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장폴 샤르트르 [말]
그들의 용서를 얻어 보려고 안마리는 몸을 아끼지 않았다. 뫼동에서도 또 그 후 파리로 올라와서도 그녀는 친정의 집안일을 떠맡아 했다. 가정교사, 간호부, 주방장, 비서, 하녀의 역할을 두루 했지만 어머니의 말 없는 역정을 가라앉힐 수는 없었다. 루이즈는 매일 아침 식단을 짜고 저녁이면 가계부를 정리하는 것을 귀찮아하면서도 남이 대신 하는 것은 그냥 보고 있지 못하는 여자였다. 자기의 짐이 가벼워지는 것은 좋았지만, 동시에 특권을 잃게 되는 것이 못마땅했다. 하루하루 늙어 가는 이 뒤틀린 여인에게는 한 가지 환상밖에 없었으니, 그것은 자기가 절대로 필요한 존재라는 믿음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환상이 깨어지고 그녀는 딸에게 질투를 느끼기 시작했다. 불쌍한 안마리. 얌전히 앉아만 있었으면 귀찮은 식객이라고 욕을 먹었을 것이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일을 하니 이번에는 집안을 휘어잡으려 한다는 의심을 사게 되었다. 그러니 첫 번째 비난을 받지 않으려면 온갖 용기를 내야 했고 두 번째 비난을 면하기 위해서는 겸손할 대로 겸손해야만 했다.
나는 아직 글자를 몰랐지만 내 책을 가지고 싶다고 조를 정도로 겉멋이 들어 있었다. 할아버지는 그 못된 출판사에 가서 시인 모리스 부쇼르가 지은 [콩트집]을 얻어 왔다. 그것은 민화에서 따온 이야기들인데, 할아바지의 말로는 어린애의 눈을 간직하고 있는 어른이 어린애의 취미에 알맞게 고쳐 쓴 책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당장에 그 책을 내 것으로 만드는 절차를 밟고 싶었다. 나는 그 두 권으로 된 작은 책을 손에 들어 냄새를 맡고 쓰다듬어 보고, 종잇장을 바스락거리면서 마음에 드는 페이즈를 되는 대로 열어 보려고 했다. 그러나 허사였다. 아무래도 이 책이 내 것이라고 느낄 수가 없었다. 나는 책을 인형처럼 다루어서, 가볍게 흔들기도 하고 입 맞추기도 하고 때려 주기도 해 보았지만 쓸데없었다. 나는 울상이 돼서 그것을 어머니 무릎 위에 갖다 놓고 말았다. 어머니는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얘야, 어떤 이야기를 읽어 줄까? 요정 이야기?" 나는 미심쩍어하면서 물었다. "요정들이 이 속에 있어?" 그 이야기는 벌써부터 잘 알고 있는 터였다. 목욕을 시키면서 어머니는 그 이야기를 자주 해 주었다. 화장수를 발라줄 때나 손에서 미끄러져 욕탕에 빠진 비누를 건지려고 할 때는 이따금씩 중단하면서.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그 이야기를 건성으로 들었다. 내 눈에는 아침마다 만나는 이 처녀 안마리만이 보이고 내 귀에는 종 노릇에 기가 죽은 그 목소리만이 들렸다. 도중에서 툭 끊어지는 구절들, 언제나 뒤늦게 튀어나오는 낱말들, 그리고 별안간 자신이 생긴 듯한 그 어조가 재미있었다. 하나 그런 자신 있는 어조도 금방 흐트러지고 무너져 버려서 고운 멜로디의 포말처럼 사라졌다가는 한순간의 침묵 후에 다시 살아났다. 이야기 줄거리는 다만 덤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의 독백을 이어주는 끄나풀일 따름이었다. 이야기가 계속되는 동안 우리는 숲 속의 두 마리 사슴이며, 우리의 곁에는 요정이라는 이름의 다른 사슴들이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비누와 화장수의 냄새를 풍기는 우리의 세속적인 생활의 에피소드를 꾸며 주기 위해서 누군가 이런 책까지 만들었다는 것을 아무래도 믿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작은 의자에 나를 마주 앉혔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더니 잠든 듯했다. 그리고 조상과 같은 그 얼굴에서 석고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누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무엇을 누구에게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일까? 나의 어머니는 이미 이 자리에 없다. 웃음 하나 없고 공감의 표시 하나 없으니 나는 추방당한 셈이다. 더구나 그 어조는 어머니의 어조가 아니었다. 어디서 그런 자신 있는 음성이 생겼을까? 나는 금방 깨달았다. 어머니가 아니라 책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책에서 나오는 그 말들이 나는 무서워졌다. 그것은 진짜 노래기와 같았다. 노래기 떼처럼 음절과 글자가 오글오글 기어 다니고 이중모음이 등을 펴고 이중자음이 바르르 떨었다. 노래를 부르다가 콧소리를 내는가 하면 잠깐씩 쉬거나 한숨을 짓기도 하는 노래기들, 알 수 없는 말들을 잔뜩 지닌 그 노래기들이 스스로 흥이 나서 나 같은 것은 아랑곳없다는 듯이 꼬불꼬불 기어 다니는 것이었다. 때때로 그 노래기들은 내가 미처 이해하기도 전에 사라져 버리기도 했다. 또 어느 때는 미리 다 알고 있는 장면도 있었다. 그럴 경우에는 노래기들이 도리어 구두점 하나 생략하지 않고 점잖게 기어가는 것이었다.
나는 그 속에서 진짜 새집을 털고 진짜 꽃 위에 앉은 진짜 나비를 잡았다. 사람과 짐승이 모두 '진짜로' 거기 있었다. 삽화는 그들의 몸이고 글은 그들의 영혼이며 독특한 본질이었다. 밖에서 만나는 사람이나 짐승은 그 원형과 다소간 닮은 점은 있지만 원형의 완전성에는 못 미치는 흐리멍덩한 모방에 지나지 않았다. 동물원의 원숭이는 진짜 원숭이답지 않고 뤽상부르 공원의 사람들은 진짜 사람답지 않았다. 정신 상태로 보아 플라톤주의자가 된 나는 지식에서 출발해서 사물로 향했다. 나로서는 사물보다도 관념이 한결 현실적이었다. 왜냐하면 내게는 관념이 먼저 주어졌고, 더구나 사물로서 주어졌기 때문이다. 내가 세계를 만난 것은 책을 통해서였다. 그것은 동화되고 분류되고 규정되고 사색된 세계, 그러면서도 아직도 무서운 세계였다. 나는 책에서 얻은 무질서한 경험과 현실적인 일들의 부조리한 흐름을 혼동했다. 나의 관념론은 바로 여기에 유래한 것이며 나는 그것을 청산하는 데 30년이 걸렸다.
사람들은 내게 우리 모두가 서로 연극을 꾸미도록 만들어져 있따고 타일렀고 나도 그 점을 인정했다. 다만 나는 그 주역을 맡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청천벽력에 망연자실한 순간들이 있었으니 그것은 내가 가짜 주역을 연출하고 있음을 깨달은 때였다. 대사도 있었고 여러 차례 무대에 얼굴을 내놓기도 했지만 정작 나 자신을 보여 줄 장면은 없었다. 한마디로 내 역할은 어른들의 상대역에 불과했다. 할아버지는 자기의 죽음을 달래기 위해서 내 비위를 맞추었다. 그리고 내가 피우는 소란은 할머니에게는 그녀의 심술의 구실이 되었고 어머니에게는 죽어지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내가 없었더라도 어머니의 양친은 어머니를 맞아들였을 것이며, 어머니는 그 고운 성품 때문에 할머니에게 무조건 복종했을 것이다. 그리고 또 내가 없었더라도 할머니는 여전히 뾰루퉁했을 것이고, 할어버지는 마터호른이나 유성이나 남의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감탄했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그들의 불화와 화해의 우연한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일곱 살 때 나는 진짜 죽음의 귀신을 도처에서 만났지만, 꼭 집어서 어디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것은 무엇이었떤가? 그것은 한 인물의 모습으로, 그리고 일종의 강박관념으로 나타났다. 그 인물은 미치광이였다. 그리고 강박관념이란 밝디밝은 대낮에도 시커먼 입들이 도처에서 열려 나를 집어삼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사물에는 무서운 이면이 있는데, 이성을 잃었을 때는 그 이면이 보이게 된다. 그리고 죽는다는 것은 광증의 극한까지 가서 그 속으로 빠져 드는 것이다. 나는 공포 속에서 살았다. 그것은 어김없이는 신경증이었다. 그 원인을 캐 보자면, 그것은 하늘이 내린 귀염둥이로서 응석받이로 자라 온 내가 자신의 근본적인 무용성을 느꼇다는 데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집안의 관례라는 것이 억지로 꾸민 요식 행위로 늘 보였기 때문에 그 무용성은 더욱더 분명한 것으로 여겨졌다. 나는 내 존재가 군더더기라고 느꼈고, 따라서 마땅히 없어져 버려야만 할 터였다. 나는 시시가각으로 소멸 직전에 처한 시든 꽃이었다. 다시 말하면, 나는 이미 사형선고를 받았고, 조만간에 형이 집행될 판국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한사코 그 판결을 거부했다. 내 생존이 소중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생존에 집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삶이 무의미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욱 죽음은 견딜 수 없는 것이 되기 마련이다.
나는 내 나이 또래 이상의 명답을 만들어 내려고 내 지성보다 더 높이 껑충 뛰어올랐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질문들은 내 기대에 어긋났다. 그것은 단지 내 호불호를 묻는 것이었다. 좋아하는 색깔은 무엇이며 좋아하는 냄새는 무엇인가 하는 따위였다.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은 채 좋아하는 것을 꾸며 대고 있었는데, 때마침 으스댈 기회가 생겼다 "당신의 가장 큰 소망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나타난 것이다. 나는 서슴지 않고 답을 적었다. "군인이 돼서 전사자들의 원수를 갚는 것." 그러고는 너무 흥분하여 그 이상 계속할 수가 없어서 마룻바닥으로 뛰어내려 내가 쓴 것을 어르들에게로 가져갔다. 그들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피카르 부인은 안경을 고쳐 쓰고 어머니는 그녀의 어깨 너머로 기웃거렸다. 두 사람은 심술궂게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러다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어머니는 얼굴을 붉히고, 피카르 부인은 내게 수첩을 돌려주며 말했다. "얘야, 이런 것은 진심으로 써야만 재미있는 거란다." 나는 숨이 막히는 듯했다. 내 실수는 너무나 뚜렷했던 것이다. 그들은 깜찍한 아이를 기대했는데 나는 고상한 아이 노릇을 한 것이다. 게다가 재수 없게도 그들은 전선에서 싸우는 가족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는 처지였다.
그 점에서는 집안에서 벌여 온 연극이 퍽 도움이 되었다. 사람들은 나를 하늘이 내린 선물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농담이었고 나도 그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남들을 감동시키는 데 이골이 난 나는 그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남들을 감동시키는 데 이골이 난 나는 눈물을 잘 흘렸지만 마음은 독했다. 나는 수취인을 찾고 있는 유용한 선물이 되고 싶었다. 나는 내 몸을 프랑스에, 세계에 바치기로 했다. 사람들 따위는 내 안중에 없었다. 그러나 우선 사람들을 상대로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상, 그들이 기쁨의 눈물을 흘리게 하자. 그 눈물은 온 세계가 나를 감지덕지 맞아들인다는 증거가 될 터였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내가 자만심이 큰 아이였다고들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나는 아버지 없는 아이였다. 아무의 아들도 아니었으니, 나는 나 자신의 원인이었고, 오만투성이이며 또한 비참투성이였다. 나는 당초에 나를 선으로 이끌어 가는 힘에 의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던 것이다. 인과의 사슬은 분명한 듯하다. 어머니의 애정으로 여성화되고, 나를 낳게 한 엄한 모세가 없어서 생기가 없고, 할아버지의 총애 때문에 우쭐해진 나는 순수한 대상이었다. 만약 내가 집안의 연극을 곧이곧대로 믿기만 했다면 무엇보다도 마조히즘의 제물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딴판이었다. 집안의 연극은 겉으로만 나를 움직이게 했을 뿐이며, 내 속은 냉담하고 정당화될 수 없는 존재로 남아 있었다. 나는 틀에 박힌 그 연극이 질색이었다. 기쁨에 겨워 정신을 못 차린다거나, 남들이 귀엽다고 마구 쓰다듬고 만지도록 몸을 내맡긴다거나 하는 짓이 지겨워졌다. 나는 반항함으로써 나의 입장을 세우려 했다. 그래서 오만과 사디즘으로, 다시 말해서 귀족성으로 달려들었다. 이 귀족성이란 따지고 보면 인색한 태도나 인종차별주의와 마찬가지여서, 자기 내면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서 분비하는 방향제에 불과하며, 결국은 자기 자신을 중독시키고 마는 것이다.
나는 사물의 존재만을 노리는 테러리스트다. 언어를 통해서 그것을 꼭 만들어 놓고 말리라. 동시에 나는 언어만을 사랑하는 수사학자이기도 하다. '하늘'이라는 말의 푸른 눈 아래로 언어의 대사원을 세우리라. 수천 년의 미래까지 겨니는 대사원을 세우리라…… 책을 손에 들고 수십 번이나 열고 닫고 해 보아도 통 상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텍스트'라는 불후의 실체 위를 스치는 내 시선은 표면에만 머무는 하찮은 우연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텍스트를 어질로 놓을 수도 없고 닳아 없어지게 할 수도 없다. 나는 다만 수동적이며 덧없 는 존재다. 나는 등불을 함빡 쬐어 눈이 부신 모기일 따름이다. 나는 서재에서 나오며 불을 껐다. 그러나 어둠 속에 묻힌 책은 여전히 번쩍이는 것이었따. 오직 저 자신만을 위해서. 나도 내 작품이 모든 것을 녹여 버리는 이런 강렬할 불빛을 지니게 하리라. 그리고 후일 그 작품들은 허물어진 도서관에 간직되어 인간들이 죽은 뒤에도 살아남으리라.
나는 항상 세상을 탓하기보다는 자신을 질책하기를 좋아했다. 마음이 착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은 오직 자신에게서 비롯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건방지면서도 겸허한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나의 실수가 어김없이 선에 이르는 지름길이니만큼 나는 더욱더 기꺼이 내가 실수하기 쉬운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설사 내 의사에 반할망정, 항상 새로운 진보를 강요하는 불가항력적인 인력을 내 삶의 움직임에서 느길 수 있도록 채비했다.
과거가 나를 만들어 준 것이 아니다. 그러기는 커녕 바로 나 자신이 나의 잿더미에소 소생하면서 부단히 다시 시작되는 창조를 통해서 나의 기억을 무로부터 건져 낸 것이다. 나는 더욱 훌륭한 존재로 다시 태어났고, 내 영혼에 사장된 비축물들을 더욱 잘 활용했다. 그것은 죽음이 그떄마다 더욱 가까이 다가와서 그 어두운 빛으로 더욱 강렬히 나를 밝혀 주었다는 단순히 이유 때문이었다. 흔히들 과거가 우리를 앞으로 밀어 준다고 말했지만, 나는 미래가 나를 이끌어 간다고 확신했다. 나는 내 속에서 힘이 서서히 작용하고 내 소질이 완만하게 발휘하는 것을 느끼기 싫었따. 나는 내 영혼에 부르주아들의 끊임 없는 진보를 가득 쓸어 넣고, 그것으로 폭발 장치를 만들었따. 나는 과거를 현재 앞에, 현재를 미래 앞에 무릎 꿇게 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조용한 진화 과정을 혁명적이며 불연속적인 돌발 사태로 바꾸어 놓았다.
내 광기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은 그것이 첫날부터 나를 엘리트의 유혹에서 지켜 주었다는 점이다. 일찍이 나는 재능의 행복한 소유자라고 자처해 본 적이 없다. 나의 유일한 관심은, 적수공권 무일푼으로, 노력과 믿음만으로 나 자신을 구하려는 것뿐이었다. 그러니 나의 순수한 선택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 어느 누구의 위로 올라선 일은 결코 없었다. 나는 장비도 연장도 없이, 나 자신을 완전히 구하기 위하여 전심 전력을 기울였다. 만약 내가 그 불가능한 구원을 수품 창고에라도 치워 놓는다면 대체 무엇이 남겠는가? 그것은 한 진정한 인간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로 이루어지며, 모든 사람들만큼의 가치가 있고 또 어느 누구보다도 잘나지 않은 한 진정한 인간이다.
보통 사람의 경우라면, 현실적 사물과의 접촉으로 시작된 체험이 일반적 관념과 상상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이 순서다. 그런데 사르트르의 경우에는 그 과정이 전도되어 나타난다. 책을 통해서 얻은 관념과 상상이 현실을 대신하고, 속되게 말해서 현실을 잡아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