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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서재 Part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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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컹리 Jul 09. 2019

달과 6펜스

#116 서미싯 몸 [달과 6펜스]


01.

   <달과 6펜스>를 처음 접한 건 중학생 때였다. 학원을 가려고 집 밖을 나왔는데, 동네 벤치에 이 책이 놓여있었다. 누가 버리고 간지, 깜빡 잊고 두고 간지는 나는 아직도 모른다. 내가 이번에 읽은 책은 좁고 기다란 민음사 책이었지만, 벤치 위에 있던 책은 두꺼운 양장본이었다. 그때는 중학생 시절이었으니 양장본은 내 수준을 넘어서는 월등한 무언가였다. 심지어 그때는 독서에 관심도 없었다. 책을 읽고 싶은 마음보다는 꽁으로 얻었다는 생각으로 집에 챙겨 왔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어디 간지는 나는 아직도 모른다. 우연히 길에서 운명처럼 만났지만 그 연을 이어가지는 못하였다.


02. 

   달과 6펜스에 대해서 다시 눈길이 간 건 어머니와의 대화 도중이었다. 이 책이 폴 고갱을 모델로 쓴 소설이라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미대 출신이시다)


03.

   제목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일단은 '펜스'가 화폐의 단위인지 몰랐다. 그리고는 펜스가 화폐의 단위이니 '달과 6펜스'에서 '달'은 달러일 것이라 유추하였다. 원제는 The Moon and Sixpense이다.    


04. 

   한 예술가에 대한 이야기. 나레이터가 찰스 스트릭랜드에 대해 기술함으로써 이야기는 시작된다. 나레이터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묘사하니 책의 내용은 다른 대개의 세계문학보다는 부담스럽지 않았다. (그리고 분량이 긴 편도 아니다.)


05.

   p.73에서 '나'가 찰스 스트릭랜드에 대한 소식을 전하기 전에 고뇌하는 장면이 있다. 그 고뇌할 때의 감정과 고민에 대한 전개가 2페이지 이상 이어진다. 여러 장르 중 소설에서만 감상할 수 있는 부분이지 않을까? (우리는 평소에 순간의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에 대해 3줄 이상 글이나 말로 표현하기도 쉽지 않다.)







p.7

   솔직히 말해서 찰스 스트릭랜드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에게서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을 조금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그의 위대성을 부인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위대성이라 해서 때를 잘 만난 정치가나 성공한 군인을 수식하는, 그런 위대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위대성은 그 사람의 지위에서 나오는 어떤 것이지 사람 자체가 가지는 특질이라고는 할 수 없다. 상황이 변하면 위대성에 대한 평가도 사뭇 달라지게 마련이다. 수상도 그 직을 떠나면 고작 잘난 척하는 말 재주꾼이었던 게 아닌가 여겨질 대가 많고, 장군도 부하를 잃으면 저잣거리의 보잘것없는 얘기 주인공으로 떨어지고 만다. 거기에 비하면 찰스 스트릭랜드의 위대성은 진짜였다. 그의 예술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는 있다. 하지만 아무튼 그의 예술이 우리의 관심을 끈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사람의 정신을 어지럽히고 매혹시킨다. 그를 비웃음의 대상으로 삼았던 때는 지나갔다. 이제 그를 변호한다고 해서 괴짜로 취급당하거나 그를 찬양한다고 해서 편벽한 사람으로 취급당하지 않는다. 그의 결점은 장점을 보완하는 데 필요한 것이었음을 이제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하기야 예술가로서의 그의 위치에 대해서는 지금도 얼마든지 논의가 가능하다. 사실 그를 찬양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헐뜯는 사람들의 혹평만큼이나 변덕이 심하다. 다만 한 가지 의심할 수 없는 점은 그가 천재였다는 사실이다. 나의 의견으로는, 예술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예술가의 개성이 아닐까 한다. 개성이 특이하다면 나는 천 가지 결점도 기꺼이 다 용서해 주고 싶다. 나는 벨라스케스를 엘 그레코보다 훌륭한 화가로 보지만 그는 너무 인습적이어서 칭찬하려면 맥이 빠진다. 그에 비해 관능적이고 비극적인 저 그리스인은 제 영혼의 비밀을 마치 산 제물을 바치듯 우리에게 바치고 있다. 화가이든 시인이든 음악가이든, 예술가는 숭엄하고 아름다운 자신의 장식물로써 우리의 심미감을 만족시켜 준다. 하지만 심미감이란 성 본능과 비슷해서 일종의 야만성을 띠게 마련이다. 예술가는 그러한 점에서도 대단한 재능을 보여준다. 예술가의 비밀을 캐다 보면 우리는 탐정 소설에 빠지듯 그 일에 빠지고 만다. 그 비밀은 불가해한 우주처럼, 해답을 주지 않는 수수께끼 같다. 스트릭랜드의 그림은, 가장 대수롭지 않은 것조차 기이하고, 복잡하고, 고뇌에 가득 찬 개성을 보여준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그의 그림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그 그림들에 전혀 무관심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그의 인생과 성격에 대한 강한 궁금증을 불러일으켜 온 것도 바로 그 개성이었다.


p.36

   한쪽은 예쁜 아가씨로 자라 장차 건강한 아이들의 어머니가 될 것이다. 한쪽은 잘생기고 사내다운 남자로 자라 틀림없이 군인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는 풍족한 가운데 품위 있게 은퇴하여 자식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행복하고 보람 있는 생활을 마음껏 누리다가 무덤에 묻힐 것이다.

   하기야 수많은 부부들이 다 이런 식으로 산다. 이런 유형의 삶의 방식에는 소박한 아름다움이 있다. 이런 삶은, 잔잔한 시냇물이 푸른 초원의 아름다운 나무 그늘 밑으로 굽이굽이 흘러가 이윽고 드넓은 바다로 흘러드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그 바다는 너무 평온하고, 너무 조용하고, 너무 초연하여 불현듯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불러일으킨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그런 삶에 어딘가 문제가 있다고 느꼈던 것은 그 무렵에도 강했던 내 타고난 기벽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그런 삶이 갖는 사회적 가치를 인정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잘 정돈된 행복이 있었다. 하지만 내 혈기는 좀더 거친 삶의 방식을 원했다. 그처럼 쉽게 얻을 수 있는 기쁨에는 무엇인가 경계해야 할 점이 있는 것 같았다. 내 마음속에는 더 모험적으로 살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변화를, 그리고 미지의 세계가 주는 흥분을 체험할 수만 있다면 험한 암초와 무서운 여울도 헤쳐나갈 각오가 되어 있었다.



p.44

   그녀는 자리에 앉았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와는 관계없는 문제를 두고 이런저런 말을 한다는 게 여간 어색하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나는 여자들이 빠지기 쉬운 잘못, 그러니까 들어주는 사람만 있으면 누구하고나 자신의 사생활을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을 알지 못했다. 스트릭랜드 부인은 그런 기분을 애써 자제하는 것 같았다.



p.53

   「이혼은 절대 안 해요」부인은 갑자기 거칠게 대답했다. 「그이에게 그렇게 전해 주세요. 그 여자와는 절대로 결혼 못 할 거라고요. 제 고집도 그이 못지않아요. 이혼은 절대로 안 할 거예요. 아이들 생각도 해야죠」

   지금 생각해 보면 그녀는 자신의 태도를 내게 분명히 하기 위해 마지막 말을 덧붙였던 것 같다. 하지만 그때 나는 그녀가 어머니로서의 걱정보다는 어쩔 수 없는 질투심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고 생각했다.

   「아직도 그 분을 사랑하십니까?」

   「글쎄요. 모르겠어요. 아무튼 돌아오길 바라요. 돌아오면 지난 일로 그냥 묻어두겠어요. 따지고 보면 우린 십칠 년이나 같이 살았잖아요. 저도 마음이 좁은 여자는 아녜요. 제가 이 일을 몰랐더라면 그이가 무슨 짓을 하든 마음에 두지 않았을 거예요. 지금은 그이가 정신을 못 차리고 빠져 있지만 오래가지 않으리라는 건 본인도 알고 있을 거예요. 그러니 그이가 돌아오기만 하면 만사가 순조롭게 해결될 것이고, 그러면 아무도 이 일을 모를 거예요」

   나는 스트릭랜드 부인이 소문에 신경을 쓰는 것을 보고 약간 언짢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만 해도 세상의 평판이 여자들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몰랐기 때문이다. 세상 평판은 여성의 가장 내밀한 감정에도 위선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법이다.



p.69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지 않소. 그리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단 말이요.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가 문제겠소? 우선 헤어나오는 게 중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빠져 죽어요.」

   그의 목소리에는 진실한 열정이 담겨 있었다. 나도 모르게 감명을 받았다. 그의 마음속에서 들끓고 있는 어떤 격렬한 힘이 내게도 전해 오는 것 같았다. 매우 강렬하고 압도적인 어떤 힘이, 말하자면 저항을 무력하게 하면서 꼼짝할 수 없도록 그를 사로잡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이지 그는 악마에게라도 사로잡혀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천연덕스러웠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나의 눈길을 받고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이라면 낡은 노퍽 재킷 차림에 허름한 중절모를 쓰고 앉아 있는 그를 어떻게 볼까 궁금했다. 바지는 헐렁하고 손은 더러웠다. 수염을 깎지 않아 더부룩한 붉은 턱, 작은 눈, 커다랗고 공격적인 코, 이것들이 다 투박하고 상스럽기만 하다. 입은 큼지막하고 입술을 두텁고 육감적이었다. 정말이지, 참으로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p.73

   부인에게 해야 할 말도 정리해 보았으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부인이 불만스러워할 것이 뻔했다. 우선 나 자신부터도 불만스러웠으니까. 스트릭랜드는 나를 혼란에 빠뜨리고 말았다. 그의 동기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맨 처음 어떻게 해서 화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니면 대답하기를 꺼렸다고 해야 할까. 그러니 뭘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나는 어떤 막연한 반항심이 그의 느린 정신 속에서 서서히 자라다가 마침내 막바지 상태까지 다다랐던 게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해 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그동안 자신의 단조로운 삶에 한 번도 초조감을 내보인 적이 없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이상 그런 생각도 의심스러웠다. 그가 권태를 견디지 못한 나머지 그 지겨운 인간 관계를 모두 끊어버리려고 화가가 되고자 결심했다면 이해할 만했을 것이다. 그런 일이야 흔히 있는 법이니까. 하지만 내 느낌으로 그의 경우는 그런 흔히 빠진 경우가 아니었다. 마침내 나는, 내 낭만적인 기질을 발동시켜 한 가지 설명을 짜맞추어 냈다. 좀 억지이긴 했지만 어쨌든 마음에 드는 유일한 설명이었다. 그건 이렇다. 그의 영혼 깊숙한 곳에 어떤 창조의 본능같은 것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 창조 본능은 그 동안 삶의 여러 정황 때문에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마치 암이 생체 조직 속에서 자라듯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나서 마침내 존재 모두를 정복하여 급기야는 어쩔 수 없는 행동으로까지 몰아간 것이 아니었을까. 뻐꾸기는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는데 새끼가 부화하면 다른 새의 새끼들을 둥지에서 밀어내고 마침내는 그들을 보호해 준 둥지마저 부수어버린다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창조 본능이 하필이면 이 우둔한 증권 중개인을 사로잡아 파멸시키고, 그를 의지해 사는 사람들마저 불행에 빠뜨린다는 건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하기야 권력 있고 부유한 인간들의 혼을 끈질기게 쫓아다니다 마침내 그들을 성령으로 굴복시켜 사로잡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세상의 안락과 여인의 사랑을 버리고 수도원의 고통스러운 금욕적 삶을 선택하게 만드는 신의 뜻보다야 더 기묘할 건 없다. 삶의 전환은 여러 모양을 취할 수 있고, 여러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이 성난 격류로 돌을 산산조각내는 대격변처럼 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또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이 마치 방울방울 끊임없이 떨어지는 물방울에 돌이 닳듯이 천천히 올 수도 있다. 스트릭랜드의 경우는 그 전환이 광신자에게처럼 단숨에, 사도들에게처럼 광포하게 왔다고나 할까.



p.76

   「아무래도 이런 격언을 믿지 않으시는군요. <그대의 모든 행동이 보편적인 법칙에 맞을 수 있도록 행동하라>는 격언 말입니다」

   「들어본 적도 없거니와 돼먹지 않은 헛소리요」

   「칸트가 한 말인데요」

   「누가 말했든, 헛소리는 헛소리요」

   이런 인간을 상대로 양심에 호소해 보았자 효과가 있겠는가.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찾는 격이었다. 나는, 양심이란 인간공동체가 자기 보존을 위해 진화시켜 온 규칙을 개인 안에서 지키는 마음속의 파수꾼이라고 본다. 양심은 우리가 공동체의 법을 깨뜨리지 않도록 감시하는,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있는 경찰관이다. 그것은 자아의 성채 한가운데 숨어 있는 스파이이다. 남의 칭찬을 바라는 마음이 너무 간절하고, 남의 비난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너무 강하여 우리는 스스로 적을 문 안에 들여놓은 셈이다. 적은 자신의 주인인 사회의 이익을 위해 우리 안에서 잠들지 않고 늘 감시하고 있다가, 우리에게 집단을 이탈하려는 욕망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냉큼 달려들어 분쇄해 버리고 만다. 양심은 사회의 이익을 개인의 이익보다 앞에 두라고 강요한다. 그것이야말로 개인을 전체 집단에 묶어두는 단단한 사슬이 된다. 그리하여 인간은 스스로 제 이익보다 더 중요하다고 받아들인 집단의 이익을 따르게 됨으로써, 주인에게 매인 노예가 되는 것이다. 그러고는 그를 높은 자리에 앉히고, 급기야는 왕이 매로 어깨를 때릴 때마다 아양을 떠는 신하처럼 자신의 민감한 양심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리고 양심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온갖 독설을 퍼붓는다. 왜냐하면 사회의 일원이 된 사람은 그런 사람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음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스트릭랜드가 자신의 행위가 불러일으킬 비난에 정말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나는 그 무서운 사람을 피해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마치 인간이랄 수 없는 괴물의 모습에 공포를 느끼고 뒷걸음 치듯.



p.83

   「하지만 전 그이가 돌아오는 거 바라지 않아요」

   「에이미!」

   알고 보니 스트릭랜드 부인은 분노에 가득 차 있었다. 얼굴이 백짓장처럼 창백해진 것도 느닷없이 치솟는 싸늘한 노여움 때문이었다. 그녀는 약간 숨가빠하면서 빠르게 말했다.

   「여자에게 넋이 빠져 같이 달아났다면 용서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럴 수도 있으려니 하고 생각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다면 사실 책망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꾐에 넘어가 한눈을 팔았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남자란 원래 심지가 약하고, 여자는 워낙 뻔뻔하니 말예요. 하지만 이건 달라요. 난 그이가 미워졌어요.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어요」

   맥앤드루 대령 내외는 한꺼번에 그녀를 나무랐다. 그들은 기가 막힐 정도로 놀랐던 것이다. 그녀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했다. 이해할 수가 없다고도 했다. 스트릭랜드 부인은 절망적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당신도 모르시겠나요?」 그녀가 소리쳤다.

   「글쎄요. 부인 말씀은 그러니까, 그분이 여자 때문에 부인을 떠났다면 용서할 수 있지만 딴 생각이 있어 부인을 떠났다면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인가요? 앞의 경우라면 어떻게 해보겠는데, 나중의 경우라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는 것이죠?」

   스트릭랜드 부인은 나를 쳐다보았지만 ─별로 친근한 눈빛이 아니었다─ 그 말에 대답하지는 않았다. 내 말이 정곡이 찔렀던 모양이다.

   「전에는 내가 이렇게까지 누구를 미워하게 될 줄 몰랐어요. 아세요? 그동안 전 말이죠.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그이가 결국은 돌아오겠거니 하고 생각하며 마음을 달랬어요. 그이가 죽어가면서 나를 부르러 보내면 당장 달려가리라고 생각했죠. 그러고는 어머니처럼 간호해 주고, 마지막 순간에는 이렇게 말해 주리라고 생각했어요. 괜찮아요, 전 늘 당신을 사랑했어요, 다 용서하겠어요, 하고 말예요」

   여자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가는 자리에서 아름답게 행동하고 싶어하는 강렬한 욕망을 가지고 있는데 그런 욕망을 볼 때마다 나는 좀 황당한 생각이 들었다. 때로 여자들은 그 멋진 장면을 보여줄 기회를 갖지 못할까 봐 남자의 장수를 오히려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 같기도 하다.



p.90

   스트릭랜드 부인의 배타적인 사류 의식에 나는 얼마간 흥이 가시고 말았다.

   「바깥분 소식은 혹 들으셨나요?」

   「아뇨. 한 마디도 듣지 못했어요. 죽었는지도 모르죠」

   「제가 파리에 가면 만날지도 모르겠군요. 소식 들으면 알려드릴까요?」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그이 형편이 정말 어렵다면 저도 좀 도울 생각이 있어요. 제가 얼마간 선생님께 돈을 보내드리면 그이가 필요할 때마다 조금씩 전해 주셔도 되겠죠」

   「참 너그러우시군요」

   하지만 나는 그 제의가 친절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고통을 겪으면 인품이 고결해진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행복이 때로 사람을 고결하게 만드는 수는 있으나 고통은 대체로 사람을 좀스럽게 만들고 앙심을 품게 만들 뿐이다.



p.102

   「부인께서는 어떻게 보셨나요?」 나는 웃으면서 물어보았다.

   「망측했어요」

   「아냐, 여보! 당신은 몰라」

   「뭘요. 네덜란드 손님들도 당신에게 잔뜩 성을 냈잖아요. 당신이 자기들을 놀린다고 생각했다고요」

   더크 스트로브는 안경을 벗어들고 안경알을 닦았다. 상기된 얼굴이 흥분으로 빛나고 있었다.

   「당신 생각은 왜 그래?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아름다움이 해변가 조약돌처럼 그냥 벌려져 있다고 생각해? 무심한 행인이 아무 생각 없이 주워 갈 수 있도록? 아름다움이란 예술가가 온갖 영혼의 고통을 겪어가면서 이 세상의 혼돈에서 만들어내는, 경이롭고 신비한 것이야. 그리고 또 그 아름다움을 만들어냈다고 해서 아무나 그것을 알아보는 것은 아냐. 그것을 알아보자면 예술가가 겪은 과정을 똑같이 겪어보아야 해요. 예술가가 들려주는 건 하나의 멜로디인데, 그것을 우리 가슴속에서 다시 들을 수 있으려면 지식과 감수성과 상상력을 가지고 있어야 해」





p.156

나는 블란치 스트로브가 스트릭랜드를 격렬하게 싫어했던 이유는 처음부터 자기도 모르게 그에게 성적으로 끌리는 데가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기야 나 같은 사람이 그 불가해하게 얽히고설킨 성의 문제를 어찌 풀 수 있으랴. 하여간 스트로브의 열정은 그녀의 그런 본성을 만족시켜주지 못했는지 모른다. 그녀가 스트릭랜드를 싫어했던 것은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힘이 그에게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남편이 스트릭랜드를 데려오겠다는 것을 격렬히 반대했을 때만 해도 아마 그것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왠지 그가 무서웠던 것이다. 그녀가 이 일의 결과가 불행하리라는 것을 미리 내다보고 있었다는 생각이 난다. 방식은 기이하지만 어쨌든 그녀가 스트릭랜드에게 가졌던 공포감은 , 스트릭랜드가 아주 기묘한 방식으로 그녀를 어지럽혔기 때문에 느꼈던 두려움을 상대방에게 전이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스트릭랜드는 거치고 투박하게 생겼다. 눈의 표정은 초연하고 입은 육감적이며, 몸집을 크고 건장했다. 그는 야성적인 열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그녀도 아마 나처럼 그에게서, 물질이 대지와 맺었던 처음의 관계를 잃지 않고 그 자체의 혼을 아직 지나고 있던 때, 그러니까 역사 초창기의 야성적 존재를 연상시키는 어떤 사악한 요소를 그에게서 느꼈는지 모른다. 그가 그녀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다면,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그를 사랑하거나 증오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그를 증오했다.


p.157

그녀는 그가 무슨 꿈을 꿀까 궁금했다. 사티로스의 열띤 추적에 쫓겨 그리스의 숲을 달아나는 요정의 꿈을 꾹 ㅗ있는 것일까? 요정은 죽을힘을 다해 날렵하게 달아나건만 사티로스는 한 걸음 한 걸음씩 가까이 뒤쫓아와, 급기야 요정은 그의 뜨거운 입김이 목덜미에 훅 끼쳐옴을 느낀다. 하지만 요정은 한사코 말없이 달아나고 사티로스는 말없이 쫓아오는데, 그처럼 쫓고 쫓기다 요정은 마침내 붙잡히고 만다. 그때 요정의 심장이 그처럼 거세게 뛰었던 것은 공포감 때문이었을까 황홀감 때문이었을까?

   블란치 스트로브는 무자비한 정욕의 손아귀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스트릭랜드를 미워하는 감정은 아마 여전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강렬하게 원했다. 지금까지의 생활이 죄다 허망하게만 여겨졌다. 지금까지 그녀는 다정하면서도 성마르고, 생각이 깊으면서도 분별이 없던 복잡한 여자였지만 이제는 딴사람이 되어 버렸다. 바커스 신의 무녀가 되어버린 것이다. 욕망 덩어리가 되어버렸다.

   

p.157

   그야 인간이라는 예측불능의 존재를 두고 얘기할 때는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긴 하나, 어쨌든 블란치 스트로브의 행동에 대해서는 그럴싸한 설명이 가능했다. 하지만 스트릭랜드의 경우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내각 생각했던 인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했기 때문에 도무지 납득이 안 되었다. 친구의 신뢰를 비정하게 저버린 행위는 이상할 것이 없다. 남의 불행이야 어찌 됐든 제 기분만 만족된다면 무슨 일이든 서슴지 않는 것, 그것은 그라는 인간에게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그렇게 생겨먹은 사람이었다. 고마움이라고는 전혀 몰랐고 동정심도 없었다. 보통 사람이면 으레 갖기 마련인 감정들도 그에게는 없었다. 그에게 왜 그런 감정이 없느냐고 탓한다면 우스운 일이 되고 만다. 야수더러 왜 그렇게 사납고 잔혹하냐고 탓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게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바로 그 변덕이다.

   나는 스트릭랜드가 블란치 스트로브와 사랑에 빠졌다고는 믿을 수 없었다. 그에게 왜 그런 감정이 없느냐고 탓한다면 우스운 일이 되고 만다. 야수더러 왜 그렇게 사납고 잔혹하냐고 탓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게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바로 그 변덕이다.

   나는 스트릭랜드가 블란치 스트로브와 사랑에 빠졌다고는 믿을 수 없었다. 도대체 그가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사랑의 감정에는 다정함이란 요소가 있게 마련 아닌가. 하지만 스트릭랜드에게는 자신이든 남이든, 도대체 다정하게 대한다는 게 없었다. 사랑에는 또한 약한 것을 알아차리는 마음, 보호해 주고 싶은 마음, 잘해 주고 싶고 기쁨을 주고 싶은 마음이 있게 마련이다. 말하자면, 이기심을 다 떨쳐버리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그걸 몹시 숨기고 싶은 마음이 들어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어떤 겸양이 존재한다. 스트릭랜드에게서는 그런 성향을 상상할 수 없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제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머리로는 알지 모르나─ 자기의 사랑이 끝날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 환상임을 알지만 사랑은 환상에 구체성을 부여해 준다. 사랑하는 이는 사랑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면서도 사랑을 현실보다 더 사랑한다. 사랑은 사람을 실제보다 약간 더 훌륭한 존재로, 동시에 약간 열등한 존재로 만들어준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이미 자기가 아니다. 더 이상 한 개인이 아니고 하나의 사물, 말하자면 자기 자아에게는 낯선, 어떤 목적의 도구가 되고 만다. 사랑에 감상이 전혀 배제된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스트릭랜드는 어느 누구보다 그런 약점에 빠질 위인이 아니었다. 사랑이란 무엇에 사로잡혀 꼼짝 못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는데 그가 그런 상태를 견뎌낼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그는 그런 외부의 낯선 속박을 견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끊임없이 마지의 어떤 것으로 몰아가는 그 불가해한 갈망을 방해하는 것이 혹시 자기 안에 들어와 있다면, 어떠한 괴로움이 있다 하더라도, 그러니까 결국은 만신창이가 되고 피투성이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 방해물을 가슴 속에서 뿌리째 뽑아낼 수 있는 인간 같았다. 내가 스트릭랜드에게서 받은 그 복잡한 인상을 이제까지 조금이라도 성공적으로 설명했다면, 내게는 그가 사랑하기에는 너무 위대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너무 부족한 사람처럼 느껴졌다고 말한다 해도 터무니없는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애정에 대한 개념이란 개성에 따라 형성되기 마련이라 사람마다 다르지 않을까 한다. 스트릭랜드 같은 사람에게도 자기 나름의 사랑법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의 감정을 분석해보려 하였으나 쓸데없는 일이었다.

   

p.182

   멍들고 상처받은 그의 마음은 다시 다정한 어머니의 사랑을 찾고 있었다. 만사를 쾌활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었던 그의 탄력성은, 여러 해 동안 사람들의 놀림을 견뎌오느라 기력을 잃고 비틀거리다 마침내 블란치의 배신이라는 마지막 일격에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이제 자기를 비웃는 사람들과 함께 웃어댈 수 없었다. 이제 홀로 버림받은 몸이 되어버렸다. 


p.201

나의 상념은 스트릭랜드의 말로 중단되고 말았다. 그는 참으로 냉소적인 말로 나를 놀라게 했다.

   「여자는 마링오. 자기에게 해를 입힌 사람은 용서하지. 하지만 자기를 위해 희생한 사람은 용서하지 못해」

   「당신은 여자를 만나 한을 품게 할 만한 모험은 하지 않을테니 그 점은 안심이 되겠군요」나는 대꾸했다.

   그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스쳤다.

   「당신은 재치 있는 대꾸를 위해서라면 언제든 원칙을 희생하는 사람이군」그가 말했다. (중략)

   「그럴 필요는 없었소. 여자도 알고 있었으니까. 난 한마디도 안 했소. 그 여자는 잔뜩 겁을 집어먹고 있었고. 결국 여자를 가져버렸지」

   그런 식으로 말하면서 그는 특이한 방식으로 자신의 격렬한 욕망을 암시했던 것일까. 내게는  혼란스럽고 끔찍스럽기까지한 일이었다. 이상하게도 그의 삶은 물질적인 것들과 단절되어 있었다. 그래서 때로 육체가 정신에 무서운 복수를 하는 모양이었다. 자기 안에 들어 있는 사티로스가 갑자기 그를 사로잡으면 그는 자연의 모든 원시적인 힘을 가진 본능의 손아귀에 잡혀 무력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 강박적인 상태가 너무 완전하여 그의 정신에 신중함이라든가 고마움이라든가 하는 마음이 깃들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그 여자를 왜 데려가고 싶어했지요?」내가 물었다.

   「그게 아니오」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여자가 날 따라오겠다고 했을 때 실은 나도 스트로브만큼 놀랐으니까. 난 여자에게 이렇게 말했지. 내가 나중에 싫증이 나면 그땐 당신이 떠나줘야 할 거라고. 그래도 괜찮다고 하더군」 여기에서 그는 잠깐 말을 멈추었다. 「그 여자는 몸이 아주 근사했소. 그래서 난 그 여자 누드를 그리고 싶었지. 그런데 다 그리고 나니까 여자에게 흥미가 없어지더군」

   「그래도 그 여자는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했죠」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비좁은 방안을 이리저리 거닐었다.

   「난 사랑 같은 건 원치 않아. 그럴 시간이 없소. 그건 약점이지. 나도 남자니까 때론 여자가 필요해요. 하지만 욕구가 해소되면 곧 딴 일이 많아. 난 그 욕망을 이겨내지는 못하지만 그걸 좋아하진 않아요. 그게 내 정신을 구속하니까 말야. 나는 언젠가 모든 욕정에서 벗어나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내 일에 온 마음을 쏟을 수 있는 때가 있었으면 하오. 여자들이란 사랑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으니까 사랑을 터무니없이 중요하게 생각하단 말야. 그래서 우리더러 그게 인생의 전부인 양 믿게 하고 싶어해요. 하지만 그건 하찮은 부분이야. 나도 관능은 알지. 그건 정상적이고 건강해요. 하지만 사랑은 병이야. 내게 여자들이란 쾌락을 충족시키는 수단에 지나지 않아. 나는 여자들이 인생의 내조자니, 동반자니, 반려자니 하는 식으로 우기는 것을 보면 참을 수가 없소」

   스트릭랜드가 한번에 그처럼 말을 많이 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분노에 찬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여기서든 어디서든 내가 그의 말을 정확히 옮겨놓을 자신은 없다. 그는 어휘가 빈약한데다 문장 구성력도 없어, 듣는 사람은 그가 내뱉는 감탄사, 얼굴 표정, 제스처, 상투적인 어구 등을 조합하여 그가 말하려는 바를 짐작해내야 한다. (중략)

   「여자는 사랑을 하게 되면 상대의 정신을 소유하기 전까지는 만족할 줄 몰라. 약해서 지배욕이 강하지. 지배하지 않고서는 만족하지 못해. 여자는 마음이 좁아요. 그래서 자기가 모르는 추상적인  것에는 화를 내는 버릇이 있어. 마음을 쓰는 건 물질적인 것뿐이야. 관념적인 것은 시기나 하고. 남자의 정신은 우주의 저 머나먼 곳에서 방황하는데 여자는 그걸 자기 가계부 안에다 가둬두려고 하는 거요. 내 아내 생각나오? 블란치도 차츰 발휘해서 나를 함정에 몰아넣고 올가미를 씌울 작정을 하고 있었어. 나를 자기 수준으로 끌어내리고 싶었던 거지. 나 자신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었어. 내가 자기 것이 되어주기만 바랐지. 하기야 나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하려고 했어요. 내가 원하는 것 한 가지만 빼놓고 말이오. 난 혼자 있기를 바랐거든」

   나는 잠시 묵묵히 있었다.



p.205

   스트릭랜드는 모자를 찾아들고 나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안 갈 거요?」

   「왜 자꾸 나를 가까이 하려고 하시죠?」 내가 물었다. 「내가 댁을 싫어하고 경멸하는 줄 아시잖아요」

   그는 너그러운 태도로 히죽 웃었다.

   「당신이 아무리 날 욕해도 말이지. 또 당신이 날 어떻게 생각하든 난 한푼어치도 신경쓰지 않아」

   나는 갑자기 분노가 치밀면서 볼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의 냉담한 이기주의가 남을 얼마나 격분시킬 수 있는지를 그에게 도저히 이해시킬 수 없었다. 나는 철갑 같은 그의 철저한 무관심을 깨뜨려버리고 싶었다. 하기야 따지고 보면 그의 말에도 일리가 있음을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상대방에 대한 나의 의견을 상대방이 얼마나 존중해 주느냐에 따라 상대방에게 미치는 나의 힘을 측정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은 싫어한다. 그처럼 사람의 자존심에 아픈 상처를 주는 것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기분이 상했다는 기색을 조금도 내보이고 싶지 않았다.

   「남을 완전히 무시해 버린다는 일이 가능할까요?」 나는 그에게라기보다 나 자신에게 물었다. 「당신은 살아가면서 필요한 모든 일을 남에게 의지하고 있어요. 혼자 힘으로, 홀로 살아가려고 하는 건 가당치 않는 일이에요. 이제 얼마 있으면 병들고 지치고 늙겠죠. 그러면 사람들 모여 사는 곳을 엉금엉금 찾아오게 됩니다. 그때 가서 마음속에 안락과 동정을 구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부끄럽지 않겠어요? 당신은 지금 불가능한 일을 하려는 거예요. 머잖아 당신 안에 있는 인간적인 요소가 함께 얽혀 살는 삶을 갈망하게 될 거란 말입니다」

   「자, 가서 내 그림 구경이나 합시다」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내가 왜? 그게 왜 중요하단 말인가?」

   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눈에 비웃음을 담고 내 앞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순간 나는 언뜻 본 것이 있었다. 육체와 결부된 존재로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위대한 무엇인가를 향해 뜨겁게 타오르는, 고뇌하는 영혼이 그것이었다. 나는 표현할 수 없는 뭔가를 추구하는 혼을 언뜻 보았던 것이다. 나는 내 앞에 서 있는 이 사내, 남루한 옷차림에 코는 커다랗고 눈은 번쩍이며 수염은 붉고 머리칼은 더부룩한 사내를 바라보았다. 이건 겉껍질에 지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육체를 벗어난 하나의 혼과 대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좋아요, 가서 당신 그림이나 구경하죠」 내가 말했다.



p.212

   결국 내가 받은 인상이란 정신의 어떤 상태를 표현하고자 하는 거대한 안간힘이 거기에 있었다는 점이었다. 나를 그처럼 당황하게 만든 원인도 바로 그러한 면에 있는 것 같았다. 스트릭랜드에게는 색채와 형태들이 어떤 특유한 의미가 있음이 분명했다. 그는 자기가 느낀 어떤 것을 전달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었고, 오직 그것을 전달해야겠다는 생각만을 가지고 그림들을 그려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찾는 미지의 그것에 좀 더 가까이 가기 위해 망설임 없이 대상을 단순화하고 뒤틀었다. 사실이란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자기와는 관계없는 무수한 사실들 사이에서 그는 자신에게 의미 있는 것만을 찾았다. 우주의 혼을 발견하고 그것을 표현해 내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 그림들에 혼란과 당혹감을 느꼈지만 한편으로 너무나 뚜렷이 드러나 있는 정서에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왠지 모르게 나는 스트릭랜드에게 꿈에도 기대하지 않았던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억누를 수 없는 어떤 공감이었다.

   「당신이 왜 블란치 스트로브에게 가졌던 감정에 굴복했는지 이제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내가 말했다.

   「왜지?」

   「용기가 꺾였던 것 같아요. 육체가 허약해지자 정신까지 허약해졌던 거지요. 당신을 사로잡고 있는 그 한없는 갈망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어요. 어쨌든 단신은 자신을 괴롭히는 정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어딘가를 향해 위험하고 고독한 모색의 길을 나서지 않을 수 없었던 겁니다. 당신은 존재하지도 않는 신전을 찾아나선 영원한 순례자 같아 보여요. 당신이 어떤 불가사의한 열반을 찾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당신은 알고 있습니까? 진리와 자유를 찾고 있는지도 모르죠. 그런데 한순간 사랑에서 해방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지친 영혼이 여자의 팔 안에서 휴식을 찾으려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거기에도 휴식이 없음을 깨닫고 여자를 미워한 거죠. 여자에게는 연민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자신에게도 연민을 느끼지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두려움 때문에 여자를 죽였어요. 위험에서 간신히 빠져나오긴 했지만 아직 두려움을 떨쳐버리지 못했으니까 말입니다」

   그는 무표정한 미소를 지으며 수염을 쓸어내렸다.

   「당신은 못 말리는 감상주의자로군. 가엾은 친구」

   일 주일 두 나는 우연히 스트릭랜드가 마르세유로 떠났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 뒤로 나는 다시 그를 보지 못했다.



p.258

   「그런데 이상한 건 말야. 이게 순전히 한 가지 행운 덕분이었다는 점이야」

   「그게 말이지. 자네 아브라함 생각나나? 장래가 유망했던 그 친구 말일세. 학생 시절에 나는 무슨 일에서나 번번이 그 친구에게 졌지. 나하고 같이 경쟁이 붙은 상이나 장학금은 모조리 그 친구가 차지했네. 나는 늘 그 친구 뒷전에서 북이나 친 셈이었어. 그 친구가 병원에 그냥 눌러 있었더라면 아마 지금 내 자리에는 그 친구가 앉아 있을 걸세. 그 친구, 외과에는 천재였으니까. 그 친구하고 붙으면 아무도 승산이 없었지. 그 친구가 성토머스 병원의 서무 의사 발령을 받았을 때, 나로서는 정식 의사 자리가 영 가망이 없었네. 천상 일반 개업의나 할 수밖에 없었지. 자네도 알잖나. 일반 개업의가 되어 일단 그 길에 들어서면 거기에서 빠져 나오기가 얼마나 어렵나. 그런데 마침 아브라함이 도중에 그만두는 바람에 그 자리가 내게 돌아왔단 말이야. 나에게는 그게 기회가 되었지」

   「틀린 말은 아닌 것 같군」

   「운이 좋았던  거지. 아브라함에게는 좀 괴팍스러운 데가 있었던 같아. 그 가엾은 친구, 이제 완전히 천덕꾸러기가 되어버렸지. 알렉산드리아에서 보건국 관리인가 뭔가 하는 하찮은 자리에서 일하고 있다네. 들리는 말로는 지지리도 못나고 늙은 그리스 여자하고 살면서 병치레하는 애들을 대여섯이나 거느리고 있다더군. 그러니 말일세, 머리만 좋다고 되는 게 아닌가 보아. 인격이 중요하지. 아브라함에게는 인격이 없었어」

   인격이 없었다? 다른 길의 삶에서 더욱 강렬한 의미를 발견하고, 반 시간의 숙고 끝에 출세가 보장된 길을 내동댕이치자면 아무래도 적지않은 인격이 필요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 갑작스러운 결정을 후회하지 않으려면 더더욱 큰 인격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알렉 카이클은 생각에 잠기며 말을 이었다.

   「그야 아브라함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척한다면, 그건 물론 나로서는 위선이겠지. 결국 내가 덕을 보았으니까」 그는 피우고 있던 길다란 코로나 담배 연기를 호사스럽게 내뿜었다. 「하지만 내가 덕을 보지만 않았다면 그런 식의 인생 낭비를 아주 안타깝게 생각했을 것이네. 사람이 그렇게 망쳐버린다면 어처구니없는 일 아닌가」

   정말 아브라함이 인생을 망쳐놓고 말았을까? 자기가 바라는 일을 한다는 것, 자기가 좋아하는 조건에서 마음 편히 산다는 것, 그것이 인생을 망치는 일일까? 그리고 연수입 일만 파운드에 예쁜 아내를 얻은 저명한 외과의가 되는 것이 성공인 것일까? 그것은 인생에 부여하는 의미, 사회로부터 받아들이는 요구, 그리고 개인의 권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저마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기사 작위를 가진 사람에게 내가 어찌 감히 말대꾸를 하겠는가.



p.279

   「당연히 그럴 만한 자격이 되십니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요. 내게 무슨 덕이 있어서 지금 아내와 같은 사람을 얻게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이 사람은 내게 늘 완벽한 친구이면서 내조자였고, 완벽한 애인이자 완벽한 어머니였습니다」

   나는 한동안 선장이 내 상상 속에 그려준 그의 생활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모르긴 몰라도 그런 생활을 하면서 그처럼 대단한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면, 두 분 모두가 의지도 강하고 성격도 굳세었어야 했겠군요」

   「그랬겠죠. 하지만 한 가지 요소가 더 없었더라면 우린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했을 겁니다」

   그는 얼마간 극적으로 말을 멈춘 다음, 팔을 앞으로 내뻗으며 말했다.

   「신을 믿는 마음─그게 없었더라면 우리는 실패했을 거예요」



p.293

   그러다가 깜짝 놀랐다. 자기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마법의 세계에 들어선 것만 같았다. 거대한 원시림과 나무들 밑으로 벌거벗은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을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음 순간 그는 사방의 벽에 그림이 그려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길, 내가 더위를 먹었나」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뭔가 희미한 움직임이 있어 돌아보니 아타가 바닥에 누워 조용히 흐느끼고 있었다.

   「아타!」 그가 불렀다. 「아타!」

   그녀는 알아듣지 못했다. 또다시 역겨운 악취가 정신을 아뜩하게 만들어 그는 여송연에 불을 붙였다. 눈이 점차 어둠에 익숙해 갔다. 이제 그는 벽에 그려진 그림들을 찬찬히 바라보면서 온통 야릇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이 그림들엔 이상하게도 그를 감동시키는 무엇이 있었다. 방바닥에서 천정에 이르기까지 사방의 벽이 기이하고 정교하게 구성된 그림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뭐라 형용할 수 없이 기이하고 신비로웠다. 그는 숨이 막혔다. 이해할 수도, 분석할 수도 없는 감정이 그를 가득 채웠다. 창세의 순간을 목격할 때 느낄 법한 기쁨과 외경을 느꼈다고 할까. 무섭고도 관능적이고 열정적인 것, 그러면서 또한 공포스러운 어떤 것, 그를 두렵게 만드는 어떤 것이 거기에 있었다. 그것은 감추어진 자연의 심연을 파헤치고 들어가, 아름답고도 무서운 비밀을 보고 만 사람의 작품이었다. 그것은 사람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신성한 것을 알아버린 이의 작품이었다. 인간 세계의 것이 아니었다. 악마의 마법이 어렴풋이 연상되었다. 그것은 아름답고도 음란했다.

   「맙소사, 이건 천재다」

   이 말이 입에서 절로 튀어나왔다. 그는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몰랐다.

   그러고는 눈길이 한구석에 있던 돗자리 잠자리에 멎었다. 그 쪽으로 가보니 형체가 일그러진 무섭고 소름끼치는 물체가 하나 있었다. 스트릭랜드였다. 그는 죽어 있었다. 닥터 쿠트라는 안간힘을 다해 가까스로 몸을 굽혀 망가져버린 그 끔찍한 몸뚱이를 들여다보았다. 그 순간, 그는 흠칫 놀랐다. 가슴이 공포로 얼어붙는 듯하였다. 누군가 등뒤에 서 있음을 느꼈던 것이다. 아타였다. 그녀가 일어나는 소리를 듣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녀는 의사의 팔꿈치 옆에 서서 그가 보고 있던 것을 함께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이구, 이거 내 정신이 말이 아니군」 그는 말했다. 「하마터면 간 떨어진 뻔했잖아」

   다시, 그는 한때 인간이었던 주검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움찍 물러섰다.

   「아니, 눈이 멀었단 말인가」

   「네, 일 년 가까이 앞을 보지 못했어요」



p.296

   닥터 구트라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빙긋 웃었다.

   「내가 우스워 보일 겁니다. 나는 유물론자예요. 그리고 이렇게 엄청나게 뚱뚱한 사람입니다. 폭스타프처럼 말예요. 서정적인 건 내게 어울리지 않아요. 그래 봐야 나만 우스꽝스러워지는 게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처럼 깊은 감명을 준 그림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어요. 정말입니다. 로마의 시스틴 성당을 구경했을 때와 똑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거기에서도 그 천장화를 그린 화가의 위대성에 경외감을 느꼈죠. 천재의 작품이었어요. 어마어마하고 압도적이었습니다. 나 자신은 좀스럽고 하찮게 느껴지구요. 하지만 미켈란제로를 볼 때는 누구나 위대한 그림을 본다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문명과는 아득히 떨어진 타라바오 산골짜기의 원주민 오두막에 그려진 이 그림들을 보면서, 나는 그것이 주는 엄청난 경이를 대면할 준비가 전혀 없었어요. 또 미켈란젤로는 정상적이고 건강한 사람이기나 했죠. 그의 결작에는 숭엄함이 갖는 평온함이 있다고 할까요. 하지만 이 그림은 아름답긴 하면서도 어딘지 마음을 어지럽히는 게 있었습니다. 그게 무엇이었는지는 모르겠어요. 그 그림을 보니 마음이 불안했습니다. 이런 느낌 있잖습니까. 내가 앉아 있는 바로 옆방이 빈 방임을 알면서도 왠지 그 방에 누가 있을 것 같은 무서운 생각이 드는, 그런 느낌 말입니다. 그러면 흔히 우리는 자기 자신을 탓하죠. 신경이 좀 예민해졌나 봐, 하고. 하지만, 그래도 말예요. 조금 있으면 또다시 엄습해오는 그 공포감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어떤 공포의 손아귀에 붙들려 꼼짝 못하는 거죠. 나도 그랬어요. 솔직히 말해서, 그 이상한 걸작이 죄다 불타버렸다는 소리를 듣고도 서운하지만은 않았습니다」

   「불타버렸다구요?」 나는 소리질렀다.

   「그럼요. 모르셨나요?」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런 그림이 있었다는 것도 몰랐는걸요. 하지만 그게 어떤 개인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나 했습니다만. 스트릭랜드가 무슨 그림을 얼마나 그렸는지 아직도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앞을 못 보기 시작하면서, 그림을 그려놓은 그 두 방에 하루에도 몇 시간이고 앉아 그 그림을 바라보았던가 봐요.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말입니다. 아마 그때 평생 보았던 것보다 더 많은 걸 볼 수 있었나 봅니다. 아타 말로는, 이 사람이 신세를 한탄하거나 낙담하는 모양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답니다. 죽을 때까지도 침착하고 차분했대요. 하지만 아타에게 이런 약속을 시켰다는군요. 자기를 묻을 때─참, 그 이야길 했던가요? 무덤을 내 손으로 직접 팠단 이야길? 글쎄, 문둥이 살던 집이라고 가까이 오려는 토박이들이 있어야죠. 그래 하는 수 없이, 우리둘이, 아타하고 나하고, 같이 묻었죠. 파레오 석 장에 감싸 꿰매어 망고 나무 밑에 묻었습니다─그런데 이런 약속을 시키더래요. 집에 불을 지른 다음 모조리 탈 때까지, 작대기 하나 남지 않을 때까지 떠나지 말라고요」

   나는 생각에 잠겨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고 보면 끝까지 변함없었군요」

   「이해하시겠죠? 다만 이건 말씀드리고 싶군요. 난 아타를 말리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어요」

   「불타버린 게 서운하지 않았다면서요」

   「그렇지만 그건 천재의 작품이었으니까요. 우리에게 무슨 권리가 있어 그걸 이 세상에서 없애버릴 수 있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하지만 아타가 말을 듣지 않더군요. 약속을 했다면서요. 나는 그 야만적인 짓을 차마 보고 있을 수가 없어 그냥 돌아와버렸죠. 나중에야 불을 질렀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마른 마룻바닥이며 판다너스 돗자리에 석유를 쏟아붓고 불을 질렀다더군요. 집은 눈 깜짝할 사이에 타버리고 잿더미만 남더랍니다. 위대한 걸작이 그렇게 히서 사라져버린 거죠」

   「스트릭랜드 본인도 그게 걸작인 줄 알았을 겁니다. 자기가 바랐던 걸 이룬 셈이죠. 자기 삶이 완성된 거예요. 하나의 세계를 창조했고, 그것을 바라보니 마음에 들었어요. 그런 다음 자부심과 함께 경멸감을 느끼면서 그걸 파괴해 버린 거죠」



p.309

   악령의 포로가 되어버린 듯 예술을 향한 충동에 꼼짝없이 사로잡혀 자신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이 사내의 기이한 삶을 작가는 <나>라는 나레이터를 통해 일종의 전기 양식으로 기술하고 있다. 수입 좋은 직업에 교양 있는 아내와  잘생긴 아들딸을 둔 화목한 중산층 집안의 가장이 왜 세상의 모든 안락과 명예를 버리고, 비참하고 고통스러워 보이는 대안의 삶을 선택하였던 것일까? 그는 결국 무엇을 얻었던 것일까? 이 물에 대한 답은 <달과 6펜스 The Moon and Sixpence>라는 이 소설의 제목에 암시되어 있다. <달>과 <6펜스>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세계를 가리킨다. 또는 사람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암시하기도 한다. 둘 다 둥글고 은빛으로 빛난다. 하지만 둘의 성질은 전혀 다르다. 달빛은 영혼을 설레게 하며 삶의 비밀에 이르는 신비로운 통로로 사람을 유혹한다. 마음속 깊은 곳의 어두운 욕망을 건드려 걷잡을 수 없는 충동에 빠지게도 한다. 달은 흔히 상상의 세계나 광적인 열정을 상징해 왔다. <6펜스>란 영국에서 가장 낮은 단위로 유통되었던 은화의 값이다. 이 은화의 빛은 둔중하며 감촉은 차갑고 단단하다. 그 가치는 하찮다. 달이 영혼과 관능의 세계, 또는 본원적 감성의 삶에 대한 지향을 암시한다면, 6펜스는 돈과 물질의 세계, 그리고 천박한 세속적 가치를 가리키면서, 동시에 사람을 문명과 인습에 묶어두는 견고한 타성적 욕망을 암시한다. <달과 6펜스>는 한 중년의 사내가 달빛 세계의  마력에 끌려 6펜스의 세계를 탈출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나레이터는 그가 문명과는 멀리 떨어진 원시의 섬에서 낙원의 비전을 보았음을 암시하고 있다.



p.312

   그러나 그의 동기를 좀 더 산문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스트릭랜드가 과거의 삶을 버린  것은 세속의 속물적 삶의 방식이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현실에 대한 스트릭랜드의 경멸감은 그가 가족을 버릴 때 보여주는 단호함이나 친절을 베푸는 스트로브를 끊임없이 멸시하는 태도, 블란치의 자살에 전혀 동정심을 느끼지 않는 것 등에서 잘 드러난다. 나아가 스트릭랜드가 혐오했을 세속 세계의 모습은 나레티어가 보여주는 현실의 관찰과 묘사에서도 잘 볼 수 있다. 우리는 그 세속 세계의 위선적이고 속물적인 양태를 통해 스트릭랜드의 동기를 이해할 수 있게 되고 그럼으로써 비정상적으로 보였던 그의 행동도 상당 부분 수긍하게 된다. 이처럼 스트릭랜드의 동기를 어느 정도 수긍한다면, <달과 6펜스>가 비정상적인 예술 충동에 강박적으로 사로잡힌 한 예외적인 인물에 관한 이야기라고만 볼 수 없다. 이 소설은 <6펜스>의 세계에 대한 냉소, 또는 그곳의 인습과 욕망에 무반성적으로 매몰되어 있는 대중의 삶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실제로 이 소설의 많은 부분이 세속의 삶과 인간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런던의 문단과 사교계의 속물들, 마음은 순진해도 고뇌하는 예술 정신은 없고 잘 팔리는 그림만을 그리는 화가 스트로브, 육체적 관능만을 추구하는 블란치, 보장된 길을 포기하고 고결한 삶을 선택한 동료 덕분에 명예와 부를 누리면서도 그 동료를 멸시하는 알렉 카마이클, 가정을 떠났을 때 저주를 퍼부었던 남편이 천재로 알려지자 그의 아내였음을 자랑하는 스트릭랜드 부인 같은 사람들로 가득 찬 현실 세계는 파리의 밑바닥에서나 타히티에서 홀로 우주의 비밀을 찾아 고뇌의 모색을 계속하는 스트릭랜드의 삶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이 소설은 신들린 혼을 가진 한 화가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니고 세속 세계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이기도 한 것이다.



p.314

   자기를 병에서 구원해 준 동료의 은혜를 배신하고, 남편을 버리기까지 하면서 자기를 사랑한 여자를 냉대하여 결국은 자살하게 만든 것은 그가 이기적이고 비열한 사람이라는 증거가 아닌가? 예술가의 개성은 과연 인격의 파탄을 상쇄해 줄 수가 있는가? 세상의 윤리로 보면 그는 이기적이고 비열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스트릭랜드의 관점에서 보면  사태는 다르다. 그가 가족을 버린 것은 가족이 자유로운 삶을 제약했던 굴레였기 때문이다. 그는 가족을 떠날 때 해방만을 원했을 뿐 자신의 안락을 위해 아무런 재산권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병이 들었을 때 남에게 도움을 청한 적이 없다. 스트로브가 자기 성질에 못 이겨 그를 굳이 돕겠다고 나섰을 뿐이다. 스트릭랜드가 보기에는 사람들이 자기와 관련하여 고통을 받는 것은 자기 탓이 아니다. 블란치가 죽은 것도 자기 탓이 아니다. 그녀는 <어리석고 균형이 잡히지 않은 인간>이라 죽었을 뿐이다. 이 대목에서 나레이터는 짐짓 세속의 윤리를 들이대어 그에게 <당신은 인간도 아니다>라고 비난해 보지만 이에 대한 스트릭랜드의 반문은 의외로 날카롭다. <당신이 정말 블란치 스트로브의 생사 문제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두고 있긴 하오?> 하고 되묻는 것이다. 칸트의 정언명령에 따위에는 콧방귀를 뀐다. 그는 기본적으로 자기가 거부하는 세계의 기준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것은 파렴치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자신의 양심의 기준에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는 세상 윤리를 부인한다기보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윤리를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독자는 스트릭랜드가 비정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 경우로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나레이터나 아타에 대한 태도를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문둥병에 걸린 자기를 떠나지 않으려는 순진한 아타의 사랑에 대해서는 눈물을 흘리고 자기 때문에 불행해진  그녀에게 연민을 느낀다.

   나레이터는 스트릭랜드에게 사람의 삶이란 로 의존해서 사는 삶임을 상기시켜 보려고 애쓴다. 의존해서 사는 삶에서 윤리가 발생하고 따라서 윤리를 지키는 것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서목이 된다. 나레이터는 또 육신의 노쇠와 죽음의 공포를 환기시킴으로써 스트릭랜드로 하여금 남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사회적 삶을 인정하게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스트릭린드는 <죽음이 왜 중요하단 말인가>라고 하면서 그 상식적인 생각을 거부하고 만다. 그에게는 목숨이란 아무런  가치가 없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p.318

   몸의 여성  혐오증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다. <달과 6펜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다분히 부정적으로 그려져 있다. 스트릭랜드 부인과 블란치의 속물성에 대한 묘사는 작가가 여성 혐오증을 가지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품게 한다. 스트릭랜드는 여자가 추상적인 것에 화를 내고, 물질적인 것밖에 모르며, 우주에서 방황하는 남자의 정신을 가계부 안에 가두어두려고 한다고 매도한다. 한마디로 영혼이 없다고도 말한다. 이것은 작가의 여성 전반에 대한 혐오증에서 비롯한 것인가 아니면 특정 캐릭터에 대한 충실한 묘사의 결과에서 비롯한 것인가. 몸을 변호하는 방식으로 생각하면, 그가 여성 자체를 무시했다기보다는 남성 중심 사회의 유형화된 여성상을 혐오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의 소설을 보면 그는 여성에 대해서 만큼이나 여러 남성 유형에 대해서도 신랄한 냉소를 퍼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또한 현실이 남성 중심적인 세계임을 뚜렷이 의식하고 있다. 가령 나레이터는 여성 혐오적인 스트릭랜드에게 <시대를 잘못 타고났군요. 여자가 가재 도구이고 남자가 노예를 거느리던 시대에 태어났어야 하는데>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따라서 작중 인물의 여성 혐오증들은 몸 자신의 여성 혐오증을 반영한다는 점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현실 남성이 가진 여성 혐오증에 대한 객관적인 묘사, 또는 남성 중심주의를 무반성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여성에 대한 냉소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p.320

   <달과 6펜스>는 위대한 문학의 목록에 든 적은 없지만 특이한 소재로 출간 이후 전 세계적으로 계속적인 인기를 유지해 왔다. 특히 출간 직후에는 폭발적인 인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세계 대전을 통해 인간과 인간 문명에 깊은 염증을 느낀 젊은 세대에게 영혼의 세계와 순진의 세계에 대한 동경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었다. <달과 6펜스>는 가까운 현실 문제를 떠나 모든 이에게 내재되어 있는 보편적인 욕망, 즉 억압적인 현실을 벗어나 본마음이 요구하는 대로 자유롭게 살고 싶은 욕망을 자극함으로써 크게 어필하였던 것 같다. 인간의 영원한 욕망인 이 탈출과 해방의 욕망이 영혼의 세계를 추구하는 천재의 신비한 개성과 치열한 삶으로 사람들을 매혹시켰던 것이다. 확실히 스트릭랜드는 현실을 거부하고 내부의 충동대로 살고 싶은 독자의 꿈을 대리 실현시켜 주는 면이 있다. 더 이 세속을 벗어날 수 없는 사람에게 스트릭랜드의 이야기는 더 매혹적으로 느껴진다. 오늘날 예술가에 대한 환상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 너머의 신비하고 아름다운 삶을 포착할 수 있는 마술적인 힘을 가진 존재로서의 예술가에 대한 동경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에는 특히 천재성과 문둥병의 낭만적인 병치가 있고, 물질 문명의 혐오감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원시의 낙원 이미지가 있었다. <달과 6펜스>도 광적인 천재를 소재로 하는 전통적인 이야기의 기본 패턴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편이다. 순진 세계와 체험 세계 자연과 도시의 대조, 거기다 저주의 병을 통해 낙원의 비전이 깃들인 위대한 예술이 탄생한다는 이야기는 낭만적 환상을 자극한다. 타히티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은 아마 <달과 6펜스>의 덕이 컸을 것이다. 이곳은 거짓과 위선이 없고 억압적인 제도도 없으며 문명의 오염이 없어 모든 것에 순진하고도 강렬한 관능이 넘치는 원시적 삶이 존재하는 곳으로 많은 사람의 뇌리에 각인되어있다.



p.321

   <달과 6펜스>의 기술 방식도 효과적이었던 같다. 있을 법하지 않은 일, 그러니까 행복한 가정을 가진 중년 남자가 하루아침에 가정을 팽개쳐버리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일을 작가는 분명하게 설명하지 못하겠다는 듯한 제스처를 씀으로써 오히려 내적 충동의 필연성과 신비감을 강렬하게 만들고 있다. 세속의 윤리와 가치를 일거에 넘어서버리는 그 비약을 비약 자체로 남겨둠으로써 오히려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이다. 나레이터를 처음부터 주인공과 일정한 거리를 두게 만들었던 것도 같은 효과를 겨냥한 수법이다. 이야기의 중반 이후는 나레이터가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엮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런 수법은 흔하지만 여기에서는 신비감을 고취하는 데 특별히 효과적으로 이바지하고 있다. 독자는 주인공이 산 삶의 중요한 부분을 직접 보거나 들을 수 없어 서로 다른 관점을 통해 그의 삶의 성격을 짐작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진실이나 자유의 정체는 결국 그런 방식으로밖에 접근될 수 없음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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