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야마구치 슈, 구스노키 겐 [일을 잘한다는 것]
p.14
따라서 '일을 잘한다'는 것은 '성과를 낸다'는 것과 같다. 일을 잘하는 사람이란 고객에게 '이 사람이라면 안심하고 일을 맡길 수 있다. 이 사람이라면 반드시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다'라는 신뢰를 받는 사람이다. 더 나아가 고객이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고 평가하는 사람이다.
이런 의미에서 업무 능력이란 어떤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할 때의 기술을 넘어서는 개념이며, 이를 총칭해서 '감각sense'이라고 부른다. 외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줄 알아도 업무에서 중요한 성과를 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프로그래밍 기술이 뛰어난데도 실적 향상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도 있다. 다양한 전략분석 프레임워크에 정통하면서도 정작 제대로 된 전략을 세우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지금 여러분의 머릿속에도 누군가 떠오를지 모른다. 이런 사람들은 '작업'은 잘할지 몰라도 '일'은 잘하지 못한다. 일하는 기술은 있는지 몰라도 일하는 감각은 없는 것이다.
p.33
효용의 시대가 가고
의미의 시대가 왔다.
기술이 이렇게까지 중시된 데에는 '시대의 요청'이라는 측면이 있습니다. 실질적인 도움을 추구한 상품과 서비스의 가치가 높았기 때문에, 한마디로 기술이 돈이 되었던 거죠.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더 이상 효용가치를 찾지 않습니다. 내게 도움이 된다거나 편의를 제공해준다는 뜻에서의 효용가치보다는, 개개인에게 의미 있
는 상품과 서비스의 가치를 선택하는 쪽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도움이 된다/도움이 되지 않는다'와 '의미가 있다/ 의미가 없다'라는 두 가지 축을 조합해 세상에서 판매되는 상품과 서비스를 정리해보면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효용가치가 큰 상품보다 의미가치가 큰 상품이 더 비싼 가격에 팔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p.35
이렇게 실질적인 효용성이 있는 상품에서 의미가 빛을 발하는 상품으로 가치의 원천이 옮겨가는 현상은 다양한 상황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즘 집에 장작 벽난로를 설치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현상도 같은 맥락입니다. 매우 효율적인 난방장치가 이미 있는데도 굳이 비싼 돈을 들여가며 불편한 벽난로를 갖추려는 추세는 실용성이라는 가치에서 의미가치로 무게 중심이 이동하는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좀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저는 '근대의 종말'을 가리키는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도움이 된다거나 편리하다는 기준은 지금까지 200여 년간 줄곧 가치를 생성해왔지만 최근에는 기능이나 편리성을 높여도 팔리지 않는 상황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거든요. 대다수 기업이 지금까지 효용성이 큰 물건과 서비스로 가치를 창출해왔습니다. 특히 20세기에 발 빠르게 세계 진출에 성공한 기업들은 대부분 '효용'이라는 편익을 제공함으로써 성공을 거머쥐었죠. 반면에 '의미'라는 편익을 제공함으로써 세계 진출에 성공한 기업들은 별로 없습니다.
인류 문명이 일정한 수준을 넘어서면 문화적 측면에서의 가치창출로 변화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런 시대 흐름을 빠르게 따라가지 못하면 여전히 효용성 측면에서 가치를 창출하고 있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사용가치만 추구하다가는 머지않아 역설적으로 사용가치가 없는 상품과 서비스를 만들어내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죠.
p.48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믿음의 대가
감각이 등한시되는 데에는 '노력이 보상받는다'는 '공정한 세상 가설just-world hypothesis'에 대한 믿음이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공정한 세상 가설'이란 정의에 관한 심리학 연구의 선구자로 불리는 멜빈 러너Marin Letner가 처음 제창한 가설입니다. 이는 이 세상은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 보상받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벌을 받게 되어 있다는 사람들의 믿음을 일컫습니다. 원인이 있으면 그에 합당한 결과가 따른다는 내용 면에서 볼 때 불교에서의 인과응보 사고관과 유사하죠.
반면에 그리스도교의 프로테스탄트가 신봉하는 예정설에서는 신에게 구원받을 사람이 날 때부터 정해져 있어서 본인이 선행을 쌓든 악행을 쌓든 구원이라는 결과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행동을 하는 어차피 천국에 갈 사람은 천국에 가고 지옥에 갈 사람은 지옥에 간다는 거죠. 이는 프랑스 신학자이자
종교개혁 지도자였던 장 칼뱅의 사고방식입니다.
이를 일의 기술과 감각에 대입해볼까요? 일반적으로 기술은 노력으로 향상시킬 수 있지만 감각은 노력으로 향상시키기 어렵다는 인식이 팽배한데, 이런 인식이 감각을 기술보다 덜 중요하게 여기도록 만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인과응보의 사고관이 작동한 것이죠.
p.52
맞습니다. 기술이나 과학은 본질적으로 범용화되니까 누가 해도 결과가 똑같아집니다. 과학의 목표는 보편적 재현성, 일반성입니다. 에너지는 질량과 광속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아인슈타인의 공식 E=mc²은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떤 기분으로 자연을 관측해도 E=mc²이 되거든요. 그때그때의 기분에 따라서 세제곱이 된다거나 장소에 따라서 네제곱이 된다거나 하는 일은 없습니다. 이것이 과학의 본질입니다. 과학은 재현 가능한 법칙을 정립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으니까요.
야마구치 선생님은 오랫동안 '기초교양 liberal arts'의 중요성을 강조해오셨습니다. 기초교양이란 자신의 가치 기준을 자신의 언어로 타인에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죠. 자신이 스스로 형성한 가치 기준이 있다는 것, '자각적인 것'이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교양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교양 형성의 본질에는 예술과 감각이 있습니다.
요즘 시대는 필요 이상으로 정확성correctness 을 요구합니다. 정보의 유통 비용이 급격히 낮아지고 유통 속도가 빨라졌기 때문에 의미가 있든 없든 누구나 자기 의견을 가시적으로 표현하고자 합니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자신이 스스로 확립한 가치 기준이 없는 사람, 쉽게 말해 교양이 없는 사람은 여러 상황에서 외재적인 정
확성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게 됩니다.
의사소통을 때도 자신의 가치 기준보다 기존의 가치, 세상의 가치 기준에 맞추려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에게 불리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저는 이런 상황이 교양의 상실' 혹은 교양의 포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기준이 될 만한 자신만의 가치가 없기 때문에 점점 외부에서 주어진 가치 기준에 맞추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과학이 제공해주는 법칙은 굉장히 만족스럽겠죠.
자신만의 내재적인 가치 기준이 있고 그 기준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 교양의 조건이니까요.
p.71
일의 세계에서 기술에 비해 감각의 중요성이 저평가돼 왔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만, 그렇다고 기술이 필요 없다고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기술은 일을 잘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하지만 최고의 성과를 내려면 기술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얘기죠. 미국의 영화배우이자 감독인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참 멋진 말을 했어요. 솜씨 좋은 바텐더가 만든 칵테일은 예술에 가까워서 그 바덴더를 찾지 않을 수 없다고요. 저는 이스트우드의 이 인터뷰에서 일을 잘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라든가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수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였습니다. '아, 이 사람이 왔으니 이제 문제없어' 하는 느낌, 이런 수준으로 일을 잘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게임이나 운동 경기에서 팀을 나눌 때 '이 친구가 우리 팀이니 걱정 없어'라든지 '저 아이와 같은 팀에 들어가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런 마음이 들게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일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기술을 쌓는 것만으로 일을 잘하게 될까요? 물론 잘하게 되기는 하겠지만 그 특정한 기술이 대응하는 일을 맡았을 때에만 해당하는 이야기일 뿐 반드시 일을 잘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일을 잘한다는 건 어떤 상황이든 다른 사람들이 의지할 만하다는 뜻이 아닐까 싶어요. 꼭 집어서 “이 사람이라면 좋겠어요” 또는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되겠어요” 하고 말하는 거죠. 이 사람이라면 문제없다며 믿음이 가고, 어떡하든지 꼭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사람, 그런 사람이 일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p.94
분석의 함정을 피해
문제를 대면하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서두에 '행복한 가정은 어느 집이나 비슷비슷한 모습이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다른 불행을 안고 있다'는 말이 나옵니다. 감각이란 그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감각이 있는 사람은 천차만별이지만 감각이 없는 사람은 모두 똑같이 감각이 없습니다. 따라서 감각이 없는 사람 쪽이 특징을 설명하기 쉽습니다.
일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생각해봅시다. 먼저 즉각 분석하고 싶어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사업 전략을 생각해보자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바로 조사를 시작하고 분석으로 돌진하죠. 오로지 강점과 약점, 기회와 위협 네 가지만 생각하는 SWOT 분석의 틀에 맞추려 들어요. 이런 식으로 일하는 사람을 저는 '스와터Swotter'라고 부릅니다. 큰 회사에는 경영기획부나 그에 상응하는 부서가 자주 스와터의 소굴이 됩니다. 그들에게 "그런 거 해봐야 뛰어난 전략은 절대 나오지 않을뿐더러 도저히 조직을 움직일 수 없어요”라고 말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이미 그런 것쯤은 다 알고 있다는 태도를 취해요.
템플릿이 정해져 있는 분석 조사라는 '작업'은 엄청난 흡인력을 갖고 있습니다. 일은 잘하지 못해도 일단 작업은 할 수 있고, 사람들에게 보여줄 자료로서의 성과를 내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작업의 유혹'은 무척 강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경영도 전략도 아닙니다.
p.110
감각과 의욕의 매트릭스가
자리를 정한다.
야마구치 :
감각은 의욕과도 관계가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이것을 '감각과 의욕의 매트릭스'라고 부릅니다. 군대에서는 전투 감각은 뛰어나지만 의욕이 별로 없는 리더가 적합하다고 합니다. 가능하면 편하게 이기려고 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감각도 뛰어나지만 의욕도 있는 사람은 대장을 보좌하는 참모 역할이 어울린다고 하더라고요. 가장 곤란한 사람이 감각은 없는데 의욕만 앞서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조직을 휘두르거나 잘못된 판단으로 돌격을 지시하면 부대를 전멸시키기도 합니다.
구노스키 :
감각은 없는데 부지런하게 의욕을 부리는 유형이 조직에서는 가장 위험하겠네요.
야마구치 :
맞습니다. 그런 유형이야말로 조직을 망가뜨리는 명령을 마구 내리는 수장이 되겠죠. 마지막으로 감각도 의욕도 없는 사람은 KPI의 틀에만 맞춰 일을 하려 할 것입니다. 꽤 민감한 이야기지만, 이는 분명 나치 정권의 비밀국가경찰인 게슈타포로부터 지시받던 양상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구스노키 :
감각도 없고 의욕도 없다면 무턱대고 지시를 수행하는 유형이 될 테니까 정말 무서운 일이 벌어질 수도 있겠습니다.
야마구치 :
여기에 기술을 적용하면 더 복잡해집니다. 기술은 있지만 감각이 없는 사람, 감각은 있지만 기술이 없는 사람 중에서 누구에게 어떤 일을 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일 감각은 없는데 의욕이 넘치는 사람이 있다면, 감각만 있고 의욕이 없는 리더를 따르기란 쉽지 않겠죠. 그러니 기술을 쌓아서 일종의 복수를 하는 것이 현재 많은 사람들이 일하는 방식이 아닐까요?
p.116
구스노키 :
그야말로 프로의 업무 방식이군요. 프로가 대단한 점은 무얼 하느냐가 아니라, 일을 하는 순서와 업무의 시퀀스입니다. A와 B와 C의 업무는 그저 나열되는 업무의 항목이 아닙니다. A가 있기에 B가 있고, B가 생김으로써 C가 나오는 식으로 시간순의 의미가 있어요. 요컨대 A와 B 사이에 논리가 있고, B와 C 사이에도 논리가 존재하는 거죠.
야마구치 :
비전을 만들고 그에 따라 업무를 항목별로 나열해서 '이 모든 업무를 하라'라고 지시하는 게 아니라 '우선은 이것만 하자'고 정한 것입니다. 우선순위에 확실하게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전략을 사용한 거죠. 게다가 결과적으로 그 순서도 정말로 뛰어났습니다.
구스노키 :
바로 그 점이 예술인 거죠. 그런데 이런 순열 정책을 '우선순위를 매겨라' 라는 일반적인 이야기와 혼동해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해야 할 일 리스트to-do ist'에도 우선순위가 매겨져 있잖아요. 하지만 중요한 일 세 가지를 정해서 시키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세 가지 일을 어떤 순서로 할지를 정하는 순열의 문제는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과는 달라요. 이 둘은 사고 계통이 완전히 다릅니다.
야마구치 :
한 가지 일이 끝난 결과로 다음 일이 생기는 이치라서 단지 일의 우선순위를 매기는 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죠.
p.143
시간적 깊이를 고려하지 않는
병렬적 사고의 문제
앞서도 말했듯이 일을 잘하는 사람과 일을 못하는 사람을 대비해서 살펴볼 때 쉽게 알 수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일을 못하는 사람은 항목별로 나열해 적기를 좋아한다는 겁니다. 해야 할 일을 줄줄이 적어 목록 만드는 것을 아주 좋아하죠. 이러한 병렬적인 사고의 문제점은 인과 관계의 역학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즉 시간적 깊이를 고려하지 않는 거죠. 병렬적 사고는 일의 감각을 말살합니다. '그래서 목적이 뭔데?'라는 고찰이 제외되는 거죠. 모든 일은 성과로 이어지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병렬적인 사고에서는 성과로 이어지는 논리 전개가 사라지고 없습니다.
'시간적 깊이'가 중요하다고 할 때의 시간이란 물리적인 시간이 아니라 논리적인 기간을 말합니다. 장기적으로 생각하라고 조언하면 "장기적이라면 얼마나요? 5년 이상으로 생각하면 되나요? 아니면 10년이요?" 하고 되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리적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데 말입니다.
물리적인 시간으로 단 한 달 동안 벌어질 일이라고 해도 '이렇게 진행하면 뒤이어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고, 그런 후에는 이런 일을 할 수 있게 되겠다'라거나 '이번에는 이런 길이 열릴 것이니 이렇게 될 것이디'라는 식의 논리적인 시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논리란 어떤 것과 다른 것 사이의 인과관계이므로 거기에는 반드시 시간이 존재합니다. 논리는 항상 시간을 짊어지고 있어요. 제가 줄곧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스토리로서의 경쟁전략'에서도 그렇습니다.
p.153
같은 것을 다르게 보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
구스노키 :
성공한 사람들은 종종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남들은 못 보고 있었지만 나는 거기서 돈을 보았다.” 서 있는 곳에 따라 풍경이 다르게 보이듯, 관점을 바꾸면 같은 대상도 다르게 보인다'는 의미입니다. 성공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다는가, 남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할 수 있었기에 돈을 벌 수 있었던 겁니
다. 이것이 전략의 출발점이니까요.
오릭스 회장을 역임한 미야우치 요시히코와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오릭스는 어떻게 돈을 버는지 알기 힘든 회사입니다" 라고 말하자 “자네 같은 사람이 금방 알 수 없으니 돈을 버는 게 아니겠나”라고 답하시더군요. 맞는 말씀입니다.
야마구치 :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거로군요.
구스노키 :
남들이 모르는 것을 알고,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이유는 결국 자신만이 갖고 있는 스토리가 있기 때문일 겁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논리 구조와 스토리 속에 자신의 자리를 잡음으로써 개별 요소가 독자적인 의미를 갖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인공지능처럼 일단 새롭고, 뭐든지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최첨단 기술일수록 그렇습니다. 예컨대 무턱대고 인공지능을 접목시킨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먼저 시간적 깊이를 고려한 스토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 스토리 가운데 특정 부분에 인공지능을 넣으면 다른 요소와 이어져 비용이 낮아지거나 이익이 생기듯이, 전체적인 배경 속에서 비로소 인공지능의 효과가 나오는 겁니다. 인공지능이라는 요소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어떤 맥락 속에 놓이느냐가 중요합니다. 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독자적인 스토리거든요.
야마구치 :
전략은 전부 '특수한' 해법입니다. 모두가 상황과 배경에 좌우되고 있어 일반적인 해답이란 없으니까요. 반대로 말하면 논리적 과정을 거듭해 다다른 해답이 타인과 같다면, 논리적으로는 옳더라도 그것은 최적의 해답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구스노키 :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략의 일반이론은 영원히 실현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p.158
어도비는 자신들의 소프트웨어를 패키지로 판매하던 전략을 버리고 대담하게 서브스크립션으로 전환했습니다. 이런 변화를 통해 매출과 이익을 모두 증대시키고 시가총액도 증가시켰습니다. 서브스크립션으로 어도비가 대담한 전환을 하고 매출 증대를 이룬 것은 맞습니다. 그 나름대로 사내에서 이익 상반 현상도 발생했지만 어도비는 그런 상황까지도 극복하고 확고하게 수익으로 연결시켰습니다. 훌륭한 전략이자 경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로 서브스크립션'으로 인한 성공인지는 조금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도비의 성공은 서브스크립션 덕분이 아니라 포토샵Photoshop과 같은 강력한 소프트웨어를 보유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하거든요. 어도비의 강점은 단지 제품 사용자 수가 많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다른 소프트웨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체 불가능한 수준의 제품들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사용자들이 포토샵이 아니면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어도비는 뛰어난 제품을 만들어 그것을 10년, 20년 넘게 판매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어도비의 제품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디자이너, 크리에이터가 전 세계에 수없이 많아졌습니다. 즉 어도비가 서브스크립션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서브스크립션'이라는 새로운 사업 모델 덕분이 아니라, 양질의 제품과 다수의 충성 고객층을 이미 갖추고 있었던 덕분이지요. 인과관계를 제대로 따져보면, 어도비는 이런 조건이 사전에 갖춰져 있었기에 과감히 서브스크립션으로 방향을 돌릴 수 있었던 겁니다. 그때까지 어도비가 이룩한 전략 스토리를 모르고서 그저 모든 게 서브스크립션의 결과라고 말하는 사람은 정말이지 일에서 큰 성과를 내지 못할 겁니다.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채 현상만 보는 사람이니까요.
비장의 무기를 손에 넣으면 인간은 기분이 한껏 고양되고 안심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익을 내는 데 있어 정말로 중요한 핵심, 일련의 논리 연쇄를 간과하게 됩니다. 빅데이터를 인공지능에 적용하면 모든 상관관계가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인과가 없습니다. 논리가 없는 거죠. 인과관계와 상관관계는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다릅니다. 현상으로서 상관하고 있는 것도 거기에 논리가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결국은 인간이 하나하나 논리를 찾아내야만 차별화로 이어지는 행동을 취할 수 있는 거죠.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정보가 늘어날수록 하나하나에 쏟아지는 관심은 줄어듭니다. 인과를 잃어가는 것이죠. '해야 할 중요한 일은 A와 B와 C예요'와 같은 병렬 사고를 해나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거기에 비장의 무기가 지닌 함정이 있습니다. 인공지능에게 상관성을 파악해 가장 중요한 것만을 선택해서 가져오라고 한다면 당장 가지고 올 겁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수가 너무 많겠죠. 인공지능에게 '의미 있는 상관성'을 찾아내게 하려면 인간이 미리 논리와 인과를 인공지능에 프로그래밍해두어야만 하니까요.
인간은 의미를 모르면 동기 부여가 되지 않습니다. 인공지능이 파악해 산출해온 상관성의 결과물에도 인과가 깃들어 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하지만 그 관계성이 드러나지 않으면 인간은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동기를 찾아내지 못합니다. 당사자가 의욕을 느끼지 못하는 사업은 절대로 성공할 수 없어요.
p.174
그렇습니다. 사업적으로 성과를 낸 것은 우편으로 DVD를 대여하면서부터입니다. 손님이 인터넷으로 주문한 DVD를 봉투에 넣어 우송하고, 다 본 DVD는 봉투에 넣어 돌려받는 시스템이었죠. 그런 사업 형태로 10여 년간을 유지했습니다. 회사 이름은 처음부터 '넷플릭스'였는데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크다고 할 수 있어요.
창업 초창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콘셉트가 바뀌지 않았습니다. '고객이 여러 가지 제약에 구애받지 않고 보고 싶은 방송 프로그램을 보고 싶을 때 보고 싶은 장소에서 볼 수 있게 한다.' 실로 단순한 콘셉트입니다. 그런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로 존재하고 싶어서 처음부터 일관된 콘셉트를 유지했던 겁니다.
당시는 기술과 인프라의 제약으로 온라인 콘텐츠 스트리밍은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사업의 본질적 목적은 지금과 같았어요. 단지 그 수단이 DVD 우편 배송이엇떤 것뿐이죠. 그나마 이것도 DVD 시대가 되어 비로소 가능해진 것이에요. 그 이전의 비디오 테이프는 크기도 큰 데다 재질이 약해서 봉투에 넣어 우편 발송을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p.180
아웃사이드 인
- 외부 정보에서 답을 찾는다.
- 업무 지시를 성실히 따른다.
- 계획이 완성되어야 실행한다.
인사이드 아웃
- 자신의 논리에서 답을 찾는다.
- 자신이 세운 목표를 따른다.
- 우선 실행하고 계획을 수정한다.
p.192
1년차 때는 누구를 만나든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 하는 인사를 건네고 상대의 말에는 '네' 하며 대답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이것이 사회생활의 초기에 필요한 능력의 80퍼센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조직이나 주변에서 일 잘하는 사람을 정해두고 계속 주시해서 살펴보는 겁니다. 아무 생각 없이 눈으로 쳐다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살펴보면서 중요한 것들을 포착하라는 의미죠. 그래서 이 사람은 이 상황에서 왜 이런 일을 하고, 왜 이런 일을 하지 않는 걸까?' 하는 것을 항상 생각하라고 조언했습니다. 설사 해답을 바로 얻지 못한다고 해도 말입니다. 모든 해답은 이미 상황에 다 반영되어 있게 마련이니까요.
그리고 세 번째는 '고객의 시점에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일하는 데 있어 기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거래처뿐만 아니라 회사 안에도 고객은 있어요. 내가 무엇을 해주길 바라는지, 우선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생각하고 그에 맞춰 일하는 것이 좋습니다. 첫 해에 이 세 가지를 딸아이에게 일러두었죠.
이 세 가지는 전부 일의 감각과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첫 해부터 엑셀로 이 작업을 할 줄 알아야만 한다거나 영어는 이 정도까지 실력을 끌어올리라고 강조한들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 기술은 자연히 피드백이 올 것입니다. 만약 토익이 300점이라면 부족한 점수가 눈으로 확인되니 영어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 테죠. 그러니 내버려둬도 괜찮습니다. 이것이 스킬의 중요한 특징이죠.
그러나 감각은 다릅니다. 피드백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에 감각이 없는 사람은 없는 대로 그냥 해나가게 됩니다. 이것이 감각의 무서운 점이에요. 감각이 없는 사람은 애초에 자신에게 감각이 없다는 것조차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옷 입는 감각이 없는 사람은 언제까지고 계속 옷 입는 감각이 없는 거죠. 피드백은 저절로 생기지 않거든요.
p.196
감각을 연마하는
최고의 방법
그렇다면 감각을 연마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일까요? 사실 감각을 연마하는 확실한 방법 같은 것은 없습니다. 사람에 따라서 감각이 드러나는 모습도 천차만별이고요. 따라서 감각 있는 사람이 주변에 있따면 그 사람을 잘 살펴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됩니다. 이것이 가장 손쉽고 빠르게 감각을 익히는 방법입니다.
이때 그 사람의 '전부'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 잘하는 사람의 감각은 단지 일하는 모습에서만 드러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메모하는 방법, 대화 상대에게 질문하는 방식, 회의를 이끄는 법, 책상 배치나 식사 습관, 심지어 가방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등이 모든 행동과 생활에 감각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감각 있는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할 수만 있다면 감각을 배우는 데 아주 유리합니다.
p211
게다가 인간이란 그다지 일관되지 못한 존재예요. 그러니 점점 더 인간의 본성이나 본능에 관한 통찰이 중요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상품의 실질적인 사용가치를 추구하려고 하면 데이터와 기술은 매우 유용하고 이해하기 쉽지만 의미가치를 추구하고자 한다면 데이터도 기술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통찰'이며 이것이 앞으로 경쟁력의 중요한 핵심으로 자리 잡을 것입니다.
p.213
비즈니스란 구체적이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구체적이지 못하면 지시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떤 문제든 구체적인 내용 해결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하니까요. 그러므로 생각의 흐름 속에는 반드시 '요컨대 이런 거지' 하는 추상화가 일어나 거기서 얻은 논리를 머릿속의 서랍에 넣어야 합니다. 감각이 있는 사람은 이 서랍이 무척 충실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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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그래서 제가 “굉장한데요.. 유니클로 천하는 계속되겠군요." 하고 감탄하면서 밖으로 나오자 시라쓰치 씨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이 브랜드는 앞으로 굉장히 어려운 상황에 놓일 거예요. 혹시 눈치채셨나요?" 뜻밖의 질문에 저는 “네? 손님이 저렇게나 많은데요? 모두 바구니에 상품을 가득 담고서 계산대 앞에 길게 줄을 서 있던데요?" 하고 되물었죠.
그러자 시라쓰치 씨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럼 하나 물을게요. 이 브랜드의 남녀 의류 매출 비율이 어떤지 알아요?" 저는 남성용이 약 80퍼센트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 대답했어요. 그러자 시라쓰치 씨는 “오늘 매장에 있던 손님들, 성별로 보면 어느 쪽이 많았지요?” 하고 다시 묻더군요. 장바구니 안의 상품까지 일일이 보지는 못했지만, 분명 여성이 약 90퍼센트였어요. 한데 시라쓰치 씨가 "바구니에 담긴 내용물은 대부분 남성용이었지요"하고 말했습니다.
즉 매장을 방문한 고객 비율은 여성이 약 90퍼센트지만 매출 비율은 남성용 의류가 약 80퍼센트를 차지했던 겁니다. 시라쓰치씨가 다시 물었습니다. “쇼핑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어땠나요?" 그러고 보니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단 게 생각났어요. "결론은 한 가지입니다. 그 사람들은 자신의 옷을 사려고 매장에 온 게 아닙니다. 패션이라는 건 본질적으로 의류를 파는 게 아니라 옷을 사는 기쁨을 파는 것이죠. 그러므로 자신을 위한 옷을 사려고 온 게 아니라는 사실은, 이 브랜드는 옷장이 가득 차면 거기서 끝이라는 겁니다." 시라쓰치 씨는 제게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당시 그의 말을 듣고 시라쓰치 씨는 대체 어떤 뇌 구조를 가졌을까 궁금했습니다. 그건 분명 기획자의 두뇌 사용법이었어요. 다양한 착안점이 있고, 그것들은 각각 구체적인 정보지만 일단 통합해서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유니클로에서는 자신을 위해 옷을 사지 않는다 → 남편과 아이들의 옷은 저렴한 유니클로에서 사고, 자신은 거기서 절약한 돈으로 주말에 백화점을 찾는다 → 따라서 유니클로는 언젠가는 그 브랜드에 지게 된다'는 이야기예요.
이렇게 설명을 들으면 이해하기 쉽지만, 여러 가지 현상들이 파편적으로 뒤섞여 있는 가운데서 그것을 깨닫기는 결코 쉽지 않죠. 모두가 이런 통찰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시라쓰치 씨의 추상적 사고력이 높은 덕분에 가능했던 거죠. 여러 가지 현상을 보고 그 정보가 모였을 때 어떤 스토리를 그릴 수 있을 것인가? 어떤 일이 일어났으며 그 후에 또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런 논점을 '연결하는 능력'은 광고기획자로서 20년간 일해오며 추상적 사고력이 높아진 데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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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아서도 이야기했지만 젊은 사람들이 자신의 강점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들은 대부분 틀린 것이 많습니다. 그러니 성급하게 '나는 이것은 잘하고 이것은 못한다'라고 단정 짓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 가지 일을 시도해보면서 잘 되었는지 혹은 잘 되지 않았는지 그 결과를 직시하는 게 중요합니다. 고객이 매우 만족한다거나 재발주가 들어온다는 것은 틀림없이 잘했다는 증거입니다. 반대로 고객이 약간 불만족스럽게 느낀 부분이 있었다거나 재발주가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은 잘하지 못했다는 뜻이죠. 그런데 이런 과정을 고찰하지 않고 재능 진단 테스트 같은 데만 의지하는 것 같아 안타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