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조르바의 편지를 다 읽고 나는 한동안 두 가지로(아니, 세 가지로) 망설였다. 화를 내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아니면 인생의 껍질(논리와 도덕과 정직성의 껍질)을 깨고 표면으로 뛰쳐 나오려는 이 원시적인 인간에게 그저 감탄만 하고 있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우리에게는 그토록 편리한, 자질구레한 덕성이 그에겐 없었다. 그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만족을 모르는 극히 불쾌하고 위험한 덕성뿐이어서 이런 상태가 그를 극한과 지옥의 나락으로 끊임없이 충동질해 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글을 쓸 때면 이 무식한 일꾼은 펜을 무지막지하게 부러뜨린다. 원숭이 껍질을 처음으로 벗긴 원시인처럼, 아니면 위대한 철학자처럼 그는 인간의 원초적인 문제에 지배당한다. 조르바는 이들 문제를 목전의 급한 필요로 인식하는 것이다. 어린아이처럼 그는 모든 사물과 생소하게 만난다. 그는 영원히 놀라고, 왜, 어째서 하고 캐묻는다. 만사가 그에게는 기적으로 온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서 나무와 바다와 돌과 새를 보고도 그는 놀란다. 그는 소리친다.
"이 기적은 도대체 무엇이지요? 이 신비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나무, 바다, 돌, 그리고 새의 신비는?"
"밤이고 낮이고 나는 버찌 생각만 했지요. 입에 군침이 도는 게, 아, 미치겠습디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화가 났습니다. 창피해서 그랬는지도 모르지요. 어쨌든 나는 버찌가 날 데리고 논다는 생각이 들어 속이 상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한 줄 아시오? 나는 밤중에 일어나 아버지 주머니를 뒤졌지요. 은화가 한 닢 있습디다. 꼬불쳤지요. 다음날 아침 나는 일찍 일어나 시장으로 달려가 버찌 한 소쿠리를 샀지요. 도랑에 숨어 먹기 시작했습니다. 넘어올 때까지 처넣었어요. 배가 아파 오고, 구역질이 났어요. 그렇습니다, 두목, 나는 몽땅 토했어요. 그리고 그날부터 나는 버찌를 먹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보기만 해도 견딜 수 없었어요. 나는 구원을 받은겁니다. 언제 어디서 버찌를 보건 내겐 할 말이 있습니다. 이제 너하고는 별 볼일이 없구나 하고요. 훗날 담배나 술을 놓고도 이런 짓을 했습니다. 나는 지금도 마시고 피우지만 끊고 싶으면 언제든지 끊어 버립니다. 나는 내 정열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내 딴에는 자기 위안의 한 경지에 도달했답시고 한번 과부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다. 조르바는 그 긴 팔을 쑥 내밀어 손바닥으로 내 입을 막아 버렸다.
"닥쳐요!"
그가 구겨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닥쳤다. 부끄러웠다.
(진짜 사내란 이런거야...)
나는 조르바의 슬픔을 부러워하며 이런 생각을 했다.
그는 피가 덥고 뼈가 단단한 사나이... 슬플 때는 진짜 눈물이 빰을 흐르게 했다. 기쁠 때면 형이상학의 채로 거르느라고 그 기쁨을 잡치는 법이 없었다.
지쳐 버린 퇴물 사이렌, 오르탕스 부인은 침대 머리에서 옥신각신하는 소리를 들었다. 달콤하던 환상은 사라졌다. 제독의 배는 침몰했고 구운 꿩, 샴페인, 향수를 친 수염도 사라졌다. 부인은 다시 이 세상의 끝, 냄새나는 임종의 침대 위로 떨어진 것이었다. 오르탕스 부인은 이 침대 위에서 도망치려는 듯이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다시 뒤로 벌렁 넘어지며 애처롭게 울부짖었다.
"자, 유식한 양반, 이 이야기는 하고 넘어갑시다. 여자에게 그 이상의 기쁨은 없는 법입니다. 진짜 여자에게는... 잘 들어 두시오. 당신에게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데... 진짜 여자는 남자에게서 얻어 내는 것보다 자기가 주는 데 훨씬 더 큰 기쁨을 누리는 법입니다."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돈, 사람, 고가선, 수레를 모두 잃었다. 우리는 조그만 항구를 만들었지만 수출할 물건이 없었다. 깡그리 날아가 버린 것이이었다.
그렇다. 내가 뜻밖의 해방감을 맛본 것은 정확하게 모든 것이 끝난 순간이었다. 엄청나게 복잡한 필연의 미궁에 들어 있다가 자유가 구석에서 놀고 있는 걸 발견한 것이었다. 나는 자유의 여신과 함께 놀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