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서재 Part 2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컹리 Nov 05. 2019

표백

#120 장강명 [표백]


p.16

  "찰스 맨슨보다 사람을 더 많이 죽인 범죄자는 그 전에도 그 뒤에도 얼마든지 있었어. 테드 번디는 최소한 36명에서 60명 가까이 죽였고, 존 웨인 게이시는 33명을 죽였지.

   그런데 왜 찰스 맨슨만 그렇게 유명해졌을까?

   샤론 테이트 같은 유명인을 죽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다른 연쇄살인범들이 변태 성욕이나 저급한 권력욕을 주체하지 못한 저능아였던 데 비해 찰스 맨슨 일당은 일단 멀쩡해 보였고, 자기들의 행위에 조잡하나마 어떤 주장을 담으려고 했기 때문일 거야.

   8명을 죽인 게 베트남에서 네이팜탄으로 수천 명을 해치운 것보다 나쁜가, 내가 아니라 너희 아이들이 사람을 해치웠고, 그런 교육을 한 것은 이 사회다 따위의 주장을 말이야.

   물론 그것은 찰스 맨슨의 허황된 계획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그의 '첼터 스켈터' 철학은 찢어진 콘돔만큼의 가치도 없지. 그런데도 사람들은 맨슨의 말에 귀를 기울였어. 수십 년이나.

   솔직히 8명을 죽이는 것보다 에베레스트 산을 무산소 등정하거나 위대한 문학작품을 쓰거나 울트라 마라톤을 완주하는 일이 더 어려울 것 같지 않니? 히말라야에 오르거나 대하소설을 쓰거나 100킬로미터를 달리려면 몇 년에 걸친 엄격한 자기 관리와 강한 의지, 뼈를 깎는 훈련이 필요해.

   하지만 사람을 8명이나 죽이는 것은, 그것도 맨슨 패밀리처럼 증거를 숨기려는 노력 따위 하지 않고 되는 대로 저질러버릴 거라면, 그냥 마음만 먹으면 아무나 할 수 있지. 자동차 한 대나 어쩌면 식칼 한 자루만으로 할 수 있어.

   단지 정상인이라면 감히 넘을 생각조차 봇하는 어떤 선ㅇ르 살짝 넘기기만 하면 돼.

   에드 게인이나 존 웨인 게이시처럼 완전히 미쳐버린 놈이 그 선을 넘는 건 의미가 없어. 그런 자들의 행위는 샴썅둥이나 늑대인간증후군처럼 희귀한 유전병, 기이한 사건ㆍ사고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니까. 대개 사람들은 그 선을 넘은 자들을 완전히 미쳐버린 놈으로 규정함으로써 인간성의 정의를 보호하려 하지. 순환논법이야.

   그러나 가끔은, 완전히 미친 건 아닌 것 같은 사람이 그 선을 넘어. 그러면 많은 것이 바뀌지. 처음으로 변기통을 미술관 안으로 갖고 들어온 예술의 개념을 바꿨고, 처음으로 비행기를 납치해 건물에 처박은 놈들은 정쟁과 테러의 개념을 바꿨어.

   만약 찰스 맨슨에게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을 만큼 조리에 닿는 메시지가 있었다면 그의 말은 얼마나 파급력이 있었을까. 그는 정말로 세상을 조금 바꿀 수도 있었어. 그러기 위해서는 단 8명만 죽이면 됐어. 8명을 죽였더니 온 세상이 덜 떠어진 몽상가인 그에게 귀를 기울였지. 어떤 사람이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그해에 울트라 마라톤을 완주하고 스무 권짜리 대하소설을 펴내도 그렇게 매스컴을 타지는 못할거야.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선을 넘으며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떤 하나의 메시지를 외치는 것.

   십자가형을 받고 죽은 사람은 수만 명이지만 사람들은 예수그리스도와 베드로만 기억하지. 그리스도교는 단 한 사람의 메시지와 단 한건의 십자가형으로 비롯됐어.

   계획을 잘만 세운다면, 사악한 상상력이 다른다면, 단 몇 명의 죽음으로도 세상을 흔들 수 있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지 않을까?"



p.20

1006.

하느님이 등장하면

모든 게 망가진다


인간은 자살하지 않고 살기 위해 신을 생각해낸 것이다. 이때까지의 세계사는 바로 이것에 불과한 거야. … 만인을 위한 구원의 길은 모든 살마에게 이 사실을 증명하는 데 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최초에 그것을 자각한 자는 반드시 자살해야 한다.

- <악령>, 도스토옙스키


   적그리스도와 소크라테스, 재프루더, 재키가 처음 모였을 때 재키는 "혹시 종교가 있는 살마 있어?"라고 물었다.

   재키 자신은 '무신론을 믿는다'고 말했다. 설사 신이 존재하더라도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나의 세계관은 세상에 신이나 절대적인 가치는 없다는 데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하느님이 등장하면 모든 게 망가져버려."


p.22

   "멋있게 살 수 없는 상황이 오면 어떻게 할 건데?"

   "예순다섯 살, 아니 예순네 살이 되면 가진 돈을 다 털어 호화 세계여행을 떠날 거야. 그래서 1년 동안 실컷 놀고 즐긴 뒤 예순다섯살 생일에 근사한 파티를 연 다음 북해에 뛰어드는 거지. 너희도 그때 내 파티에 와."

   적그리스도는 마치 이 계획을 전부터 생각해온 듯이 말했다.

   "왜 예순네 살까지 기다려? 폼 나게 자살하려면 20대에 해야하는 거 아니야?"

   소크라테스가 따졌다.

   "스물, 스물다섯에 죽는 놈들은 철이 덜 들어서 그런 거지……. 인생에 즐길 게 얼마나 많은데 왜 그때 죽어? 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놈들의 게으름이고 감상 과잉이지. 난 삶의 단물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쪽쪽 다 빨어먹고 내 인생의 쾌락의 총합이 최대가 되는 시점에 죽을 거야. 그런데 쾌락의 총합에서 고통의 총합을 뺀 양이 최대가 되는 때가 대강 예순다섯 살이라는 거지. 뭐. 의학의 발전 같은 것도 고려해야겟지만 말이야."

   "만약에 주변 상황이 변해서 쾌락은 줄어들 게 분명하고, 고통은 크게 늘어날 것 같다면 어떻게 하지? 예컨대, 죽지는 않지만 무지막지한 고통을 주는 불치병에 걸린다면?"

   재키가 물었다.

   "그런 경우에는 예순다섯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바로 자살 파티지."

   "다 말장난이야. 우리한테 쾌락이 얼마가 남아 있는지, 고통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누가 어떻게 알겠어."


p.26

   H그룹 인사부 선배는 요즘 대학ㄱ생들에게는 도전 정신이 없다는 이야기를 한참 늘어놓았다.

   "요즘 학생들 보면 이렇게들 패기가 없어서야 참 걱정이다 싶을 때가 있어. 세세한 스펙 따위 별 상관도 없으니 거기에 목숨 걸고 그러지 말고 큰 꿈을 가져봐."
   "그런데 왜 청년들한테 도전 정신이 있어야 하는 거죠?"

   내 물음에 H그룹 과장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늙은이들더러 도전 정신을 가지라고 하겠지?"

   숭배자들─A대학 경영학과 학생들─의 웃음.

   "도전 정신이 그렇게 좋은 거라면 젊은이고 나이 든 사람이고 할 것 없이 다 가져야지, 왜 청년들한테만 가지라고 하나요?"

   "젊은 때는 잃을 게 없고, 뭘 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으니까 그럴 때 여러 가지 기회를 다 노려봐야 한다는 얘기지. 그러다가 뭐가 되기라도 하면 대박이잖아."

   "오히려 오륙십 대의 나이 든 사람들이야말로 인생 저물어 가는데 잃을 거 없지 않나요. 젊은 사람들은 잃을 게 얼마나 많은데…. 일례로 시간을 2, 3년만 잃어버리면 H그룹 같은 데에서는 받아주지도 않잖아요. 나이 제한을 넘겼다면서."

   "대신에 그에 상응하는 경험이 남겠지."

   "무슨 경험 있든 간에 나이를 넘기면 H그룹 공채에 서류도 못 내잖아요."

   "얘가 원래 좀 삐딱해요."

   누군가가 끼어들어 제지하려 했으나 나는 멈추지 않았다. 나는 술을 마시면 멈추는 법이 없었다.

   "저는요, 젊은이들더러 도전하라는 말이 젊은 세대를 착취하려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뭣 모르고 잘 속는 어린애들한테 이것저것 기켜봐서 되는지 안 되는지 알아보고 되는 분야에는 기성세대들도 뛰어들겠다는 거 아닌가요? 도전이라는 게 그렇게 수지맞는 장사라면 왜 그 일을 청년의 특권이라면서 양보합니까? 척 보기에도 승률이 희박해 보이니까 자기들은 안 하고 청년의 패기 운운 하는 거잖아요."

   "이름이 뭐랬지? 넌 우리 회사 오면 안 되겠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빈정대는 말투로 한마디 내뱉었다.

   거 봐, 아까는 도전하라고 훈계하더니 내가 막상 도전하니까 안 받아주잖아.


p.35

   "나도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나를 그렇게 생각해주는 건 고맙지만, 그건 과대평가한 거야. 난 그저 비겁자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중산층 자식일 뿐이야."

   소크라테스는 자조 섞인 어조로 내뱉듯이 말했다.

   "비럽자 콤플렉스가 뭐야?"

   "나는 내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한 번도 스스로 내리지 못했어. 모든 걸 부모나 사회가 원하는 대로 했지. 고등학생 때에는 대학을 가지 않고 시를 스거나 영화감독이 되는 걸 꿈꾸기도 했지. 그런데 실천하지는 못했어. 대단한 부잣집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가난 때문에 고생한 적도 없지. 중간고사 성적이 떨어지는 것 따위 외에 진짜 위기라는 걸 내가 겪어본 적이 있을까? 아버지 사업이 망한 적도 없고 어머니가 돌아가시지도 않았지. 공부도 잘했고 심지어 부모님도 좋은 분이야. 그렇게 여기까지 왔어. 돌이켜보면 모든 게 합리적인 결정이었지만, 너무 쉬운 길로만 걸어왔다는 데에 죄책감을 느껴. 독립운동가까지 갈 것도 없이, 그냥 자수성가한 사람 이야기만 들어도 부끄러워. 안정하게만 살아온 나 자신이 부끄러워."

   재키는 더 얘기해보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난 공부를 곧잘 하는 편이었어. 선생들도 부모님도 모두 낵 서울대에 갈 거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수능 성적이 너무 시원찮게 나온 거야. 2지망으로 우리 학교에 합격했는데 주변에서는 내가 재수를 할 걸로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나는 재수를 하지 않았찌. 1년 더 공부해야 한다는 게 두려웠거든. 재수 학원에 가긴 했는데 그 건물 전체에 어린 패배의 기운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어.

   나는 패배자가 되는 게 너무 무서웠고, 지금도 두려워. 내가 받은 교육이라고는 어떻게하면 패배하지 않느냐에 대한 것뿐이었지. 그래서 승리도 하지 않고 패배도 하지 않는 안전한 방법을 익히고 그대로 살고 있어. 그런데 이게 뭐야?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가 몇년인데 아직도 학벌 콤플렉스가 있다니.

   대학에 들어와서 처음 여자 친구를 만났을 때에는, 성격이 별로 맞지 않는데도 얼굴이 예쁜 아이를 사귀었어. 못생긴 여자와 사귀면 패배한 것 같은 느낌이 들 테니까. 나중에 정말 괜찮은 아이를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그 아이가 미국으로 유학을 간다고 했어. 가기 전에 헤어졌어. 그 아이한테 인생을 거는 게 두려웠거든. 군대도 육군 사병으로 가는 게 두려워서 카투사를 지원했지. 그리고 이제는 죽을 때까지 끝내 이런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게 아닌가 두려워."


p.29

   한때 재키는 '큰 꿈 없는 세대'라는 정의를 검토한 적이 있다.

   그녀가 만난 똑똑한 20대들은 자신의 꿈이 국제 변호사라거나 펀드 매니저라거나 아니면 카페를 차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돈 잘 벌고 폼 나는 직업을 갖겠다는 것 이외에 정말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큰 꿈 없는 세대'를 만드는 요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한국이 선진국이 되어가면서 사회체제가 안정되고 1970년대나 80년대처럼 파이가 많이 남지 않았다. 각 조직의 관료화가 완료돼 조직 내 세대교체가 쉽지 않아졌고, 새로운 일자리는 대개 서비스업에서 만들어지는 단순 노동거리다. 대단치도 않은 눈앞의 과실을 따기 위해 온 힘을 쏟다 보면 그만큼 생각의 폭이나 인물의 그릇이 잘아지게 된다.

   말 잘 듣는 아이가 좋은 성적을 거두는 교육이나 조직 문화도 문제겠고, 세계화가 갑자기 진행된 것도 관련이 있을 터다. 과거 한국 기준으로는 큰 꿈이던 것이 이제는 그렇지 않으니까.

   '단군 이래 가장 많이 공부하고, 제일 똑똑하고, 외국어에 능한 세대'라는 주장은 칭얼거림에 불과하다. 그게 무슨 소용인가? 과거 세대도 그들에게 주어진 무대에서 썩 잘했다.

   게다가 과거 세대들은 민주주의라든가 자본주의 정착, 근대 체제로의 편입과 같은 중요한 역사적 과업도 이미 달성했다. 이제 남은 것은 양성 평등이나 환경문제와 같은 거대 이데올로기라기보다는 소주제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그다음에 나오게 될 이슈들은 한 세대의 과업이나 종교의 대용품이 되기에는 지나치게 사소한 것이리라. 성적 소수자 보호, 동물 보호, 장애인 인권 문제, 소비자 운동, 저개발국 원조 프로그램 등등.

   그래서 이 세대는 큰 꿈을 가질 수 없게 됐다.


p.39

   "우리처럼 시대를 잘못 만난 세대를 위해서는 사회가 어떤 보상책을 마련해야 해. 부잣집에서 태어나 재산을 물려받는 사람에게는 상속세를 부과하잖아. 그런 것처럼 호시절에 태어나 걱정 없이 사회에 진출하는 사람들한테는 '불경기에 취업 시장에 나오는 세대를 위한 지원세' 같은 목적세를 도입해야 해. 그렇게 마련한 돈은 우리 같은 세대를 위해 쓰는 거지. 그건 정당한 소득분배니까 그놈들이 삐겨서도 안 돼."

   나는 흥에 겨워 또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우리는 ' 저주받은 00년 생'류의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1980년대에는 대학생들이 정치의 상당 부분을 담당했고, 1990년대에는 대학생들이 대중문화의 중심이었지. 지금 우리는 뭘까? 아무것도 아니야. 작은 유행 하나 만들어내지 못해. 이렇게 형편이 어려운데도 반항 정신이나 독립심조차 이전 세대에 못 미치지."


p.44

   "전 사람들을 잘 다뤄요."

   촛볼에 비친 세연의 모습은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이었다. 세연은 가방에서 반짝거리는 담배 케이스를 꺼냈다. 그 안에 든 담배는 필터가 없었고, 담뱃잎 가루를 싼 종이도 뭔가 허술해 보였다.

   "젊은 남자들을 다루기란 특히 쉬워요. 젊은 남자들이 예쁜 여자애의 관심을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뭔지 알아요?"

   세연은 자신을 예쁜 여자애라고 부르는 데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었다.

   "예쁜 여자애랑 섹스하는 거?"

   "예쁜 여자애에게 무시당하지 않는 거요. 그래서 상대방에게 '여기서 잘못하면 자존심을 구길 수 있다'는 점을 슬쩍 암시하면 남자애들은 겁을 먹고 저를 모른 척해버리죠. 유용한 기술이에요."

   그 방의 젊은 남자 세 사람은 바보처럼 세연의 말을 듣기만 했다.

   

P.49

    "하고 싶으면 해."

    "뭘?"

    "날 덮쳐도 돼."

    재키는 침대에 누워 적그리스도에게 말했다. 적그리스도는 그 말이 유혹인지 아닌지 속으로 가늠하고 있었다. 그는 재키가 자신이 처녀라고 주장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재키가 처녀일 거라고 믿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그녀를 덮치려 하면 그녀가 말과는  달리 완강히 저항하리라 생각했다. 재키 역시 적그리스도와 처음 섹스를 할 때는 강간의 모양새를 취할 생각이었다.

   "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는데, 왜 별명이 적그리스도야?"

   "학교 밴드에서 공연할 때 찬송가를 펑크 록으로 불렀거든. 창작곡을 만들 실력은 안 되고 명곡을 카피하려니 딱히 부를 노래가 없더라고. 그래서 찬송가를 록 버전으로 바꿔서 부르자고 했더니 다들 좋다고 고개를 끄덕였지. 막상 부르고 보니 굉장히 섬뜩하더라."

   적그리스도는 자신이 생각하는 록의 역사에 대해 떠들었다. 그가 볼 때 헤비메탈 말기에 와서 록 밴드들은 '반대할 것이 없다'는 난제에 부딪혔다. 기존 체제, 기성세대, 이성애, 권위주의, 기독교, 자본주의 등 모든 것을 선배들이 이미 다 반대해버렸고, 이제는 적으로 삼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래서 나온 것이 뜻 모를 가사를 웅얼거리는 얼터너티브 록이었으며, 그런 얼터너티브가 자살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 뒤에는 정말 록 뮤지션들이 노래할 게  없었다. 심지어 록이 죽었다는 것조차 메릴린 맨슨이 불렀다.


p.52

    복수! 얼마나 가슴 설레는 단어인가. 이 단어는 어떤 이유도 묻지 않는다. 그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순수한 감정. 모든 회의로부터 그를 구해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동기. 사랑과 달리 시간이 지나도 식지 않는 열정. (중략)

   복수와 정복은 결코 완성되어서는 안 되었다. 이뤄지는 순간 그 과제는 곧 거대한 공허로 변해버릴 테니까. 그 목표는 언제나 두어 발 앞에서 빛나고 있어야 했다. 아마 최선은 복수와 세계 정복을 눈 앞에 두고 한 개인의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운명 때문에 좌절하는 것이리라.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떤 경지에 오른 무인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죽을 땅을 찾았다'거나 '오늘은 죽기 좋은 날'이라는 표현이 나온 것이다.

   "나는 내 앞에 예정된 미래가 온통 패배의  길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져서 화가 많이 나 있지. 나한테 삶은 숙제야. 내가 죽을 날, 죽을 땅을 찾아야 하는. 마혁과시라는 말 알아? 대장부는 싸움터에서 죽어 시체가 말가족에 싸여 돌아와야지, 침대 위에 누워 여자의 시중을 받으며 죽으면 안 되는 거였어."

적그리스도는 이 복잡한 시대에서 그가 납득할 수 있는 폭력적인 죽음을 상상했다.  

    예를 들면 이런 것. 지하철에서 유모차가 선로에 떨어지고,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의 아기를 구하러 그가 뛰어내린다. 유모차에서 아기를 꺼내 플랫폼으로 올리지만 그 자신이 올라갈 시간은 없다. 이미 전차가 경적을 있는 대로 울리며 역에 들어선 참이다. 그는 달려오는 전차를 향해 이글거리는 눈으로 '씨발'이라든가 '염병' 따위의 욕을 한마디 내뱉고 야비한 웃음을 지으며 죽음을 맞이한다.

    누구도 패배라고 부르지 않을 죽음, 은밀한 도피. 그러나 그렇게 해서 살려낸 아이의 삶이 그 자신의 삶보다 더 가치 있으리라는 보장이 있는가? 그건 그저 자신이 하기 싫은 숙제를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행위가 아닌가?



   

p.67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 세계에 신이 없다면 가치는 어디에서 오는가의 문제에 대해. 저번에 너는 신이 없는 세상에서는 절대적인 가치가 있을 수 없다고 했지, 그리고 신이 있다는 걸 믿지 않는다고도 했고. 그렇다면 우리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

    "아니, 각자의 주관적인 가치가 있지. 그때 재프루더가 말했잖아. 애 낳고 애 키우고 여행도 다니면서 살고 싶다고. 그걸로 충분한 사람한테는 그걸로 충분하지, 안 그래? 그리고 네 얘기도 별로 다르진 않았잖아.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지. 공익 같은 것에 기여하면서. 기자가 되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난 그런 얘기한 적 없어."

    소크라테스가 화들짝 놀라서 반박했다.

    "뭐, 아무튼 괜찮아. 너희에게 문제는, 너희가 세운 그런 목표가 뭔가 찜찜하게 여겨진다는 것이겠지. 죽지 않고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아야 하는 상황에서 세상과 타협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게 문제겠지? 그런 목표들이 자기기만처럼 여겨지고 말이야.

    난 주관적인 목표를 정해놓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사는 건 전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신이 없다고 해도 말이야. 신이 없고 내세가 없으면 역사도 없는 걸까? 그렇다고 본다면 각자의 쾌락을 추구하면 되지. 그것만큼 확실한 건 없으니까. 그리고 역사가 없는 것도 아닐 거야. 우리는 본성상 남의 시선을, 내가 죽은 다음에라도 신경 쓰는 존재거든. 너희도 죽기 전에 마지막 할 일이 하드디스크의 야동 지우는 거라고 농담하잖아.

    그러니까 자기만족을 위해 어떤 일을 하겠다거나, 역사에 남는 일을 하겠다거나 하는 목표는 다 좋은 거야. 그걸로 완결된 거야. 누구의 승인을 받거나 할 필요가 없어.

    그런데 왜 우리가 세운 목표가 마음에 차지 않는 걸까? 그 목표들이 시시하다는 걸 우리 스스로도 알고 있기 때문이야. 충분히 위대한 목표는 그 자체로 우리 가슴에 불을 지르고, 그러면 그걸로 충만해지지. 괜찮은 직업을 갖고 애를 낳아서 기른다는 목표로는 절대 이를 수 없는 경지야."


p.100

    심야 버스 안에서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앞으로 어떤 인간이 될 지에 대해 생각했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는 데 대해 나는 퍽 싸늘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 '어느 상황에서고 강한 척할 수 있다면 강한 것이다'라는 게 내 신조였고, 자신의 아픔을 떠벌리는 녀석들을 경멸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주위의 도움과 동정에 기대고 싶지 않았다.


p.114

    주변에 있던 여러 사람 중 꼭 소크라테스와 재프루더, 적그리스도, 루비, 하비, 제리, 메리 등을 계획에 끌어들인 데에는 특별한 의도가 없었다. 그들에게 '아주 특출한' 재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열두 사도가 그 시대의 최고 엘리트라서 예수의 부름을 받았던가? 아니다. 그들은 그저 예수가 제자들을 필요로 할 때 어느 정도 의지를 갖고 근처에 있던 사람이었다. (중략)

    그렇다고 재키가 자신의 '제자'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소크라테스와 재푸르더, 적그리스도, 루비, 하비, 제리, 메리 등은 모두 자질이 있었다. 그들은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서라면 다른 많은 가능성을 희생할 수 있을 정도로 순수했고, 21세기의 한국 사회가 구성원들에게 지상 과제로 제시하는 성공의 가치를 의심할 수 있을 정도로 영리했다.

    그들은 그 성공의 가치와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것 사이의 모순을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예민했고, 무엇보다 그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 어떤 일을 저지를 수 있을 정도의 에너지를 지닌 젊은이들이었다.


p.172

자살 선언은

범죄인가


    자살 선언이 과연 폭행이나 강간, 절도, 강도, 방화, 납치, 공갈, 협박, 횡령, 뇌물 수수, 살인과 같은 대열의 범죄인가?

    왜?

    자살이 범죄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논리 중 '스스로에 대한 범죄'라는 논리를 먼저 폐기 처분하도록 하자. 스스로에 대한 범죄라는 것은 없다. 스스로에 대한 범죄라는 것은 신과 같은 절대자가 있을 때에만 성립하는 것이고, 그런 절대 기준이 있다면 아마 자살 외에도 자위 행위나 태만, 공상, 인본주의 서적을 읽거나 불경스러운 생각을 하는 등 다른 많은 일도 스스로에 대한 범죄가 될 것이다. 같은 논리로 잘못된 사회의 사고방식에 순응해 아무런 거부도 하지 못하면서 자신의 존엄성을 한낱 사회의 부품 또는 노동자의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일이 스스로에 대한 범죄라는 주장도 성립한다.

    그렇다면 자살로 자기 자신 외에 피해를 당한 사람은 누구인가? 물론 당신을 알고 있는 주변 사람들이 얼마간 정신적 충격을 받게 된다. 그러나 장담하건대 부모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 친지와 친구, 심지어 형제나 이성 친구까지도 며칠 지나지 않아 그 정도 상처는 극복해낼 수 있다. 냉정히 생각해보라. 당신 삶에 그렇게 대단한 애정과 관심을 가진 사람은 없다. 자신의 죽음이 주변 사람들에게 끼칠 상처가 우려돼 자살 선언을 할 수 없다면, 그런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고 영생하는 방법도 찾아야 할 것이다. 부모에게 끼칠 상처가 우려돼 자살 선언을 할 수 없다면, 그런 경우는 이해하겠다. 본인의 선택에 달렸다.

    마지막으로, 자살이 공동체에 해가 된다는 주장이다. 물론 자살은 공동체에 해가 된다. 자살은 그 공동체가 믿고 있는 신화에 의문을 제기해 결속을 무너뜨린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자살 선언을 하는 것이다. 공동체는 그러므로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그걸 범죄로 규정한다. 자살 선언에 동참하든 하지 않든, 그런 규정을 받아들일 것인지 말지는 여러분 마음이다.


p.150

    나는 어릴 때 복도식 구조인 15층짜리 주공 아프트 단지에 살았다. 어떤 아이가 이 아파트의 복도에서 수십 미터 아래 지나가는 행인을 향해 지우개나 연필부터 공사용 벽돌까지 크고 작은 물건을 던지기 시작했고 그게 곧 유행이 되었다.

    '범행'에 가담한 아이들은 초등학교 2학년에서 중학교 1학년으로, 그런 행동이 나쁜 짓이라는 것은 알고 있을 나이였다. 그러나 높은 데서 물건을 떨어뜨리는 작은 행동만으로 지나가는 사람을 혼비백산하게 만드는 쾌감에 대해 아이들이 서로 몰래 수군대며 뻐기기 시작하자, 그리고 그에 대해 어른들이 질겁하며 자식들을 타이르기 시작하자, 동네 모든 아이의 모음에 유혹이 싹텄다. 이 '테러'는 일주일 넘게 지속됐다. 절정기에는 하루에도 그런 투척 사건이 여러 동에서 각각 서너 번씩 벌어질 정도였다.

   다행히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 사건이 온 동네를 얼마나 공포에 몰아넣었는지는 자세히 쓸 필요도 없으리라 생각한다. 몇몇 주민이 외출을 꺼리는 수준을 넘어 경비원과 동네 노인들로 구성된 일종의 자경단까지 구성될 정도였다. 자경단의 임무는 투척 사건이 발생하면 재빨리 그 아프트의 해당 층으로 가서 타문 수색을 벌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이 벌인 범죄 치고는 놀랍게도, 단 한 명도 현행범으로 잡히지 않았다.

   나는 우리의 자살 선언에 대해서 이 사회도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리라 확신한다.

   우리가 자살을 한 뒤 사회가 궁극적으로 바뀌지 못해도 괜찮다. 우리는 그런 사회에 분명히 거부 의사를 밝혔다. 버나드 맬러머드는 "인간의 가치 하락은 인간이 하등의 항의도 없이 그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생긴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항의했다.


p.159

'자살 선언'은 언제 하는 것이 좋은가


    여러 가지 실제적인 문제점을 고려해볼 때 실행 24시간 전에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지 않나 생각한다. 그보다 먼저 하면 주변 사람들이 당신을 찾아내서 갖은 수를 써서 자살을 만류할 것이고, 어지간히 심지가 굳은 사람이 아닌 한 마음이 흔들리게 될 거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정말 당신의 인생에 관심을 쏟고 있느냐, 혹은 당신이 자살을 포기했을 때 그 사람들에게서 어떤 존경을 얻을 수 있겠느냐. 그게 아니라는 건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지 않나? 그들은 딱히 별 이유도 없이, 동정심도 관심도 아닌 '그냥 그래야 할 것 같다'는 관성에서 주변 사람의 자살을 막으려 드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살 직전에 자살 선언을 하면 감정에 치우쳐 순간적인 충동을 못 이기고 저지른 일이라는 인상을 주기 쉽다. 실제로는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당신 주변 사람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니까 자살 실행 약 24시간 전에 그 결심을 외부에 알리는 것이 가장 낫지 않나 생각한다. 의무 사항은 아니다. 물론 그 뒤 24시간 동안 주변 사람들이 당신의 자살을 방해할 수 없도록 준비는 해놔야 한다. 선언한 뒤 잠적하거나, 예약 메일 등을 이용하거나, 당신 주변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는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올려서 시간이 지난 뒤 그게 지인들에게 전해질 수 있도록 하는 방법 등이 있을 것 같다. 와이두유리브닷커 게시판은 예약 게시 기능도 지원한다.

    가장 중요한 것을 빼먹을 뻔했다. 절대 생활이 곤궁하거나 좌절했을 때 자살하지 마라. 그런 때 자살하면 세상은 당신의 선언을 그저 패배자의 개인적인 도피로 여길 것이다. 여태까지 인터넷 자살 사이트나 집단 자살자가 그렇게 많았건만 모두 잊힌 이유도 그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어떻게 자살하든 세상은 뭔가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붙여 "겉으로는 괜찮아 보였지만 심적 갈등이 심했고 도피처를 찾던 중이었다"라고 우겨댈 것이다. 그러므로 기다리고 참았다가 당신 삶의 중요한 성취를 이뤘을 때 실행하라. 이 선언이 분명한 사회적 저항임을 전달하려면 그래야 한다.


p.189

표백 세대와 자살 선언

   

    1978년 이후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유지 보수자의 운명을 띠고 세상에 났다. 이 사회에서 새로 뭔가를 설계하거나 건설한 일없이 이미 만들어진 사회를 잘 굴러가게 만드는 게 이들의 임무라는 뜻이다. 이들은 부품으로 태어나 노예로 죽을 팔자다.

    나는 여기서 나를 포함해 이런 사명을 부여받은 우리 세대의 젊은 이들이 어떻게 해서 만성적인 좌절감에 빠지는지 밝히고, 그런 좌절감이 누구의 탓이라기보다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원인에서 기인한 근본적인 문제임을 증명해보겠다. 또 타고난 능력과 근면, 성실함으로 개인적인 성취를 이루는 것은 우리가 겪고 있는 굴욕에 대한 답이 아니며, 그런 성공은 본질적으로 시시한 것임을 논해보겠다.

    

    나는 입에서 단내를 풍기며 아현동 골목길을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다. 치킨집과 구멍가게, 세탁소, 오래된 빌라 사이의 구질구질한 골목길을 구질구질한 사내가 구질구질한 이유로 달린다.

    아, 달리는 게 아니라 도망치는 거지.


p.189

    체제를 위협할 만한 심각한 모순이 없는 가운데, 완성된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이데올로기인 자유민주주의와 수정자본주의를 대체할 만한 사상은 아직 보이지 않고 있다.

    일부 진보 세력이 대안이라고 내놓는 이데올로기는 기실 자유민주주의와 수정자본주의 틀 안에서의 미세 수정에 불과하다. 또 자유민주주의와 수정자본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과격한 이데올로기 대부분은 그 현실성을 따지기도 전에 논리의 정합성과 일관성에서 절망적으로 유치한 수준에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를 포함한 우리 이후의 세대들은 혁신적인 사상을 내거나 시도할 수 없고, 그런 까닭에 진정으로 세상을 바꿀 힘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변화가 완만하게 이뤄졌던 다른 서구 국가들과 달리 한국에서는 현 세대와 이전 세대가 처한 환경의 격차가 매우 뚜렷하다. 자신들의 힘으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룰 수 있었던, 그것도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드라마틱하게 그 시대적 사명을 이뤄낸 세대가 우리 세대를 우습게 보고 '열심히 노력하지 않는다'거나 '분노할 줄 모른다'고 비아냔거리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잘못이 아니다.


p.194

    위대한 일을 할 기회를 박탈당한 세대는 어떻게 되는가? 그들은 출세나 개인적인 성공과 같은 작은 성취에 매달리게 된다. 그런데 완성된 사회는 개인적인 성공에 대해 사실상 단 하나의 평가 기준만 지니고 있다.

    이는 자유민주주의와 수정자본주의의 결합에서 필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결과다. 자유민주주의는 교리에 따라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근본적으로 우월할 수 없고 모든 사람이 가치 면에서 평등하다고 주장한다. 수정자본주의는 시장 가치를 바탕으로 하는 평가 척도 한 가지만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두 이데올로기가 결합한 가치 체계에서 한 인간의 가치를 재는 방법은 '그 사람이 자유민주주의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 있는가(독재자나 범죄자가 아닌가)'와 '그 사람이 얼마나 높은 시장 가치를 갖고 있는가'가 된다.

    따라서 완성된 사회에서 표백 세대의 젊은이는 부에 대한 욕심이 크지 않더라도 자신의 능력과 야망을 증명하려면 돈을 버는 경쟁에 뛰어들어야 한다. 그 외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의 존재 가치를 주장할 다른 방법이 없다.

    군대를 일으켜 무공을 세우는 일은 자유민주주의의 이념에 어긋나며, 단식과 묵상으로 깨달음을 얻는 행위는 시장에서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그러나 돈을 얼마나 많이 버느냐를 놓고 벌이는 시합에서도 표백 세대는 좌절할 수밖에 없다. 완성된 사회는 가능성이 그만큼 고갈된 사회기 때문에, 부를 창출하는 능력에서도 성숙한 단계에 있다. 닷컴 열풍, 부동산 시장 활황과 같은 국지적인 성장은 때때로 가능하지만 산업화 초중반에 볼 수 있었던 '경제 전반에 걸친 활기'는 찾아보기 어렵다. 완성된 사회의 경제성장률은 이론적으로 0퍼세트에 가까워야 한다.

    즉 표백 세대드릉ㄴ 아주 적은 양의 부를 차지하기 위해 이저 세대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경쟁을 치러야 하며, 그들에게 열린 가능성은 사회가 완성되기 전 패기 있는 구성원들이 기대할 수 있었던 것에 비하면 아주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 가장 똑똑하다는 젊은이들조차 엘리트 조직의 끄트머리가 되기 위해 몇 년을 골방에 처박혀야 하고, 그런 노력이 결실을 얻은 뒤에도 조직의 말단에서 다시 경쟁을 시작해야 한다.

    표백 세대는 같은 세대뿐 아니라 이미 사회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기성세대들과도 경쟁해야 하는데, 사회 각 분야가 고도로 발전해 있고 표백 세대들이 가진 자원이 거의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매우 불리한 게임이다. 분배 방식이라는 게임의 규칙조차 기성세대가 정한 것을 따라야 한다.


p.197

    이런 한계 속에서 표백 세대의 내면은 추하게 일그러진다. 그들은 자신의 역사적인 위치나 사명에 대해 깊이 고민할 것이 없으므로 역사 의식이 희박해지며, 민족주의처럼 그들의 자존감을 손쉽게 높여줄 수 있는 불합리하고 값싼 이데올로기에 의존하는 경햐이 생긴다.

    박탈감과 좌절감은 뿌리 깊이 박혀 있지만 이런 좌절감은 집단적인 분노로 발전하지 못한다. 투쟁은 손해 보는 일이라는 것을 모두 다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 게시판에서는 선배와 상사, 기성세대를 찢어죽일 것처럼 성토하다가도 면접 시험장에서는 한없이 고분고분해지고 공손해진다.

    패배를 자연스러운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이들 중 몇몇은 정면 승부를 벌이고 작은 이득을 위해 아득바득 싸우는 태도를 촌스럽다고 여기게 된다. 기왕에 지는 거, 한발 물러난 자세로 "나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와 같은 태도를 보이거나 아예 싸움을 피하는 것이 그나마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다. 그것이 '쿨한 모습'으로 받아들여진다.

    진정으로 새로운 주장이나 사상이 없는 상태에서 조롱과 비아냥거림, 의미 없는 장난이 이 세대의 트레이드마크가 된다.

    사유와 생산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는 표백 세대는 소비를 삶의 표현 양식으로 삼는데, 이는 여가와 사교 생활에서 문화 예술 및 창작 활동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면에 걸쳐 이들의 사고와 행태에 깊숙이 영향을 미친다.

    물론 이들이라고 해서 바보는 아니며, '뭔가가 잘못됐다'는 느낌 정도는 갖고 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는 사회에 대해 그런 의심을 품는 행위는 자칫 그 자신을 바보라고 인정하는 셈이 될수도 있기에, 이들은 그런 생각을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다. 고로, 음융함은 그들의 제2의 천성이 된다.


p.207

    자살 선언은 완성된 사회에서 표백 세대가 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저항 운동이다. 그것은 극단적이면서 저항이 불가능한 사회에서 유일하게 논리적으로 기능하는 저항 운동이기도 하다. 물을 인정할 수 없는 물고기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뿐이다.

    자살 선언자들은 완성된 사회에서 그들이 얻을 수 있는 미약한 대가를 사양하며, 완성된 사회를 긍정해 그 구조 안에서 성공을 거두는 것을 거부한다. 그들은 죽음의 고통과 사후에 당할 모욕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사후 세계에 대한 어떤 기대나 선망도 갖고 있지 않다.

    나는 자살 선언자에 대해 완성된 사회가 쏟아낼 비난이 어떤 것인지 이미 알고 있다. 그들은  자살 선언자의 자살이 비겁한 도피와 현실 부정이며, "그럴(자살할) 용기와 의미가 있다면 그 힘으로 살아라"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패전을 각오한 군인과 순교자들처럼 명백하게 죽음을 선택한 이들에 대해서는 같은 주장을 하지 않는다.

    기실 완성된 사회는 어떤 사상이나 자존심을 위해 개인이 모든 것을 포기하는 행위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완성된 사회는 인간을 하찮은 욕망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완성된 사회가 왜 그토록 자살 선언자를 두려워하는지도 설명이 된다. 자살 선언자는 그 존재만으로 완성된 사회의 기본 가정을 부수며, 완성된 사회가 완전하지 않음을 고발한다. 자살 선언자는 희고 완벽한 완성된 사회에서 지워지지 않는 한 점 얼룩이다. 완성된 사회는 자살 선언자가 필요로 하는 것을 줄 능력이 없으며, 자살 선언자의 행위를 이해조차 할 수 없다.

    자살 선언자들은 봉건사회를 무너뜨린 부르주아지나 공산 혁명을 시도한 프롤레타리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자살 선언자들의 목표는 완성된 사회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완성된 사회의 천박함과 불완전성을 고발하고 자신들이 품고 있는 위대한 가능성을 증명하는 데 있으면, 그 방법은 오로지 죽음이라는 완전한 거부뿐이다. 왜냐하면 봉건 시대의 부르주아지와 산업 시대의 프롤레타리아에게는 대안과 미래가 있었으나 표백 세대와 자살 선언자들에게는 그런 것이 없기 때문이다.

    완성된 사회는 사람들이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살아 있기를 선택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완성된 사회는 구성원들의 최대 복리를 위해 시스템을 움직이지만 구성원들의 자존심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런 생각이 잘못됐음을 증명하기 위해 모든 표백 세대가 자살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수천 명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할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나 자신도 이미 5년 전에 자살했다.

    우리는 영웅으로 태어났으나 우리가 태어난 이 세상은 영웅의 삶을 허락히자 않는다.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영웅다운 죽음뿐이다.

    부모 세대가 만들어놓은 무대 위에서 하찮은 욕망을 채우는 데 시간과 열정을 허비하며 의미 없는 삶을 보내고 우리 세대가 별 볼일 없음을 시인할 것인가, 아니면 담대한 결단으로 그대 안에 있는 위대한 가능성을 증명하고 우리를 비웃어오던 세상에 충격과 공포를 줄 것인가.

    선택은 그대에게 달렸다.



p.225

    이렇게 저열한 불편과 냉대를 당하고, 늘 기다리야 하고, 모든 걸 상대방 편한 대로 해야 하는 것은 노동계급의 생활에서 당연한 일이다. (중략) 그는 행동하는 게 아니라 무엇에 따라 처신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신비로운 권위의 노예임을 자각하며, 자신이 이것이나 저것이나 다른 무엇을 원해도 '그들'이 결코 허용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 <위건 부도로 가는 길>, 조지 오웰


p.302

    자살 선언은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잘못됐다고 주장한다. 자살 선언은 내가 야망이 없는 시시한 인간이라고 주장하는데, 나는 이것을 받아들일 수도 부정할 수도 없다. 자살 선언을 한다는 것이 우리에게 야망과 의미를 부여한다는 얘기에는 더더구나 찬성할 수 없다.

    내가 자살 선언에 반대하는 이유는 자존심 때문이다.


p.319

    재키는 표백 세대의 본질이 좌절감에 있다고 이해했고, 그래서 야심은 있지만 그걸 구체화할 방도가 없는 영리한 젊은이들에게만 관심을 뒀다. 그녀의 자살 선언에도 일종의 엘리트주의가 깔려 있다. 그건 분명 재키 자신이 엘리트였고, 자신보다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을 대화나 논쟁의 상대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재키는 오만했다.

    제리는 다르게 생각했다. 표백 세대의 고통은 좌절이 아닌 굴욕에서 비롯된다. 야심이 있든 없든 이 세대는 모두 굴욕을 당할 운명이며, 이에 대한 정항에는 모든 젊은이가 동참할 수 있다.

    

p.342

    이 책이 다루는 가능성은 20대를 옹호나는 것일 수도 있찌만 동시에 그들을 모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사실에 나는 약간 죄책감을 느낀다. 이것도 일종의 착취에 해당하는 것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중략)

    이 책에서도 인용한 새뮤얼 헌팅턴의 말처럼, 사람은 적수가 누구인지 알 때만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다. 20대를 정의하는 각종 담론이 대체로 공허한 이유는 그 청년 세대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자신들의 과업을 찾는 것이 바로 지금의 20대에게 부여된 가장 중요한 임무인지도 모르겠다.


p.345

    자기 세대의 서러움을 껴안으려는 젊음의 열망은 시대의 더러움을 제거하려는 의지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역사에 면면한 개혁과 혁명의 요구도 이를 테면 오염에 대한 표백의 시도였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의 광풍 속에 '부품으로 태어나 노예로 죽을 팔자'인 작금의 젊은이들은 원자화된 채 자신 이외에 없애버릴 다른 무엇을 찾지 못한다. 비극과 재앙은 그처럼 싸움을 포기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이러한 세태를 냉정하면서도 치밀하게 묘파한 이 작품은 절망의 기록이다. 그러나 동시에 절박한 희망의 구조 요청이기도 하다. 난파하는 젊음의 위태로운 모스 부호를 해독하기 위해서는 먼저 점과 선의 약속을 이해해야 한다. 작가는 한시바삐 고립된 점을 이어 소통의 선을 그어야 함을 자살자와 그들의 어리석은 갈망을 통해 역설한다. 늑장을 부릴 시간이 없다. 오늘도 작중 인물을 닮은 젊은이들이 방향타도 없이, 그럼에도 그들의 것일 수밖에 없는 시대를 표류하고 있기에. -김별아(소설가)

 

           


매거진의 이전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