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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서재 Part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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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컹리 Jan 17. 2020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121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p.19

1.   "사람들을 꿰뚫어보는 것은 아주 쉽다. 하지만 그래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엘리아스 카네티의 말이다. 타인의 흠을 찾아내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 그러나 그것이 또 얼마나 무익한지를 암시하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면에서는 사람을 꿰뚫어보는 일을 중단하고자 하는 순간적인 의지 때문에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닐까─설혹 그 과정에서 눈이 약간 먼다고 하더라도? 냉소주의와 사랑이 스펙트럼의 양극단에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가끔 사랑에 빠지는 것은 습관화되다시피 한 맥빠지는 냉소주의에서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모든 갑작스러운 사랑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장점을 의도적으로 과장하는 면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과장 덕분에 우리는 습관이 된 비관주의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에게라면 결코 가능하지 않았을 믿음을 가지게 된 어떤 사람에게 우리 에너지를 집중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p.23

9.   정말 무서운 것은 나 자신을 용납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워하면서─어쩌면 그런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다른 사람은 끝도 없이 이상화할 수 있다는 것이……. 나도 클로이가 인간[이 말이 내포하는 모든 의미에서]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중단하고 싶었던 내 욕망도 용서받을 수 있지 않을까?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희망이 자기 인식에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있는 것─비겁함, 게으름, 부정직, 타협성, 끔찍한 어리석음 같은 것─을 상대에게서 발견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사랑에 빠진다. 우리는 선택한 사람 주위에 사랑의 방역선을 쳐놓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어떻게 된 일인지 우리가 가진 결함으로부터 자유롭고, 따라서 사랑스럽다고 결정해버린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서 우리 내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함을 찾으며,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합을 통하여 인간 종에 대한 불확실한 믿음[자기 인식에서 나온 모든 증거에 위배됨에도 불구하고]을 유지하고 싶어한다.


p.39

1.   가장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가장 쉽게 유혹할 수 있다는 것은 사랑의 아이러니 가운데 하나이다. 내가 클로이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 자신의 가치에 대한 모든 믿음을 잃었다는 뜻이다. 그녀와 비교하면 나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녀가 내 초라한 입에서 떨어지는 말 [그것도 내 혀가 풀려야 가능하겠지만] 가운데 몇 마디에 기꺼이 대꾸를 해주는 것도 영광인데, 하물며 나와 저녁 식사를 하기로 약속하고 또 아주 우아하게 차려입고 나왔다는 것["이 옷 괜찮아요?" 그녀는 차 안에서 묻더니 덧붙였다. "괜찮아야 돼요. 여섯 번씩이나 옷을 바꿔 입어볼 수는 없는 것 아니에요?"]은  최고의 영광이 아닌가.


p.41

4.   첫 번째 코스가 나왔다. 요리를 담은 접시들의 배치는 잘 꾸민 프랑스 정원 특유의 대칭성을 보여주었다.

   "너무 아름다워서 손대기가 그러네요." 클로이가 말하고는 [내가 그 느낌을 어떻게 알겠는가] 덧붙였다. "이런 구운 참치는 먹어본 적이 없어요."

   우리는 먹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자기에 나이프와 포크가 부딪히는 소리뿐이었다. 할 말이 없는 것 같았다. 클로이는 너무나 오랫동안 나의 유일한 생각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내가 그녀와 공유할 수 없는 하나의 생각이었다.

   침묵은 저주스러웠다. 매력적이지 않은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둘 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것은 상대가 따분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매력적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둘 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따분한 사람은 나 자신이 되고 만다.


P.43

7.   그런 서툰 질문들 [그래도 내가 물어보는 질문들 하나하나를 통하여 나는 그녀를 좀더 많이 알게 되는 것 같았다] 배후에는 가장 직접적인 질문으로 다가가려는 초조한 시도가 있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그리고 그것과 연결되는 "나는 누구여야 합니까?" 그러나 그런 직접적인 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내가 그렇게 하면 할수록, 내 연구 대상은 그물 사이로 빠져나가면서 자신이 무슨 신문을 읽는지, 무슨 음악을 좋아하는지만 알려주었다. 그런 것들을 안다고 해서 그녀가 "누구"인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P.48

14.   우리가 매력을 느끼는 것은 계획이 아니라 우연이다. 클로이가 어떤 행동을 했기에 내가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일까? 그녀에 대한 나의 사랑은 그녀의 정치적 입장이나 신중하게 고른 옷만큼이나 그녀가 웨이터에게 버터를 주문하는 모습이 귀엽다는 사실과도 관련을 맺고 있었다.

   가끔 여자들이 나를 유혹하려고 어떤 행동을 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내가 그런 행동에 반응을 보인 적은 거의 없었다. 나는 아주 주변적인 작은 것들에 끌리는 경향이 있었다. 유혹하는 여자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전면에 내세우지 못하는 것들. 나는 코 밑에 약간 솜털이 있는 여자를 사랑한 적이 있다. 보통 나는 여자의 콧수염에는 까다로운 편인데, 이상하게도 이 여자의 경우에는 거기에 매력을 느꼈다. 내 욕망은 그녀의 따뜻한 웃음, 긴 금발, 지적인 대화보다도 그 솜털이 있는 곳에 집중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나는 친구들과 그녀의 매력을 이야기하면서, 애써 그것이 그녀가 지니고 있는 뭐라고 규정할 수 없는 "분위기"와 관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내가 다름 아닌 코 밑의 솜털과 사랑에 빠졌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다시 그 여자를 만났을 때, 누가 전기분해 요법을 권했는지 솜털은 사라지고 없었다. 내 욕망도 [그녀의 다른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솜털을 따라서 사라져버렸다.


p.59

1.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에 빠져 어떤 사람[천사]를 보면서 그 사람과 함께 천국에서 누리는 기쁨을 상상할 때,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위험을 잊기 쉽다. 정작 상대가 나를 사랑해줄 경우에 그 사람의 매력이 순식간에 빛이 바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타락한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이상적인 사람과 함께 있고 싶어서 사랑을 한다. 그런데 그런 존재가 어느 날 마음을 바꾸어 나를 사랑한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 사람이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할 만하다고 인정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취향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인데, 그런 문제가 있는 사람이 어떻게 내가 바라던 대로 멋진 사람일 수 있을까?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상대가 나의 사랑에 보답을 할 때 잔인한 역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묻게 된다. "그/그녀가 정말로 그렇게 멋진 사람이라면,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p.62

7.   훌륭한 죽 같은 아침 식사 동안 나는 너무나 뻔한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어찌 된 일인지 그것은 나에게 예기치 못했던 일로, 아주 복잡한 일로 다가왔다. 다름 아니라, 내가 클로이에게 몇 주 동안 느껴오던 것을 크로이도 나에게 약간은 느끼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지만, 나는 그녀를 사랑하게 되면서 어쩐 일인지 보답을 받을 가능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었다. 나는 사랑받는 것보다 사랑하는 데에 더 무게를 두고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일에 집중했던 것은 아마도 사랑을 받는 것보닫는 사랑을 하는 것이 언제나 덜 복잡하기 때문일 것이며, 큐피드의 화살을 맞기보다 쏘는 것이, 받는 것보다는 주는 것이 쉽기 때문일 것이다.


p.70

21.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똑같은 요구를 공유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마음이 끌리는 상태의 핵심에 그 요구가 놓여 있다. 알베르 카뮈는 우리가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그 사람이 밖에서 보기에 매우 온전해 보이고 ─육체적으로 온전하고 감정적으로 "통합되어" 보이고─주관적으로 자신을 보면 몹시 분산되어 있고 혼란스럽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만일 우리 내부에 부족한 데가 전혀 없다면 우리는 사랑을 하지 않겠지만, 상대에게서도 비슷하게 부족한 데를 발견하면 불쾌감을 느낀다. 답을 찾기를 기대했지만, 우리 자신의 문제의 복사본만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p.92

12.   그러나 사랑과 사랑의 정치의 시작이 똑같이 장밋빛이라면, 그 마지막도 똑같이 핏빛이다. 우리는 정치적 사랑이 압제로 끝나는 현상, 진심으로 국가의 진정한 이익을 돌본다는 통치자의 강한 확신이 결국 자신에게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런 가책 없이 ["그들 자신을 위하여"] 모두 죽여도 좋다는 자신감으로 발전하는 현상에 이미 익숙하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사랑에 빠진 연인들도 자신의 좌절을 반대자와 이단자에게 분풀이하는 경향이 있다.


p.101

6.   내가 묘사할 수 있는 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클로이의 외모에 대한 나의 주관적 반응일 뿐이었다. 남들은 다른 몸에서 비슷한 완전성을 찾아낼 가능성을 인정하면서, 내 욕망이 머물게 된 지점들을 지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 나는 아름다움의 객관적 기준이라는 플라톤적 관념을 배격하고, 대신 미학적 판단은 "결정 근거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는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 나오는 견해에 동조할 수밖에 없다.


p.106

2.   어쩌면 클로이는 사랑의 고백을 기대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내가 한 번도 그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풀오버 스웨터는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랑의 증표일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우리 감정을 언어로 번역한 적이 없었다. 우리 관계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형성된 것이지만, 그럼에도 그 핵심을 어쩐 일인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 같았다. 너무 분명해서일 수도 있고, 너무 의미심장하여 말로는 표현할 수 없어서일 수도 있었다.


3.   클로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은 그래도 이해하기가 쉬웠다. 그녀는 말을 의심하는 사람이었다. "문제를 말하면 진짜로 문제가 생겨." 그녀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문제가 언어에서 생겨날 수 있듯이, 좋은 것들이 언어에 의해서 파괴될 수 있었다.


p.108

4.   그녀가 습관적으로 장밋빛에 저항하는 것을 볼 때, 내가 사랑의 고백을 했더라도 농담으로 대꾸하여 피해갔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런 식의 체계화는 완전한 상투어와 완전한 벌거벗음 둘 중의 하나로 흘러버릴 위험이 너무 커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클로이가 감정적이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그녀는 자신의 감정에 너무 신중하여 그것을 낭만주의자의 닳아빠진 사회적 언어로 말할 수가 없었을 뿐이다. 그녀의 감정들이 나를 향하고 있었음에도, 묘한 의미에서, 그 감정들은 내가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p.110

9.   내가 클로이에 대해 느낀다고 생각하는 것 가운데 얼마나 많은 부분이 그런 노래에 영향을 받았을까? 사랑한다는 나의 느낌은 그저 특정한 문화적 시기를 살기 때문에 나온 것이 아닐까? 내가 낭만적 사랑을 자랑하게 된 동기는 어떤 진정한 충동이 아니라 사회가 아니었을까? 이전의 다른 문화와 시대에서라면 내가 클로이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을 무시하라고 가르치지 않았을까. 현재의 문화에서 스타킹을 신고 싶은 충동이나 모욕을 당했을 때 결투로 맞서고 싶은 충동을 [대체로] 무시하고 가르치듯이.

   "어떤 사람들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면 절대로 사랑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라 로슈푸코의 말인데, 역사는 그의 말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가.


p.120

7.   두 눈이나 모양이 제대로 갖추어진 입에서 매력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슈퍼마켓 계산대 위에서 움직이는 여자의 손에서 매력을 찾아내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클로이의 몸짓들은 빙산의 일각처럼 그 밑에 놓인 것을 가리켰다. 그것의 진정한 가치, 호기심이 덜한 사람이나 사랑이 덜한 사람에게는 당연히 의미 없어 보일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서 바로 연인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p.122

12.   그러나 유아론에는 한계가 있다. 클로이에 대한 내 관점이 현실에 조금이라고 가까이 다가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완전히 판단력을 잃은 것일까? 물론 그녀는 나에게 사랑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도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사랑스러울까? 이것은 오래된 데카르트의 색깔 문제이다. 버스가 보는 사람 눈에는 빨간색으로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도, 본질적으로도 빨간색일가?


 p.128

3.   생존의 문제가 아닐 때에는 의심도 쉽다. 우리는 여유가 있는 만큼만 회의적일 수 있으며, 따라서 근본적으로 우리를 즈탱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 회의를 품는 것이 무척 쉽다. 탁자의 존재를 의삼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사랑의 정당성을 의심하게 되면 그것은 지옥이다.


p.161

5.   우리가 우리 짝과 얼마나 행복하든, 그 사랑 때문에 다른 사람을 쫓는 일은 방해를 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 짝을 진정으로 사랑하는데도 왜 그것이 구속으로 느껴지는 것일까? 짝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기울고 있는 것이 아닌데도, 왜 그것을 아쉬워할까? 살랑의 요구가 해결되었다고 해서 늘 갈망의 요구까지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p.190

5.   상대방에게 무엇 때문에 나를 사랑하게 되었느냐고 묻지 않는 것은 예의에 속한다. 개인적인 바람을 이야기하자면, 어떤 면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사실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다. 속성이나 특질을 넘어선 존재론적 지위 때문에 사랑을 받는 것이다. 사랑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은 부유함 속에서 사는 사람들처럼 애정/소유를 얻고 유지하는 수단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는 금기를 지켜야 한다. 사랑에서건 돈에서건 오직 빈곤만이 체제에 의문을 품게 한다. 그래서 아마 연인들은 위대한 혁명가가 되지 못하는 것 같다.


6.   어느 날 거리에서 불행한 여자 옆을 지나다가 클로이가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내가 저 여자처럼 얼굴에 커다란 점이 있었어도 나를 사랑했을 것 같아?" 그 질문에는 "그렇다"는 대답에 대한 갈망이 숨어 있다. 몸이라는 세속적인 표면,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비참하게도 어떻게 바꾸어볼 수 없는 표면보다 높은 곳에 사랑을 놓아달라는 요구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너의 재치나 재능이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아무런 조건 없이 네가 너이기 때문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너의 눈 색깔이나 다리의 길이나 수표책의 두께 때문이 아니라 네 영혼의 깊은 곳의 너 자신 때문이다. 연인이 외적 자산을 벗어버린 나를 좋아하고, 무엇을 이루었느냐에 관계없이 우리 존재의 본질을 평가해주고, 흔히 부모와 자식 사이에 존재한다고 말하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되풀이해주기를 바라는 갈망이다. 진정한 자아는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이다. 그 외에 우리의 이마에 점이 생긴다든가, 나이 때문에 몸이 시든다든가, 불황 때문에 파산을 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우리의 표면에 불과한 것에 손상을 주는 사고들에 대해서는 책임을 면제해주어야 한다. 설사 우리가 아름답고 부유하다고 해도, 이런 것들 때문에 사랑받고 싶어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서 그것이 사라지면 사랑도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이 내 얼굴보다는 머리를 칭찬해주기 바란다. 그러나 꼭 얼굴을 칭찬해야겠다면, [정적이고 피부조직에 기초를 둔] 코보다는 [운동신경과 근육이 통제하는] 미소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해주기 바란다. 내 소망은 내가 모든 것을 잃고 "나"만 남았다고 해도 사랑을 받고 싶은 것이다. 이 신비한 "나"는 가장 약한, 가장 상처받기 쉬운 지점에 자리잡은 자아로 간주된다. 내가 너한테 약해 보여도 될 만큼 나를 사랑하니? 모두가 힘을 사랑한다. 하지만 너는 내 약한 것 때문에 나를 사랑하니? 이것이 진짜 시험이다. 너는 내가 잃어버릴 수도 있는 모든 것을 벗어버린 나를 사랑하는가? 내가 영원히 가지고 있을 것들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가?


p.143

2.   어쩌면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하는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다는 것도. 본질적으로 우리는 사랑을 받기 전에는 온전하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3.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오직 인간만이 연체동물이나 지렁이와는 달리 자신을 규정하고 자의식을 얻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뜻이다.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어디에서 끝나고 다른 사람들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지 우리아게 보여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제대로 된 느낌에 이를 수 없다. "혼자서는 제대로 성격이 형성되지 않는다." 스탕달의 말이다. 성격의 기원은 우리의 말과 행동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반응에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의 자아는 유동체이기 때문에 이웃들이 윤곽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자신이 온전하다는 느낌을 얻으려면, 근처에 나 자신만큼 나를 잘 아는 사람, 때로는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


4.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제대로 된 정체성을 소유할 능력을 상실한다. 사랑 안에서 자아가 지속적으로 확인되기 때문이다. 많은 종교에서 우리를 볼 수 있는 신이라는 개념이 중심을 차지하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누가 나를 본다는 것은 내가 존재한다고 인정받는 것이다. 나를 보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신이나 짝이라면 더욱 좋다. 우리가 누구인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 우리의 역사를 수도 없이 말해주었는데도 우리가 결혼을 몇 번 했는지, 자식이 몇 명인지, 우리 이름이 브래드인지 빌인지, 카트리나인지 캐서린인지 자꾸 잊어버리는 [우리도 그들에 대해서 똑같이 잊어버린다] 사람들에 둘러싸여 살다가, 마음속에 우리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새겨두고 있는 사람의 품에서, 시야에서 사라질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피난처를 발견한다는 것은 위로가 되는 일이 아닐까?


5.   의미론적으로 볼 때 사랑과 관심이 거의 맞바꾸어 쓸 수 있는 말이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나는 나비를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는 "나는 나비에 관심이 많다"는 말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깊은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며, 그 관심으로 그 사람이 무엇을 하고 무슨 말을 하는지 스스로 더 풍부하게 느끼게 해 준다는 것이다. 클로이는 나를 이해하기 때문에 나에 대한 그녀의 행동에는 "나"의 확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요소들이 점차 늘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내 기분의 많은 부분을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것, 그녀가 내 취향을 아는 것, 그녀가 나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해주는 것, 그녀가 나의 일상과 습관을 기억하는 것, 그녀가 나의 공포증을 인정하는 것에는 다양한 "나"의 확인이 수도 없이 포함되어 있었다.


p.213

18.   일반 테러리스트들은 건물이나 초등학생들을 폭탄으로 날려보내 이따금씩 정부의 양보를 강요할 수 있지만, 낭만적 테러리스트들은 접근방법이 근본적으로 일관되지 않기 때문에 실망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낭만적 테러리스트는 말한다. 너는 나를 사랑해야 한다. 너한테 삐치거나 질투심을 일으켜서 나를 사랑하도록 만들겠다. 그러나 여기에서 역설이 생긴다. 만일 상대가 사랑을 보답한다면 그 즉시 그 사랑이 더럽혀진 것으로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낭만적 테러리스트는 이렇게 불평할 것이다. 내 강요 때문에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면, 나는 이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이 사랑은 자발적으로 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낭만적 테러리즘은 자신의 요구를 해소하는 과정에서 그 요구를 부정해버린다. 테러리스트는 결국 불편한 현실, 사랑의 죽음은 막을 수 없다는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p.220 

    네가 보고 싶을 거야. 우리가 함께 나눈 것들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어. 우리가 함께 보낸 몇 달을 사랑했어. 모든 것이 초현실적으로 뒤섞여 보여, 아침 식사, 점심 식사, 오후의 전화, 일렉트릭에서 보낸 심야, 켄싱턴 가든스 산책. 어떤 것도 그것을 망치게 하고 싶지는 않아. 사랑을 할 때 중요한 것은 시간의 길이가 아니야. 느끼는 것과 하는 일이 모두 강렬해진다는 것이 중요한 거지. 나에게 그 시간은 삶이 다른 데 가 있지 않았던 몇 번 안 되는 시간 가운데 하나야. 너는 나한테 언제나 아름다울 거야. 아침에 잠을 깨서 네가 옆에 있는 것이 얼마나 기분 좋았는지 잊지 못할 거야. 나는 너에게 계속 상처를 주고 싶지 않을 뿐이야. 천천히 상해가는 모습만은 보고 싶지 않았어.


p.221

8.   사랑의 거부가 종종 도덕적 언어, 옳고 그름의 언어, 선과 악의 언어의 틀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마치 거부하거나 거부하지 않는 것,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는 것이 당연히 윤리의 한 지류에 속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거부를 하는 사람에게는 악하다는 딱지가 붙고, 거부를 당한 사람은 선의 화신이 되는 일이 많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클로이와 나의 행동 양쪽에도 이런 도덕적 태도가 이 얼마간 드러났다. 클로이는 자신의 거부를 정리하면서 나를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악과 동일시했고,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것을 선의 증거로 여겼다. 따라서 내가 여전히 그녀 를 바란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나는 그녀에게 “너무 좋은” 사람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클로이가 그냥 예의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당 부분 진심을 토로하고 있다고 가정할 때, 그녀는 자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자신은 나에게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윤리적 결론을 내렸다. 그것 때문에 그녀는 나보다 가치가 적은 사람이 되었다. 나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한다고 느끼기 때문에 마음이 선한 남자였다.


9.   사랑의 거부가 아무리 불행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사랑을 이타성과 동일시하고 거부를 잔인성과 동일시할 수 있을까? 정말로 사랑을 선과 동일시하고 무관심을 악과 동일시 할 수 있을까? 내가 클로이를 사랑하는 것은 도덕적이고, 그녀가 나를 거부하는 것은 비도덕적일까? 그녀가 나를 거부하면서 죄책감을 느낀 것은 사랑을 내가 이타적으로 그녀에게 준 것으로 보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나의 선물에 이 기적인 동기가 있었다면, 클로이도 똑같이 이기적인 동기에서 관계를 끝내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사랑의 종말은 이타주의와 이기주의, 도덕성과 비도덕성 사이의 충돌이라기보다는 근본적으로 이기적인 두 충동 사이의 충돌로 나타난다.


10.   이마누엘 칸트에 따르면 도덕적 행동이 비도덕적 행동과 구별되는 것은 그것이 고통이나 쾌락과는 관계없이 의무감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 때문이다. 나의 행동에 대한 보 상을 고려하지 않고, 오직 의무감에만 인도되어 어떤 행동을 할 때 나는 도덕적이다. “어떤 행동이 도덕적으로 선하 기 위해서는 그것이 도덕률에 일치한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행동이 도덕률을 위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기질의 결과로 이루어진 행동은 도덕적이라고 할 수 없다. 이것은 경향에 기초한 도덕성이라는 공리주의적 관점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주장이다. 칸트 이론의 핵심은 도덕성이란 어떤 행동을 수행하는 동기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떤 예상되는 보답에 관계없이 사랑을 할 때에만, 사랑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사랑을 줄 때 에만 도덕적이다.



11.   내가 클로이를 부도덕하다고 말한 것은 그녀가 매일 그녀에게 위로, 격려, 지원, 애정을 주는 사람의 관심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가 이런 것에 퇴짜를 놓는다고 해서 도덕적인 의미에서 무슨 비난을 할 수 있을까? 큰 비용을 들이고 희생을 하여 선물을 줄 때 그것을 물리친다면 틀 림없이 비난이 뒤따를 것이다. 그러나 사랑을 주는 사람도 받을 때 느끼는 것과 같은 기쁨을 맛보았다면, 이것이 과연 도덕적인 언어를 사용할 문제일까? 사랑이 일차적으로 이기적인 동기에서 주어지는 것이라면즉 상대의 유익을 위한 마음에서 생겨났다고 하더라도 결국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 이라면, 적어도 칸트의 눈으로 볼 때 그것은 도덕적인 선물이 아니다. 내가 클로이를 사랑했다고 해서 내가 그녀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그렇지 않다. 비록 내 사랑에 희생이 포함되었다고 해도,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행복했기 때문에 그녀를 사랑했을 뿐이다. 나는 순교를 한 것이 아니다. 나는 의무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내 경향 에 완벽하게 들어맞았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했을 뿐이다.   


12.   우리는 공리주의자들처럼 사랑하며 시간을 보냈다. 침실에서 우리는 플라톤이나 칸트가 아니라 홉스와 벤담의 추종자였다. 우리는 초월적 가치가 아니라 선호에 기초해서 도덕적 판단을 했다. 홉스는 『법의 원리』에서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모든 사람은 자기를 즐겁게 하고 자기에게 기쁨을 주는 것을 선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자기를 불쾌하게 하는 것을 악이라고 부른다. 사람이란 그 기질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선과 악의 일반적 구별에서도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아가톤 하플로스, 즉 그냥 좋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13.   나는 클로이가 나를 불쾌하게 했기 때문에 클로이를 악이라고 불렀다. 그녀가 악한 존재로 타고났기 때문이 아니다. 나의 가치 시스템은 절대적 기준에 따라서 클로이의 범법을 설명한 것이라기보다는 어떤 상황을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나는 고전적인 도덕주의자의 잘못을 범한 셈인데, 니체는 이 점을 간결하게 요약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은 동기와 관계없이 오로지 그 유용하거나 해로운 결과 때문에 개별적 행동들을 선하거나 악하다고 부른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렇게 부르게 된 계기를 잊어버리 고, 선과 악이 결과에 관계없이 행동 자체에 내재된 특질이라고 믿게 된다.


    나는 나에게 쾌락을 주느냐 고통을 주느냐에 따라서 클로 이에게 어떤 도덕적 딱지를 붙일 것이냐를 결정했다. 나는 세계와 그녀가 이 세계 속에서 가지는 의무를 나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판단하는, 자기 중심적인 도학자였다. 나의 도덕률은 나의 욕망의 승화된 형태일 뿐이었다.


14.   나는 독선적인 절망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이렇게 물었다. “사랑받는 것이 내 권리이고, 나를 사랑하는 것이 클로이의 의무가 아닐까?” 클로이의 사랑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침대에 들어갔을 때 내 곁에 그녀가 있다는 것은 자유나 삶의 권리와 마찬가지로 중요했다. 정부가 그 두 가지를 나에게 보장해준다면, 왜 사랑의 권리는 보장해주지 않는가? 정부는 삶에 대한 권리와 언론의 자유를 그렇게 강조하 지만, 나는 그 삶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사람이 없다면 두 가지 모두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데. 사랑이 없다면,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다면, 산다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자유라는 것이 버림받을 자유를 의미한다면 자유란 대체 무엇인가?''


p.228

17.   사랑의 보답을 받을 수 없게 되자 사랑을 받고 싶다는 오만이 생겨났다. 나는 내 욕망만 가지고 홀로 남았다. 무방비 상태에, 아무런 권리도 없이, 도덕률도 초월해서, 충 격적일 정도로 어설픈 요구만 손에 든 모습으로, 나를 사랑해다오! 무슨 이유 때문에? 나에게는 흔히 써먹는 지질하고 빈약한 이유밖에 없었다.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p.240

7.   인간은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며, 그 바람에 자살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 되었다. 성난 개는 자살을 하지 않는다. 자신을 화나게 한 사람이나 물건을 물어뜯는다. 그러나 성난 인간은 침울하게 방 안에 틀어박혔다가 말없는 종이 한 장만을 남기고 총으로 자신을 쏜다. 인간은 상징적이고 비유적인 피조물이다. 나는 내 분노를 상징하려고 했다. 나는 클로이에게 상처를 주느니 차라리 나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쪽을 택했다. 나 자신을 죽여 그녀가 나한테 한 일이 무엇인지 내 몸으로 보여주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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