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기시미 이치로ㆍ고가 후미타케 [미움받을 용기]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주관적인 세계에 살고 있지. 객관적인 세계에 사는 것이 아니라네.
그렇지, 분명히 설명이 안 되지. 그래서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과거의 '원인'이 아니라 현재의 '목적'을 본다네.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래, 분노는 한순간의 감정이지. 이런 이야기가 있네. 어느 날, 엄마와 딸이 큰소리로 말다툼을 벌였네. 그런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지. "여보세요?" 엄마는 당황해서 수화기를 들었는데 목소리에는 여전히 분노의 감정이 남아 있었지. 전화를 건 사람은 다름 아닌 딸의 담임선생이었네. 그걸 안 순간 엄마의 목소리는 정중한 톤으로 바뀌었지. 그리고 그대로 격식을 차린 채 5분가량 담소를 나누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네. 동시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딸에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어.
중요한 것은 무엇이 주어졌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이다.
모든 범죄자에게는 범행을 저지를 만한 내적인 '마땅한 이유'가 있지. 가령 금전에 얽힌 원한 문제로 살인을 저질렀다고 하세. 이것도 당사자에게는 '마땅한 이유'이자 '선'의 수행이라네. 물론 도덕적인 의미에서의 선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득이 된다'는 의미에서의 선이지만.
자네가 변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변하지 않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네.
아들러 심리학은 용기의 심리학일세.
"고민을 없애려면 우주 공간에서 그저 홀로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고독을 느끼는 것은 자네가 혼자라서가 아닐세. 자네를 둘러싼 타인, 사회, 공동체가 있고, 이러한 것들로부터 소외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고독한 거지. 우리는 고독을 느끼는 데도 타인을 필요로 한다네. 즉 인간은 사회라는 맥락 속에서 비로소 '개인'이 되는 걸세.
우리를 괴롭히는 열등감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주관적 해석'이라는 건가요?
'열등감'과 '열등 콤플렉스'도 혼동하지 말고 정확하게 구분해서 써야 하네.
열등 콤플렉스는 자신의 열등감을 변명거리로 삼기 시작한 사태를 가리킨다네. 일상생활에서 "A라서 B를 할 수 없다"라는 논리를 내세우는 것은 이미 열등감의 범주를 벗어난 걸세. 그건 열등 콤플렉스지.
그렇지. 정말로 자신 있는 사람은 자랑하지 않아. 열등감이 심하니까 자랑하는 걸세. 자신이 우월하다는 것을 일부로 과시하려고 하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주위에 누구 한 사람 '이런 나'를 인정해주지 않을까 봐 겁이 나거든 이는 완벽한 우월 콤플렉스라네.
(불행자랑)
이런 사람들은 불행한 것을 '특별'하다고 여기고, 불행함을 내세워 남보다 위에 서려하지.
건전한 열등감이란 타인과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나'와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라네.
내 대답은 한결같네. 모든 인간은 '같지는 않지만 대등'하네.
인간관계를 경쟁으로 바라보고 타인의 행복을 '나의 패배'로 여기기 때문에 축복하지 못한 걸세.
분노를 제어하는 것이 '참는다'는 것을 뜻하나? 그러지 말고 분노라는 감정을 이용하지 않아도 되는 방법을 배우게. 분노란 어차피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며 도구니까.
권력투쟁에 관해 한 가지 더 일러둘 말이 있네. 아무리 자신이 옳다고 여겨도 그것을 이유로 상대를 비난하지는 말게.
친구와 지인의 수는 결코 중요하지 않네. 중요한 것은 관계의 거리와 깊이라네.
인간은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사랑을 실감할 수 있네.
아들러 심리학은 '소유의 심리학'이 아니라 '사용의 심리학'일세.
설사 자네가 인생의 과제를 회피하고 인생의 거짓말에 의지한다고 해도, 그것은 자네가 '악'에 물들어서가 아닐세. 도덕적으로 규탄받아야 할 문제가 아니라 '용기'의 문제라는 걸세.
타인의 기대 같은 것은 만족시킬 필요가 없다는 말일세.
누구의 과제인지 구분하는 방법은 간단하네. '그 선택이 가져온 결과를 최종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인가?'를 생각하게.
자신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네.
자신의 삶에 대해 자네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믿는 최선의 길을 선택하는 것', 그뿐이야. 그 선택에 타인이 어떤 평가를 내리느냐 하는 것은 타인의 과제이고, 자네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일세.
나는 '과제의 분리'를 설명할 때마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떠올린다네.
'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에만 집착하는 삶이야말로 '나' 이외에는 관심이 없는 자기중심적인 생활양식이라는 것을.
인간은 칭찬을 받을수록 '나는 능력이 없다'는 신념을 갖게 된다네.
이를테면 어떻게 해야 인간은 '용기'를 낼 수 있을까? 이에 대한 아들러의 견해는 다음과 같지. "인간은 자신이 가치 있다고 느낄 때에만 용기를 얻는다."
과제를 분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변할 수 있는 것'과 '변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해야 하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인다, 즉 '자기 수용'을 한다.
그러면 배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타자 신뢰'를 할 수 있다.
타인을 무조건 신뢰하고 그 사람들을 내 친구라고 여기게 되면 '타자 공헌'을 할 수 있다.
타인에게 공헌함으로써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실감하게 되며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다, 즉 '자기 수용'을 할 수 있다.
자네의 공헌이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사람은 자네가 아니라네. 그건 타인의 과제이지 자네가 개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일반적인 운동 - 이를 키네시스라고 하네 - 에는 시점과 종점이 있네. 그 시점에서부터 종점까지 이르는 운동은 가능한 효율적이고 신속하게 달성되는 것이 바람직하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그 여정은 불완전하지.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말이야.
반면 에네르게이아란 '지금 하고 있는'것이 그대로 '이루어진' 상태가 된 운동을 가리키네. 달리 말하면, '과정 자체를 결과로 보는 운동'이라고 할까. 춤을 추는 것이나 여행처럼 말이야.
'지금, 여기'에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면 과거도 미래도 보이지 않게 되네.
먼 장래에 이룰 목표를 설정하고 지금은 그 준비 기간이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이걸 하고 싶은데 아직 때가 아니니 그때가 되면 하자'라고 생각한다. 이런 건 인생을 뒤로 미루는 삶의 방식이네. 인생을 뒤로 미루는 한 우리는 어디에도 가지 못하고 단색으로 칠해진 따분한 나날만 보내게 될 걸세. '지금, 여기'는 준비 기간이고 참는 시기라고 여기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