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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서재 Part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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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컹리 Oct 05. 2018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98 홍세화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p.66

   학생증을 손에 쥔 내가 감동하여 그에게 "당신은 참으로 친절하십니다"라고 말했을 때 그(다니엘 에므리 교수)가 나에게 대꾸한 말이 바로 '한 사회와 다른 사회의 만남과 그 중요성'이었다.

   그는 이미 '다른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내가 그때까지 알고 있던 '교수들의 사회'에 속하지 않았다.

   그는 "나는 맑스주의자다"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그 대신에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은 맑스주의자가 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여 또 나에게 '다른 사회'에 와 있음을 확인시켰다. (중략)


한 사회와 다른 사회의 만남

   프랑스 사회가 우리와 많이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같은 사람이 대학교수라는 게 신기하기도 했다. 그가 남한 출신 망명자인 나를 신기하게 보았던 것처럼. 이 신기함끼리의 만남 때문에 그가 말한 '한 사회와 다른 사회의 만남'이 더 큰 의미가 되어 다가왔는지 모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말이 내 가슴에 와닿았던 이유는 바로 내가 그 말을 이전에 나 스스로에게 그리고 동료에게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나의 출국을 합리화했다.

   "나는 다른 사회를 보고 싶어."

   그 후 동료들이 치른 그 엄청난 곤욕을 나 혼자 피하게 된 것이 바로 그 핑계의 결과였기 때문에, 나 혼자만 일탈했다는 자의식과 함께 그 핑계였던 '다른 사회를 만난다는 것' 또한 고정관념처럼 내 가슴을 계속 짓누르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영원히 갚을 수 없는 빚과 같았다. 바로 그것을 그 교수가 헤집었던 것이다. 물론 내 속을 들여다보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그의 말은 나의 폐부를 찌르고도 남았다.





p.69

   어느 날 빠리 제7대학의 교정을 함께 걷던 에므리 교수가 이렇게 물었다

   "무슈 옹그(프랑스인들은 나의 성을 이렇게 발음했다)는 어떻게 망명자가 되었소? 내 질문이 분별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하면 대답하지 않아도 되오."

   처음에 나는 그의 직설적인 질문에 조금 당황했지만 곧 이렇게 대답했다.

   "이상하게 들으시겠지만 별로 한 일도 없어요. 다만 저항했을 뿐이지요. 남한의 국시는 반공이랍니다. 프랑스의 '자유, 평등, 형재에'처럼 적극적인 가치를 이루자는 것이 아니라 다만 반대의 이데올로기였지요. 내 나이 스무 살 때, 나는 이 반대이념이 인간에 대한 인간의 증오심을 살찌운다는 것을 알아야 했어요. 나도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모르면서 벌써 공산주의자를 철저히 증오하고 있었으니까요. 그것은 무서운 발견이었지요. 인간을 알기도 전에 이미 인간을 증오하다니. 인간에 대한 사랑을 알기 전에 증오부터 배웠다니. 그 충격이 있은 뒤에 남한의 권력이 모두 이 증오의 이데올로기만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것이 보였지요. 나는 저항하여 나에게 강요된 증오를 거부했지요. 그 결과가 이렇게 된 셈이지요."

   교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스무 살 때 어떤 계기고 그 발견을 하게 되었는지 묻지 않았다. 그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런 계기가 꼭 필요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교수에게 말했던 바와 같이 나의 행동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국내에선 대단한 행동을 하고 있다고 믿었는데 프랑스에 와서 곰곰이 돌이켜보니 단지 저항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대단한 행동을 하고 있다고 믿었던 것은 다만 나 자신과 치열하게 싸워야 했기 때문이었지 행동 자체가 대단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에므리 교수가 말한 '다른 사회'의 눈으로 보면 더욱 그러했다. 나의 행동이 별게 아니었다는 것은 내가 망명을 신청하여 프랑스 외무부 관리를 만났을 때에도 확인되었다. 그 경험은 역으로 한국 사회가 얼마나 증오에 차 있는가를 다시금 돌이키게 했을 뿐이다.



p.76

   그래도 한국 출신인 나와 나의 가족이 빠리의 일반 한국인들과 접촉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겉만의 접촉이었는데 그 관계가 이어졌던 것은 역설적으로 나와 나의 아내가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외국생활도 군대생활과 마찬가지로 오래 산 사람이 처음 시작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지 그 반대는 성립하기 어렵다. 비록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해도 우리는 도움을 주었는데 그들 중 거의 모든 사람들이 빠리 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뒤엔 우리에게서 멀어졌다. 이용가치가 없어진 탓이다. 그리고 나의 문제는 그들에게 아무 때나 스스럼없이 멀리해도 된다는 권리를 부여하고 있었다. 그중에 어떤 사람은 우리 같은 사람을 그동안 만나준 것만도 큰 배려였다는 듯이 말하기도 했는데 그 말은 한편 맞는 말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p.78

   나는 그 어처구니없는 모함을 씹어 삼켰다. 서글픔이 앞섰다. 만약 내가 돈이 많거나 혹은 학위라도 갖고 있었다면 그렇게 쉽게 모함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으리라. 나의 처지는 나의 의식만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대하는 다른 사람의 의식도 규정하였다. 내가 돈도 없고 힘도 없으니 함부로 해도 된다는 의식이 있었기에 그런 모함을 할 수 있었ㅇ르 터였다. 이런 것이 우리가 사는 사회의 실제 모습이었다. 이른바 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의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이렇게 나는 삼중의 이방인이었다.

   빠리에서 나에겐 경계와 불신과 무관심의 시선밖에 없었다. 그 중에 프랑스인들이 보내는 무관심의 시선이 가장 따뜻한 것이었다. 내가 이른바 프랑꼬필르(francophile, 프랑스를 좋아하는 사람)가 되었다면 그것은 한편 당연한 귀결인지 모른다. 그리고 빠리에서 나의 처지를 마음속 깊이 이해해주고 꾸준히 친하게 지낸 이들이 있었다면 그들은 오꾸나까 세이죠와 이즈미라는 이름의 일본인 부부였다.



p.109

   전두환 정권의 서슬이 시퍼런 때였다. 빠리의 한국인 사회가 오히려 한국의 상황 변화에 국내보다 더 예민하게 반응한다고 느끼게 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서울의 봄' 동안에 잠깐 부드러워졌던 사람들의 시선이, 광주항쟁 이후 전두환 정권이 단단해지자 차갑게 바뀌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 차갑게 바뀐 시선은 다시, 프랑스에 사회당 정권이 들어서자 날카로운 의혹의 시선으로 발전하였다. 당장 무슨 위기라도 만난 듯이 야단법석이던 당시의 한국 신문들처럼, 빠리의 한국인 사회도 분위기가 날카로워졌는데 그 영향이 나에게까지 미쳤던 것이다. 빠리의 한국인들 중에는 이러한 반응을 애국심의 발로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실은 경제적으로 한국에 매여 있어 그 눈 밖에 나선 안 되기 때문에 자기 이익을 위한 이기심이 냉전논리의 관성을 타고 나타났던 것뿐이다.



p.136

설득하는 사회와 강요하는 사회의 차이

우리와 사회환경이 다르다는 것은 프랑스인들의 성격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의 성격 중에서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는 뻔뻔스러울 정도로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는데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멈춘다는 데에 있다. 언뜻 들으면 이율배반 같은 이들의 성격은 프랑스 사회의 똘레랑스를 이해해야 납득할 수 있다.


   프랑스에 온 지 얼마 안 되고 아직 회사에 다니던 때의 일이었다. 영업사원인 베르트랑하고 몹시 다툰 적이 있었는데, 한국인 정서의 잣대로 보아 그가 너무 뻔뻔하게 자기 이익을 챙긴다고 느끼던 내가 참지 못하고 터뜨려 싸움이 일어났다. 그는 봉급 외에도 판매액에 따른 일정한 수수료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판단하기에 그의 몫이 될 수 없는 수수료를 집요하게 요구하는 것이었다. 한참을 다툰 뒤에 나는 속으로 '요 쥐새끼 같은 놈하고는 다시는 말도 나누니 않으리라'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이튿날 출근길에 이 친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인사를 하고 말을 거는 것이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할 수 없이 응수를 한 내 얼굴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있었고 또 속으로 '참으로 뻔뻔해도 너무 뻔뻔하구나' 하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이 얘기를 듣고 동서양 사람들은 음적인 성격과 양적인 성격의 차이를 설명하려 할 것이다. 즉 서양 사람들은 열려 있어 자기주장과 권리를 그대로 밝히는 데 비하여 동양 사람들은 겉으로는 잘 나타내지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동양 사람들이 자기주장을 잘 못 펴는 것은 염치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라고, 좋은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틀린 말이 아니다. 실제로 나는 염치라는 것 때문에 프랑스에서 손해를 보기도 했다. '알아서 해주겠지' 생각하고 나의 권리 주장을 않고 기다렸더니 프랑스인은 이를 '요구사항 없음'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양인을 상대할 때는 분명하게 자기의 의사를 밝혀야지 그러지 않으면 손해 보기 십상이다.

   그러나 여기까지의 설명으로 베르트랑과 내가 다툰 에피쏘드를 다 이해했다고 할 수 없다. 한 가지 아주 중요한 점이 빠졌다. 그것은 베르트랑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 데 반해 나는 그의 주장을 반박한 것이 아니라, 그런 주장을 하는 그를 미워한 점이다. 그의 주장이 틀렸으면 그 주장을 반박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를 미워했다. 그는 나를 미워할 이유가 없었다. 그에게는 단지 그와 나의 생각이 서로 달랐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싸운 이튿날 그는 나에게 자연스럽게 평소처럼 대했고 나는 앙심을 품고 있었다. 이 차이는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프랑스에선 이 주장과 저 주장이 싸우고 이 사상과 저 사상이 논쟁하는 데 비하여 한국에선 사람과 사람이 싸우고 또 서로 미워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프랑스인들은 다른 사람의 의견, 주의 주장 또는 사상을 일단 그의 것으로 존중하여 받아들인 다음, 논쟁을 하여 설득하려고 노력하는 데 비하여 우리는 나의 잣대로 상대를 보고 그 잣대에 어긋나면 바로 미워하고 증오한다. 이 글을 끝까지 읽는 독자는 곧 이해하게 되겠지만 그 같은 독선 논리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있던 나조차 그 함정에 빠져 베르트랑을 미워했던 것이다.

   우리에게 설득이란 단어는 있지만 우리 사회는 '설득하는 사회'가 아니다. '강요하는 사회'다. 베르트랑과 나의 차이는 바로 여기서 온 것이다. 프랑스인들은 이 차이를 '똘레랑스'가 있는 사회인지, 없는 사회인지의 차이로 구분하였다.

   이렇게 똘레랑스가 있는 사회에선, 즉 설득하는 사회에선 남을 미워하지 않으며 축출하지 않으며 깔보지 않았다. 서로 치고받고 싸우지 않고 대신 까페에서 열심히 떠들었다. 말이 많고 말의 수사법을 중요시했다.

   또 강요가 통하지 않으므로 편견이 설 자리가 없었다. 택시운전사를 택시운저사로, 즉 그대로 인정했다. 이 말은 택시운전사인 내가 택시운전을 잘못할 때는 손님의 지청구를 들을 수 있으나 택시운전사라는 이유 때문에 업신여김을 당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간혹 건방을 떠는 손님에게 오히려 공손하고 친절하게 대하면 그는 곧 수그러들었다. 더욱 기고만장하여 나를 깔아뭉개려고 하지 않았다. 건방을 떨거나 치근대는 손님을 만난 한국의 택시운전사가 오히려 속으로 '좋은 게 좋다' 하고 곱게 받아주거나 혹은 참고 넘어갈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한국의 택시운전사들은 아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다른 사회환경에 있었기에, 이방인인 나는 택시운전사의 이른바 '곤조'를 갖지 않을 수 있었고 손님에게 친절하자는 나의 다짐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손님에게 친절히 한다고 하지만, 잠깐 동안 스칠 뿐이기에 대단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손님이 불안하지 않도록 차를 부드럽고 몰고 승차거부를 하지 않으며, 나이 든 사람이 타고 내릴 때 문을 열어주고 또 무거운 짐을 차도에서 집 문 앞까지 옮겨주는 정도일 뿐이다. 그렇지만 이 조그마한 친절에도 손님들은 꽤 고마워했다. 내가 나이 든 사람이 타고 내릴 때 문을 열어주는 습관을 들인 것은, 한편 항상 앉아서 일해야 하는 자세에서 허리를 펼 수 있는 기회를 갖기 위한 까닭도 있었다. 특히 할머니가 타고 내릴 때는 서울에 계신 나의 할머니를 생각하며 더 신경을 썼다.



p.154

   내가 준비하려던 논문 제목이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1980년 광주'였으므로 우리들이 나눈 대화의 주제도 자연 한국의 현대정치사에 관한 것이었다. 따라서 중국현대사를 전공하고 박사준비과정(DEA)에 있었던 그녀는 한국의 현대사에 대해서도 꽤 알게 된 셈이었다.

   대화 도중에 씰비는 한국의 인권상황, 특히 20대에 시작하여 60대 노인이 되도록 감옥에 갇혀 있는 장기수의 얘기를 듣고는 '압쉬르'(absurde, 부조리한, 터무니없는)와 '에뿌방따블'(epouvantable, 무시무시한)이란 말을 거듭 반복하면서 흥분하였다. 프랑스에선 살인범도 실제 수형기는 15년을 넘기지 않는다면서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우질 못했다. 그녀는 거의 화를 낼 듯이 나에게 덤벼들면서 이렇게 항변하였다.

   "당신들은 사람도 아니네요…… 당신 나라의 야당은 그럼 무엇을 하나요? 교회는? 노동조합은? 그리고 지식인들과 학생들은 그럼 도대체 무얼 하고 있나요?"

   그녀는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에는 밀리땅(militant, 활동가)은 적은데 디리장(dirigeant, 지도자)만 많은 것이 아닌가요?"

   그녀는 "한국의 터무니없는 정치현실에 대항하는 민주화운동의 기초는 아직 약한 데 비하여, 운동노선에 대한 이론투쟁은 활발한 것 같다"고 지적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나의 논문 요약서를 읽고 난 그녀의 첫 코멘트였다.

   우리는 한국의 정치현실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사상과 전통, 특히 불교, 도교, 유교의 전통 등에 대해서도 대화를 나누었다. 이른바 네 마리의 용─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에 대한 얘기가 나왔을 때였다. 씰비가 이런 질문을 했다.

   "남미의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가 성장정책을 먼저 시작했고 또 어느 정도 궤도에 진입했다가 빚더미에 올라앉아 곤두박질했던 것에 비하여 네 마리의 용이 경제적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잖아요? 무슈 옹그도 그것마저 부정할 수는 없을 거예요. 나는 어떤 교수에게서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남미엔 들어간 자본도 많았지만 바깥으로, 특히 미국으로 역수출된 자본이 더 많았던 데 반해, 네 마리의 용은 그렇지 않았다는 거예요. 네 마리의 용은 축적된 자본이 그대로 머물러 있었기에 도약이 가능했다는 주장이지요. 그런데 그 이유를 그 교수는 유교 전통에서 찾고 있었어요. 그래서 나도 더 관심을 갖기 되었는데…… 네 마리의 용이 모두 유교문화권에 속한 건 사실이잖아요? 무슈 옹그는 어떻게 생각해요?"

   중국현대사를 전공하는 그녀가 유교 전통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나는 이미 다른 프랑스인이 그녀와 비슷한 얘기를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나는 그 프랑스인에게 했던 말을 반복했다.

   "글쎄, 그렇게 이해하는 것은 한편은 맞지만 다른 한편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네 마리의 용이 경제적으로 도약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오. 그런데 그 이유를 아시아인들의 근면성과 높은 교육열에서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나 유교 전통과 관련해 자본의 유출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하는 데는 나는 동의하지 않소. 축적된 자본이 남미와 달리 흘러나가지 않은 것은 맞아요. 그런데 그 이유는 다른 데에 있을 거요. 특히 한국의 경우, 우선 부동산투기라는 최대의 이익을 주는 투자처가 있었다는 거지요. 그 때문에 빈부의 격차는 더 심화되었고,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외국에 자본을 유출하기엔 아직 문화적 구속력이 컸던 탓이오."

   "그 문화적 구속력이 유교 전통과 관계없나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한국에서 유교의 전통 가치는 그 껍데기는 남아 있을지 몰라도 그 내용은 이미 허물어졌다고 봐야 하니까. 내가 말한 문화적 구속력은 삶의 방식과 언어의 차이를 말하는 거요. 남미의 자본과 부는 삶의 방식과 언어의 차이가 크지 않아 큰 장벽이 없는 미국 같은 나라에 투자하고 또 부를 즐길 수 있지만 한국의 자본과 부는 아직 그럴 능력도 또 의사도 없었던 거요. 그렇지 않다면 분단된 나라에서 항상 위기의식을 강조하는 그들의 이율배반을 이해하기 힘들어요. 앞으로 그 문화적 구속력이 엷어지면 자본과 부가 열심히 밖으로 빠져나가게 되겠지만 아직은 이른 것 같소. 그리고 그들한테 아직 그럴 의사가 없다고 말한 것은 한국처럼 돈이 숭상되는 나라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돈을 숭상하는 건 프랑스인도 마찬가지예요. 로또 같은 복권이나 경마를 많이 하는 것도 그 때문이지요."

   씰비가 배시시 웃었다.

   "그래요. 프랑스인도 돈을 무척 숭상해요. 그런데 우리는 돈도 숭상하고 돈 많은 사람 또한 숭상해요. 그게 바로 우리의 옛 전통하고 크게 달라진 것이지요."

   "그것도 마찬가지예요. 프랑스인들도 겉으론 태연한 척하지만 실은 돈 많은 사람들을 무척 부러워하거든요."

   "그래도 프랑스엔 사회적 연대라는 가치가 있기 때문에 한국과 다르오. 한국은 가족 간의 우애라든가 이웃 간의 정, 윗세대에 대한 존경 등의 전통가치는 허물어지고 있는데 사회연대라는 가치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아요. 그 비어 있는 가치관에 돈이 자리를 차지했고 또 헤게모니를 쥐게 된 거라고 나는 생각해요."

   "……"

   씰비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내가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에게는 넓은 마음 그리고 큰 그릇들이 있었던 같소. 멋과 운치가 있었고 또 여유와 유머도 있었소. 가난해도 마음까지 가난하지 않았고 그리고 깨끗했소.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들이 거의 사라졌고 또 어딘가 남아 있다 해도 대세에 밀려 보이지 않게 되었지요. 사람들은 항상 손해를 본다는 의심과 불안에 사로잡히기 시작했어요."

   "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해요? 혹시 자본주의를 말하고 싶은건가요?"

   "그보다는 우선 분단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분단은 우리들에게 섬보다도 더 지독한 섬을 강요했소. 반쪽의 이념으로 사고의 영역이 제한되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 땅덩어리도 섬보다도 더 폐쇄되었기 때문에 대륙 기질을 잃어버리고 왜소해진 게 아닌가 싶소. 우리는 일본 사람들에게 섬나라 사람 근성을 가졌느니 하며 왜소함을 지적하기도 했는데 지금의 한국은 일본보다 더 심한 섬나라라고 해야 할 거요. 사고의 영역으로도, 또 실제 움직일 수 있는 땅의 영역으로도 말이오. 그러니 우리의 인성이 자연 왜소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도니 건지요. 그 위에 지금 씰비가 지적한 자본주의의 영향도 있었을 거요. 씰비는 제로썸(zero-sum)이론을 들은 적이 있어요?"

   "제로썸요? 잘 모르겠는데요."

   "미국의 어느 경제학자의 주장인데 경제의 합계는 항상 제로(0)이기 때문에 부자가 있으면 당연히 가난한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소. 그래서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선 구조적으로 가난을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가 봐요."

   "그건 당연한 얘기인 것같이 들리네요. 하지만 너무 단순한 논리가 아닌가요?"
   "글쎄, 나도 잘은 모르오. 그런데 내가 이 제로썸 이론에 주목했던 이유는 다른 데에 있소. 자본의 논리 또는 소유의 논리라는 메커니즘에 길든 인간들이 이젠 마음 씀씀이조차 그렇게 되었다는 거지요. 우리들은 이제 인간관계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을 주는 것조차 아주 인색해졌다는 얘기요. 주는 것은 곧 마이너스니까 손해 보는 것, 더 나아가 패배하는 것이라고 인식하여 되도록 주진 않고 마냥 받으려고만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원래 인간의 마음이란 샘과 같아서 주면 줄수록 더욱 충만해지고 깊어지고 또 넓어지는 것이라고 믿소."



p.159

   "난 능력도 부족하겠지만 처음부터 꼭 학위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진 않았어요. 물론 아쉬움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후회는 하지 않을 거요. 내가 학위를 받는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일 뿐이니까. 그리고 또 그 아쉬움조차 날려버릴 수 있는 것은 프랑스의 대학사회를 조금이라도 볼 수 있었다는 데에 있어요. 나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소. 나는 다니엘 에므리 교수를, 그리고 당신들을 만나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이 큰 축복이었다고 생각해요. 나는 한국에 있을 때, 그리고 여기에 있으면서도 외국 대학에서 공부한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 하는 일종의 환상을 가지고 있었소. 그 환상을 지워버릴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나의 짧은 경험은 충분히 가치가 있었는데, 그뿐만 아니라 당신들은 나에게 충격을 주었어요. 아주 즐거운 충격을 말이오."

   내 말은 진실이었다.

   나는 프랑스의 '대학사회'를 잠깐 보고도 확인한 것이 있다. 그것은 내가 이 대학사회를 동숭동 문리대 시절에 이미 경험했다는 사실이다. 강의실에서 교수들의 강의를 통해서가 아니라 학생총회가 있던 교정에서, 농성장이던 본 4 강의실에서, 연극회에서, 탈춤반에서 그리고 써클 활동을 통하여 이미 경험한 일이었다. 그 경험들은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이었는데 그 같은 문제 의식이 프랑스에선 바로 대학의 출발점이었고 또 본질이라는 것을 확인했던 것이다. 물론 모든 대학의 출발점이었고 또 본질이라는 것을 확인했던 것이다. 물론 모든 대학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내가 직접 본 빠리 제7대학 역사학부의 동남아시아과에선 그랬다. 이 발견을 나에게 아주 즐거운 확인이었고 또 즐거운 충격이었다.

   서울의 대학시절, 이른바 국제정치학을 전공한다는 외교학과 학생이던 내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하여, 현대 중국과 마오쩌둥에 대하여, 필리핀의 후크(HUK)에 대하여, 그리고 베트남 전쟁에 대하여, 또는 제3세계의 종속에 대하여 알게 된 것은 교수들의 강의를 통해서가 아니다. 문제의식을 갖고 선후배 학생들과 나눈 대화에서, 써클 활동을 통해서, 그리고 책을 읽어 알게 된 것이다. 내가 당시 리영희 선생의 글을 대하고 충격을 받고 또 빠져들었던 사실은, 내가 외교학과에선 무슨 강의를 들었어야 했는지를 거꾸로 분명하게 말해준다 할 수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문제의식이 있고 없고의 차이였다. 그런데 빠리 제7대학의 쎄미나에선 바로 그 문제의식의 불꽃이 튀고 있었다.



p.177

   그가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당신은 그 조직에서 구체적으로 무슨 행동을 했습니까?"

   그로서는 아주 당연한 질문이었다. 그런데 이 당연한, 그리고 아주 명료한 질문에 나는 대답이 궁한 자신을 발견해야 했다. 곰곰이 돌이켜보아도 크게 내세울 것이 없었던 것이다. 특히 망명을 신청한 자로서는 더욱 그러했다. 한국 내에 있었으면 실로 엄청난 일을 당했을 테고 또 실제 다른 동료들이 겪었고 또 겪고 있는데도 말이다. 몇 차례에 걸쳐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을 무너뜨리자는 삐라를 뿌렸다는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말으 전부였는데, 그 정도의 행위는 프랑스에서는 경범죄에도 해당하지 않는 일이었다! 어처구니없지만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 행위가 한국의 유신체제하에서는 취조실에서 고문을 당해야 하며 적어도 수년간의 옥살이를 각오해야 하는 행위라고 설명하는 나에게 허탈감이 스며들고 있었다. 


   "우리 조직은 미제국주의에도 반대하였소."

   맥이 빠진 내가 이렇게 저항하였을 때, 그는 이렇게 대꾸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무슨 행동을 했습니까?"


   '미제국주의'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이면 이미 그에 반대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잇는데 구체적인 행동이 없었다면 그게 무슨 대수냐고 말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 그랬다. 나의 상대는 사회당이 집권한 나라의 관리이고 그 자신 미제국주의에 반대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의 질문은, 미제국주의에 반대할 수 있는 구체적 방안이 있으면 자기에게도 가르쳐달라는 뜻으로 들리기까지 했다. 그가 사회당 정권에 관계없이 단순한 관리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나는 프랑스 사람들이 미제국주의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자주 보았다. 빠리 지사에서 나와 같이 일하던 베르트랑도, 삐에르도 미제국주의라는 표현을 썼다. 평범한 사무원들이 스스럼없이 '미제'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나는 아주 놀랐다. 왜냐하면 유럽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당시에 나는 주로 북한 사람들만 그 표현을 쓰는 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행동이 따르지 않은 '미제국주의에 대한 반대'는 별 의미가 없었다. 나는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p.199

   그날은 도서관에서 늦게까지 소설책을 읽고 밤 10시가 다 된 뒤에 학교를 나왔다. 이런 날은 혼자라도 버스를 이용했다. 밤길을 혼자 타박타박 걷기도 뭐했고 버스에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안국동에서 버스를 탔다. 그때 그 소리를 들었다.

   "야! 거스름돈 줘!"

   당시 학생의 버스 삯은 회수권으로 사면 한 장에 2원 50전이었지만 돈으로 내면 3원을 내야 했다. 대학생 교복을 입은 학생이 10원짜리를 냈는데 버스차장이 거스름돈 줄 것을 잊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처음에 그 소리를 무심코 들었다. 그리고 또 무심코 보았다. 버스차장이 "여기 있어요" 하고 거스름돈을 주고 피곤한지 차문에 기대 눈을 감고 있었다. 바로 그때 「빨강머리의 걸녀」를 자주 읽고 간직하고 있던 나는 "진열창 너머 29쑤우짜리 값싼 보석을 들여다보는 빨강머리의 걸녀와 그녀에게 마냥 짖어대는 잔망스러운 강아지"의 이미지가 떠오르면서 갑자기 그 버스차장이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바로 대학생이 했던 "야! 거스름돈 줘!" 하던 소리가 다시 살아났고 귓속에서 점점 커졌다. 원남동에서 버스에서 내린 나는 이런 질문을 하며 걸었다.

   ─그 대학생은 반말을 했다. 그녀는 반말을 듣고도 잠자코 있었을 뿐 아니라 존댓말로 대꾸했다. 그 두 사람의 나이는 비슷해 보였다. 그 대학생은 그 차장 또래의 여대생에게는 반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여자가 버스차장인 줄 알았다 하더라도 버스 차장 유니폼을 입지 않았고 길에서 만났다면 반말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설사 버스차장 유니폼을 입었다 하더라도 버스 안에서 손님과 차장으로 만난 것이 아니라 길에서 만나 길을 묻게 되었을 때라면 반말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대학생은 어떻게 스스럼없이 반말을 할 수 있었을까? 또 그 버스차장은 그 반말을 듣고도 왜 당연한 듯 받아들인 것일까? 그리고 나 또한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왜 무심코 듣고 지나쳤을까?

   나는 그때 사회를 지배하는 집단무의식과 그 편견에 대하여 생각했던 셈이다. 그러나 당시의 나에게는 그 생각을 더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은 없었고, 다만 무의식적인 편견은 의식적인 편견에 비하여 무의식이기 때문에 더욱 수정하기 어려우리라는 것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후에 나는 누구에게도 반말을 쓰기 어려워했고 또 이 경험을 자주 돌이켜 생각하였다. 스무 살 때 이 경험을 돌이켰을 때 나는 어지럼증과 아득함을 느껴야 했다.



p.215

   밤늦게 택시에 올라탄 동양인 청년 둘이 뒷자리에서 계속 프랑스말로 떠들어 나의 귀에 거슬렸다. 동양인들이 그처럼 프랑스말을 유창하게 하는 것은 자기 나라 말을 잘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었고, 자연 우리말보다 프랑스말을 몇 배나 잘하는 우리 아이들 걱정도 겹쳐서, 그들에게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었던 것이다.

   그들은 18년 전 각각 두 살과 여섯 살 때 프랑스로 입양을 온 한국인 형제였다. 결국 한국 사람끼리 프랑스말을 주고받아야 했는데, 그래도 내가 한국인이라고 하니까 몹시 반가워하며 열심히 그리고 거침없이 자기들의 얘기를 했다. 지금까지 양부모 밑에서 잘 자랐고 교육도 잘 받아 둘 다 장래가 열린 건축공부를 하고 있고, 또 형은 이미 일을 시작했다고 했다. 잠깐 동안의 얘기로도 그들이 자신감에 넘쳐 있다는 것과 또 그늘 없이 자랐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에겐 한국에 남아 있었던 것보다 차라리 떠난 것이 잘된 일이었다고 나 스스로 인정해야 했다. 내가 한국을 알고 싶거나 우리말을 배울 생각이 없느냐고 물으니, 자기들도 자기들의 뿌리를 알고 싶고 또 한국말도 하고 싶지만 마땅한 방법이 없다고 했다. 형은 큰 뒤에 완전히 잊어버린 한국말을 다시 배울 생각을 가져보기도 했지만 쉽지 않았다고 하며, 혹시 빠리에서 한국말을 배울 길이 없느냐고 묻기도 했다. 빠리에 한국인 학교가 있지만 그들처럼 이미 컸고 또 한국말을 한마디도 못하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곳은 없었다. 그래서 내가 한국에 가서 배울 기회를 가져보라고 했는데, 형의 말은 나의 가슴을 찔러 아프게 하였다.

   "한국이 우리의 뿌리인 것도 알고 또 가보고 싶기도 하지만, 한국인들이 우리들에게 어떻게 했는지 아세요? 우리가 입양되어 올 때 우리가 형제인데도 그들은 우리를 따로따로 다른 양부모에게 입양시켰던 거예요. 나는 그때 여섯 살이었는데 그 사실을 빠리 공항에 니려서야 알 수 있었어요. 내가 울고불고 내 동생을 붙들고 놓지 않자, 동생을 입양하려던 양부모가 양보를 해서 우리는 같이 살 수 있었어요. 어떻게 한국에선 우리 둘을 떼어놓을 생각을 할 수 있지요?"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정말 그들은 어떻게 형제를 떼어놓을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같이 프랑스에 보내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고아들이니까 그래도 된다는 뜻이었을까. 우리들은 갑자기 모두 말을 잃었다. 프랑스에서 아이를 입양하려면 양부모 될 사람의 조건도 좋아야 하고 또 돈도 많이 든다는 등의 얘기는 할 필요도 없겠다. 그리고 프랑스에만 수천 명의 한국 출신 입양아들이 그 뿌리를 잃어버린 채 자라고 있다는 말도 필요 없겠다.



p.222

인종주의자

   비록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인종주의자들이 에트랑제가 운전하는 택시를 되도록 타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을 볼 때가 있다. 빈 택시가 없을 땐 할 수 없이 타지만 빈 택시가 많을 때는 앞의 택시부터 차례대로 운전사가 에트랑제가 아닌지 확인하고 올라타는데 택시의 유리창 너머를 빠끔히 쳐다보는 모습은 영 기분을 상하게 한다. 오직 그들만이 순서대로 탑승하지 않는 부류였는데, 그들에겐 왜 보기 싫은 에트랑제에게 돈을 벌게 해주겠느냐는 생각이 있을 터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앞에 있던 에트랑제 택시운전자를 기피하고 자기 택시에 올라탄 그들에게 "차례대로 앞의 택시를 타라"고 하면서 그들을 쫓아내는 프랑스인 택시운전사들이 적잖다는 사실이다. 나는 쫓겨난 인종주의자들의 벌게진 얼굴을 바라보며 낄낄거리며 좋아했다. 그들은 결국 다른 택시정류장을 향해 멀어졌다. 빠리의 택시운전사들 사이에는 경쟁심리도 없지 않지만 인종의 차이를 덮을 수 있을 만큼 연대감도 있었다. 어쨌든 이런 인종주의자들이 많지 않아서 다행이고, 그런 사람들이 에트랑제인 내 택시를 타지 않으려 하는 것 또한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p.225

   나는 어느 글에서 "인종주의란 자기를 낳게 한 종자 외엔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들의 열등감의 표현"이라고 쓴 것을 읽은 적이 있다. 무의식의 그 열등감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 열등감을 감추기 위하여 더욱더 인종을 내세우게 된다고도 쓰여 있었다. 프랑스인 중에는 이런 속물적인 우월심리를 부추기고 외국인에 대한 적대감정을 불러일으켜 그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는 극우파 '국민전선'과 같은 정당이 프랑스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있었다.



p.226

"가짜 인종주의자?"

   다음에 가짜 인종주의자를 만난 사연은 이런 것이다. 혼자 올라탄 50세쯤 돼 보이는 백이었는데, 나에게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었다. "꼬레앵"이라는 내 대답에 다시 "노르 우 쉬드?"라고 되물었고 결국 나의 아집인 "꼬레 뚜 꾸르"를 듣고 "아, 봉!(Ah, bon! 아, 그래요!)" 하며 약간 흥미를 표시하던 손님이었다. 몇 마디 대화가 이어진 뒤 그가 갑자기 "나는 인종주의자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 봉!"하고 그의 조금 전 말투를 그대로 흉내 내 대꾸했는데, 그와 나눈 대화와 그의 말투에서 이미 그가 인종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나는 아주 철저한 인종주의자(raciste convaincu)요. 그런데 내겐 이 세상에서 하나의 인종(race)밖에 보이지 않소. 인류라는 인종 말이오."

   우리는 잠시 소년처럼 웃었다. 그가 말하자면 인종과 인류를 하나로 본 휴머니스트였던 것이다. 진짜 인종주의자와 가짜 인종주의자는 그렇게 다른 것이었다.


p.226

의심하는 습관을 버리시라

   한편 진짜 인종주의자는 나에게 지름길이 아닌 길을 가다고 시비를 건 손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런데 통틀어 세 번밖에 되지 않았던 한국인 손님들 중에 그런 의심을 했던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독자는 기억할 것이다. 나는 의심하기 좋아하는 한국인의 표상 같은 그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그때 못 했던 얘기를 빠리 택시운전자들의 대표 자격으로 말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당신은 나에게 그런 의심을 표현한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물론 당신 말고도 그런 의심을 가졌던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들이 표현을 안 했기 때문에 내가 모르고 지나갔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그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

   우선 프랑스인을 비롯한 다른 나라 사람들은 길을 모르면 가만히 있지 당신처럼 "이놈이 돌아가고 있는 거 아냐" 하는 의심은커녕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당신은 별로 속아 살지 않았을 만큼 영악한 사람인데도 다른 사람이 항상 당신을 속일 수 있다는 피해망상을 갖고 있다.

   길을 알고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자기가 아는 길과 다른 길을 선택한 택시운전사에게 이곳 사람들은 당신처럼 불쾌한 표정을 짓지 않으며 또 속으로 '이놈이 돌아가네' 하고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 "이러이러한 길이 더 빠른 길이 아니오?" 하고 떳떳이 말한다. 어감에서 불쾌함을 찾기 힘들다. 택시운전사는 이에 대해 자기가 왜 그 길을 선택했는지 설명한다. 역시 불쾌한 어감이 아니다. 대개 택시운전사의 선택이 더 빠른 길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큰 차이가 없다. 여러 길의 선택이 가능한 행선지라면 손님과 미리 상의하기도 하고 또 많은 택시운전사들이 아예 '당신이 원하는 길이 있으면 미리 알려주시오'라는 팻말을 택시 안에 붙이고 다니기도 한다. 

   아무리 빠리에 오래 산 빠리지앵도 택시운전사보다 길을 더 잘 알기는 어렵다. 어떤 손님은 자신이 잘 모르는 길을 어트랑제인 내가 알고 있는 것에 "어, 이런 길도 있었네" 하고 놀라기도 했다. 나에게 돌아간다고 시비를 걸었던 인종주의자도 나에게 시비를 걸기 위한 핑계로 그렇게 말했던 것이지 실제로 그렇게 의심했던 것은 아니다. 그래서 또 나는 더 해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것이기도 하다. (중략) 빠리에 못된 택시운전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의 의심은 대개 근거가 없는 것이다. 근거 없이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고 미리 의심부터 하는 습관을 버리시라.



p.251

   미국은 범죄 당시 미성년이었던 범죄자를 사형 집행하는 세계 7개국 중의 하나라는 오점이 부각되었다. 필름은 그 실제 집행현장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전기의자에 앉혀져 끔찍하게 죽어간 사형수는 물론(?) 흑인이었다. 사형제도를 없앤 프랑스인들이 보기에 미국은 아직 미개한 인권 상황을 보여주는 나라에 지나지 않았다. 미떼랑 프랑스 대통령은, 자신의 철학은 "인간이 인간을 합법적으로 죽일 수 있다는 것을 도저히 용납하지 않는다"고 피력하기도 했다.

   프랑스에서도 유독 극우파들이 사형제도를 부활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와 관련하여 나는 아주 흥미로운 발견을 하였다. 즉 '인간을 합법적으로 죽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낙태수술에는 결사코 반대한다는 사실이었다. 반대로, '인간을 합법적으로 죽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낙태수술에는 찬동하는데, 이 겹모순의 해답은 결국 '개인과 사회의 관계' 그리고 '사회의 책임' 등을 어떻게 보는가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극우파를 제외한 대부분의 프랑스인들이 보는 미국 사회는 한마디로 똘레랑스가 없는 사회였다. 인종차별이 심하고 건강보험 등 사회보장이 제1세계에서 가장 낙후한 나라이며, 특히 사회 주변 계급에 대한 처벌과 축출이 가장 심한 나라다 필름에서 삐에르 신부는, 사형 집행은 바로 사회 주변 계급 축출의 가장 심각한 본보기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렇게 힐난한다. "청소년 범죄는 과연 그 개인의 책임인가? 아니면 사회의 책임인가?" 사형 집행은 그 사회의 책임을 외면한다는 것을 보일 뿐이라는 주장이었다.



p.253

   한편 복수정당제와 인권 향상을 위해 활동하다가 이른바 반혁명죄로 기소되어 7년 징역형을 선고받은 

꾸바의 어느 수학교수를 위한 탄원문에서, 빠리 과학아카데미의 원장은 피델 까스뜨로(Fidel Castro)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던졌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권력을 잡았을 때 그 많은 사람들이 품었던 찬란했던 희망을. 당신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자유롭고자 하는 사람을 제거함으로써 '자유'를 없앨 수는 없다는 것을. 인간의 역사란 다름 아니라 '자유'를 쟁취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인류가 나타나기까지 수억 년의 시간이 필요했으며, 또 하나의 인간이 탄생하기 위해서 아홉 달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인간을 죽이는 데는 단 한순간으로 족하며 또한 아주 간단한 족쇄로 그 인간의 존엄성을 빼앗을 수 있습니다."

   "인간이 모두 똑같이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평등 개념이 창안되어야 했던 것이며, 인간이 모두 같은 이데올로기를 갖지 않기 때문에 인권 개념이 창안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21세기의 벽두에 단지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을 감옥에 집어넣는 행위는 완전히 사라져야 할 것입니다. 그 행위는 인간의 가장 나쁜 재앙 중 하나입니다."


   1986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였던 엘리 위셀(Elie Wiesel)은 "단 한 사람이라도 자유롭지 않은 사람이 있는 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모든 사회에 적용될 수 있는 진리가 아닐까!

   같이 출발했으면서도 결국 엄청나게 다른 운명을 갖게 된 체 게바라(Che Guevara)와 까스뜨로를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느끼게 되는가? 씰비는 "인류 역사를 위하여 필요한 사람은 일찍 역사에서 사라졌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녀는 뜨로쯔끼(Leon Trotsky)와 게바라의 열렬한 팬이었고 레닌이 너무 일찍 죽었다고 아쉬워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한때, 특히 제3세계인을 열광시켰던 알제리의 민족해방전선(FLN)이 독립전쟁에서 승리하고 권력을 잡은 뒤엔 일당독재를 계속하여 오히려 민주와에 역행했던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씰비가 강조했던 것처럼 어느 체제나 굳어지면 '프로피뙤르'들이 날뛰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문화혁명은?

   까스뜨로의 사진과 반혁명분자로 몰려 감옥에 갇힌 곤잘레스라는 이름의 수학교수의 사진이 교차되는 화면을 보면서 나는 끝없는 의문부호를 찍고 있었다.



p.273

   수현아, 용빈아,

   너희들은 꼬레앵이라는 뿌리를 잊어선 안 된다.

   너희들이 여기에 이르게 된 그 긴 사연을, 식민지에 태어났던 너희 할아버지 세대의 그 어두운 역사를 나의 세대에서 끝내지 못하고 마침내 너희들에게까지 이렇게 남겨주게 된 그 노정을 너희들은 몰라선 안 된다.

   수현아, 용빈아,

   사람이 미래를 모르고 살면 불안하긴 하나 위험하지는 않단다. 아니, 미래를 모르고 사는 것이 오히려 축복일 수도 있단다. 그러나 과거를 모르고 사는 것은 몹시 위험한 일이란다. 그것이 개인의 과거였든 민족의 과거였든……



p.282

너무나 짧았던 외교관의 꿈

   격심한 풍파를 겪었지만 나는 아직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였다. 가슴 한쪽에는 항상 그늘이 따라다니기도 했으나, 그래도 나는 꿈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 꿈은 외교관이 되어 한반도의 통일정책에 일익을 담당하고 싶다는, 아주 단순하고 순진한 꿈이었다. 당시의 나는 아직 한국에 자주적인 외교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고, 또 일부 군부세력을 제외하곤 모든 사람들이 분단에 반대한다고 당연히 믿었다. 따라서 일부 군부세력을 몰아내고 외교 능력과 지혜를 발휘하면 통일의 길이 보일 것으로 확신했던 것이다. 나는 1학년 때에 그 꿈의 실현을 위한 첫 단계로 그 예비시험을 보아 합격했다. 물론 그것은 아주 쉬운 시험이었다.
   그러나 외교관이 되어 통일의 역군이 되겠다는 꿈으로 부풀었던 순간은 너무나 짧게 끝났다. 그것은 그야말로 남가일몽이었다. 2학년이 되어 동숭동으로 다니게 된 뒤, 외교학과의 강의를 많이 듣지 않고도 그동안 읽었던 분단 이래의 역사를 다룬 책을 통하여 그리고 학림다방에서 다른 학생들과 나눈 대화를 통하여, 한국 외교의 총합이라는 것이 미 국무부 차관보 한 사람에게도 못 미친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믿기 어려웠고 믿기 싫었던 일이었는데 실상이 그러했다. 특히 이른바 한미행정협정의 내용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그야말로 아연실색할 지경이었다. 국군통수권을 미국이 송두리째 거머쥐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이 필요로 할 때는 언제라도 또 어디든지 우리 땅을 수용할 수 있었고 또 일체의 치외법권을 누리고 있었다. 나를 또한 놀라게 한 것은 그 같은 사실을 알고 또 가르쳤던 교수들이 그걸 아주 덤덤하게 설명한다는 사실이었다. 약간의 냉소주의를 빼곤 아주 당연한 결론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한국이 그와 같은 실정에 처했으니 그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또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 등의 문제의식도 없었고, 따라서 그 대답도 없었다 다만 '그렇다'는 것이었다. 또는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외교관이 되겠다는 꿈을 조금씩 조금씩 저 멀리로 던졌다. 처음엔 그래도 아쉬움이 남았으나 그것도 차차 저 멀리로 사라졌다.



p.285

   내가 아직 어렸을 때, 할아버지께선 옛날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대부분 잊었지만 잊히지 않는 것 중에 이런 얘기가 있다. 당신께서 중국의 루쉰을 읽으시고 좀 바꾸어 말씀하신 것인지, 아니면 우리 옛이야기에 실제로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하여튼 얘기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옛날에 서당선생이 삼 형제를 가르쳤겠다. 어느 날 서당선생이 삼 형제에게 차례대로 장래희망을 말해보라고 했겠다. 맏형이 말하기를 "저는 커서 정승이 되고 싶습니다"고 하니 선생이 아주 흡족한 표정으로 "그럼 그렇지"하고 칭찬했겠다. 둘째 형이 말하기를 '저는 커서 장군이 되고 싶습니다'고 했겠다. 이 말에 서당선생은 역시 흡족한 표정을 짓고 "그럼 그렇지, 사내대장부는 포부가 커야지" 했겠다. 막내에게 물으니 잠깐 생각하더니 "저는 장래희망은 그만두고 개똥 세 개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했겠다. 포정이 언짢아진 서당선생이 "그건 왜?"하고 당연히 물을 수밖에. 막내가 말하기를 "저보다도 글 읽기를 싫어하는 맏형이 정승이 되겠다고 큰소리를 치니 개똥 한 개를 먹이고 싶고, 또 저보다도 겁쟁이인 둘째 형이 장군이 되겠다고 큰소리치니 또 개똥 한 개를 먹이고 싶고……" 여기까지 말한 막내가 우물쭈물하니 서당선생이 일그러진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렀겠다. "그럼 마지막 한 개는?" 하고.


   여기까지 말씀하신 할아버님께서 이렇게 물으셨다.

   "세화야, 막내가 뭐라고 말했겠니?"하고.

   나는 어린 나이에 거침없이 대답했다.

   "그거야 서당선생 먹으라고 했겠지요, 뭐."

   "왜 그러냐?"

   "그거야 맏형과 둘째 형의 그 엉터리 같은 말을 듣고 좋아했으니까 그렇지요."

   "그래. 네 말이 옳다. 얘기는 거기서 끝나지. 그런데 만약 네가 그 막내였다면 그 말을 서당선생에게 할 수 있었겠느냐?"

   어렸던 나는 그때 말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러자 할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화야, 네가 앞으로 그 말을 못 하게 되면 세 번째의 개똥은 네 차지라는 것을 잊지 마라."

   나는 커가면서 세 번째의 개똥을 내가 먹어야 한다는 것을 자주 인정해야 했다. 내가 실존의 의미를, 그리고 리스먼의 자기지향을 생각할 때도 할아버지의 이 말씀이 항상 함께 있었다.



p.319

   삐라를 뿌린 장소에 다시 돌아가는 일은 금지되었으나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했던 나는 10분쯤 뒤에 현장에 가보았다. 우리들이 뿌린 삐라는 그대로 보도에 흩어져 있었고 누구 한 사람 읽어보겠다고 집어 들려고 하지 않았다. 어쩌다 집어 든 사람도 잠깐 보더니 뜨거운 감자라도 만졌다는 듯 곧 팽개쳤다. 유신체제에 조금이라도 비판적인 말을 했다가는 바로 잡혀가는 시대였다. 사람들은 압도되어 있었고 또 서로 불신했다. 그만큼 증오 이데올로기는 바로 공포였고 또 그 그물망은 아주 촘촘했다.

   보도에 흩어진 삐라를 물끄러미 바라보자니 내 마음은 당시의 공기처럼 무거워졌다. 사람들이 흥미 없어 길바닥에 내버린 광고지를 밝고 지나가듯 우리들이 뿌린 삐라를 밟고 지나갈 땐 흡사 내 가슴을 밟고 지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처연한 기분이 되어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젊은이 하나가 삐라 한 장을 슬쩍 집어 들어 읽지도 않은 채 뛰더니 막 떠나려는 버스에 올라타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뛰면서 삐라를 슬쩍 호주머니 속에 집어넣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그는 그것이 삐라인 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젊은이가 정말 고마웠다. 그런 사람이 단 한 명만 있어도 우리의 행동은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설사 그런 사람이 없다 해도 우리는 계속 삐라를 뿌렸을 것이다. 그 행동 자체로 우리에겐 이미 큰 의미가 있었다.

   

   남민전이 너무 무모했다고들 말한다. 그렇다. 무모했다. 하지만 나처럼 수학은 잘했지만 계산을 잘 못 하는 사람에게는 무모하지 않았다. 나는 계산에 어두웠고 또 계산을 싫어했다. 나는 바보였다. 증오의 사회에 무모하게 저항한 바보였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실존이었고 삶이었다. 나는 내가 바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바보였고 또 그 바보스러움을 자랑스럽게 껴안았던 바보였다.

   나는 투철한 혁명가도 아니었다. 이론가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 어떤 정치적 욕구도 나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내 삶의 의미를 되새겼고 그에 충실하고자 했다. 나를 사랑하고 나 아닌 모든 나를 사랑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분열에 저항하여 하나로 살고 싶었다. 그것은 바로 내 가슴의 요구였다. 그뿐이었다.



p.349

프랑스 사회의 똘레랑스란?


   1

   프랑스 사회는 똘레랑스가 있는 사회입니다. 흔히 말하듯 한국 사회가 '정'이 흐르는 사회라면 프랑스 사회는 똘레랑스가 흐르는 사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정'의 뜻을 다른 나라 말로 옮기기 쉽지 않듯이, 프랑스 사회의 똘레랑스를 한마디의 우리말로 옮기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의 사회적 의미는 애매한 반면, 똘레랑스의 사회적 의미는 명확하답니다. 우리의 '정'은 감성의 표현인 것에 비하여 똘레랑스는 이성의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2

   똘레랑스란 첫째로,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의 자유 및 다른 사람의 정치적ㆍ종교적 의견의 자유에 대한 존중'을 뜻합니다. 이 뜻은 내가 임의로 규정하여 말한 것이 아닙니다. 프랑스말 사전이 밝힌 똘레랑스의 첫 번째 뜻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존중하시오, 그리하여 존중하게 하시오(Respectez, et faites respecter)."

   이렇게 적힌 팻말이 공원의 잔디밭에 있는 걸 당신은 자주 볼 수 있었을 겁니다. (중략)

   '당신의 정치적ㆍ종교적 신념과 행동이 존중받기를 바란다면 우선 남의 정치적ㆍ종교적 신념과 행동을 존중하.' 바로 이것이 똘레랑스의 출발점입니다. 따라서 똘레랑스는, 당신의 생각과 행동만이 옳다는 독선의 논리에서 스스로 벗어나길 요구하고, 당신의 정치적 이념이나 종교적 믿음을 남에게 강제하는 행위에 반대합니다.

   원래 정치적 이념이나 종교적 신념은 설득에 의한 동의로 바뀔 수는 있어도 강제에 의해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강제에 의해 하루아침에 버릴 수 있는 이념이나 신념이었다면, 그것들은 이미 이념도 신념도 아니고 다만 허위였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정치이념이나 종교신념이 나와 다르다고 강제하여 전향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다만 인간성에 대한 몰이해이며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이념이나 신념에 대한 모독이 될 뿐입니다. 당신이 만약 그런 강제를 인정한다면 당신과 그 사람의 자리를 뒤바꾸어 보십시오. 당신은 바로 당신 자신의 이념과 신념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념과 신념이 당신에게 귀중한 것이라면 남의 그것들도 그에게는 똑같이 귀중한 것입니다. 당신의 그것들이 존중받기를 바란다면 남의 그것들도 존중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똘레랑스의 요구이며 인간 이성의 당연한 주장입니다.

   똘레랑스가 강조되는 사회에선 가용하거나 강제하는 대신 토론합니다. 아주 열심히 토론합니다. 상대를 설득하기 위하여 노력합니다. 그러다 벽에 부딪히면 "그에겐 안된 일이지만 할 수 없군!(tant pis pour lui!)" 하며 아쉬운 표정으로 돌아섭니다. 강제로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습니다. 치고받고 싸우지도 않습니다. 또 미워하지도 않으며 앙심을 품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감옥에 처넣지도 않고 죽이지도 않습니다.



p.352

   똘레랑스는 당신에게 당신과 다른 것을 인정하라고 말합니다. 이웃을 인정하고, 외국인을 인정하고 또한 당신과 다른 생활방식, 다른 문화를 인정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프랑스에 사는 외국인들은 외국인의 설움이나 배척감을 다른 나라에 사는 외국인들에 비해 훨씬 덜 느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중략) 그리고 마늘이나 김치 또는 된장찌개 냄새 등으로 수모를 겪는 일도 거의 없습니다. 만약 어느 프랑스인이 우리 음식 냄새를 맡고 당신에게 불쾌감을 표시하면 프랑스의 치즈도 고약한 냄새가 난다고 곧바로 응수하면 됩니다. 그는 움츠러들어 슬그머니 물러날 것입니다. 이는 치즈 냄새가 우리 음식 냄새보다 더 고약하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프랑스 음식에서 빠질 수 없는 치즈도 다른 나라 사람에겐 배척될 수 있다는 지적으로, 자기 것을 인정받으려면 남의 것도 인정해야 하는 똘레랑스에게 벗어난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미식가들인 프랑스인들은 오히려 비교적 값싸게 즐길 수 있는 외국 음식이 있다는 것을 축복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빠리에서는 세계의 음식을 모두 다 맛볼 수 있다고 할 정도로 온 나라의 식당이 있습니다.



p.359

   이처럼 똘레랑스는 당신이 존중받기를 원하면 우선 남을 존중하며, 당신의 정치이념과 종교신념이 존중받기를 원하면 우선 다른 사람의 정치이념과 종교신념을 존중하며, 당신과 다른 인종과 국적을 가진 사람을 존중하며, 그리고 당신과 다른 생활방식과 문화를 존중하라고 요구합니다. 한마디로 '당신의 것'이 존중받으려면 '남의 것'부터 존중하라는 요구인 것입니다.

   실제 사회생활에서 똘레랑스는 소수에 대한 다수의, 소수민족에 대한 대민족의, 소수 외국인에 대한 다수 내국인의, 약한 자에 대한 강자의, 가난한 자에 대한 가진 자의 횡포를 마긍려는 이성의 소리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권력의 횡포에서 개인을 보호하려는 의지로 나타납니다.



p.363

   이처럼 똘레랑스는 '권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금지되는 것도 아닌 한계자유'를 뜻합니다. 이러한 똘레랑스에 익숙한 프랑스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관료주의와 권위주의입니다. 그들은 관료의 편의주의와 일률적인 규격화에 반대하고 규정을 잘 지키지 않습니다.

   건널목의 신호등을 지키지 않고 휴지 등을 길바닥에 잘 버립니다. 나는 순찰차에 타고 있던 경찰이 재떨이를 길바닥에 비우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었지요. 프랑스인들에게 '왜 그렇게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리느냐'고 말하면, '그래야 청소부들이 실업자가 되지 않는다'라고 대꾸하며 씩 웃기도 합니다.

   이렇게 프랑스인들은 '꼭 ……하라' 또는 '……하지 마라'라는 구호나 지시를 아주 싫어합니다. 자동차의 안전벨트 착용을 행정 명령으로 지시했을 때, 우선 갑갑하기도 하지만 그 명령에 승복하기 싫어서도 착용을 거부합니다. 그들이 결국 착용하게 된 것은 안전상 필요하다고 스스로 인정한 뒤의 일이었는데 5~6년이 걸렸습니다.

   이처럼 행정지시를 잘 안 따르고 공중도덕도 엉망이라는 이들인데 희한하게도 해변의 유원지나 들에서는 유리병도 휴지도 아무데나 안 버리고 꼭 비닐봉지에 싸서 쓰레기통에 버립니다. 유원지의 캠핑장도 밤 10시만 되면 조용해집니다. 이율배반으로 보이는 이들의 행동은 똘레랑스를 모르면 이해하기 힘듭니다. 즉 공권력의 영향력에는 약자로서 강자에게 똘레랑스를 요구하며 응수하지만, 같은 개인에게는 '내가 존중받으려면 남부터 존중한다'는 첫번째 의미의 똘레랑스를 지키는 것입니다.


   프랑스인들처럼 공권력의 간섭을 싫어하는 국민은 드물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웃 간에 소음 등의 이유로 분쟁이 생겼을 때, 독일에서는 곧 경찰을 부르겠다고 하고 또 실제 경찰이 동원되어 해결사가 되는 경우가 흔합니다. 그런데 프랑스에선 서로 용인하려고 노력하거나 자기들끼리 해결하지, 경찰의 도움을 청하겠다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곧 동네에서 바보 취급을 받기 십상입니다.

   만약 길에서 두 사람이 언쟁을 하다가 흥분하여 서로 치고받고 싸울 지경에 이르렀는데 근처를 지나던 경찰이 접근한다면, 보통 사람들은 서로가 자기가 옳고 상대가 잘못했다고 떠들며 경찰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합니다. 당신도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프랑스인들의 경우에는 그때까지 서로 다투던 두 사람이 오히려 한패가 되어 경찰에게 "당신이 간섭할 일이 아니오!" 하고 대들 수 있습니다.

   자동차 접촉사고가 일어나도 인사사고가 아니면 근처에 경찰이 있다고 해도 부르지 않고 스스로 해결합니다.

   이렇게 공권력의 간섭을 싫어하는 이유는, 사회 불의나 공권력의 남용보다는 차라리 무질서를 선택한다는 프랑스인들의 성격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며, 또한 공권력의 간섭을 받기 시작하여 그에 따르다 보면 자율의 폭이 줄어들고 따라서 똘레랑스도 잃어버리게 되는 위험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상과 같이 똘레랑스가 흐르는 프랑스 사회지만 권력의 남용이나 공직을 이용한 부정부패는 절대로 용서되지 않습니다. (중략)

   이처럼 똘레랑스는 개인이 권력에 요구하는 것이지 권력이 개인이나 사회에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권력에는 역사에 대한 책임만이 철저히 요구될 뿐이지요. 바로 이것이 한국과 프랑스가 다른 아주 중요한 차이점입니다.

   즉 프랑스의 개인은 권력에 대해 똘레랑스를 갖고 있음에 반해 한국의 개인은 똘레랑스 없이 다만 권력으로 강제되고 희생되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프랑스의 권력은 사회와 역사에 책임을 지는 데 반해, 한국의 권력은 그 현대사가 증명하듯이 역사나 사회에 전혀 책임을 지지 않았습니다.



p.371

   얼마 후 텔레비전 화면에선 열 살쯤 소년들 수십 명이 그의 노래를 합창했는데 모두 텁수룩한 수염에 검은 색안경을 껴 쎄르주 갱스부르처럼 분장했을 뿐만 아니라 담배를 꼬나 쥔 손을 부들부들 떨어대고 있었다. 그 소년들 앞에서 쎄르주 갱스부르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반항적이고 아나키스트적인 그의 행위는 최대한의 똘레랑스로 덮어졌다고 할 수 있는데 물론 그의 예술 재능을 높이 샀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최근의 대학입학 자격시험의 철학시험에 '예술가는 실정법을 무시해도 되는가?'라는 논제가 세 개의 선택문제 중 하나로 출제되었다. 바로 위의 얘기와 관련되는 논제라 할 수 있다. 한국의 고등학생은 물론 대학생에게 이 논제를 주었을 때 어떤 답안이 나올지는 논외로 하고, 이들은 교육과정에서 이미 똘레랑스의 철학적 의미까지 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실정법이 요구하는 세계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세계는 다를 수밖에 없고 당연히 그 사이에 똘레랑스가 자리한다는 것을 묻는 논제였기 때문이다.

   문화ㆍ예술의 발전이 기존의 규범이나 형식에 도전하여 새로운 것을 모색하면서도 균형을 이루어냄으로써 담보된다고 할 때, 똘레랑스의 문화ㆍ예술적 응용이야말로 그 발전의 거름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똘레랑스는 일탈이면 균형이며, 도전이면서 융화이기 때문이다.



p.372

   가령 중등 과정을 통하여 프랑스인들은 볼떼르의 "나는 당신의 견해에 반대한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그 견해를 지킬 수 있도록 끝까지 싸우겠다"라는 말을 공유하게 됩니다. 내가 반대하는 견해를 죽이려고 끝까지 싸우는 게 아니라 그 견해가 지켜질 수 있도록 끝까지 싸우겠다는 볼떼르으 선언은, 내가 반대하는 견해를 죽이려고 앴는 한국 사회, 국가보안법을 계속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왜 그래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합니다. 볼떼르는 이렇게 답합니다. "우리들의 부싯돌은 부딪쳐야 빛이 난다"고. 즉, 서로 다른 견해가 자유롭게 표현되어 부딪칠 때 진리가 스스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견해를, 다르다는 이유로 없애려고 하는 것은 내 견해의 옳음을 밝히기 위해서도 옳지 못한 행위가 된다는 것입니다.

   17세기 인문주의자인 바나주 드 보발(H. Basnage de Bauval)은 "견해의 대립을 통해 이성을 눈뜨게 하지 않으면 인간을 오류오 무지로 몰아가는 자연적 성향이 지체 없이 진리를 이기게 된다"고 말했던바, 이 말이 오늘날 한국 사회의 모습을 설명해주는 것이 아닌지 되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중략)

   이 같은 똘레랑스는 역사의 교훈입니다. 똘레랑스는 극단주의를 외면하며, 비타협보다 양보를, 처벌이나 축출보다 설득과 포용을, 홀로서기보다 연대를 지지하며, 힘의 투쟁보다 대화의 장으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권력의 강제에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합니다.



p.374

   내가 처음에 한국 사회를 '정'의 사회라고들 한다고 했습니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그 정이 지나쳐서일까요? 참견을 잘하고 강요하는 사회인 것도 같습니다. 나와 다른 남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똑같이 되기를 요구합니다. 나와 똑같은 이념을 갖기를 강요하며 나와 똑같은 신앙을 갖기를 강권합니다. 그리하여 그 요구에 순응하면 한편이 되고 또 이른바 '정'을 주기도 하지만 따라오지 않으면 바로 적대관계로 돌변합니다. 이 같은 강요의 논리가 권력 수단과 함께 펼쳐질 때 어떤 결과를 낳는지 우리는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한국 현대사의 비극은 모두 여기에서 비롯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한편 이것도 '정'이 지나쳐서일까요? 권력의 남용과 비리를 오히려 잘 용납하고 또 잘 잊는 사회이기도 합니다.



p.375

   이제 내 말은 다 끝났습니다. 내 말을 끝까지 들어주어 정말 고맙습니다. 차 한전 더 하시겠어요? 아, 그렇군요. 시간이 많이 늦어졌군요. 네?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 똘레랑스 얘기가 친프랑스적인 얘기였다구요? 사대주의라구요? 아, 내 얘기가 그렇게 들리셨습니까? 그럼 할 수 없군요. 똘레랑스에 대하여 다시 말씀드려야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아직 똘레랑스를 이해하지 못하셨기 때문입니다. 아시겠어요? 그리고 나는 친프랑스적이거나 프랑스에 사대하여 프로피뙤르가 될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또 그런 위치에 있지도 않습니다. 그럼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똘레랑스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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