜곡을 숨기기 위해 국민들에게 왜곡된 정보가 사실인 양 과장해서 교육한다. 다섯째는 이러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편협한 사람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그들 스스로가 사회의 합리적 선택을 방해한다. 결국 사회는 병든다. 실제로 이러한 사회가 있는가? 어떤 사람들은 북한을 생각할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한국 근현대를 생각할 수도 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남미나 쿠바를 떠올릴 수도 있다. 어쨌거나 독재나 소수 엘리트에 의한 이상적 사회는 허구인 것만은 사실인 듯하다.


p.266

   우선 ①은 경제체제는 자본주의, 정치체제는 민주주의를 선택한 사회다. 이를 자유민주주의라 한다. 자유민주주의에서의 '자유'는 신자유주의에서의 '자유'와 마찬가지로 의미로, '시장에서의 자유'다. 자유민주주의는 인간의 자유를 추구해서 자유민주주의이고, 북한은 인간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체제명에 자유를 붙이지 않는 것이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 자유라고 할 때, 그것은 거의 언제나 자본의 자유, 시장의 자유를 의미한다. 자유민주주의는 일단 기본적으로 시장경제를 추구하는 동시에, 정치적 의사결정 방식이 다수가 참여하는 민주주의 체제인 것을 말한다. 대표적으로는 한국, 일본, 미국이 있다.


   다음으로 익숙한 조합은 ②다. 우리에게 이 사회가 익숙한 것은 가까이에 북한이 있기 때문이다. ②는 경제체제는 공산주의, 정치체제는 독재주의를 선택한 사회다. 이 사회는 공산독재주의라고 부르지 않고, 그냥 공산주의라고 지칭한다. 사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가 독재적인 형태만 띠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독재적인 공산주의를 단순히 공산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혼란의 여지가 있다. 다만 일반적으로 그렇게 지칭하므로 우리도 독재적인 공산주의를 공산주의라고 부르기로 하자. 엄밀히 구분하면 공산주의는 실제로 민주적 절차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상적인 공산주의 이론에 따르면, 정치적인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집단은 오직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은 노동자 집단뿐이다. 그래서 공산주의를 '프롤레타리아 독재 사회'라고도 한다. 이러한 사회 형태는 과도기적 단계로, 모두가 평등한 공산주의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중간 단계다. 노동자가 독재하는 사회가 공산주의라는 측면에서, 오늘날의 북한은 공산주의라 부르기 어려운 사회가 되었다. 왜냐하면 우선 노동자에 의한 정치 형태도 아닐 뿐만 아니라, 90년대 중후반에 '선군정치'라고 해서 사회의 핵심적 계층으로 군을 중시하는 정치체제로 변모했기 때문이다. 군이 정치와 경제분 아니라 교육, 문화, 예술 등에 이르기까지 전 영역을 총괄한다. 그런 까닭에 개념 분류상 노동자가 중심이 아닌, 군인이 중심이 된 북한 사회를 더 이상 공산주의 사회라 지칭하기 어렵다. 국가가 경제를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고, 개인보다 국가를 앞세우는 권위적인 모습을 띠고 있으니, 통제경제의 파시즘 체제 정도로 이름 붙이는 것이 적절하겠다. 어쨌거나 경제적을 공산주의, 정치적으로는 독재주의를 추구하는 대표적인 국가는 소련, 중국, 북한이 있다.


p.302

   이기주의와 전체주의 모두 부정적이기는 하지만, 이기주의는 사실상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회 안에서 개인이 이기적으로 행동할 경우 사회는 그 일탈 행위를 처벌하거나 그에게 불이익을 줌으로써 이기적 행위가 타인에게 표출되는 것을 억제하기 때문이다. 사회는 개인의 이기적 행위를 충분히 통제할 수 있는 힘과 시스템을 갖췄다. 따라서 아무리 이기적인 개인이라도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이기성을 직접적으로 표출하지 않는다.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전체주의다. 국가나 사회가 전체의 이익을 위해 특정한 개인들을 희생시키려고 마음먹으면 개인은 도저히 이를 막을 방법이 없다.


p.306

   전체주의는 독립적으로 자생하는 하나의 이념이라기보다는, 사실 경제적 위기가 발생시키는 하나의 병리 현상으로 보인다. 아무리 평범하고 선한 개인이라고 하더라도 국가적 차원에서 기인한 경제적 어려움에 처했을 때 경제를 살리겠다는 인물이 있으면, 그가 전권을 맡는 것에 대해 침묵하거나 암묵적으로 동조한다. 국가의 이름으로 독재를 하건, 외국과 전쟁을 벌이건, 유대인과 사회주의자를 잡아가건, 노동조합을 탄압하건, 대중은 크게 개의치 않는다. 왜냐하면 그건 내가 한 게 아니라 독재자가 한 것이고, 경제 회복을 위해서 전체가 함께 동조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없다. 전체주의는 개인의 존재 가치를 절하하고, 집단과 전체의 가치를 앞세운다. (중략)

   전체는 나의 이익을 위해 강력하게 행동하지만, 나에게는 책임이 없는 이상적인 사회가 전체주의다. 전체주의 개인이 전체의 비윤리적 행위에 눈감게 된다.


p.314

   여기서부터 우리가 지금 논의하고 있는 자연권과 전체주의의 개념을 적용해보자. 절대적으로 지켜져야 할 자연권의 세부 요소 중에는 분명히 재산권에 대한 보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세금은 재산권, 즉 개인의 자연권에 대한 침해가 아닌가? 게다가 현재의 세금 제도는 부자에게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하는 누진과세이니, 다수의 노동자의 이익을 위해 소수의 부유층의 재산권을 침해하는 전체주의적 폭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A씨의 주장은 이러한 사고방식의 전개 위에 서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 전체주의의 부도덕성과 자연권의 침해 관점에서 볼 때, 그동안 윤리적 담론에서 우위를 점유했던 진보의 견해는 실제로는 전체주의의 위험성을 항상 내재하고 있으며 부도덕한 주장이 되는 것이다. A씨의 주장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 당신을 대신해서 B씨가 나섰다.


B : 뭐냐, 그 궤변은! 당신도 사회의 일원이니까 사회의 의무를 다해야 하는 것 아닌가? 세금은 모든 사회의 구성원이 동의한 합의다!

A : 당신 말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네. 첫 번째는 당신이 말한 사회적 의무를 모두가 지는 건 맞지만, 왜 내가 더 많은 의무를 져야 하느냐는 것일세. 누구나 동일한 혜택을 받으니 부자들만 누진세를 내는 건 공평하지 않네. 두 번째로 모든 사회 구성원이 동의했다고 하는데, 나를 비롯한 소수의 부유층은 거기에 합의한 적이 없네. 다수를 차지한 당신들이 다수결을 앞세워 강행한 거지.

B : 사회적 합의라는 것이 만장일치는 불가능하고, 어쩔 수 없이 다수의 의견이 반영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어쨌거나 사회 전체가 동의했으니, 이건 우리 사회의 룰이다. 이 룰을 따르기 싫다면 당신이 떠나면 된다.

A : 지금 그 말에서 당신들의 본질인 전체주의적 견해가 잘 드러난다네. 나는 평생을 이 나라에서 최선을 다해 일하고 정당하게 경쟁하며 지금의 부를 축적했네. 나의 모든 기반은 여기에 있는데, 당신들은 자신들이 만든 법을 지킬 것을 강요하면서, 그에 대한 협박으로 추방을 권고하는 것 아닌가. 소수의 약자의 약점을 쥐고 다수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전체주의적 발상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지.

B : 당신은 당신이 혼자서 노력해서 부를 축적했다고 하는데,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당신이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건 사회가 도왔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당신을 위해 일하고, 소비자가 당신의 물건을 소비해서 당신이 부를 쌓은 것이 아닌가? 혼자 부를 쌓았다는 것은 사회의 도움을 고려하지 못한 것이다.

A :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데, 당신들은 나를 위해 일하거나 나를 위해 소비한 적이 없네. 나는 노동자가 노동한 대가로 정당하게 계약된 급여를 지불했고, 소비자의 돈을 강탈한 것이 아니라 소비의 대가로 정당하게 그들이 원하는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했지. 이건 서로의 이익을 위해 스스로 선택했던 일이지, 내가 강요한 것도, 당신들이 희생한 것도 아닐세.

B : 사회에는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 당신에게는 얼마 되지 않는 돈이라도 사회의 최소수혜자들에게는 삶에 큰 도움이 된다. 윤리적 차원에서 부유층이 세금을 더 내는 것은 타당하다.

A : 최소수혜자나 서민을 돕는 것은 말 그대로 돕는 것으로, 내가 기부의 방법을 통해 자발적으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일세. 나에게서 기부를 유도하는 게 아니라 강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을 돕는다며 나의 재산을 강탈하는 것은, 그 목적이 아무리 윤리적이라 하더라도 절차가 윤리적이지 않았으므로, 결론적으로 윤리적 행위라 할 수 없다네.

B : 당신이 부를 축적한 것은 노력이나 공정한 경쟁에서가 아니었다. 당신은 어쨌거나 생산수단을 독점함으로써 노동자를 착취하고 그들의 시간과 노력으로 부를 축적한 것이 아닌가? 생산수단을 독점한 당신은 이미 경쟁의 우위에 서 있었던 것이다. 당신의 노력으로 부를 축적한 것이 아니니 그건 불로소득이고, 따라서 사회적 환원의 의무가 있다.

A : 다시 말하지만 나는 노동자를 착취한 적이 없다네. 나는 그들을 고용하기 전에 임금과 계약 조건을 모두 밝혔네. 노동을 원하고 선택한 건 그들 자신이고 내가 강요한 적은 없는 것이지. 그리고 당신은 육체노동만을 노동으로 생각하는 모양인데, 현대 사회에서 노동의 방식은 다양하다네. 나도 내 기업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 모든 열정을 다해 당신들보다 더 열심히 일해왔으며, 당신들은 지지 않는 기업의 미래에 대한 선택의 책임과 리스크를 나 혼자 모두 지고 있다네.


p.342

   학문마다 탐구하는 명제가 다르다. 사실명제를 탐구하는 학문은 과학이고, 당위명제를 탐구하는 학문은 윤리다. 사실명제는 항상 참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는 반면, 당위명제는 참과 거짓을 구분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사과는 맛있다"라는 명제는 직접 먹어보면 참인지 거짓인지를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사과는 맛있어야 한다"라는 명제는 도대체 참인지 거짓인지를 말할 수가 없다. 즉 당위명제는 참과 거짓의 판단을 넘어서 있고, 이에 따라 윤리 역시 참과 거짓을 말할 수 없다. 단적으로 사실명제와 당위명제는 성격이 너무나 달라서 이 둘은 각각의 세계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명제에서 당위명제가 도출되거나, 반대로 당위명제에서 사실명제가 도출되거나 하는 일은 없다.

   그런데 가끔 사실명제와 당위명제를 섞어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경우 쉽게 오류에 빠진다. 예를 들어,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

   "자유주의가 세계적 대세이므로 우리도 자유주의를 추구해야 한다."

   이 문장은 두 가지 명제로 구성되어 있다. ①자유주의가 세계적으로 대세다. ②자유주의를 추구해야 한다. ②는 주장, ①은 근거가 된다. 타당한 형식을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②는 ①로부터 도출되지 않는다. 모든 국가가 자유주의를 '선택했다'고 해서 우리도 자유주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 문장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다음 문장을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모든 사람이 거짓말을 하므로 나도 거짓말을 해야 한다."

   이 문장은 사실명제에서 당위명제를 도출했다는 점에서 앞의 문장과 형식이 동일하다. 그런데 우리는 이 문장에 문제가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모든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사실일지라도 내가 거짓말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당위명제는 사실명제를 통해 증명될 수 없다. 당위명제는 사실명제와 무관하게 그 문장 자체의 내용만을 토대로 판단하고 평가해야 한다. 즉 윤리적 판단은 실제의 세계가 어떠한지와는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p.372

   사회에서 자본가가 소수라는 특징은 이들의 권리가 노동자 다수에 의해 침해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발생시킨다. 전체주의로부터 개인을 보호하는 근본 이념으로서의 자연권, 특히 재산권의 절대적 보장은 자본가의 권리와 재산을 보호해줄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 또한 현실적인 측면에서 미디어는 기업들의 광고비를 통해 유지된다는 특징 때문에 기업과 자본가의 이익을 지속적으로 반영할 수밖에 없으며, 이로 인해 보수적 견해를 반영하기 쉬운 조건에 놓인다.

   윤리에서 의무론은 결과보다는 의무와 도덕 법칙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는 윤리관으로, 개인의 권리와 인권을 강조한다. 현실적인 측면에서 신자유주의는 공정한 경쟁이라는 절차가 보장된다면 그 결과로 빈부격차가 발생하는 것은 문제시하지 않는다. 결과가 아닌 절차나 사회적 의무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의무론적 윤리설이 신자유주의의 정당성에 대한 윤리적 근거를 제시하기에 적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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