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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서재 Part 1

부분과 전체

#26 하이젠베르크 [부분과 전체]

by 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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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는 계속하였다.

(중략) 그런데 이 같은 증명이 실패하였을 때 사람들은 이 새로운 경험이 - 그것을 새로운 내용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 표현 가능성의 확장, 다시 말해서 물리학의 개념 체계의 확장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는 공간과 시간과 같은 기본적인 개념이 철저하게 바뀌어야만 한다는 것을 예견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시간과 공간에 관한 개념에 무엇인가 변화가 있어야 하고, 또 변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처음으로 인식하였던 것은 아인슈타인의 위대한 발견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녜가 물리학에 대해 한 이야기를 18세기 중엽의 음악의 발전과 견주어 보고자 한다. 당시 개개인의 감정 세계는 더딘 역사적 과정을 통하여 우리들이 루소 또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시대의 의식 안으로 들어왔고, 그래서 저 위대한 고전파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등이 표현 수단을 확장함으로써 이 같은 감정 세계의 적절한 표현을 성공시켰던 것이다.


발터의 어머니가 우리를 향해서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타이르듯이 입을 열었다.

아마도 바흐나 모차르트 같은 인물들이 음악의 왕으로서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은 수많은 무명의 음악가들이 200년에 걸쳐 최고의 세 심 성과 성실성을 가지고 그들의 사상을 재현하고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청중들에게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청중들 자신도 이 세심한 재현과 해석의 작업에 동참함으로써 저 위대한 음악가들에 의해서 표현된 내용이 비로소 생생한 현존의 것으로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술에서나 과학에서나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역사적인 발전과정을 보면 모든 분야에 '긴 친묵의 시대'와 '천천히 발전하는 시대'가 반드시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시대에서도 가장 세부적인 데 이르기까지 성실하고 정확한 작업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온 힘을 바치지 않은 일들은 모두 잊히게 마련이며, 언급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이 느린 과정에서 시대의 변천에 따라 문제 되는 분야의 내용도 바뀌게 되고, 이래서 전연 예기치 않았던 새로운 가능성과 새로운 내용들이 돌연히 나타나게 되지요. 위대한 천재들은 이와 같은 과정 속에서 그 모습을 나타내는 성장력에 마술적으로 끌려 들어가서 불과 20, 30년 안에 대단히 우수한 예술작품을 창조하거나 아주 중요한 뜻을 갖는 과학적 발견을 성취하게 됩니다. 위대한 천재들은 새로운 정신적인 내용에다 외면적인 표현을 부여하고, 또 그 이상으로 발전을 가능케 하는 가치 있는 형식을 창조하지만 그들 자신이 새로운 내용을 본래적으로 창조해내는 일 따위는 거의 없습니다.


볼프강은 이에 대하여 몇몇 조건들을 덧붙였다.

"그러나 네가 말한 것은 사람들이 꼭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매우 중요한 몇몇 전제 아래서만 타당한 것이다. 첫째로 이론의 예언은 전후 모순이 없이 뚜렷하게 일관되어 있다는 것이 확실해야 한다. 상대성 이론의 경우에는 이것은 간단하게 내다볼 수 있는 수학적 구조로써 보증되고 있다. 둘째로는 그것이 어떤 현상에는 적용될 수 있고 어떤 것에는 적용될 수 없다는 한계가 이론의 개념적 구조로부터 나와야 한다. 그러한 제한이 없다면 모든 이론은 곧 모순에 빠지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한 이론이 세계의 모든 현상을 예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이 과제는 이 영역 이외의 과학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와는 전혀 성질이 다른 것입니다. 그 까닭은 지금까지의 물리학에서, 또는 다른 모든 자연과학 분야에서는 사람들이 하나의 새로운 현상을 설명하겨고 할 때 이미 현존하는 개념과 방법을 사용하여서 그 새로운 현상을 이미 알려진 현상이나 법칙에 소급시키는 시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원자물리학에서는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개념으로는 결코 충분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뉴턴의 물리학은 물질의 안정성 때문에 원자의 내부에서는 적용이 될 수 없으며, 기껏해야 경우에 따라 하나의 거점을 제공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원자구조에 대한 직관적 서술도 불가능합니다. 직관적이어야 한다는 그 자체가 벌써 고전 물리학의 개념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현상은 이미 그와 같은 개념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본디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학생은 잘 알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원자의 구조에 대해서 어떤 것을 서술한다고 하지만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보어에게 물었다.

"만약에 원자의 내부구조가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그렇게 직관적 서술로써는 접근하기 어렵고, 또 우리가 이 구조에 관해서 말할 수 있는 언어를 갖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도대체 언제쯤 원자를 이해할 수 있단 말입니까?"

보어는 잠시 머뭇거린 다음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그때 동시에 '이해'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이 삐라의 내용에 관한 한 그동안 기회 있을 때마다 볼프강과 논의했던 모든 의문점에도, 나에게 상대성이론의 정당성을 굳게 확신시키는 구실을 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왜냐하면 뮌헨의 시민전쟁에서 경험한 사실들을 통하여 나는 오래전부터 정견은 큰소리로 선전하거나 실제로 달성하려고 노력하는 그 목표를 바탕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다만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한 수단에 따라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부당한 수단은 이미 그 수단을 사용하고 있는 장본인부터 그 명제의 설득력을 스스로 믿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인슈타인이 대답하였다.

"사람이 무엇을 관찰할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이론입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관찰이란 일반적으로 매우 복잡한 과정입니다. 관찰되어야 할 현상은 우리들의 측정장치에서 어떤 사건을 일으킵니다. 그 결과 장치 안에서 또 다른 현상이 일어나게 되고, 그것이 돌고 돌아서 결국은 감각 인상을 만들어 내어 우리의 의식 안에 현상에서부터 우리의 의식 안에 그 결속을 정착시키게 됩니다. 정착되기까지의 이 전체적인 긴 과정에서 자연이 어떻게 기능하고 있느냐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관찰하였다고 주장하려면 우리는 적어도 자연법칙을 실질적인 면에서 알고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따라서 이론, 즉 자연법칙에 대한 지식만이 감각 인상을 통해서 그 바닥에 깔려 있는 현상에 관한 결론은 내릴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과학에서도 실질적인 신세계는 어느 결정적인 자리에서 지금까지 과학이 서 있었던 그 밑바탕을 박차 버리고, 말하자면 허공에 뛰어들 각오가 되어 있을 때에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그의 상대성이론에서 그때까지의 물리학이 확고한 바탕으로 삼거 있었던 동시성의 개념을 포기하였다. 그리고 많은 지도적인 물리학자나 철학자들은 동시성에 관한 종전의 개념을 포기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여 상대성이론의 격렬한 반대자가 되었던 것이다. 과학의 진보는 그 종사자들에게 새로운 사고 내용을 받아들여서 그것을 구체화하는 것을 요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를 위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신세계에 들어가려면 새로운 사고 구조를 받아들여야 할 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 사고 구조를 바꾸어야 할 경우도 있는 것이다.



보어 : 네 , 그건 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양자 비약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양자 비약이라는 현상을 표상할 수 없음을 증명할 뿐입니다. 다만 우리가 양자 비약이라는 현상을 표상할 수 없음을 증명할 뿐입니다. 즉 우리의 일상생활과 지금까지의 물리학의 실험을 서술하는 직관적 개념을 양자 비약이라는 현상을 서술하기에는 불충분하다는 것을 중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문제 삼고 있는 현상은 우리들의 직접적인 경험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 다시 말해 우리가 그것을 직접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념들은 그 현상을 설명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렇게 이상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파울 에렌페스트는 아슈타인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인슈타인! 나는 자네에 대하여 부끄러운 생각이 드네. 자네는 마치 자네의 상대성이론에 반대했던 사람들처럼 이 새로운 양자이론에 반대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 같은 친구의 권고도 그를 설득할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사고의 근거가 되어 왔고 과학적인 연구의 기반이 되어 왔던 표상들을 포기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나는 새삼 뼈저리게 느낄 수가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저 외부세계의 시간과 공간 안에서 우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이 확고한 법칙에 따라 진행되는 물리학적 현상들의 객관적인 세계를 연구하는 것을 필생의 사업으로 삼았다. 따라서 그에게는 이론물리학의 수학적인 기호들은 이 객관적인 세계를 묘사해야 하며, 이를 바탕으로 그 세계의 미래적인 형태에 대한 예언이 가능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제 사람들이 원자세계까지 내려간다면 공간과 시간 안에서의 그 같은 객관적인 세계는 전연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이론물리학의 수학적인 기호들은 실존적인 것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것만을 묘사한다는 사실이 주장될 수 있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그의 발이 딛고 서 있는 발판을 제거해 버릴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 뒤 양자이론이 이미 물리학의 확고한 구성요소가 되어버린 지 오랜 시간이 흘러도 아인슈타인은 평생 동안 자기 견해를 바꾸지 못했다. 그는 양자 이로은 잠정적인 과도적 설명으로는 받아들였지만 그것을 궁극적인 설명으로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는 주장은 아인슈타인에게는 흔들릴 수 없는 확고한 원칙이었으며, 그 원칙이 누구에 의해서든 침범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보어는 이런 아인슈타인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있을 뿐이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어떻게 다스리실 것인가를 지시하는 것은 우리들의 과제가 될 수 없습니다."


버튼은 대략 다음과 같이 답변했던 것 같다.

"(중략) 지금까지는 뉴턴의 물리학이 관찰된 사실들에 대한 충분하고도 정확한 기술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전자기 현상을 알게 되었고, 뉴턴의 역학을 가지고는 이 전자기 현상을 설명하는 데 충분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그렇지만 맥스웰의 방정식이 이 현상을 설명하는 데 우선은 족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원자 현상에 관한 연구에서, 고전역학이나 전자 역학을 적용해 가지고는 관찰된 결과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에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전의 이론이나 방정식들을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그 결과 양자역학이 성립되었습니다."


"즉 뉴턴의 법칙은 현상이 뉴턴의 개념으로써 기술될 수 있는 정도의 정확성을 가지고 성립됩니다. 이 정확성의 정도가 한정된다는 사실은 이전의 물리학에서도 이미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 까닭은 아무도 임의적으로 정확성을 결정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확정성 관계에서와 같이 측정 정확성에 원리적으로 한계가 설정된다는 것은 원자 영역에서 사람들이 처음으로 마주친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측정 정확성에 관한 한 뉴턴의 역학은 완전무결한 것이고 앞으로도 충분히 타당할 것이라는 점만 확인해도 된다고 봅니다."


"뉴턴의 역학으로부터 상대론적 역학 또는 양자역학으로의 이행에서 나타나는 근본적인 변화를 엔지니어의 개량과 나란히 세우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엔지니어들이 개량이고 할 때는 모든 말들이 이때까지의 의미를 그대로 지니고 있으며, 다만 이전에 등한시하였던 영향들을 보완하기 위하여 공식에다 새로운 보조항을 첨가한데 지나지 않습니다. 즉 기술자에게는 도대체가 지금까지의 개념을 바꿀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종류의 변화는 뉴턴의 역학에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며, 그런 변화에 접근하는 실험이란 도대체 존재하지를 않습니다. 뉴턴의 역학은 그 통용범위에서 어떤 조그마한 변경으로 말미암아 개량이 이루어질 수 없으며, 이미 옛날에 그 법칙의 궁극적인 형식을 발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바로 뉴턴 역학의 영원한 절대성의 주장이 타당하다는 점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뉴턴 역학의 개념 자체로써는 도저히 꿰뚫을 수 없는 경험 역역이 존재합니다. 바로 이와 같은 새로운 경험 영역을 위해서는 새로운 개념 구조가 필요하며, 이 새로운 개념 구조를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 등이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자기 완결적인 폐쇄 영역에 대한 가장 중요한 규준은 아마도 정확하게 표현된, 자체 모순이 없는 공리계의 존재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동시에 개념들과 그 체계 안에서의 합법적인 관계들을 확고하게 합니다. 이와 같은 공리 체계가 어느 정도로 실제성에 적합한지는 물론 경험적으로만 결정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커다란 경험 영역이 어떤 이론에 따라서 서술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이론은 이론으로서 성립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판단 규준을 타당하다고 한다면 지금까지의 물리학을 네 가지의 완결된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고 봅니다. 즉 뉴턴의 역학, 열의 통계학적 이론, 맥스웰의 전자기 역학을 포함한 특수상대성이론, 그리고 새로 성립된 양자역학일 것입니다. 이 각자의 영역들은 이 같은 개념들로 서술될 수 있는 경험 영역 안에 우리가 머물고 있는 한, 그 진술이 엄격하게 타당한 개념과 공리에 따라서 정확하게 정식화되는 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보어는 이 사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설거지는 마치 언어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더러운 설거지물과 더러운 냅킨을 가지고도 접시와 컵을 깨끗이 씨는 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불명확한 개념과 적용범위도 뚜렷하지 않은 논리를 가진 언어를 사용하여 자연에 대한 이해를 명백하게 하는 데 성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독 사람의 경우에만 이 특수화가 다른 방식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고 말할 수 있게 하는 인간의 신경계를 사람이 동물보다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훨씬 큰 규모를 갖게 만드는 하나의 기관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과거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기억할 수 있고 미래에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를 내다볼 수도 있습니다. 공간적으로 먼 곳에서 일어나는 것을 상상할 수도 있으며,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어느 의미로는 동물보다 훨씬 더 융통성이 있고 환경에 잘 순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와 같은 융통성으로 특수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군비 증강은 이웃 나라들의 저항력을 촉진시킬 뿐이며, 결과적으로 우리나라의 안보를 해치는 일밖에는 되지 않을 겁니다. 더 큰 정치적인 공동체에 소속된다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안보 책이 될 겁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결국 먼 장래에 놓여 있는 목표 달성을 위해 세운 정치적 계획에 대하여 가치판단을 내린다는 것은 항상 매우 어렵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정치적 운동이란 큰소리로 외치며 실제로 달성하려고 하는 그 목표에 따라서 판단할 것이 아니라, 그 실현을 위해서 사용하고 있는 수단에 따라서 판단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국가 사회주의자의 경우나 공산주의자의 경우에는 유감스럽게도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수단은 참으로 졸렬한 것이며, 장본인들조차도 자기 이념의 실현을 위한 설득력을 믿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두 가지 이념으로부터 파생되는 어떠한 운동에도 기대를 걸 수는 없으며 이 두 가지 주의로부터는 독일에 불행만 가져올 뿐이라는 것을 유감스럽지만 확신하고 있습니다."


러더퍼드 : 베를린의 물리화학자인 네른스트는 지구는 본디 일종의 화약공며, 사람들이 아직 이 화약을 폭발시킬 성냥을 갖고 있지 못한 것뿐이라고 주장하였다고 합니다.


부테난트는 내 말에 동의하였다.

"하빌적인 사고를 위한 교육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확실하며, 이런 사고방식에 다시 한번 더 많은 기회를 주는 일은 전후에 우리가 맡아야 할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확실히 이번 전쟁의 오늘날까지의 경과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현실에 눈을 뜨게 했음에 틀림없습니다. 제 아무리 총통을 신뢰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없는 자원을 만들어 주지도 않으며, 무시하였던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그것으로 도깨비처럼 급작스럽게 이뤄지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그들은 충분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중략) 그러나 한 민족으로서의 우리는 지성보다는 어떤 환상을, 사상보다는 감정을 더 높이 평가하면서 꿈속을 헤매고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따라서 과학적인 사고방식이 존중되는 일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일이며, 이것은 전후의 궁핍 가운데서도 가능하다고 합니다."


"도리어 실질적인 면에서는 환상은 과학의 영역, 특히 자연과학의 영역에서도 결정적인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실을 얻기 위하여 냉청하고 세심한 많은 실험적인 작업이 팔 요하지만 사실의 종합정리는 사람들이 그 현상을 곰곰이 생각할 때보다는 도리어 그 현상으로 감정이입이 가능할 때에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곳에서는 절대적인 것을 향한 추구는 형식의 속박에 매여 있을 때에만, 즉 과학에서는 논리적인 냉철한 사고에, 음악에서는 화성학과 대위법의 규칙에 의존하고 있을 때에만 가능했습니다. 즉 절대적인 것을 향한 이와 같은 극단적인 긴장관계에서만 자기의 실제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입니다.


프리드리히는 그의 생각을 계속 말하였다.

"사람들은 여기서 발견자와 발명자를 나누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발견자는 대체로 발견 전에는 그 이용 가능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으며, 그 뒤에도 실제적 이용까지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그것을 예언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겁니다. 그러나 발명자의 경우는 예측에서 이와는 다르다고 봅니다. 발명자는 확실히 어떤 특정한 실용ㅈ거인 목표를 계산하고 있을 것이고, 따라서 그는 그 목표 달성이 어떤 가치가 있다는 것을 확신해야 하기 때문에 당연히 그것에 대한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발명자의 경우에는 본디 한 개인으로 석 ㅏ아니라 큰 인간 공동체의 위아래서 행동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ex) 전화의 발명자, 화약의 발명자) 따라서 발명자에게도 그 책임의 일부만이라도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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