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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서재 Part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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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컹리 Jan 17. 2020

해변의 카프카

#121 무라카미 하루키 [해변의 카프카]


p.27   

    집을 떠나기 전에 욕실에서 비누로 손을 씻고 세수를 한다. 손톱을 자르고, 귀 청소를 하고, 이를 닦는다. 시간을 들여 될 수 있는 대로 몸을 깨꿋하게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깨끗하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때도 있다. 그러고 나서 세면대 거울 속의 내 얼굴을 주의 깊게 바라본다. 거기에는 내가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사실은  어머니 얼굴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유전으로 물려받은 얼굴이 있다. 아무리 거울 속의 표정을 무덤덤하게 바꾸고, 아무리 눈을 가늘게 떠서 표정을 바꾸어본다 해도, 아무리 근육을 몸에 붙인다 해도, 얼굴 모습을 바꿀 수는 없다. 또 아무리 간절하게 원해도, 아버지한테 물려받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길고 짙은 두 눈썹과, 그 사이에 깊게 파인 주름살을 지워버릴 수는 없다. 그렇게 하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아버지를 죽을 수도 있다(그건 현재의 내 힘으로는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머니를 기억에서 말살해 버릴 수도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예언이 있다. 그것은 장치로서 내 안에 묻혀 있다.

    그것은 장치로서 네 안에 묻혀 있다.

    나는 불을 끄고 욕실에서 나온다.

    집 안에는 무겁고 축축한 침묵이 감돌고 있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의 속삭임이고 죽은 사람들의 숨결이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고 멈춰 서서 심호흡을 한다. 시곗바늘은 오후 세 시를 지나있다. 그 두 개의 바늘은 무척 쌀쌀해 보인다. 그들은 중립적인 척하면서 내 편에 서 있지 않다. 이제 슬슬 이곳을 떠날 시간이다. 나는 소형 배낭을 집어 들고 어깨에 멘다. 몇 번이고 시험 삼아 어깨에 메어본 것이었는데도, 배낭은 여느 때보다 훨씬 더 무겁게 느껴진다.



p.90

    나는 자유다, 라고 생각한다. 눈을 감고, 내가 자유다, 라는 것에 대해 한동안 생각한다. 그러나 자유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나는 아직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지금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외톨이라는 사실뿐이다. 혼자 모르는 고장에 와 있다. 자석도 지도도 잃어버린 고독한 탐험가처럼. 자유란 이런 상태를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조차도 잘 모르겠다.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를 그만둔다.


p.124

    다만 아이들의 머릿속에서는 산속에서 의식을 잃었던 두 시간 동안의 기억이 상실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전원에게 공통된 사항입니다. 자신들이 쓰러졌을 때의 기억조차 없었습니다. 그 부분은 깨끗이 빠져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기억의 '상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누락'에 가까운 것입니다. 이것은 전문적인 용어가 아니고, 지금 편의상 사용하고 있을 뿐이만, '상실'과 '누락'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글쎄요, 철도 위를 달리고 있는 여러 차량이 연결된 화물 열차를 상상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중 한 칸에서 짐이 없어집니다. 이처럼 알맹이가 없는 텅 빈 화물칸이 '상실'입니다. 그리고 짐뿐만 아니라 화물차까지 몽땅 없어져버리는 것이 '누락'입니다. 


p.136

    나는 어떻게든 나 자신을 본래대로, 완전한 나로 봉합하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기저기로 찾아다니며, 나로부터 떨어져 나가 흩어진 파편을 긁어모아야만 한다. 조각조각 흩어진 지그소 퍼즐 조각을 하나씩 하나씩 정성껏 주워 모으듯이. 이건 처음 경험하는 일이 아니야, 하고 나는 생각한다. 전에도 이와 비슷한 감각을 어디선가 맛본 적이 있다. 그것이 언제 일이더라? 나는 기억을 더듬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 약한 기억의 실은 곧 끊어져버린다. 나는 눈을 감고 시간이 흘러가게 둔다.


p.342

    “우리는 지금 그 사실을 트집 잡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고 그녀가 말한다. 

    오시마 상은 가볍게 고개를 갸웃한다. 

    "다만 이 도서관에서는 모든 분류에서 남성 저자가 여성 저자보다 먼저 나와 있습니다” 하고 그녀는 말한다. “우리 생각으로는 이것은 남녀평등이라는 원칙에 반하며, 공평성이 결여된 조치입니다.” 

    오시마 상은 명함을 손에 들어 다시 한 번 거기에 있는 글자를 읽고 나서 카운터 위에 내려놓는다.

    “소가 상” 하고 오시마 상이 말한다. “학교에서 출석을 부를 때 소가 상은 다나카 상 앞이었고, 세키네 상 다음이었을 겁니다. 당신은 그 점에 대해 불평했습니까? 가끔은 거꾸로 불러달라고 항의했습니까? 알파벳의 G는 자기가 F의 다음이라고 화를 냅니까? 책의 68 페이지는 자기가 67페이지 다음에 있다고 혁명을 일으킵니까?”


p.347

    “너도 보고 싶어?” 하고 오시마 상은 나를 향해 말한다. 나는 잠자코 고개를 젓는다. 그는 그 신분증을 지갑에 집어넣은 뒤 바지 주머니에 넣는다. 그리고 카운터 책상 위에 두 손을 짚는다. “그 증명서를 봐서 아시겠지만 나는 생물학적으로나, 호적상으로나 엄연한 여자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의 주장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습니 다. 나는 당신이 말하는 전형적인 차별 주체로서의 남성적 남성은 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고 키가 큰 여성은 무엇인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뒷말이 이어지지 않는다. 키가 작은 쪽은 굳게 입을 닫고, 오른손 손가락으로 블라우스의 옷깃을 잡아당기고 있다. 

    “그러나 신체 구조는 여성이지만, 내 의식은 완전히 남성입니다” 하고 오시마 상은 계속한다. “나는 정신적으로는 하나의 남성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말하는 것은 역사적 사례로서는 옳을지도 모르며 나는 악명 높은 차별주의자일지도 모릅니다. 다만 나는 이런 모습은 하고 있어도 레즈비언은 아닙니다. 성적 기호로 말하면, 나는 남자를 좋아합니다. 즉 여성이면서 게이입니다. 버자이너(질)는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고, 성행위에는 항문을 사용합니다. 클리토리스는 느끼지만, 젖꼭지는 그다지 느끼지 못합니다. 생리도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무엇을 차별한단 말입니까? 누가 좀 가르쳐주시겠습니까?” 


p.351

    "나는 보다시피 이런 인간이다 보니 지금까지 여러 곳에서, 여러 의미에서 차별받아 왔어” 하고 오시마 상이 말한다. “차별당하는 심정이 어떤 것인지, 그것이 얼마나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것인지, 그것은 차별당해 본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지. 아픔이라는 것은 개별적인 것이어서, 그 뒤에는 개별적인 상처 자국이 남아. 그렇기 때문에 공평함이나 공정함을 추구하는 데에는 나도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해. 다만 내가 그것보다 더 짜증이 나는 것은, 상상력이 결여된 인간들 때문이야. T.S. 엘리엇이 말하는, '공허한 인간들' 이지. 상상력이 결여된 부분을, 공허한 부분을, 무감각한 지푸라기로 메운 주제에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바깥을 돌아다니는 인간이지. 그리고 그 무감각함을, 공허한 말을 늘어놓으면서, 타인에게 억지로 강요하려는 인간들이지. 즉 쉽게 말하자면, 조금 전 도서관의 실태를 조사하러 온 두 여성 같은 인간들이라구." 그는 한숨을 쉬고 손가락으로 긴 연필을 돌린다. 게이든, 레즈비언이든, 정상인이든, 페미니스트는, 파시스트의 돼지든, 공산주의자든, 힌두교 신자든,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어. 어떤 깃발을 내걸든 나는 전혀 상관하지 않아, 내가 견딜 수 없는 것은 그런 공허한 사람들이야. 그런 사람들과 부딪치며, 나는 참을 수가 없거든. 나도 모르게 하지 않아도 될 쓸데없는 말을 입에 담게 돼. 조금 전의 경우도 적당히 받아넘기고 적당히 맞장구를 쳤으면 됐을 텐데. 아니면, 사에키 상을 불러서 맡겼으면 됐을 텐데. 그녀라면 미소 띤 얼굴로 능숙하게 대처했을 거야. 그런데 나는 늘 그렇게 할 수가 없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마구 하는가 하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해버리거든. 자기 자신을 억제할 수가 없어. 그게 내 약점이야. 어째서 그게 약점이 되는지 알겠지?”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을 일일이 진지하게 상대하다가는 몸이 열 개 있어도 모자란다, 는 얘기인가요?" 하고 나는 말한다. 

    “그래, 맞아” 하고 오시마 상이 말한다. 그리고 연필의 지우개 부 분으로 가볍게 관자놀이를 누른다. “정말 그래. 하지만 다무라 카프카 군, 이것만은 기억해 두는 게 좋을 거야, 결국 사에키 상의 연인을 죽인 것도 그런 인간들임에 틀림없어. 상상력이 결여된 속 좁은 비관용성 독불장군 같은 계급 투쟁의 운동 방침, 공허한 말들, 찬탈된 이상, 경직된 시스템. 내가 정말로 두려운 것은 그런 것들이야. 나는 그런 것을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증오해. 무엇이 옳고, 옳지 않은가─물론 그것도 매우 중요한 문제지. 그러나 그런 개별적인 판단은 혹시 잘못되었더라도 나중에 정정할 수가 있어. 잘못을 스스로 인정할 용기만 있다면 대개의 경우는 돌이킬 수 있지. 그러나 상상력이 결여된 속 좁은 것이나 관용할 줄 모르는 것은 기생충과 마찬가지거든. 중간 숙주를 바꾸고 형태를 바꾸어서 끝없이 이어져가는 거야. 거기에는 구원이 없어. 나는 그런 종류의 인간을 여기에 들여놓고 싶지는 않아."

    오시마 상은 연필 끝으로 서가를 가리킨다. 물론 그는 도서관 전체를 말하는 것이다.

    "나는 그런 것을 적당하게 웃어넘길 수가 없어."


p.383

    “그렇게 되면, 나는.....”

    목소리에는 필요한 무게가 결여되어 있다. 내가 입에 담은 말은 갈 곳을 찾지 못한 채 공허한 공간으로 빨려 들어간다. 오시마 상은 의자에서 일어나 내 옆에 와서 앉는다.

    나는 말한다. “오시마 상, 내 주위에서 잇따라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나요. 그중의 어떤 것은 내가 선택한 일이고, 어떤 것은 전혀 선택하지 않은 일이에요. 하지만 나는 그 두 가지를 잘 구별할 수가

없게 됐어요. 즉 내가 선택했다고 생각한 일도, 실제로는 내가 그 일을 선택하기 전에 이미 일어나기로 정해져 있던 것처럼 생각돼요. 나는 다만 누군가가 미리 어딘가에서 정한 것을, 그냥 그대로 따르고 있을 뿐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아무리 스스로 생각하고, 아무리 애써 보았자 그런 것은 전부 헛일이라고 말예요. 아니, 노력하면 할수록 내가 점점 더 내가 아니게 되어가는 것 같은 느낌조차 들어요. 내가 나 자신의 궤도로부터 멀어져가는 것 같은 느낌 말이에 요. 그리고 그건 나에게 아주 힘든 일이거든요. 아니, 무섭다고 하는 편이 맞을지도 몰라요.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때때로 온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아요."

    오시마 상은 손을 뻗어 내 어깨 위에 올려놓는다. 나는 그 손바닥 의 온기를 느낄 수가 있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즉 네 선택이나 노력이 헛수고로 끝나도록 운명 지어져 있다 하더라도, 그래도 너는 조금도 어김없는 너인 거고, 너 이외의 아무도 아닌 거야. 너는 너로서 틀림없이 앞으로 전진하고 있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는 눈을 들어 오시마 상의 얼굴을 본다. 그의 말에는 뭔지 모를 설득력이 있다. 


p.389

    나는 깊이 숨을 들이마신다. 그리고 내가 지금부터 입에 담아야할 말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물론 확인할 것까지도 없이 그건 거기에 있다. 그건 언제나 거기에 있다. 하지만 나는 다시 그 비중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말한다. “너는 언젠가 그 손으로 아버지를 죽이고, 언젠가 어머니와 관계를 맺게 될 것이다. 라고." 

    그 말을 일단 입 밖에 내버리자, 새삼스럽게 형태가 있는 말로 만들어버리자, 내 마음속에 커다란 공동空洞이 생긴 것 같은 허전한 감각이 생겨난다. 그 가공의 공동 속에서, 내 심장은 금속적이고 공허한 소리를 내고 있다. 오시마 상은 표정을 바꾸지 않고 한참 동안 내 얼굴을 본다.


p.391

    “그렇게 하면 네가 큰 상처를 입을 텐데도?"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아버지에게 나는 어쩌면 하나의 작품에 지나지 않았을 거예요. 조각과 마찬가지로, 만든 다음 부숴버리는 상처를 내든 그건 아버지의 자유인 거죠.”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내 생각으론 무척 일그러진 사고방식 같은데" 하고 오시마 상은 말한다.

    "오시마 상, 내가 자란 곳에서는 모든 것이 일그러져 있었어요. 모든 게 다 너무 심하게 일그러져 있어서요, 똑바른 것이 오히려 비뚤어져 보일 정도였지요. 오래전부터 그것을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나는 어린애였고 거기밖에 있을 곳이 없었거든요.” 

    오시마 상이 말한다. “네 아버지 작품을 지금까지 몇 번인가 실제로 본 일이 있지. 재능 있는 뛰어난 조각가이시지. 독창적이고, 도전적이며, 시류에 흐르지 않고, 힘에 차 있지. 네 아버지가 만든 것은 틀림없는 진짜였어.”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오시마 상, 그런 것을 끄집어내고 난 기에 남는 찌꺼기를, 독毒 같은 것을, 아버지는 주위에 마구 뿌려놓기로 했었어요. 아버지는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을 모두 오염시키고 상처를 안겨주었던 거지요. 아버지가 원해서 그렇게 했는지 어떤지 나는 알 수가 없어요. 그저 무슨 까닭인지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건지도 모르겠고, 애당초 그렇게 만들어진 사람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나 어느 쪽이든 간에, 아버지는 그런 의미에서는 특별한 어떤 것과 결부되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내가 말하고 싶은 걸 알겠어요?"

    "알 것 같아" 하고 오시마 상은 말한다. "그 어떤 것이란 어쩌면 선이라든가 악이라는 엄격한 구별을 초월한 거야. 힘의 원천이라고 하면 될지도 모르겠네."



p.20

    나가타 상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식을 집중하여 호시노 상의 허리뼈에 갖다 댄 두 엄지손가락 위치를 주의 깊게 확인했다. 위치가 정해지자 처음에는 반응을 보면서 서서히 힘을 더해 갔다. 그러고나서 문득 숨을 들이쉬고, 겨울 철새 같은 짧은 소리를 내며 온몸의 힘을 다해 뼈와 근육 사이로 손가락을 힘껏 밀어 넣었다. 그때 청년이 느낀 아픔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머릿속에 거대한 섬광이 번쩍 지나가고, 거의 의식을 잃을 뻔했다. 숨이 딱 멈췄다. 높은 탑 꼭대기에서 지옥의 나락을 향해 단숨에 추락하는 것 가튼 기분이었다. 비명을 지를 수 조차 없다. 너무 아파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잆었다. 모든 사고가 불타서 튕겨 나가고, 모든 감각은 아픔 속으로 집약되었다. 온몬의 틀이 단번에 조각조각 분해되어 버린 것 같았다. 죽음조차도 이처럼 파괴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눈을 뜰 수도 없다. 엎드린 채 꼼짝 못하고 다다미 위에 침을 질질 흘렸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런 끔찍한 상태가 삼십 초쯤 계속 되었다.

    그러고 나서 청년은 가까스로 숨을 들이마시고 팔꿈치를 짚고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방바닥이 폭풍 전의 바다처럼 흔들흔들 불길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아프셨습니까?"

    청년은 아직 자기가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듯이 머리를 천천히 몇 번인가 흔들었다. "이건 아픈 정도가 아니야. 껍질을 벗기고, 꼬챙이로 찌르고, 맷돌에 갈고, 그 위를 화난 소 떼가 달려간 것 같은 기분이라구. 도대체 무슨 짓을 한거야?"


p.30

    그래, 넌 무척 기묘한 장소에 세워져 있지. 너는 이미 다시는 찾아볼 수 없게 된 소녀의 모습에 사랑을 느끼고, 이미 죽어버린 소년을 질투하고 있는 거야. 그럼에도 그 상념은 지금까지 네가 현실에서 체험한 어떤 감정보다도 훨씬 더 생생하고 애절한 것이지. 그리고 거기에는 출구가 없어. 출구를 발견할 가능성조차 없는 거야. 너는 시간의 미궁 속에 빠져버린 거다. 가장 큰 문제는, 네가 그 시간의 미궁 속에서 빠져나오고 싶은 생각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야. 그렇지?


p.53

    "호시노 상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나카타도 그렇게 해볼 생각입니다. 여러 사람에게 물어보고 다니겠습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가타는 머리가 좋지 않아서 물어보는 데는 익숙합니다."

    "그렇지. 물어보는 것은 한때의 수치, 물어보지 않는 것은 평생의 수치, 라는 말을 우리 할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말했지."

    "정말 그렇습니다. 죽어버리면 알고 있는 것도 전부 없어져버립니다."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구" 하고 청년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말했다.


p.108

    "지금 내가 잠정적으로 인간의 형태를 하고 여기 나타났으나 신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애당초 감정이 없는 존재니까, 인간과는 다른 마음의 움직임을 갖고 있다, 그런 뜻일세."

    "그러니까" 하고 청년은 말했다. "어쨌든 아저씨는 인간도 아니고, 신도 부처도 아니란 말이지?"

    "'나는 본래 신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고로 비정하다. 비정한 존재로서 인간의 선악을 따지고, 그것을 따라야 할 이유가 없도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신도 부처도 아니니까 인간의 선악을 판단할 필요가 없다, 또한 선악의 기준에 따라 행동할 필요도 없다는 말일세."

    "그러니까 아저씨는 선악을 뛰어넘는 존재로군."

    "호시노 짱, 그건 지나친 칭찬 같아. 딱히 선악을 뛰어넘은 건 아니야. 다만 관계가 없을 뿐이지.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가,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내가 원하는 단 한 가지, 내가 맡고 있는 역할을 완전히 끝내는 일이지. 나는 매우 실용적인 존재일세. 말하자면 중립적 객체인 게야."


p.114

    "호시노 짱, 모든 물체는 이동중에 있네. 지구도 시간도 개념도 사랑도 생명도 신념도 정의도 악도, 모든 사물은 액상적이고 과도적인 것일세. 한 장소에 하나의 형태로 영원히 머물러 있는 것은 없다네. 우주 자체가 거대한 구로네코 택배라네."


p.174

    "어젯밤에 다무라 군 방에서 우리 사이에 일어났던 일도 아마 그런 움직임 중 하나였을 거라고 생각해. 어젯밤에 우리가 한 일이 옳은 일이었는지 아닌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어. 하지만 그때 나는 이제 억지로 무언가를 판단하는 일은 그만두자고 결심했어. 만일 거기에 흐름이 있다면, 그 흐름이 이끄는 대로 계속 떠내려가자고 생각했지."

    "사에키 상에 대해 제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말해도 괜찮겠습니까?"

    "물론 괜찮지."

    "사에키 상이 하려는 것은 아마도 잃어버린 시간을 메우는 일일겁니다."

    그녀는 그 말에 대해서 잠시 생각하고 있다. "그럴지도 모르지"하고 그녀는 말한다. "하지만 다무라 군이 어떻게 그것을 알지?"

    "어쩌면 저도 같은 일을 하고 있으니까요."

    "잃어버린 시간을 메우는 일?"

    "그렇습니다" 하고 나는 말한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꽤 많은 것을 빼앗겨왔습니다. 수많은 소중한 것들을 말입니다. 저는 지금 조금이나마 그것을 되찾아야 합니다."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저에게 필요합니다. 사람에게는 되돌아갈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합니다. 지금이라면 아직 늦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에게나 사에키 상에게나요."


p.191

    푸르니에의 유려하고 기품 있는 첼로 연주에 귀를 기울이면서, 청년은 어렸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 매일 근처의 강에 가서 물고기나 미꾸라지를 잡던 시절의 일을. 그때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됐었는데,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냥 살아가면 되었다. 살아 있는 날까지, 나는 어떤 존재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자연히 그렇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어느새 그렇지 않게 되었다. 살아가면서 점점 나는 아무 존재도 아닌 것이 되고 말았다. 그것 참 이상한 얘기로군, 인간이란 살기 위해 태어나는 것이 아닌가? 그렇잖아? 그런데도 살아가면 갈수록 나는 알맹이리를 잃어간다, 그저 텅 빈 인간이 되어가는 것 같다. 게다가 앞으로 살아가면 갈수록 나는 더욱더 텅 비고 무가치한 인간이 되어갈지도 모른다. 그건 잘못된 것이다. 그건 말도 안되는 이야기다. 그런 사고의 흐름을 어디에선가 바꿔놓을 수는 없을까?


p.207

    "하지만 산속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죠?"

    "바람 소리를 듣고 있으면 돼" 하고 그는 말한다. "나는 늘 그렇게 하고 있어."

    나는 그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본다.

    오시마 상은 손을 뻗어 내 손을 다정하게 잡는다.

    "여러 가지 이상한 일들은 네 탓이 아니야. 내 탓도 아니고. 예언 탓도 아니고, 저주 탓도 아니지. DNA 탓도 아니고, 부조리 탓도 아니고, 구조주의 탓도 아니고, 제3차 산업혁명 탓도 아니야. 우리들이 모두 멸망하고 상실되어 가는 것은, 세계의 구조 자체가 멸망과 상실의 터전 위에 성립되어 있기 때문이지. 우리의 존재는 그 원리의 그림자놀이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아. 바람은 불지. 미친듯이 불어대는 강한 바람이 있고, 기분 좋은 산들바람이 있어. 그러나 모든 바람은 언젠가는 없어지고 사라져. 바람은 물체가 아니야. 그것은 이동하는 공기의 총칭에 지나니 않아. 너는 귀를 기울이고 그 메타포를 이해하는 거야."


p.287

    "그렇다면 한 가지 묻겠는데, 음악에는 사람을 변하게 하는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말하자면 어떤 때, 어떤 음악을 듣고, 그 때문에 자기 내부에 있는 무엇인가가 크게 확 변해 버리는, 그런 일 말입니다."

    오시마 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론이죠" 하고 대답했다. "그런 일은 있습니다. 무언가를 경험하고, 그것에 의해 우리 내부에서 무언가가 일어납니다. 화학작용 같은 것이지요. 그리고 그 후에 우리는 자기 자신을 점검하고, 거기에 있는 모든 눈금이 한 단계 위로 올라간 것을 알게 됩니다. 자기의 세계가 한 단계 더 넓어졌다는 것을요.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물론 드물기는 합니다만, 가끔은 있습니다. 연애외 마찬가지입니다."

    호시노 청년은 그런 거창한 연애를 한 경험은 없었지만, 어쨌든 고개를 끄덕였다.


p.303

    "너는 그렇게 함으로써 너에게 내린 저주를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그렇지? 그러나 과연 그렇게 됐을까?" 하고 까마귀 소년이 묻는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되었을까? 너는 아버지라는 존재를 죽이고, 어머니라는 존재를 범하고, 누나라는 존재를 범했어. 너는 예언을 대충 실행했지. 너는 그것으로 아버지가 너에게 씌웠던 저주가 끝나리라고 생각했을 거야.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어. 극복되지도 않았어. 그 저주는 오히려 전보다 더 짙게 네 정신에 깊이 새겨져 있지. 너는 이제 그것을 알 거야. 네 유전자는 지금도 그 저주로 가득 차있어. 그것은 네가 쉬는 숨이 되어 사방에서 부는 바람을 타고, 전 세계에 뿌려지고 있지. 네 속의 어두운 혼란은 변함없이 거기 있어. 그렇지 않아? 네가 품어왔던 공포도 분노도 불안감도 전혀 사라지지 않았어. 그 모든 것은 아직도 네 속에 있으면서 네 마음을 집요하게 괴롭히고 있지.


    "잘 들어, 싸움을 끝내기 위한 싸움이란 어디에도 없어" 하고 까마귀 소년이 말한다. "싸움은 싸움 자체 속에서 성장해 가거든. 그것은 폭력에 의해 흐른 피를 마시고, 폭력에 의해 상처 입은 살을 뜯어 먹으며 성장해 가지. 싸움이라는 것은 일종의 완정 생물이야. 너는 거것을 알아야 해."  (중략)

    "글쎄, 네가 해야 할 일은 아마도 네 속에 있는 공포와 분노를 극복하는 일일 거야" 하고 까마구 소년이 말한다. "거기에 밝은 빛을 집 어넣어서 네 마음의 차가워진 부분을 녹이는 거지. 그것이 진짜로 터프해지는 거야. 그렇게 해야 비로소 너는 세계에서 가장 터프한 열다섯 살 소년이 될 수 있어. 내가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아니, 지금이라면 너는 분명히 자기 자신을 되찾을 수 있어. 머리를 써서 생각하는 거야.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해야 해. 너는 결코 바보가 아니야. 생각하는 것은 할 수 있잖아."


p.306

    나는 숲의 한가운데에 발을 들여놓는다. 나는 속이 텅 빈 인간이다. 나는 실체를 잡아먹는 공백이다. 그러니까 더 이상 두려워해야 할 것은 없다.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나는 숲의 중심에 발을 들여놓는다.


p.308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나가타에게는 추억이라는 건 하나도 없습니다. 그건 나카타가 머리가 나쁘기 때문입니다. 추억이라는 것은 도대체 어떠한 것입니까?"

    사에키 상은 책상 위에 올려놓은 자기 두 손을 보고 나서 다시 나카타 상의 얼굴을 보았다. "추억이란 당신의 몸을 안쪽에서부터 따뜻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당신의 몸을 안쪽으로부터 심하게 갈기갈기 찢어놓는 것이기도 합니다."


p.311

    "나가타에게는 그림자가 반밖에 없습니다. 사에키 상처럼 말입니다."

    "네."

    "나카타는 그것을 어렸을 때 겪은 전쟁에서 잃어버렸습니다.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왜 나카타가 그런 일을 당해야 했는지, 나카타는 잘 모릅니다. 어쨌든 그로부터 상당히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우리는 이제 서서히 여기를 떠나야만 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나카타는 오래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나카타에게는 추억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에키 상이 말씀하시는 '괴롭다'고 하는 마음을 나카타는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카타가 생각하기에는 아무리 그것이 괴롭다 해도 사에키 상은 그 추억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네" 하고 사에키 상은 말했다. "그래요. 그것을 끌어안고 사는 것이 아무리 괴로워도 살아 있는 한 저는 그 기억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요. 그것이 젝 살아왔다는 유일한 의미이고 증거니까요."


p.319

    가까운 시일에 이런 날이 찾아오리라는 각오는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이렇게 실제로 망자가 된 사에키 상과 단둘이 조용한 방에 남겨지자,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마음이 몹시 메말라 있었다. 나는 이 사람을 필요로 하고 있었는데, 하고 오시마 상은 생각했다. 아마도 내 속에 있는 공백을 메우기 위해 이 사람의 존재를 필요로 하고 있었어. 하지만 나는 이 사람이 안고 있던 공백을 메울 수는 없었어. 마지막 순간까지 사에키 상의 공백은 그녀만의 것이었다.


p.342

    "생각해 보니까 그 가운데서도 제일 이상한 것은 누가 뭐래도 아저씨야. 그래, 나카타 상이라구. 왜 아저씨가 이상하냐 하면 음, 아저씨는 나라는 인간을 바꿔버렸기 때문이지. 불과 열흘 동안에 나는 엄청나게 변했어. 뭐라고 할까, 여러 가지로 주위를 보는 눈이 많이 달라진 것 같아. 지금까지 그냥 대충 보던 것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구. 지금까지 조금도 재미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음악이 묵직하게 마음에 스며드는 거야. 그리고 그런 느낌을 누군가, 비슷한 것을 알고 있는 사람과 얘기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거든. 이런 일은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이야. 그래서 말인데, 왜 그렇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니까, 그것은 내가 줄곧 나카타 상 옆에 있었기 때문인 거야. 물론 하나에서 열까지 다 나카타 상의 눈을 통해 본 것은 아니지만 뭐랄까, 극히 자연스럽게 나는 아저씨의 눈을 통해서 여러 가지 것을 보고 있었던 거야. 왜 그렇게 했느냐 하면, 아저씨의 세계를 보는 자세가 꽤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지. 그래서 나는, 이 호시노는 여기까지 아저씨를 계속 따라온 게 아닐까? 아저씨와 헤어질 수가 없었어. 그것은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일어난 일 가운데서 제일 알맹이가 있는 일이야. 거기에 대해서는 오히려 내 쪽에서 아저씨에게 감사해야지. 그러니까 아저씨는 타한테 고마워할 필요가 없다구. 물론 감사하다는 말을 들으니까 기분은 나쁘지 않지만 말야.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나카타 상은 나한테 대단히 좋은 일을 해주었다는 거야. 아저씨,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러나 나카타 상은 이미 얘기를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눈을 감고 코를 규칙적으로 골고 있었다.

    "이 사람은 정말이지 마음이 편해서 좋겠군." 호시노 상은 한숨을 쉬었다.


p.374

    청년은 거실의 소파에 앉아서 하는 일 없이 시간을 보냈다. 음악을 들을 기분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책을 읽을 기분도 아니었다. 석양이 찾아와 방 구석구석이 점점 어두워져도 일어나서 불을 켜라고도 하지 않았다. 온몬에서 힘이 쭉 빠져버린 듯 일단 한고에 주저앉으니까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시간은 천천히 찾아왔다가 천천히 지나갔다. 이따금 청년의 눈을 피해 몰래 되돌아오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p.407

    "나는 먼 옛날에 버려서는 안 될 것을 버렸어" 하고 사에키 상이 말한다. "내가 무엇보다도 사랑하던 것을. 나는 언젠가 그것을 잃어버리게 될 것을 두려워했던 거야. 그래서 내 손으로 그것을 버릴 수 밖에 없었어. 빼앗기거나 어떤 우연한 일로 사라져버릴 거라면, 차라리 내가 버리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한 거지. 물론 거기에는 사라지지 않는 분노의 감정도 있었어. 하지만 그건 잘못된 일이었어. 그것은 결코 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었어."


p.411

    거리에는 역시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분지를 가로지르며 아름다운 강이 흐르고, 거리를 따라 조그만 건물들이 들어서 있고, 같은 간격으로 늘어선 전봇대가 땅바닥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나는 한순간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린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곳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다못해 저녁때까지만이라도 거기에 머물러 있자. 저녁때가 되면 즈크 자루를 든 소녀가 내 방으로 찾아온다. 내가 필요로 하면 그녀는 언제든지 거기 있다. 가슴이 갑자기 뜨거워지고, 강한 자력이 나를 뒤로 잡아당긴다. 다리가 마치 납을 집어넣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여기를 지나버리면 이제 두 번 다시 그녀를 만날 수 없다. 나는 멈춰 선다. 나는 시간의 발자취를 놓쳐버린다. 앞서 걸어가는 병사들의 등에 대고 말을 하려고 한다. 나는 돌아가지 않겠어요, 계속 여기에 머무르겠어요, 하고. 그러나 그 말은 소리가 되지 않는다. 말은 생명을 잃어버리고 있다.

    나는 그때 공백과 공백 사이에 껴 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구분할 수가 없다. 내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조차도 알 수 없다. 나는 격심한 모래 바람 가운데 혼자 있다. 내가 뻗은 손끝조차도 안 보인다. 어느 쪽으로도 갈 수가 없다. 벼를 부순 것 같은 흰 모래가 나를 완전히 둘러싸고 있다. 그러나 사에키 상이 어디에선가 나에게 말을 건다. "그래도 너는 역시 돌아가야만 해"하고 사에키 상은 단호하게 말한다. "내가 그것을 원하고 있어. 네가 거기에 있기를 내가 원해."


p.441

    "무슨 뜻이이라고 생각하는지 말해 볼래?"

    "말로 설명해 보았자 그곳에 있는 것을 올바로 전할 수 없기 때문에 말을 못한다는 것 아닌가?"

    "맞아. 바로 그런 말이야"라고 사다 상은 말한다. "잘 맞쳤어. 말로 설명해도 올바로 전달되지 않는 건 아예 말하지 않는 게 제일 좋지."

    "가령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그럴까요?" 하고 나는 반문한다.

    "그래. 설령 자기 자신에게도 말이야" 하고 사다 상이 대답한다.

    "자기 자신에게도 아마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p.449

    "그렇게 해도 괜찮을 것 같은 느낌이 점점 들더라구요."

    "도망쳐 다녀보았자 아무 데도 갈 수 없으니까."

    "아무도 그럴 거예요" 하고 나는 말한다.

    "너는 많이 성장한 것 같군" 하고 그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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