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정인성 [반도체 제국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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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회사들이 다른 제조업과 구분되는 가장 큰 차이점은 기술력이 미치는 영향력이 막대하다는 것이다. 다른 일반 제조업의 경우, 기술력이 부족한 회사는 사업장을 이동하여 임금 등의 다른 원가 요소를 아껴 순이익을 확보하거나, 주 경쟁 기업의 빈틈을 파고들어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등으 전략을 사용할 수 있다. 동네에 잘나가는 1등 빵집은 빵의 재료를 더 싸게 구매할 수 있고, 규모가 커서 숙련도나 효율성도 높다. 이런 경우 2등 빵집은 1등이 만들지 않는 신상품인 자연효모 빵이나, 초콜릿 빵 등을 만들어 소수 고객을 공략하는 등의 선택이 가능하다. 정 안 된다면 해당 지역의 경쟁을 피하여 임대료와 인건비가 싼 곳으로 옮겨보는 선택도 가능하다.
하지만 반도체 시장은 그렇지 않다. 기술력이 원가에 미치는 영향은 상상할 수 없는 수준으로 매우 높기 때문이다. 2015년 기준 1MB 메모리 가격은 약 0.0042달러다. 1980년에는 6480달러였으니 무려 100만 배가 넘게 가격이 하락한 것이다. 원가 역시 그만큼 감소했다. 임금 등 다른 투입 요소를 1년에 10&도 절약하기 힘든 것을 생각하면 이는 그야말로 경학할 만한 수치다.
빵집에서 밀가루를 더 쓰지 않고 더 많은 빵을 만들 방법은 없다. 하지만 반도체 회사는 설계를 바꾸고, 신형 노광장비 등을 도입하여 차기 미세공정으로 넘어가게 되면 원재료인 웨이엎 위에 기존보다 수십 %가 넘는 반도체를 추가로 배치할 수 이쓴 잠재력을 가지게 된다.
게다가 이는 상당 기간 지속 가능한 방법이다. 계속해서 차기 공정으로 넘어감에 따라, 트랜지스터당 원재료비 및 인건비가 기하급수적으로 감소하게 된다. 게다가 동일 면적에 집적된 트랜지스터는 전력 소모량이 같다는 데너드 스케일링Dennard scailing이라는 악마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기술이 앞서는 회사는 전력 소모 등의 특성도 앞서가게 된다. 같은 면적 안에 트랜지스터가 100개이건 1만 개이건 전력 소모가 같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술이 앞서가는 회사는 집적도를 올려 원가를 극단적으로 낮추거나, 남는 웨이퍼 면적 일부를 이용하여 전력을 절약하는 회로 등을 부착해 특성을 개선하는 등, 선택지가 매우 다양해진다.
뿐만 아니라 반도체는 부피가 작고 부가가치가 높다. 때문에 빵집과는 달리 원가가 앞서는 단일 회사가 세계 수요의 상당 부분을 제조한 뒤, 항공운송 등으로 실어 나를 수가 있다. 지리적 장벽을 기반으로 달아날 수도 없는 것이다. 최고의 기술력을 가진 자는 최고의 성능과 가장 싼 원가를 동시에 가질 수 있으며, 경쟁을 피할 방법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다른 재화들이 가지지 못한 매우 살벌한 특성이다.
p.39
기술력의 영향력과 고정비용이 크다는 반도체 시장의 두 가지 특징은 모든 상품이 균질하다는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특징과 합쳐지면 매우 살벌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p.119
흥미롭게도 컴퓨팅 시장의 표준을 제시했던 IBM에게 있어 이러한 오픈 어키텍처는 장기적으로 독이 되고 말았다. 오픈 아키텍처로 PC 시장에 새로운 지평을 연 것까지는 좋았으나, IBM 이를 다른 회사들이 따라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결국 IBM PC들이 개성을 잃고 시장에서 도태된 것이다 .이후 IBM은 이러한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다시 폐쇄적인 PS/2 아키텍처를 만들어 시장의 주도권을 유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는 이미 비가역적으로 변해버린 PC 시장에서는 의미가 없는 행동이었다. 결과적으로 해당 플랫폼의 주도권은 인텔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IBM 호환 PC는 'IBM조차도 거역할 수 없는' 규칙이 되어버린 것이다.
PS/2의 흔적은 이제 PC 뒤편의 USB에 밀려 거의 쓰이지 않는 키보드/마우스용 규격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PC 시장에서 IBM의 영향력은 절대자에서 그저 그런 컴퓨터 제조사로 전락하였다. 다행스러운 것은 IBM에게 있어 PC 시장은 다양한 사업 영역 중 하나일 뿐이었으며, 아직도 많은 능력이 가지고 있다. IBM은 지금까지도 메인프레임 시장의 절대자로 남아 있다.
이 시점에 인텔은 두 가지 중요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 하나는 당시 회사 매출의 큰 비중을 차지했지만, 일본 회사들과의 치열한 경쟁이 붙은 D램 사업을 포기하고 모든 인력을 CPU에 투입하는 것이었다. 이와 동시에 타사에 더 이상 인텔 신형 80386 프로세서의 생산을 맡기지 않았다. 인텔을 왕좌에 올렸던 8088 프로세서를 위탁 생산하던 회사는 AMD, NEC, 후치즈 등 10개 가까이 되었다. 이러한 아웃소싱을 통해 인텔은 웨이퍼 고장을 상대적으로 작게 유지할 수 있었지만, 밸류 체인의 상당 부분을 위탁 생산 중이던 회사들에게 나눠줘야만 했다. 뿐만 아니라 훗날 AMD가 인텔 x86의 유일한 경쟁자로 남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인텔의 CPU 설계 역량은 크게 향상되었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인텔의 설계가 타사에 새어나가지 않게 되었다. 또한 물론 사실상 전 세계의 PC CPU의 설계부터 제조까지 벨류 체인을 장악할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p.125
성능을 높이는 한 가지 방법은 클럭을 높이는 것이었다. 신형 노광기 등 최신의 제조 장비를 빠르게 도입하여 미세공정의 품질을 높이고, 이를 통해 셀의 크기를 줄이고 누설 전류와 발열을 억제시켜 CPU의 최대 스위칭 속도를 높이는 것이다. 이를 통해 클럭이 2배 높아지면 동일한 구조의 CPU 성능도 약 2배로 향상된다. 자동차로 따지면 단순히 자동차의 최대 속도가 2배 올라가는 것과 같다. 물론 이는 공짜로 할 수는 없는 것이며, 이를 위해 새로운 물질들을 지속적으로 발굴해야 했다. 또한 설계 측면에서는 지속적으로 한 덩어리였던 하드웨어 블록을 여러 개로 쪼개야 했다(이를 파이프라인이라 한다). 트랜지스터의 스위칭 속도는 물리적으로 전류으 전달 속도보다 빠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스위칭 속도가 빨라짐에 따라 한 개의 하드웨어 블록이 동일한 시점에 동일한 상태를 공유할 수 없게 되었다.
p.141
인텔의 IA-64 이행 실패는 표준이 정립된 시장에서 움직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었다. 또 한 가지는 생태계를 뒤집어엎는 혁신의 이해 당사자를 조율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것이었다. 인텔의 제안은 장기적으로는 전체 반도체 시장의 효율을 높이는 제안이었지만, 인텔은 고객들에게 매해 치열한 시장 경쟁에서 타사보다 나은 성능을 제공해야 했다. 또한 소프트웨어 회사들은 컴파일러의 발전 및 자신들과 관계가 있는 회사들의 이행 계획을 눈치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다른 한 가지는 경쟁자의 존재였다. 만약 인텔이 과점 기업이 아닌 100% 독점 기업이었다면 이러한 변화를 밀어붙일 수는 있었을 것이다. 호환성을 엎으면서 생겨날 여러 문제를 고객들에게 떠넘기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문제는 능력 있는 경쟁자인 AMD가 살아 있었다는 것이다. 인텔이 경쟁자를 무시하고 차기 생태계를 향해 움직이려 할 때 AMD는 고객사들이 겪는 문제점을 빠르게 파악하여 빈틈을 찔렀다. 그리고 새로운 생태계로의 이행 자체를 불필요하게 만들어버렸다. 인텔의 허를 찔러 힘을 얻은 AMD는 이후 듀얼코어 맨체스터를 개발하면서 시장의 우위를 점하였으며, 이 시기 인텔은 비순차 처리 엔진보다는 클럭 상승에 집중하는 잘못된 설계 방향을 잡았다. 이로 인해 클럭에 비해 낮은 성능을 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발열도 심해져 펜티엄4 프레스캇은 '프레스 핫'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다. 반면 AMD는 승승장구하였으며, 2005년 기준 40%가 넘는 시장점유율을 차지할 정도로 성장했다. 인텔 CPU의 성능은 최저가 라인에서부터 최고가 라인업까지 AMD에게 열세를 면치 못했다.
이는 생태계의 지배자로서는 뼈아픈 실패였으며, 카피캣이 원조를 밀어내는 순간이었다. 인텔은 절치부심하며 반격을 준비했다. 펜티엄4 프레스캇의 다음 세대로 예정되었던 5Ghz 이상의 작동 속도를 가지는 설계였던 코드명 테자스Tejas와 제이호크Jayhawk를 폐기했다. 인텔은 펜티엄 4의 설계 사상을 포기하고, 구형 펜티엄 3의 설계를 이은 새로운 CPU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p.175
공짜 점심이 사라지다 : 설계 제조의 난이도 증가
21세기에 접어들면서 반도체 제조 시장에는 서서히 위기의 전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반도체 집적에 무한에 가까운 자유를 가져다주던 데너드 스케일링이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불화 아르곤 레이저의 후계자로 거론되던 EUV의 도입은 5년이 넘게 밀려났으며, 회로가 수십 nm 단위로 미세화함에 따라 차츰 양자역학적 효과가 크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셀과 배선 사이에서는 기생 회로들의 효과가 커지기 시작하여 미세 누설전류의 양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는 전성비(전력 대 성능비) 개선의 감소로 나타나게 되어, 점점 반도체의 열밀도가 올라가게 되었다.
이제 반도체 회사들은 집적도를 올릴 때마다 동일 면적에서 일어나는 발열이 커지는 것을 감내해야 했다. 분명 트랜지스터 당 사용하는 전력이 감소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과거와는 달리 같은 면적의 반도체임에도 더 큰 열을 발생하는 것이다. 이는 반도체의 특성 관리와 쿨링, 전력 공급에 큰 어려움을 불러오게 되었다. 칩 전체를 완전히 가동하는 것은 점점 더 힘들어 졌으며, 이젠 고성능의 작업을 하고 있을 때 필요 없는 회로들을 꺼야 될 수도 있었다.
p.179
인텔은 칩 간의 2차원 연결을 지원하는 EMIB 기술 및 3차원 연결을 하는 보베로스 계획을 발표했다. 기존 단일 미세공정으로 칩 전체를 처리하던 제조 방식에서 어느 정도는 벗어나, 미세공정의 영향을 덜 받는 IO 등을 구세대 공정으로 제조한 뒤, 고성능 인터커넥트인 EMIB를 통해 칩 사이를 연결하는 칠렛 chiple 방식을 함께 도입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그림 2-4)를 보면 인텔은 CPU와 그래픽 등 성능이 중요한 부분에는 고성능의 10나노 공정을 사용하고, 입출력단이나 메모리 컨트롤러 등에는 좀 더 구세대 공정을 사용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연결된 작은 칩들 위로 또 다른 칩들을 쌓아 올림으로써 패키지의 면적을 아끼는 한편, 고밀도를 달성하고, 단일 패키지 내에 많은 기능을 통합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이를 통해 대형 단일 칩 제조로 인한 수율 저하를 이겨내는 한편, 기존이라면 가동률이 떨어질 구세대 공정의 재사용성을 높이고, 단일 칩이 가지고 있는 고속의 통신 능력도 유지할 수 있다. 실제로도 칩의 특정 부분은 영향을 크게 받아 크게 미세화되지만, IO와 같은 부분은 잘 미세화되지 않는다.
p.242
스마트폰 태동기인 2009년부터 아이폰 4s가 등장하는 2011년까지, 인텔의 최저 전력 프로세서들은 여전히 35W 가까운 최대 전력을 소모하고 있었다. 문제는 애플이 처음 스마트폰은을 계획했을 때 필요로 한 전력 소모량은 그의 10분의 1 정도였다는 것이다. 최초 아이폰은 약 1,400mAh의 전력만을 저장할 수 있었으며, 이는 노트북의 10분의 1 정도에 해당하는 초라한 양이었다. 애플은 깎아낼 수 있는 모든 것을 깎아내야만 하는 상황이었따. 뿐만 아니라 기존 10인치가 넘던 노트북의 기능 중 상당 부분을 손바닥만 한 사이즈에 합쳐야 했기 때문에, 공간 확보도 절실했다.
<그림 2-28>은 2013년 출시된 인텔의 4세대 프로세서인 하스웰과 같은 시기에 출시된 ARM의 Cortex A15의 크기를 비교한 것이다. 인텔 22나노로 생산된 하스웰 코어의 면적이 14.5mm2인 반면, TSMC 28나노로 생산된 Cortex A15는 2.7mm2밖에 되지 않는다. 미세공정 차이를 감안한다면, 실제 코어의 크기 차이는 더욱 클 것이다. 물론 인텔의 CPU는 거대한 IO 및 거대한 캐시 메모리를 고성능 셀로 구성한 성능 중심의 세팅이다. 반면, ARM은 상대적으로 고밀도 셀로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필요 없는 것을 많이 다이어트한 형태다. 중요한 사실은 하스웰의 성능이 A15보다 몇 배가 뛰어나건 간에 스마트폰에는 탑재하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라이트급 복싱 경기가 큰 인기를 끌고 있는데 헤비급 챔피언을 데려와 봤자 출전할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인텔은 폐쇄적인 설계 툴과 제조 공정을 가지고 있었다. 칩의 설계도는 외부로 공개될 일이 없었으며, 칩의 일부만을 튜닝하여 빠르게 내놓을 프로세스도 갖춰지지 않았다. 칩의 특정 부분을 포기하고 잘라내는 방식으로 저전력 요구를 맞출 수가 없었다. 인텔은 단시간 내에 15W 미만의 전력을 소모하는 칩을 만들 수 없었다. 과거에 영광을 가져다주었던 비즈니스 모델이 드디어 인텔의 발목을 잡게 된 것이다.
거인인 인텔이 웹서핑만 가능한 수준의 저전력 저성능 칩을 공급할 수 있던 그 시기, 인텔의 눈에 띄였던 것은 당시 삼성전자의 S5L8900였다. 이 프로세서는 애플이 요구하는 전력 소모량과 크기를 맞출 수 있는 AP였다. 이 AP의 성능은 인텔에 비하면 형편없지만, 전력 소모가 적을 뿐만 아니라 칩 사이즈도 작았다. 뿐만 아니라 이미 AP에 eD램이 부착되어 별도의 D램을 와이어링해 붙일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패키징 기술이 크게 발전하지 않았던 당시에는 굉장한 장점이었다. 이는 이전부터 내부 사용이나 외부 판매를 위해 반도체 설계 및 파운드리 사업과 칩 패키징까지 하고 있던 삼성전자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칩은 인텔의 x86 대신 ARM의 ISA를 쓰고 있었다. 이전부터 ARM은 저전력을 필요로 하는 소형 공유기 등의 제어를 위해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저전력 AP는 필요 없는 로직을 제거하기 쉬었던 ARM의 설계를 전체 또는 일부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고, 당연하게도 ARM의 ISA를 사용하고 있었다. 최초의 스마트폰이 태동하던 시절, 최초로 그 땅을 밟은 것은 인텔이 아닌 ARM이었던 것이다. 이후 모바일 생태계는 과거 IBM 호환 PC 시절에 그러했듯이 ARM을 기반으로 성장하게 될 것이었다. 손바닥 위의 인터넷이 공고했던 x86 기반의 소프트웨어 생태계에 ARM의 교두보를 열어준 것이다 .이렇게 인텔은 신대륙에 최초로 발을 디딜 기회를 잃고 말았다.
p.271
GPU의 사실상 유일한 경쟁자였던 AMD는 CPU와 GPU 모두를 가지고 있어서 컴퓨팅에서 더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가능성이 잇었으나, CPU에서의 실패로 인해 스스로 주저앉게 되면서 존재감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엔비디아는 GPU 기반의 컴퓨팅에서 경쟁할 자가 없는 자리에 서게 되었다.
심지어 인텔이나 ARM도 GPU라는 테두리 안에서는 엔비디아에게 몇 수 접어주어야만 했다. ARM의 말리는 대형 하드웨어를 두고 고성능 컴퓨팅을 제대로 시도해본 일이 없다. 인텔은 라라비 Larrabee라고 부르는 x86 기반의 병렬 프로세서를 개발하려 했으나 제대로 된 성능을 내지 못하여 계획을 전면 재검토해야 했다. 자연스럽게 경쟁자들이 사라지자, 엔비디아는 이 분야의 최강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현재 엔비디아는 팹리스로서는 퀄컴, 브로드컴 바로 뒤에 위치하고 있다. 앞의 두 회사가 모뎀부터 AP 등 수많은 컨트롤러를 판매하는 회사임을 감안했을 때, 차지할 수 있는 거의 최고의 위상으로 떠오른 것이다. CPU도 같이 파는 AMD는 매출로는 엔비디아의
60~70%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이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엔비디아는 늘어난 고객들과 높아진 연산력, 신뢰성 요구사항 덕분에 기존 하드코어 게이머 Enthusiast를 압도하는 더 큰 지불 용의를 가진 고객들을 대하게 되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TSMC의 최첨단 공정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기존 하드코어 게이머들의 지불 용의라고 해봤자 수백만 원이었지만, 엔터프라이즈 고객들은 억 단위의 돈을 지불할 용의가 있었다. 지금의 테슬라 Tesla 기반 GPU는 스마트폰 AP와 같은 최첨단 공정을 사용하여 출시되며, 시장도 PC에서 서버, 자율주행 자동차까지 매우 넓어졌다. 그래픽이라는 지역의 단순한 강자에서, 반도체 시장의 다크호스로 떠오른 엔비디아는 그야말로 백조가 된 미운오리 새끼라 할 수 있다.
엔비디아는 기존의 광대하던 PC 게이밍 시장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시대가 변화하면서 슈퍼컴퓨팅, 서버, 자율주행차 등 수많은 분야에서 PC게이밍을 능가하는 광대한 성장 시장을 차지했다. 비록 테그라Tegra라고 불리웠던 모바일 시장향 칩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실패했지만, 이는 앞에서 언급된 거대한 성공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하다. 엔비디아가 놓친 시장은 콘텐츠 소비용 디바이스일 뿐이고, 새로 차지한 시장은 컴퓨팅을 고강도로 수행하는 부가가치가 넘치는 시장이기 때문이다.
p.274
하지만 이 회사의 위상은 스마트폰이 대두하면서 크게 변화했다. 스마트폰의 심장인 AP가 점점 더 저전력, 고성능을 요구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태블릿 등으로 영역을 넓히게 되면서 단순 제조 위탁의 자리에 있던 TSMC의 위상도 변하게 되었다. AP들의 최종적인 성능은 각 AP 회사의 설계뿐만 아니라 TSMC가 제공하는 공정에도 큰 영향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AP 회사들은 TSMC가 양산 1년 전에 발표하는 셀 특성을 보고 어떤 공정으로 자신들이 설계한 칩을 제조하면 시장의 요구에 부응하는지를 결정해야 한다. TSMC는 자신의 고객사들이 잠재적 경쟁자인 인텔 등에게 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빠르게 신공정을 도입하는 한편, 설계 회사들이 원할만한 여러 특성의 트랜지스터를 만들어내야만 한다.
이러한 위상 변화 덕분에 TSMC는 과거의 사업 모델을 더욱 강화하면서도 정교화할 수 있게 되었다. 본래 TSMC의 사업 모델 중 상당 부분은 구세대 공정을 한참 동안 사용하는 것이었는데, 모바일 혁명 이후 이러한 일을 더욱 쉽게 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반도체의 수요가 완제품 PC뿐만 아니라 수많은 마이크로컨트롤러와 AI 가속을 위한 가속기까지 뻗쳐나가게 되자, 구 공정에도 수많은 첨단 고부가가치 칩 생산 수요가 몰리게 된 것이다. 이 시기에 생겨난 수많은 작은 회사는 칩의 설계를 매해 바꾸기에는 큰 부담을 느끼는 경우도 있었다. TSMC는 이러한 회사들을 위해 구 공정에서 만든 설계를 거의 재활용하면서도 성능과 면적은 개선하는 공정들을 개발해나가고
있다. 〈그림 2-39)는 삼성전자가 발표한 파운드리 전략인데, TSMC 역시 유사한 전략을 취하고 있다.
TSMC는 이러한 장점을 더욱 적극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면 첨단 7nm 공정에서는 하이엔드 스마트폰용 AP와 CPU, 엔비디아의 GPGPU를 위탁 생산하고, 14~28nm 정도의 구세대 공정에서는 중간급 스마트폰용 AP와 고용량 SSD 등에 사용할 대형 마이크로컨트롤러 등 소위 가성비 라인에 해당하는 제품과 주변 부품을 위한 칩을 위탁 생산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모든 업체에 도움이 되었다. 첨단 공정은 분명 성능도 좋고 가격도 싸긴 하지만, 이는 대량으로 판매할 때의 이야기다. 첨단 공정으로 칩을 설계하는 것은 칩을 새로운 위험에 노출시킬 뿐 아니라, 값싸진 트랜지스터들의 용도를 정하고 더욱 늘어난 하드웨어 블록들을 검증해야 하는 어려움이 생겨나게 된다. 뿐만 아니라 TSMC 자신의 사정으로 공정 도입이 늦어지거나 수율 안정화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 로드맵이 전체적으로 밀리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이런 큰 위험을 버틸 수 있는 회사들이 선제적으로 신기술에 달려들 수 있다. 이들은 컴퓨팅의 최전선에 있기 때문에 이런 위험이 실제로 일어나더라도 충분한 매출과 순이익을 누릴 수 있다.
p.278
이렇게 사실상 단 둘만이 남은 파운드리 시장이기에 TSMC의 미래는 아주 밝다. 주문은 끊이지 않을 것이고, 매출은 지속적으로 발생할 것이다. 후발주자인 삼성전자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과점화된 시장의 특성상 두 플레이어가 한쪽이 죽을 때까지 치킨게임을 벌일 수는 없을 것이다. TSMC가 삼성전자 파운드리를 죽이기에는 반도체 회사로서 삼성전자의 체급은 너무나 압도적이다. 그리고 삼성전자가 TSMC를 공격한다면 고객사들이 공급선 다변화라는 명목으로 균형을 맞출 것이다.
다만 TSMC의 아쉬운 점은 영원히 수요를 먼저 만드는 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의 매출은 수많은 팹리스에 달렸다. TSMC는 시장에 스마트폰 같은 매우 새로운 아이디어나, 가상화폐 채굴처럼 엄청난 칩 수요를 스스로 만들어낼 수는 없다. 공장은 많지만 로직 설계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마이크로컨트롤러 시장에 진출할 수도 없다. 또한 빈 공장을 이용해 메모리 시장에 진출하기엔 기존 메모리 IDM의 압도적 원가 경쟁력을 이길 수도 없다. 설령 시도한다 하더라도, 기존 고객들의 큰 반발을 사게 될 것이다. 이미 삼성전자가 퀄컴으로부터 그러한 항의를 받은 예가 있다.
p.285
기존 가전 및 IT 업체들과 비교되는 삼성전자의 가장 큰 특징은 압도적 수직 계열화를 통한 최적화 및 부가가치 흡수 능력이다. 삼성전자는 전자부품의 상당 부분에서 세계 최고이거나 이에 준하는 수준의 기술력과 생산 능력을 갖추고 있다. 스마트폰의 예를 들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림 2-43>을 보면 타사들이 디스플레이, AP 설계 등 핵심 부품의 일부만을 밸류 체인에 내재화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삼성전자는 거의 모든 부품을 가지고 있다. (저장소, D램, 디스플레이, AP설계, AP제조, 전자제품, OS)
디스플레이, AP, 메모리는 한 분야에서도 세계 톱 수준의 경쟁력을 가지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고려할 때 삼성전자가 타사들에 대해 가진 압도적 우위를 짐작할 수 있다. 삼성전자는 강력한 자체 공급망을 통해 세계 톱 티어 수준의 부품들을 쉽게 확보할 뿐만 아니라, 외부 공급사에 대한 강력한 협상력을 얻어낸다.
강력한 자체 공급망을 통해 초기부터 제품 조합에서 올 수 있는 문제를 인지하여 최적화를 진행하고, 최종 판매 제품에서 나오는 부가가치를 대량으로 흡수할 수 있다. 또한 대부분의 경우 회사 내부에 대안 부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부품 구매 시에도 높은 가격 협상력을 가질 수 있다.
p.295
삼성전자는 2015년에 삼성페이를 최초로 선보였다. 당시 국내 모바일 페이 시장은 답보 상태에 있었다. 모든 스마트폰은 NFC라는 칩을 탑재해서 사실상 신용카드의 기능을 대신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소매점에 보급된 단말기들이 그렇지 않았다. 소매점 단말기들은 이미 MST 기반의 기기들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었고, 대부분의 플라스틱 신용카드 역시 MST를 사
용했기 때문에 딱히 불편함이 없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많은 회사가 개별적으로 가맹 협약을 하거나, QR 코드나 바코드 기반의 시스템을 사용했다. 당연하지만 이는 시스템적으로나 범용성으로나 진정한 의미의 모바일 결제라고 할 수 없었다. 실제 금전이 금융망을 통해 오고 가는 것도 아닐 뿐만 아니라, 가맹에 가입되지 않은 곳에서는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스마트폰 업체와 구글을 포함한 소프트웨어 업체들은 NFC 단말기의 보급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삼성전자는 이런 상황을 미리 인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는 하드웨어 업체인 루프페이 LoopPay를 인수했고, 이를 통해 MST 방식의 카드를 모사할 수 있는 자기장 발생장치의 제반 기술을 확보할 수 있었다. 삼성전자는 이 자기장 발생장치를 자사 스마트폰 플래그십 모델에 탑재하는 동시에, 은행권과 연계하여 가상카드를 통한 결제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삼성전자는 삼성페이를 통해 수수료 장사를 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함으로써 은행권과 카드사들의 지지를 끌어냈다. 최초로 호환성 문제가 전혀 없는 온라인 페이가 탄생한 것이다. 삼성페이는 급속히 보급되었으며, 삼성 스마트폰의 킬러 앱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가까운 곳에 나갈 때 스마트폰 하나만 휴대하면 되는 시대를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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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시장 상황에서 중국의 SMIC가 대적해야 할 상대는 TSMC와 삼성전자다. TSMC는 파운드리 시장의 절대적인 강자로 군림하고 있으며, 수많은 EDA 툴 업체와 FPGA 업체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대형 고객들에게 잘 알려진 신뢰성과 기존 설계의 재사용성 덕분에 TSMC와 함께 일했던 회사들은 계속 TSMC에 남아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반드시 옮겨야 할 강력한 이유가 없다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삼성전자의 경우 파운드리 매출 자체는 자사 물량을 제외할 경우 글로벌 파운드리, UMC와 비슷한 수준이지만, 종합 반도체 회사로서의 삼성전자는 TSMC와 SMIC 두 회사와는 체급 자체가 다르다. 이 두 파운드리의 연 매출은 5조 원 수준인 반면, 삼성전자의 반도체 사업 매출은 매해 80조 원 가까이 되며 순이익은 20조 원이 넘는다. 연구개발이나 장비 도입에 사용할 수 있는 현금의 차이가 클 뿐만 아니라, AP부터 각종 마이크로컨트롤러까지 최소한의 가동률을 유지시켜줄 자체 소요 물량도 어마어마하다. 뿐만 아니라 비효율적으로 도입된 장비의 일부를 메모리 사업으로 돌리는 등의 효율화(삼성전자가 쓰는 단어로는 라인 재조정)도 가능하다.
글로벌파운드리의 사업 재조정 선언 이후, 글로벌파운드리가 영위하던 고성능 칩 사업의 일부는 삼성전자에게 넘어왔다. IBM은 글로벌파운드리의 전략 변화 이후 자사의 첨단 메인프레임 프로세서를 차기 삼성 EUV 라인에서 생산할 것임을 밝혔다. 삼성전자 입장에서는 세계 최고성능의 칩 제조를 위탁받은 것이다. 이는 삼성전자가 십수 년간 IBM과 함께 공정 개발을 해왔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조만간에 파운드리 시장에서도 중국은 선택을 강요당하게 될 것이다. 이미 톱 플레이어들 중 2개의 플레이어가 사실상 첨단 공정으로의 진출을 포기했고, 곧 중국도 선택을 내려야 할 것이다. TSMC, 삼성과 자웅을 겨루는 제3의 파운드리를 설립하기 위한 행동을 시작하거나, 아니면 그대로 있는 것이다. 전자를 선택하면 대규모 장비 투자뿐만 아니라, 고객의 편의를 증대시킴과 동시에 신뢰를 쌓고 개발 일정과 웨이퍼 분량을 준수하는 등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의 비즈니스를 시작하고 오랜 시간 버텨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역시나 글로벌 경쟁에 노출되어 있는 팹리스 고객들이 떠나가거나 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후자의 경우 지금처럼 그대로 하면 되지만, 역시나 중국이 굴기라고 부를 만큼 엄청난 성과라고는 할 수 없다. 자국 IT 산업의 가장 핵심부에는 여전히 서구 선진국의 반도체가 사용되고 있을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