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김수아 홍종윤 [지금 여기 힙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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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합 및 대중음악 평론가 블럭(박준우)은 2014년 한 강연에서 "가난도 스펙이 되는 시대"라는 표현을 썼다. 그는 과거의 가난과 고통이 힙합에서 일종의 서사 기능을 한다고 말했다.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표현하는 것이 생애사적 성격을 지닌 힙합의 고유한 서사이자 매력이라고 짚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대부분의 한국 힙합 가사는 생애사적 맥락보다는, 단순한 성공의 과시나 노력하는 자가 성공한다는 신자유주의 자기계발론에 그쳐 있다.
한국 힙합은 어떻게 자기계발 서사의 장이 될 수 있었을까. 이는 한국 사회가 1990년대 후반부터 신자유주의적 계발 주체들을 생산해 낸 것과 무관하지 않다. 무한 경쟁을 통해 명예와 부를 획득하고, 성공을 이룬 자만이 기억된다는 논리, 한국 힙합은 이러한 신자유주의 시대 자기계발 서사와 맞물려 독특한 모습을 갖추어 나가게 된다. 불안한 시대를 겪어 내며, 어떻게든 성공해야 한다는 욕망이 한국 청년들을 뒤덮는다.
힙합의 주제가 '가난한 청년'인 경우 성공은 더욱 극적인 효과를 낸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절, '개천에서 용 났다'는 의미로 어려운 집안 사정에도 열심히 공부해 가계를 일으킨 일명 '개룡남'이 성공 신화로 회자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한국식 힙합 스웨거'는 이처럼 일종의 과거 시험을 통과하고 장원 급제한 사람의 금의환향 퍼레이드가 됐다. 그가 몰락한 양반가의 자손이라면 더욱 의미가 커지는 장원 급제 설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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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정체성; 모방 vs 독창
한편 힙합 음악의 출발점과 유행이 모두 미국에서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곡과 가사 작법의 독창성 논란은 끊이지 않는다. 케이팝의 경우에는 이미 해외 작곡가의 곡을 구매하여 한국말을 붙이는 등 글로벌한 음악 산업을 지향하고 있지만, 힙합은 늘 미국을 모방하다는 비판에 부딪힌다. 진정한 힙합은 단순 모방이 아닌 독창적인 작법에 있다. 사실 혼종성을 숙명으로 하는 대중음악의 진정성 문제는, 실제로 존재한다기보다 수용 과정에서 나타난다.
p.45
사적 관계에서의 불만, 음악적 견해나 다른 래퍼에 대한 비판, 정치적 입장 표명이 모두 랩으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은 억지스럽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힙합이 모방하고자 하는 전범인 미국 래퍼들은 SNS를 통해 심심찮게 디스 혹은 비프를 주고받는다. 하지만 한국 힙합 수용자들은 랩으로 진행되는 대결만이 진정하다고 주장하는 편이다. 'Show and Prove' 정신은 힙합 문화의 중요한 태도를 보여 준다. 그러나 이 의미가 래퍼의 모든 표현은 랩이어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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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가난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힙합 음악의 진정성을 이루는 기반일 수는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일리네어 레코즈의 성공은 한국 힙합의 진정성 개념에 일정 정도 변화를 가져왔다. 이들은 산업에 영합하는 것이 아닌 '허슬hustle"을 통해 돈을 벌고 있다는 점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허슬은 미 국 힙합에서 마약, 갱단 활동 등 무슨 수를 써서든 돈 버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경제가 상향 평준화되면서 '열심히 일한다'는 의미로 변화하기 시작했고, 특히 한국에서는 일리네어 레코즈의 래퍼 도끼가 허슬이란 단어를 자주 사용하면서 력과 열정이라는 의미로 변용됐다.
도끼는 2017년에 발표한 곡 힙합 러버Hiphop Lover)에서 “적어도 그런 배은망덕한 짓은 난 안 해 여전히 깨끗한 무지 티에 목숨을 걸어 TV 무대 밖에서도 난 목걸일 목에 걸어 이 건 힙합인 척 하는 악세사리 아닌 컬쳐” 라고 말한다. 자신은 힙합을 배신한 적 없다, 다시 말해 돈을 위해 힙합을 판 적 없 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허슬 즉, 힙합의 진정성은 앨범 숫자로도 환원된다. 스윙스는 컨트롤 디스전에서 믹스테이프가 한 개뿐인 어글리덕을 당당하게 비난할 수 있었다. 사이먼 도미닉 역시 현재 힙합 커뮤니티에서 가장 비난받는 래퍼 중 한 명으로 거론되고 있다. 2015년 8월 이후 정규 앨범을 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힙합의 진정성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p.56
물론 혹자의 주장처럼 가부장제적 성차별이 전부 힙합의 책임인 것은 아니다. 힙합 음악은 뿌리 깊은 가부장제, 남성 우월주의와 여기서 파생된 여성 혐오의 정서 구조를 드러낸 대중문화의 한 영역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음악 장르가 여 성 혐오적인 가사를 양산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할 수 는 없다. 또한 장르의 진정성이 미국에 기원한다고 할지라도, 힙합의 여성 혐오가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혐오는 이해와 모방의 대상이 아니라 비판의 대상이어야 한다.
한편 여성 혐오의 핵심 기제는 대상화다. 대상화는 인간 의 인격과 주체적 판단, 자율성을 부인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p.64
불경의 정치 전략
비단 힙합만이 아니라 대중문화의 전 영역에서 여성 대상화와 여성 비하, 여성에 대한 편견은 비판받아 왔다. 그런데 이 문제는 특히 힙합이라는 장르에서 좀 더 자주, 그리고 강력하게 제기된다. 상업화된 힙합 음악이 남성과 여성의 전형적인 성 역할을 지정하고 강화하며, 이를 뮤직비디오 등을 통해 전시하면서 여성의 성 상품화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힙합에서 여성은 주체가 아닌 대상이거나 발화하지 않는(못하는) 열등한 존재로 취급된다. 인종과 성차별에 대해 연구하는 사회 학자 마가렛 헌터 Margaret Hunter는 이에 대해 “상업적 랩 음악은 가사나 뮤직비디오가 정형화되어 있어서 특정한 젠더 이데올로기를 내포하며, 성적이고 젠더화된 각본을 전달한다" 고 말한다. 그러면서 현재 힙합은 “흑인 범죄자를 팔지만 흑 인 지식인은 존재하지 않으며, 여성 댄서를 팔지만 여성 래퍼 는 없다”고 주장한다.
p.69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들(여성래퍼)이 보여 주는 정체성 수행이다. 여성이라는 성별을 정체성의 자원으로 활용하는가? 그렇다면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대해 어떤 담론이 구성되는가? 니키 미나즈는 랩을 하는 동시에 자신의 큰 가슴과 엉덩이를 강조한다. 그의 퍼포먼스 뒤에는 남성의 대상화를 위한 행동인지, 아니면 여성의 성적 자율성을 확실하게 드러내기 위한 행위인지에 관한 논란이 따라붙는다. 여성 래퍼를 이야기할 때 늘 '여성'이 강조된다는 점도 문제다. 여성 래퍼들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남성 래퍼와 똑같이 잘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한다.
반면 남성 래퍼는 남성성을 의식적으로 구성하려 하지않아도 된다. 남성이라는 지배적 성의 특권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힙합 장르에서 남성성은 기준이 되고, 기준으로서 정상화된다. 그러나 여성은 존재 자체가 질문이 된다. 미국의 경우, 여성 래퍼들은 여성의 위치와 문화적 정체성에 대해 끊 임없이 질문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성별과 섹슈 얼리티의 문제는 미국 여성 힙합 아티스트에게 핵심적인 질문이 되어 왔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성별 문제는 미국만큼 가시화되지 않았다.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 래퍼 윤미래는 성별보다 혼혈이라는 인종적 정체성 수행에 집중했다. 그의 대표곡 〈원더 우먼〉과 〈검은 행복〉은 모두 혈통의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여성 래퍼 중에도 재미 교포 출신이 여럿이라는 점은 국적과 혈통, 이주 문제가 한국 힙합의 주요 조건이었다는 점을 명시한다. 한국 힙합은 미국에서 최신 트렌드를 흡수한 교포를 통해 시작되었다.
p.74
가부장제 문화는 여성을 통치할 목적으로 성녀/창녀 이분법을 이용한다. 성녀는 칭찬하며 가정으로 들이고, 창녀는 처벌하며 비난하는 방식이다. 미국의 이러한 성녀/창녀 분할 통치에서 문제가 된 것은 어려운 환경에 노출된 흑인 가정이 었다. 당시 흑인 남성은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질 수 없었고 범죄에 연루되는 경우도 많았다. 때문에 많은 흑인 여성이 남 편을 대신해 마약을 팔거나 성매매를 해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이 모습을 보고 자란 흑인 남성은 정신적인 균열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를 사랑하는 동시에 혐오하는 감정 은 이후 흑인 남성의 여성 혐오로 나타났다. 이런 상황에서 'bitch' 의 문화적 전유가 일어났다. 흑인 여성 래퍼들은 이 용어의 의미를 삶을 어떻게든 이어 나가는 강인하고 매력적인 여성으로 전복시켰다. 다른 흑인 여성들과의 협동과 연대를 유도하기도 했다.
미국 힙합 씬에서도 'bitch'를 둘러싼 논란이 있었다. 'bitch'의 의미 전복이 정말 여성의 성 역할과 젠더 권력 관계를 논쟁 대상에 올려놓는지, 아니면 결국 여성의 종속을 인정하게 만드는지 누구도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러한 논란조차 형성되지 못했다. 우선 이 문화적 전유는 한국에서 아무런 맥락도 갖고 있지 못했다. 'bitch' 개 념은 미국 사회 문화 현상을 반영하고 있었고, 그 맥락이 다른 한국에서는 문자 그대로 '번역'될 뿐이었다. “미국에서는 'bad bitch'가 속어로 멋진 여성이라는 뜻이니 우리도 이 의미 를 사용하자”는 건 서로 다른 역사적 배경과 사회 문화적 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단순한 용어 수입에 불과하다.
p.77
두 사람의 디스전은 '여성' 래퍼냐, 여성 '래퍼'냐를 둘러싼 논쟁으로 번져 갔다. '여성' 래퍼라는 말은 랩 실력이 부족하고, 인지도를 쌓기 위해 섹슈얼리티를 이용했다는 부정적 인식을 함의했다. 여성성은 부정당
했고, 'bitch'는 명백히 여성성을 비하하는 의미를 갖게 됐다. 이 디스전을 통해 여성 활용에 대한 문제가 확산됐다. 힙합에서 여성 래퍼의 “랩을 할 수 있다”는 발언은 (남성처럼) 잘한다는 의미를 필연적으로 내포했다. “랩을 잘해야 한다” 라는,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이 주장은 남성 래퍼의 수준에 오르고, 남성의 규준에 맞춰 행동해야 함을 의미했다.
결론적으로 한국 여성 래퍼의 정체성 수행은 수입된 단어 bitch' 앞에서 길을 잃고 만다. 여성/래퍼라는 구분은 여성을 덧붙여진 젠더로서만 인식하게 만든다. 힙합 장르에서 여성 래퍼는 그 수가 적어 조금이라도 뛰어나면 눈에 띈다는 장점이 있지만, 일단 같은 장場 안에 놓이게 되면 성차별적인 상황에 노출된다. 그리고 스스로 남성의 규준을 정상화하고 따르는 '명예 남성'의 위치를 취하게 된다. 졸리브이의 디스곡이 이러한 명예 남성의 위치를 취한다는 것은 편협한 주장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디스전에서 여성 래퍼의 실력과 외모, 섹슈얼리티 논쟁이 남성 래퍼의 규준을 정상화하는 반증이었따는 점은 아쉽지만 사실이다.
p.92
루저, 블랙넛이라는 텍스트
블랙넛의 활동 시기는 한국 대중문화에 '루저loser'가 중요한 자원으로 등장한 시점과 맞물린다. 2008년 “눅눅한 비닐장판”에서 “싸구려 커피”를 마시는 초라한 청년의 신세를 노래한 밴드 장기하와 얼굴들은 등장과 동시에 큰 인기를 누렸다. 대한민국 평균 이하 남성을 내세운 MBC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도 2007년부터 본격적인 성공 가도에 올랐다. 두 미디어 주체가 표방한 주인공은 모두 '루저 남성'이었다.
2000년대 중반부터 루저 문화는 한국 대중문화의 코드로 부상한다.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다 했고 학벌 사회에서 학벌 자본을 취득했지만, 취업 경쟁에서 탈락한 청년의 열패감이 루저란 말로 표출됐다. 여기에는 자기 학대적인 냉소가 다분하다. 특히 금융 위기 이후 '88만원 세대', '삼포 세대'등의 명칭은 고용 불안, 한국 가족의 구조 변화, 젠더 갈등의 심화 등을 나타낸다.
저성장 시대의 한국 청년은 이처럼 항상 위기와 관련되어 정의된다. '헬조선', '흙수저'라는 용어는 자학적 개념을 넘어 더 이상 사회가 나아지기 어렵다는, 미래에 대한 절망까지 내포한다. 가정 경제를 책임지는 위치로서 권위를 내세웠던 과거의 영광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2008년 이후로도 계속된 경제 위기는 유머와 자조로 뒤덮인 남성 루저 문화를 극단적으로 몰아붙일 뿐이다.
루저 문화의 부상에 전제가 된 것은 바로 돈과 외모, 학력과 지위 등 소위 '스펙'이었다.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고 안정된 직장에 취업해 가장이 되지 못한 남성이 느끼는 좌절감과 상실감은 커져 갔다. 루저 문화는 왜곡된 능력주의와 결합했다. 한국 청년은 능력에 따른 차별 대우를 강조하면서 공동체가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것을 거부하는 등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를 아무런 비판 의식 없이 받아들인다. 그래서 이들은 능력이 없는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면서 '찌질함'을 자처하고, 약자에 대한 혐오를 정당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흐름을 이어받은 것이 일베였다. 일베로 대표되는 일부 청년은 자신을 주류 문화에 편입될 수 없는 하위 주체로 인식하며 자조하지만 동시에 그 실패와 좌절을 소수자, 타자에게 반사하면서 변질된 루저 문화를 구성한다. 일베 이용자들은 여성이나 진보 세력, 호남 세력, 이주민 등 사회적 소수자들이 소수라는 이유를 들어 과도한 보상을 요구하고 있고, 원래 자신들의 자원이던 것을 약탈하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평범한 자신들을 루저로 만들고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여성의 사회 진출이 자신들의 취업 기회를 앗아 가고, 정당히 받아야 할 이익을 침해한다고 보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긴 했으나 어찌됐든 일베는 차차 사회적인 인지도를 쌓아 올리고, 이런 상황에서 '일베 래퍼' 꼬리표를 단 블랙넛이 논란의 중심에 오르기 시작한다. 그는 루저 문화 내에서 젊은 한국 남성의 정서를 재현해 낸다.
우선 블랙넛이란 이름부터 논란의 소지가 된다. 그의 정체성은 키가 작거나, 기형이거나, 아니면 블랙넛이란 이름이 뜻하는 대로 '성기'로 압축된다. 게이게이킴gaygaykim 이라는 인스타그램 아이디는 그가 한국의 헤게모니적 남성이 되지 못함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그의 음악에서 가장 지배적인 정서는 '자학'이 된다. 그는 자신이 못났다는 사실을 자랑하듯 노출한다. 흔히 멋이나 능력을 자랑하는 본토 힙합과는 완전히 다른 주제를 다룬다.
블랙넛이 데뷔 때부터 발표한 음악을 주제별로 분류하면, '자학 및 상처' 20.7퍼센트, '랩 실력에 대한 자신감' 16.2퍼센트, '여성 혐오' 13.2퍼센트, '성적 판타지 혹은 성적 자신감의 부재' 10,8퍼센트, '동료 및 타인 비판' 9.9퍼센트, '타인에 대한 폭력' 8.3퍼센트, '노력과 희망' 7,6퍼센트, '효도' 8.1퍼센트 그리고 성 소수자 혐오'가 5.2퍼센트를 차지한다.
블랙넛은 헤게모니적 남성성의 이상에 도달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절망하고 자학한다. 이를 보충하고자 가상의 적을 향해 폭력적인 형태로 남성성을 표출한다. 이성애 각본에서의 실패를 주요한 정체성 자원으로 삼으면서, (성)소수자와 여성 혐오 표현을 사용한다.
힙합엘이 운영진인 멜로(김정원)는 블랙넛의 가사 주제를 호전성'이라는 키워드로 분석한 바 있다. 멜로에 따르면, 힙합에서의 호전성은 보통 자신이 우위를 점하고 있는 부분을 강조하며 나타난다. 래퍼들은 경쟁적인 속성을 지닌 랩 배틀에서 상대의 약점을 공격하고, 자신의 장점(혹은 상대보다 나은 점)을 부각한다. 반면 블랙넛은 자신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를 의도적으로 드러낸다. 잃을 게 없는 사람은 무서울 것도 없다' 라는 인식이 호전성으로 갈음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멜로는 그의 삶과 구조적 요건에도 주목한다. 블랙넛은 호남 출신의 고졸 백수, 170센티미터를 간신히 넘는 키와 깡마른 체격의 소유자, 특출하지 않은 외모와 부모님의 부채를 지고 있는 청년으로 그려진다. 이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랩을 과격하게 해서 주목받는 것뿐이며, 이는 빈민가에서 랩이나 농구를 통해서만 가난을 탈출할 수 있었던 흑인의 운명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블랙넛은 스스로를 '모쏠아다'로 표상한다. 모쏠아다는 '모태 솔로'의 줄임말인 '모쏠'과 '새롭다'는 뜻의 일본어 아따라시이의 아따'를 합쳐, 한 번도 연애와 섹스를 안(못)해본 사람을 일컫는 신조어다. 멜로의 주장에 따르면, 모쏠아다 세대는 아버지 세대가 표방해 온 전형적인 남성성과 완전히 대척점에 서 있다. 남자라면 늘 자신감이 있어야 하고, 울지 않으며, 매사에 리더가 되어야 한다고 교육받았으나 현 세대의 청년 남성은 그렇지 못하다고 말한다. 모쏠아다들은 아버지와 거리가 먼 자신을 보며 괴리감과 박탈감을 느끼고, 인지 부조화 상태에 빠진다. 실생활에서 풀지 못한 분노는 커뮤니티 세상에 표출한다. 블랙넛은 이들이 인터넷에 쏟아낸 비-혜게모니적 남성성의 대표 주자가 된다.
블랙넛의 서사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나는 외모도 못 생겼고 사회 경제적 약자이기 때문에 사랑을 할 수 없고, 이 고통이 자학으로 이어진다. 이 자학은 나를 만나 주지 않는 여성에 대한 분노나 타인을 향한 폭력으로 전이된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성공하고 싶고 성공을 통해 효도하고 싶다.”
p.104
진정성, 남성성, 여성 혐오.
차붐이 여성을 혐오하는 것은 그의 세계에서 여성이 실패한 남성을 돌아보지 않기 때문이다. 즉, 힙합의 여성 혐오는 남성의 불안을 나타내는 표상이 된다. 블랙넛의 표현이 공격적이거나 호전적인 것, 그 대상이 여성과 소수자 및 자신보다 못한 남성으로 향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블랙넛은 현재의 헤게모니적 남성성이 개별 남성 주체에게 부여하는 불안과 고통을 타인에 대한 공격으로 표출한다. 그리고 그 공격은 힙합
문화 안에서 진정한 것으로 인정된다.
비록 자학과 혐오일지라도,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진정성은 힙합 장르의 코드로 인식된다. 그래서 누군가는 '찌질이'와 루저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고, 소수자나 여성에 대한 혐오를 마음껏 분출할 수 있다. 그래도 여전히 힙합은 장르적 정당성을 부여받고, 팬덤에 의해 소비된다.
물론 예술에는 자유가 있다. 랩의 가장 중요한 특성도 자신의 삶을 반영하는 것이다. 하지만 힙합의 현실 묘사가 젊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끼친다는 사싷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특히 아직 이성애 과정을 경험하지도 않은 10대 남성이 주로 소비하는 음악이 힙합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힙합은 가난하고 못생긴 남성을 돌아보지 않는 여성을 등장시킨다. 이 여성은 그저 '상상된 여성일 뿐이지만, 자칫 10대 청소년에게 여성에 대한 왜곡된 가치관을 심어 줄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힙합은 여성 혐오와 무관하지 않다. 힙합의 찌질한 남성이 보여 주는 여성 혐오가 만들어 내는 결과를 단순하게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
“그런 여자들이 정말 있다니까!” 아마 힙합 팬과 래퍼들이 하고 싶은 말일 것이다. 창녀가, 명품 백을 얻으려는 여자가 진짜 있고 자신이 본 진실을 힙합 음악으로 기록한 것일뿐이라고 말이다. 여기에는 《힙합 워즈》의 저자인 로즈의 제안을 정리하는 것으로 답하고자 한다. 로즈에 의하면, 힙합은 그저 세상에 가득 찬 성차별주의와 여성 혐오를 보여 주는 현실의 거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질문한다. 현재를 그리는 것만이 리얼한 힙합인가? 그 리얼함이 만약 사회의 문제를 영속시키거나 심지어 악화시키는 데 기여한다면? 이토록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대중음악이라면, 성차별주의를 변화시킬 약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p.114
한국 힙합의 사랑은 좀 더 세밀하게 '연애 프로젝트'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사랑에 대해 말할지 망설이는 순간이나, 사랑을 잃은 순간을 이야기하는 남성의 이미지는 사실상 루저의 감수성에 가깝다. 이는 아이돌 가수 지드래곤의 인터뷰에서도 드러난다. 비평지 《콤플렉스》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힙합으로 날 버린 나쁜 년을 욕할 수 있지만 사랑 노래를 할 때에는 루저의 감수성을 노래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랑
에 대한 노래가 연인이 아닌 솔로의 입장에서 불린다는 것은, 연애 프로젝트의 성공 유무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한국 사회 젊은 남녀의 현실을 보여 준다.
p.115
여성의 모호함과 규격화된 사랑
한편 남성이 사랑하는, 혹은 사랑했던 여성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는 편인데, 이는 연애 서사의 파편화와 관련이 깊다. 미국 힙합에서 여성은 단순하다거나 성정치상에서올바르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을지언정 몇 개의 반영적 주체성을 갖고 있다. 예컨대, 래퍼 YG는 곡 〈미 앤 마이 비치Me&My Bitch)에서 같이 살았던 여자 친구를 사랑했으나 그 여자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말한다. 래퍼 TI는 메모리즈 백 댄Memories Back Then)에서 경찰이 뜨고 문제가 생길 때 자신을 숨겨 준 여자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배신한 '나쁜 년bitch' 이거나 '헌신하는 바보down ass chick'거나 그도 아니면 연애할 필요가 없는 돈을 노리는 '골드 디거gold digger'거나, 그것이 비록 불가능한 사랑'이라 할지라도 이들 사랑 노래에는 남성성과 여성성 모두 특정한 정체성과 위치를 갖는다.
그러나 한국 힙합/랩 발라드에서 여성은 남성의 일방적 혹은 자조적 시선을 통해 묘사되는 그저 아름다운 여성'을 뜻한다. 전통적으로 힙합은 자신을 떠난 여자에게 모욕을 주고 분노를 표현해 왔는데, 사랑 노래가 되면서부터는 이러한표현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오히려 여성이라는 캐릭터(정체성)가 사라져 버렸다는 해석 역시 가능하다. 그에 따라 사랑의 역사와 남녀 관계는 모호하게만 서술된다. 이들 사랑의 역사에 대해 청자는 들은 이야기가 없다. 알 수 있는 것은 이들의 사랑이 끝났다는 것, 여성은 떠났고(새 사랑을 찾았다는 것), 남
성 주체는 그로 인해 아프다는 것뿐이다. 이는 전통적으로 힙합의 작법, 래퍼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구체적인 역사와 맥락이 들어간 이야기를 해오던 것과는 배치된다.
그렇기 때문에 장르 내부에서 대중적으로 성공한 힙합은 '가짜 사랑 노래'라는 해석이 등장한다. 이 맥락에서 산이와 버벌진트의 노래는 '사랑' 노래가 아니게 된다. 로맨스 주체 간 관계성이 그려지지 않는 이 곡들은, 그래서 역설적으로 누구에게나 자신의 노래가 될 수 있으며 경험담이 될 수 있다는 여지를 준다. 연애는 이런 방식으로 소비될 수 있는 재화이자 기획 상품이 된다. 규격화되지 않으면 팔릴 수 없다는 점에서 연애 상품에 중요한 것은 합리화와 규격화다. 합리화는 사랑의 시작과 끝에 이유가 존재하며 그것이 모두에게 납득 가능한 상식으로 존재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규격화는 그러한 사랑이 누구에게나 (구매) 가능한 문화 상품으로 존재함을 의미한다. 버벌진트나 산이의 음악을 가짜 사랑 노래 혹은 진정성이 없다는 말로 폄하하려는 힙합 팬들은 사랑의 서사가 없고, 그래서 그 주체성이 자신의 고유한 것이 아닌 규격화되어 판매되기 좋게 가공된 것이라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p.122
사랑과 이별이 힙합과 만났을 때
사랑의 불가능성에 대한 노래들이 현 시대만의 특징은 아니다. 후기 산업 사회, 연애가 상품으로 소비되기 시작한 이후 부터 지속된 현상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실패와 이별은 대중음악에서 흔하디 흔한 주제다. 그러나 힙합은 사랑 주제를 다루는 것만으로 논쟁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는다. 이는 곧바로 진정성 논쟁과 연결되지만, 한편으로는 단순히 장르 내부의 문제라기보다 현대 사회의 연애 담론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래퍼 화지는 "사랑했는데 떠나고 그래서 상처 받는 것은 힙합의 감정이 아니”라고 언급했다. 산이는 “항상 널 쏴죽여 버릴 거야'라는 갱스터 힙합이나 '네 엉덩이를 흔들어 가슴을 내밀고 다 벗어젖히고'와 같은 노래들만 1등을 하는 게 아니며, 달콤하고 대중적인 힙합 음악도 많다”고 말했다. 이 두 사람의 간극은 장르 내부에서도 사랑을 다루는 힙합이 변절이냐 아니냐에 대한 논란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사랑을 다루는 힙합은, 음원 시장의 주 소비자인 여성을 대상으로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변절'로 비판받
는 경우가 더 많다.
백인 남성 지배 구조하에서 온전한 로맨스 주체가 될 수 없었던 흑인 힙합의 남성 주체들과, 스펙화된 연애와 결혼 제도 속에서 실패한 사랑을 읊조리는 한국 힙합의 남성 주체들은 다른 듯 같은 맥락 속에 놓여 있다. 인종 차별이라는 사회 구조, 신자유주의 시대 무한 경쟁 체제라는 사회 구조는 분명히 다르지만, 낭만적 사랑을 경험하기도 전에 이 높다란 벽앞에 무너진 흑인 남성과 한국 남성은 불안의 정서를 공유한다. 그러한 불안이 폭력적이며 반여성적인 형태로 굴절되어 표출되거나, 유순하고 나약한 자기 독백의 언어로 나타나는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물론 모든 힙합 가사의 남성이 이러한 정체성을 띠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 대중음악에서 인기를 누리는 힙합/랩 발라드가 분명히 기존의 힙합 음악과 다른 남성성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은 너무도 자명하다. 한국의 랩 발라드는 사랑의 서사를 생략하고 이별의 순간에 집중한다. 여성의 정체성은 불분명하며, 이는 여성 소비자의 판타지와 조응하는 한편, 현실 사회 연애의 불확실성과 조응한다. 힙합이 보여 주던 강한 남성성에는 한국적 맥락에서 파생된 '유순한 루저'가 추가됐다. 규격화된 사랑의 불안과 고통을 노래하
고, 이로써 한국 힙합의 로맨스는 불확실한 연애 시대에 '사랑'을 '소비'하는 하나의 방식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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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네어 레코즈의 음악에는 기존의 한국 힙합과는 다른 몇 가지 특징이 있다. 가장 큰 특징은 자신이 가진 부를 자랑 삼아 랩 가사로 표현하는 '머니 스웨거다. 돈 이야기를 하는 것이 힙합의 문법처럼 받아들여지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한국 정서에서 그렇게 친숙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일리네어 레코즈는 머니 스웨거로 그들만의 내러티브를 만들어 낸다. 현재 한국에서 가장 돈 이야기를 많이 하는 레이블이자 가장 인기 있는 레이블이다.
모두가 한국에선 안 된다던 음악
그만두라던 그 말 이젠 다 의미 없지 부정할 수 있니 누가
<Rolling Up>, 도끼
이들이 한국 힙합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상당히 독특하다. 머니 스웨거 하나만으로도 논란이 일지만 미국 힙합의 모방이나 샘플링 문제, 진정성 이슈 등 여러 가지 주제에서 논란의 중심이 되고 있다. 이러한 논란에 대한 답변은 대체로 음악을 통해서 이뤄진다. 특히 이들은 두 가지 진정성 담론을 드러내는데 기획사 음악에 대한 대척점으로 자신들을 '인디펜던트한 일리네어 레코즈'로 상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랩으로 발설하는 자기 이야기가 전부 '진짜' 라고 강조하는 방법이다. 이 두 가지 담론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머니 스웨거를 도구로 활용하는 특성을 보인다.
흔히 더티 사우스Dirty South 라 불리는 남부 힙합의 주제와 곡 특성을 꾸준히 보여 줬던 래퍼 도끼는 자신이 하는 힙합이 '모두가 한국에선 안 된다던 음악이라고 규정한다. 모두들 안 된다'고 했지만 성공했다는 것이 핵심 메시지다. 도끼는 일찍부터 이런 음악을 하는 것을 자신의 신념으로 밝혀오곤 했다. 2005년 힙합 그룹 다이나믹듀오와 만든 음악 〈서커스>에서 16살의 도끼는 “난 할래 난 갈래 형들 말처럼 절대 안 된다고 하는 길 끝까지 갈래"라고 말한다.
이처럼 도끼 스스로 그려 내는 성공 내러티브는 단순하지만 명료하다. 랩 가사에서 그가 적대자로 구성한 것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기획사 중심의 현 음악 산업이고, 두 번째는 그 음악 산업의 기획에 영합하는 동료 (힙합) 음악가들이다. 그는 〈미스터 인디펜던트Mr. Independent)라는 곡에서도 스스로를 기획사 중심 음악 산업의 대척점으로 설정한다. 한국 대중음악 기획사 시스템에 대한 반감은 사적 경험과도 관련되어 있다. 10대에 올블랙이라는 힙합 그룹으로 데뷔해 연예 기획사와 계약을 한 그는 이로 인해 거액의 빚을 지고, 그 빚을 갚기 위해 수년을 허비했다고 말한다. 'Mr. Independent는 '어떤 음악이 시장에서 통한다'는 일종의 대중음악 법칙에 반대하는 신념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안 된다'는 가사는 도끼가 지향하던 미국 힙합의 트렌드를 계속 실천하는 것은 한국에서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대중가요는 전적으로 사랑이란 주제에 편중되어 있으면서 겸손, 예의, 성실과 노력이라는 집단적 도덕주의 에토스를 중시하는 아이돌 음악과 퍼포먼스에 집중한다. 일리네어 레코즈의 음악은 이 관점에서 대중적일 수가 없다. 내가 가진 차와 돈'을 자랑하는 것은 겸손과 예의를 중요하게 여기는 한국적 정서와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건방지다거나 불쾌하다는 반응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일리네어 레코즈의 래퍼들은 이러한 대중의 정서에 관심을 갖거나 반응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의 음악이 더 의미 있다고 주장하는 식이다. 이 의미 부여는 음악 차트에 오르는 대중가요와 자신들의 음악을 대비하면서 타협하지 않았다는 것을 내세울 때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다.78 이들은 차트에 오르는 사랑노래보다 자신들의 돈 이야기가 더 진실하다고 주장한다. 소재 자체가 상업적이지 않고, 이 내용이 실제 자신들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선 안 된다던' 음악은 오히려 '리얼'하기 때문에 진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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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순간 있어, 난 작업실에
돈 자랑 음악으로 이해되는 이들의 음악을 힙합 팬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첫째, 이를 옹호하는 측에서는 힙합식 스웨거'로 받아들이며 힙합은 원래 그래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 힙합은 이렇게 자신이 이룬 부를 자랑하는 주제가 일반적이고, 이는 힙합 장르의 고유한 문법이라는 것이 주요 논거다. 둘째, 비판하는 측에서는 머니 스웨거를 하기에는 이들의 현재 상황이 보잘 것 없으며 만약 이것이 대단하다고 느끼진다면, 힙합 수용층이 어리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사회물 어느 정도 먹은 입장에서 보면 (일리네어 레코즈 래퍼들이)
벤츠 끌고 다니는 거 아무 감흥 없고, 미국 힙합 뮤지션들 스케일하고 비교돼서 헛웃음만 나와요. 이게 중요. 10대 애들이나 우와~ 하지, 이건 뭐”와 같은 반응이 대표적이다. 미국에서 머니 스웨거가 통할 수 있는 건 그 부가 카타르시스를 줄만큼 대단하기 때문이지만, 현재 일리네어 레코즈는 그 정도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셋째, 일리네어 레코즈의 음악을 허세라고 보는 시각이다. 이들은 힙합 팬이라기보다는 일반 대중음악 소비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2014년 도끼와 더콰이엇이 쇼미더머니 시즌3에 출연하면서 일리네어 레코즈의 음악이 일반 대중에게도 노출될 기회가 생겼다. 이때 일차적인 반응은 '이 사람들이 정말로 그렇게 잘하냐 혹은 '힙합 하는 애들은 원래 이렇게 자랑질이 심하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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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자신의 소비를 정당화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노력'이다. 차와 시계는 소비라기보다는 노력에 따른 증명이다. 매일 새 옷을 살 수도 있지만 여전히 작업에서 일하는 부지런함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가사에 자주 증장하는 'came from bottom, to the top' (밑바닥에서 꼭대기까지)이라는 표현은 힙합의 고유한 주체인 노력과 성공, 그리고 자기 과시를 의미한다. 일리네어 레코즈는 이를 허슬이라 표현하는데, 상업적 성공을 거두며서도 거리 힙합의 진정성을 잃지 않으려는 미국 래퍼 제이지Jay-Z의 '허슬 라이프'와 일견 비슷하다. 제이지는 2003년 발표한 곡 <모멘트 오브 클래리티Moment of Clarity>에서 상업적 성공을 목표로 음악을 만들지 않으며, 과거 거리에서 활동했던 경험이 자신의 현재 위치를 진정한 것으로 보장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도끼의 허슬은 노력이다 불편한 소비를 멀리하고 재능이 아닌 노력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그의 랩은 정확히 자기계발 윤리와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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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합 팬들은 이들을 롤모델이라고 이야기함에 주저함이 없다. 단지 부에 대한 희망을 주기 때문이 아니라, 살아가는 데 노력이라는 가치관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 주기 때문이다. 이 지점이 바로 자기계발의 윤리와 통하는 부분이다. 명품 시계 롤렉스, 고급 차 벤츠와 롤스로이스 등을 성공의 증명으로 내세우는 일리네어 레코즈의 소비는 음악 앞에서 '꿈의 증명'이 된다. 미국 상업 힙합의 물질주의적 태도가 쾌락주의적이라고 비판받는 것과는 달리, 이들이 비싼 차와 시계를 사는 행위는 성공한 자기계발 시나리오가 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