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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컹리 Jun 28. 2018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

#84 토드 부크홀츠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

p.39

   물론 경제학자들뿐 아니라 모든 과학자들은 모델을 구축해야 한다. 꽤 오랜 세월 동안 물리학은 뉴턴의 만유 인력 법칙에 의존했다. 천문학자들은 아직도 코페르니쿠스의 패러다임을 사용한다. 토머스 쿤의 저서로 많은 논란을 일으켰던 <과학혁명의 구조>는 이런 모델의 발전 과정을 추적한다. 그렇다면 경제학은 왜 이런 '어려운 과학'보다 더 어려운가? 다음 예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신장 수술을 집도하는 한 외과 의사를 떠올려보자. 의사는 엑스레이 검사를 통해 환자의 오른쪽 신장이 결장에서 2.5센티미터 정도 아래로 내려와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런데 의사가 수술을 위해 막 절개를 시작한 순간 신장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일이 벌어졌다. 경제학에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경제학자가 주요 원인을 분석하고, 그것이 미치는 영향을 평가하려는 순간, 그것이 미치는 영향력이 달라진다. 인간관계와 사회제도가 바뀜에 따라 과학적 의문의 대상도 동시에 바뀐다. 경제학은 '어려운' 과학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경제학이 쉬운 과학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너무 유동적이기 때문에, 어떤 한 곳을 점찍어서 연구하는 것이 어렵다. 케인스는 경제학의 대가란 기사작위나 성인 칭호를 얻기 위해 필요로 하는 것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몸소 보여주는 사람이라며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경제학자는 수학자이자, 역사가이자, 정치가이며, 동시에 철학자여야 한다. (…) 그는 경제학의 복잡한 수식을 이해하고, 그것을 말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특수한 것을 일반적인 것으로 생각해야 하며, 추상적이고 구체적인 것을 동일한 사고의 지평에 놓고 다루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미래를 위해 현재를 이미 지난 과거의 경험에 입각해 연구해야 한다. 인간의 본성이나 여러 가지 사회제도를 하나라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는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져야 하고, 개인의 감정에 치우쳐서는 안 된다. 예술가처럼 초연하고 순수하면서도 간혹 정치가처럼 냉혹한 현실을 냉철한 눈으로 직시할 줄 알아야 한다.



(암울한 예언가, 맬서스)

p.138

   그러나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아프리카 대륙의 국가들은 인구 감소나 농업 생산량 증가에서 별다른 성과를 내고 있지 못하다. 비록 출산율을 1950년대에 비해 많이 떨어졌지만, 전반적인 인구 성장률을 기대율은 1950년대에 비해 많이 떨어졌지만, 전반적인 인구 성장률은 기대 수명이 늘어나면서 더 높아졌다. 한편, 에티오피아 같이 가뭄과 전쟁이 끊이지 않는 나라들에서는 이 두가지가 적극적인 억제 기능을 하면서 인구가 감소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나라들은 자국의 국민을 부양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런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경제학자들은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한다.

   하나는 가난한 나라들은 소득이 낮기 때문에 저축할 여유가 없고, 따라서 새로운 투자에 필요한 자본이 없다. 소득이 낮은 이유는 생산 기술이 불충분하고 낙후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 국가는 악순환에 빠져 있고, 해외 원조는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데 있다. 다른 하나는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으로 이들 국가에서 정치적 기반이 약한 지배자들이 식료품 가격을 낮게 유지함으로써 도시 소비자들을 지지 기반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하지만 식료품 가격을 시장에 맡기지 않고 인위적으로 낮춤으로써 농민들의 투자 의욕을 저하시키고, 그 결과 생산량이 떨어진다. 결과적으로 소비자들은 낮은 식료품 가격에 좋아하겠지만, 시간이 갈수록 상점의 선 반은 비어갈 것이다.

   

(자유무역의 화신, 데이비드 리카도)

p.154

   이처럼 리카도는 항상 돈에 둘러싸여 살았지만, 그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접한 것은 스물일곱 살 무렵에, 그것도 아주 '우연한 기회'를 통해서였다. 1799년, 리카도는 영국 남서부에 위치한 에이번 주의 온천 휴양지 바스에서 지루한 휴가를 보내고 있었는데, 마침 그때 고전파 경제학의 창시자가 쓴 이 위대한 역작을 접하게 된다. 사실, 흥미로운 것은 이때가 리카도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경제학을 접하는 순간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가 유럽 여행길에 프랑스에 들러 체류하는 동안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국부론>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을 상기하자. 경제학이 다른 어떤 학문보다 지루함에 빚을 많이 지고 있는 것 같은데, 경제학과 학생들은 교수들이 간혹 수업을 지루하거나 따분하게 한다 해도 불평하지 말지어다.


p.166

   문제는 외투가 미국에서 생산되느냐 생산되지 않느냐가 아니다. 즉, 문제는 더 높은 또는 더 낮은 기회비용으로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우리의 귀중한 자원을 사용할 수 있느냐다. 교역을 허용함으로써 각 국가는 자국의 국민들에게 한정된 자원을 생산성이 낮은 산업에서 생산성이 높은 산업으로 옮겨가도록 강제한다. 이렇게 각 나라가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면, 각 나라의 국민들은 적은 희생으로 더 많은 재화를 소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산업 구조 조정이 일어날 경우 생산성이 낮은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과 경영자들에게는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생산성이 낮은 산업을 보호할 경우 더 큰 댓가를 치르게 되는 것은 소비자들이다. 따라서 정부는 산업 구조 조정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실직자들에게 실업 수당을 지급함으로써 직접 보상을 하거나, 아니면 재교육을 통해 다른 일자리를 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1980년대 초에 미국은  철강 노동자의 일자리를 보장하기 위해 철강 노동자 1인당 10만 달러가 넘는 손실을 보았고, 한편 제화공의 일자리를 보장하기 위해 제화공 1인당 7만 7,000달러의 손실을 감당해야 했다. 그리고 최근 사례로는 2002년에서 2006년까지 캐나다산 목재에 대해 보복성 관세를 부과함으로써 이 시기에 새로 지은 가옥의 건설비용이 평방미터당 1,000달러까지 상승하는 일도 있었다. 결국 누가 손해를 보았겠는가!

   게다가, 생산성이 떨어지는 산업을 보호할 경우 경제 전반에 걸쳐 침체가 일어날 수 있다. 지금까지 산업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우리의 생계수준을 높여준 대다수 산업과 발명은 다른 한편으로 피해자를 만들어냈다. 다시 말해, 생산성이 떨어지거나 비효율적인 산업 분야에서 생산성이 높고 효율적인 산업 분야로 옮겨가는 것은 필연적으로 실업자를 양산할 수밖에 없다. (중략)

   자유시장이라고 해서 고통이 뒤따르지 않는 것은 아니다. 보이지 않는 손은 어머니가 아이를 돌보거나 보호해주는 식으로 우리를 보호해주지 않는다. 만일 사람들이 안정을 더 선호한다면, 아마도 그들은 보호받는 쪽을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경제성장과 발전에서 얻는 이득은 외국에서 각종 선물과 판매할 물건을 등에 짊어지고 항구를 통해 들어오는 자국 국민들을 정부가 못 가지고 들어오도록 금지할 경우 코너에 몰릴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는 돌아가지 않는다.


(경제학계의 풍운아, 존 스튜어트 밀)

p.232

   자유방임 정책과 정부의 개입 정책에 대한 밀의 입장을 살펴보는 일은 몇 권의 책을 써도 모자란다. 그래도 간략히 요약하면, 밀은 한쪽에 치우치기보다는 두 입장 사이에서 최대한 중립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극단적인 자유방임주의의 입장을 거부했던 그는 자유방임의 기본 전제만을 받아들였다. 반면, 정부의 개입에 대해서는 더 큰 행복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필요한 경우에 한에서만 인정했다. 밀은 "더 큰 선이 필요로 하지도 않는데, 자유방임을 포기하는 행위는 명백한 악이다"라고 주장했다. 물론 과세, 화폐 발행, 국방, 법질서 확립 등 국가가 개입해서 해야 할 일들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소비자 보호, 교육, 그리고 사업 규제 등은 국가가 반드시 개입해야 하는 분야가 아니다. 따라서 이런 '선택적 optional' 기능들은 각각의 경우에 따라 개입을 결정해야 한다. 예를 들어, 밀은 국가복지보다는 사적인 자선 사업을 선호했지만, 이런 자선 사업이 부분적인 성공밖에 거두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해 누가 한 푼이라도 더 준다면 좋아하겠지만, 부자들이 직접 나서서 그렇게 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무임승차 free-rider' 효과때문인데, 무임승차란 자신은 비용을 부담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해 놓은 일에 편승해 같은 혜택을 누리는 것이다. 따라서 밀은 국가가 가난한 사람들을 부양하기 위해 과세의 힘 taxing power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존 스튜어트 밀의 이런 주장은 매우 현대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오늘날 정부의 주요 기능들과 정책들을 앞서 예견했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그는 모든 정책적 제안은 기본적으로 검증 과정을 거쳐 확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왜냐하면 "일부 성미 급한 개혁가들은 지식인들과 여론의 지지를 얻는 것보다 정보를 장악하는 것이 더 쉽고 더 빠른 길이라는 생각하고, 나아가 정부으 기본 역할과 범위를 넘어 계속해서 그것을 확대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프랑스 정치 사상가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를 읽고 중앙집권적인 정치 형태보다는 분권적이고 자유로운 정치 형태의 장점을 배웠다.

   여러 측면에서 밀의 입장은 당시 영국 정부의 입장이기도 했다. 영국은 산업혁명의 성공에 힘입어 자국 상품의 해외 수출을 위해 자유시장 경제로 나아가고 있었고, 그에 따른 경제적 착취와 불평등을 막기 위해 다양한 사회적 안전 장치들을 속속들이 마련해 가고 있었다. 영국의 정치가로 4번이나 수상을 역임한 윌리엄 글래드스턴은 1846년에 결국 곡물법을 폐지했고, 소득세 인하를 단행했다. 그리고 자유무역의 기치가 유럽 전역에서 울려 퍼지고 있을 때, 영국 의회는 1802년에 공장법을 제정하고, 1819년과 1846년 2차례 개정을 거쳐 9세 이하 아동의 취업을 금지하고 노동 시간을 규제함으로써 경제적 착취를 막고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기념비적인 조치를 위했다. 밀은 영국 정부의 이런 정책 방향에 대해 신중한 검토를 거쳐, 즉 기본적인 검증 과정을 거쳐 지지했다.


(비운의 혁명가이자 경제학계의 이단아, 카를 마르크스)

p.249

   마르크스의 철학과 역사는 헤겔의 용어를 빌리고 있지만, 그것을 그대로 차용하지는 않았다. 즉, 헤겔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더라도 그것의 순서를 달리했다. 그가 어떻게 순서를 달리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정신적 지주였던 헤겔의 가르침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헤겔은 철학이란 이념 ideas의 전개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는 데 있다고 가르쳤다. 역사란 인간의 정신과 이념의 산물이다. 물질 세계, 즉 우리가 보고 만질 수 있는 물질, 그리고 사회의 제도는 이런 이념의 길을 따른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 역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 The Protestant Work Ethic and the Spirit of Capitalism>에서 이와 비슷한 논지를 폈다. 즉,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등장이 자본주의를 낳았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신에 대한 믿음이 경제 제도의 변화를 초래했다고 주장하는 것인데, 헤겔의 이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 헤겔에 따르면, 우리는 당대의 지배적인 민족주의 natinalism를 통해 역사의 공로를 추적할 수 있다. 즉 이집트, 그리스, 로마 등등. 헤겔은 공고한 민족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프러시아가 이제 그 뒤를 이을 차례라고 생각했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관념론 idealism을 거부했다. 독일 철학자 루드비히 포이어바흐를 따라 마르크스는 역사에서 물질의 힘에 주목했다. 포이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 The Essence of Christianity>에 따르면, 신은 단지 인간의 욕망, 필요, 그리고 속성의 투사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 같은 말이지만,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실존적 존재인 인간이 신이라는 관념을 만들어냈다. 포이어바흐의 영향을 받은 마르큿는 뒤에 종교를 "민중의 아편 opium of the people"으로 선언하기에 이른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열망을 신과 내세에 투영하는 한, 그들은 현실 세계의 물적 조건 material conditions과 불의 injustices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이상에서 언급한 내용을 토대로 보면, 마르크스는 청년 헤겔파라기보다는 헤겔학팍의 낙제생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헤겔의 주요 방법론이었던 변증법 dialectic을 그대로 수용했다. 헤겔은 역사는 실재와 마찬가지로 평탄하고, 점진적인 패턴을 따르지는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렇다가 역사가 일련의 독립적인 사건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아니다. 모든 관념은 자신의 대립물을 포함한다. 철학자들은 헤겔의 변증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즉, 테제 thesis 또는 관념은 그것의 반테제 antithesis와 한 쌍을 이룬다. 그리고 이들 관념 사이의 대립 갈등이 종합 테제 synthesis(합 또는 진테제), 다시 말해 새로운 테제를 만들어낸다. 새로운 테제는 다시 자신의 반테제와 대립한다. 이렇게 세계는 테제(정)-반테제(반)-종합테제(합)의 끊임없는 연속이다. 역사는 그 자체로 결코 반복되지 않는다. 오직 말 많은 역사가들만이 자신의 말을 되풀이할 뿐이다.

   변증법적 방법과 모든 경제 현상을 불변적인 인과관계로 간주하는 뉴턴적 경제학 접근방법을 비교해보자. 헤겔의 변증법적 관점에서 오직 불변적인 것은 변화 그 자체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불변적인 것이다.

   마르크스는 변증법적 방법과 유물론 materialism을 결합했다. 뒤에 엥겔스는 이것을 변증법적 유물론 dialectical materialism 또는 역사유물론 있었다면, 마르크스는 코를 땅에 박고 문지르고 싶어 했다. 마르크스는 역사는 땅에 뿌리를 박고 있다고 말했다. 종교, 윤리, 또는 민족주의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창밖을 내다봐라. 인간이 한갓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얼마나 애쓰고 발버둥치고 있는지 똑똑히 보라. 인간 없는 역사는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빵 없이 인간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최초의 역사적 행위는 이런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을 생산하는 것이다." 관념론적 역사가들은 공상의 나라 오즈 Oz의 역사나 써댈지 모른다.

   마르크스는 역사가 노예제 사회에서 봉건제, 자본주의, 그리고 사회주의로 나아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런 역사적 경로는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이나 어떤 불변적인 법칙에 사이에 나 있는 것이 아니라 생산에 놓여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그것은 인간과 생산(수단)의 관계(생산 양식 또는 생산제관계)에 놓여 있다. 각각의 생산 양식은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을 만들어낸다. 각각의 시대는 지배 계급이 수익을 수취해 가는 특별한 방식으로 특징지어진다. 로마 시대에는 노예를 소유한 자가 노예가 생산한 것에 대해 소유권을 가졌다. 봉건제 시대에는 영주가 농노가 생산한 것에 대해 소유권을 가졌고, 자본주의 시대에는 공장 및 토지의 소유자가 임금 노동자가 생산한 것에 대해 소유권을 가졌다. 이처럼 지배 계급의 생존은 피지배 계급의 노동에 달려 있다. 그런데 이것이 노동자들의 교섭력을 높여줄까? 그렇지 않다. 노동자들은 지배 계급과 협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지배 계급이 생산 수단을 통제하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구슬을 챙겨 집으로 가지고" 갈 수 없다. 그것은 자신들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 사이에 상호 의존이 생겨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배 계급은 마치 노동자들을 별로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려고 한다. 오히려 노동자들이 지배 계급에게 애달 복걸하는 것처럼 보인다. 만일 이런 위장 전략이 성공할 경우, 지배 계급은 피지배 계급에 대한 자신들의 지배력을 확장할 수 있다.

   지배 계급은 어떻게 자신들의 지위를 보장할 수 있을까? 바로 여기에 헤겔의 관심사였던 윤리, 민족주의, 관념이 끼어든다. 지배 계급은 신념, 법, 문화, 종교, 도덕, 애사심을 조장해 생산 과정을 지탱한다. 애사심이 강한 노동자는 신바람나게 일할 것이고, 일과 시간에 농땡이를 부리며 생산 수단의 소유자를 기만하지 않는다. 오늘날 미국의 자동차 제조업자들과 양조업자들은 미국을 마치 지상낙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하루 일과를 충분히, 성실하게' 할 수 있는 곳으로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아메리카 드림은 '야구와 핫도그, 애플파이와 시보레 자동차' 같은 것과 동일시된다. 미국에서 시보레는 사실상 어머니의 자리를 대신했다. 이게 사실이라면 오이디푸스적인 아메리칸 드림은 아버지의 자동차에 대한 욕망도 포함하는 것일까?

   우리의 윤리적, 법적 체계는 우리가 일을 게을리 할 경우 죄의식을 갖도록 가르친다. 그런데 왜 생산 수단의 소유자는 우리가 피땀 흐렬 생산한 이윤을 수취할 권리를 가질까? 이에 대해 우리는 그가 재산, 즉 생산 수단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윤리적, 법적 체계를 수용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마르크스의 의문은 바로 이것에서 시작한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사적 소유 제도에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지배 계급은 대중을 현혹한다. 예를 들어 미국인들에게 주식이나 채권을 보유하고, BMW를 구매하는 꿈을 꾸도록 한 것은 바로 유인 suggestion과 설득 persuasion의 힘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개인들은 이런 꿈을 외부의 유인과 설득의 힘이 아닌 자기 자신의 고유한 것으로 생각하고, 따라서 그것들을 내면화하거나 주관화한다. 다시 말해, 그것을 외부에서 주입된 의식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이다. 마르큿는 이런 기존 지배 관계의 유지에 관여하는 관념, 법, 윤리를 상부구조 superstructure라 불렀다.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A Contribution to the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서문에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물질적 생활의 생산 양식이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지적 생활을 조건 짓는다. (…) 인간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결정한다.

   농노는 영주에게 허리를 굽혀 충성을 맹세한다. 단순 기능공들은 높은 긍지를 갖고 숙련된 장인을 섬긴다. 임금 노동자들은 높은 임금을 받거나 승진하기 위해 더욱 열심히 일한다. 이들은 모두 주어진 지배 체제 내에서 힘들게 일하며 더 나은 삶은 추구한다.

   마르크스는 지배 계급이 상부구조를 구축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모여 공모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생산 수단의 소유자들도 그들의 종교를 수단이 아닌 진심으로 믿고 섬길 수 있다. 상부구조는 생산 과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생산 과정이 살마들의 인식을 왜곡하고 틀 지우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인간이 자신의 역사를 창조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지는 못한다. 즉, 인간은 자신이 직접 선택한 환경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주어진 환경에서 역사를 창조한다. 모든 앞선 세대의 전통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악몽처럼 자리 잡고 있다."라고 말했다.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이면, 뒤에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마르크스와 자신이 간혹 생산(토대)과 상부구조의 인과관계를 지나치게 강조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관념도 때에 따라서는 실질적인 결과물을 내놓았다.

   만인 윤리와 문화가 자동적으로 발생해 기존의 계급 체제를 떠받친다면, 왜 마르크스는 <공산당선언 The Coummunist Manifesto>의 서문에서 "지금까지 존재했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선언했을까? 누군가가 왜 투쟁을 해야 한단 말인가? 누군가가 처음 투쟁을 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생산 수단의 소유자들은 단지 노동자들의 고혈을 짜낼 뿐이고, 통일교도들이 교주가 외부 행사에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항상 몰려나와 꽃을 던지며 환호하고 축복하는 것처럼, 노동자들이 자신의 고혈을 짜내 바치는 행동을 자연스럽게 여길 수도 있지 않은가. 통일교 교도들과 노동자들이 이런 행동으로 인해 조금이라도 이득을 보는 한, 경제는 알아서 굴러갈 것이고, 따라서 생산 수단 소유자들의 통장에는 이윤이 쌓여갈 것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생산 과정의 기술이 바뀌면 기존의 생산 과정에 일대 변화가 일어난다. 새로운 생산 기술이나 방법은 토지, 노동, 그리고 자본의 양과 질을 바꾼다. 발견, 발명, 교육, 인구 증가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물질적 생산력은 동적 dynamic이다. 이렇게 새로운 생산력이 더해지면서 오래된 생산 과정은 폐기된다. 예를 들어, 노예제는 토지 대비 노동자의 비율이 높을 때 이윤을 생산할 수 있었다. 그러나 트랙터나 수확기의 생산성이 노예보다 더 효율적이거나 노동자 인구가 상승하면, 노예제는 이윤을 많이 낳지 못할 것이다. 즉, 미래의 생산력은 새로운 생산 과정에 달려 있다.

   그러나 정치, 윤리, 그리고 법 제도 전반은 낡은 방법에 의존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즉, 생산력이 발전한다고 해서 이런 제도들이 발맞춰 신속하게 바뀌지는 않는다. 산업혁명 이후에도 성직자들은 여전히 노예 제도가 신의 왕국으로 가는 첩경이라고 설교했다. 이것은 성직자들의 마음과 중세 성당의 대리석에 새겨진 영원불멸의 진리였다. 여기에서 엿볼 수 있듯이 상부구조는 정적 static이다.

   구지배 계급이 낡은 관념을 틀어쥐고 새로운 경제발전을 저해함으로써 역동적인 역사 과정을 방해할 때 투쟁이 일어난다. 마르크스는 수동 제분기가 중세 영주를 낳았고, 증기 제분기가 산업자본가를 탄생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너라 중세 영주는 기존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산업자본가들과 대립한다. 뒤에 길드 장인들은 공장 소유자와 대립한다. 용맹한 원탁의 기사 랫슬럿 경과 갈라하드의 이야기는 잊어버리자. 뾰족한 병기를 들고 벌이는 유혈 투쟁은 중세의 기사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영주와 상업 세력들 사이에서 대규모로 일어난다. 

   지배 계급은 토지, 노동, 자본, 또는 기술이 변할 때마다 위협에 직면하나. 그들은 자신들의 철학이 '영원한 진리 eternal truths'라고 부르짖지만, 그런 사상누각에서 언제 곤두박질칠지 모른다. 역사는 모든 것을 갈아엎는다. 어제 왕의 목을 졸랐던 자가 오늘 도리어 목이 잘려 나갈 수도 있다.


p.264

   애덤 스미스, 그리고 특히 데이비드 리카도처럼 마르크스는 상품의 가치가 그것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량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입증한다'. 기계는 쇳조각 형태로 저장되어 있는 과거의 노동 past labor일 뿐이다. 제작하는 데 10시간이 걸리는 스테레오는 다섯 시간밖에 걸리지 않는 스테레오보다 2배 더 가치가 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노동이 착취되지 않는다면 이윤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를 토대로 다음과 같은 단순한 삼단논법을 전개해볼 수 있다.

1. 상품의 가치(즉, 가격)는 노동량에 의해 결정된다.

2. 노동자는 자신이 상품 생산에 기여한 만큼의 가치(즉, 임금)를 받는다.

3. 따라서 이 상품의 가치가 노동자가 받는 임금과 동등하다.

   그러나 상품의 가치와 달리 상품의 판매 가격은 노동자들에게 분할되지 않는다. 상품의 소유자가 그 가격의 일부, 즉 자신의 이윤을 가져간다. 보이지 않는 손 따위는 잊자. 오히려 자본가의 눈에 훤히 드러나 보이는 억센 손이 그것을 와락 채간다. 그렇다면 이런 이윤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우선 두 번째 전제가 잘못됐다. 즉, 노동자는 자신이 상품 생산에 기여한 만큼의 가치를 받지 못했다. 그들은 창취당한 것이다. 그런데 마르크스를 비판하는 논자들은 오히려 첫 번째 전제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자본가들은 어떻게 노동자들을 속일까?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사업에 기여한 만큼 임금을 지불하는 대신 오직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최저 임금 subsistence wage, 다시 말해 목숨을 부지한 채 계속 일을 할 수 있는 만큼만 지급한다. 자본가들은 노동력을 마치 하나의 상품처럼 구입한다. 그런 다음 생산 원료와 마찬가지로 하루에 X시간 동안 생산 과정에 투입한다.

   마르크스의 용어를 사용해 다시 설명해보자. 마르크스는 자본가들이 불변 자본 constant capital이라 불리는 공장과 설비를 제공하고, 가변 자본 variable capital이라 불리는 노동(력)을 고용한다고 정의한다. 물론 불변 자본과 가변 자본을 공장이라고 불리는 한 곳에 모아 놓는다고 해서 무조건 생산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자본가는 공장이 돌아가 생산되는 최종 생산물의 가치가 투입된 불변 자본과 가변 자본의 합을 초과해야 본격적으로 생산을 시작한다. 초과 가치 extra value(이윤)는 노동자들에게 그들이 생산한 가치보다 적게 임금을 지급한 결과 발생한다. 다른 말로, 노동자들이 자신들이 생산한 상품에 추가하는 가치는 그들이 임금의 형태로 받는 가변 자본을 초과한다. 마르크스는 노동자에게서 강탈한 이런 부정 이득을 잉여 가치 surplus value라 불렀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영희는 라디오 시티 뮤직홀에서 재봉사로 무대 의상을 제작하거나 수선하는 일을 하고 있다. 보통 관객들은 배우들이 뜯어진 의상을 입고 무대에 오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문제 있는 의상을 수선하는 영희의 바느질은 공연에 10달러의 가치를 더한다. 그러나 그녀가 바느질에 대한 댓가로 받는 보수는 6달러밖에 되지 않는다. 즉, 공연 단장이 매일 공연마다 4달러의 잉여 가치를 영희에게서 빼앗아가는 것이다. 여기에서 영여 가치 대 보수(임금)의 비율, 즉 6분의 4가 착취율 ratio of exploitation이다.

   그런데 왜 영희는 자신이 공연에 온전히 기여한 10달러에 대해 지불을 요청하지 않을까? 그것은 바로 실업 문제에 있다.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실업을 발생시키며, 산업예비군 reserve army이 영희가 더 높은 보수를 요구할 때를 대비해 언제고 대기하고 있다. 더구나 그녀는 생사 수단인 재봉틀, 무대 의상, 또는 무대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것은 단장이다. 생산 수단을 통제함으로써 단장은 영희가 속해 있는 노동시장을 지배한다.

   그 전에 단장은 무슨 기준으로 영희의 보수를 6달러로 책정했을까? 일단 단장은 자신이 고용하는 노동자들에게 생존에 필요한 임금만 지불하면 그만이다. 영희의 보수가 6달러로 책정된 것은 그것으로 그녀의 삶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그녀는 최저임금을 받은 것이다. 만일 그녀가 시간당 1달러를 받는다면, 그녀는 하루 여섯 시간 노동을 최저 생계수준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단장은 여섯 시간이 지났는데도 영희에게 계속해서 일을 시킨다. 그는 그녀에게 더 많은 일감을 안겨주며 더 많은 시간을 일하도록 강요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단장은 그녀에게 하루 일당 6달러를 주며 4시간이나 더 많은 10시간 노동을 시킨다. 그 결과 영희는 자신을 위해 6시간을 일하고, 나머지 4시간은 단장을 위해 일하는 꼴이다. 4시간의 잉여(시간 또는 노동)는 곧장 단장의 호주머니로 들어간다. 단장은 바느질 한번 하지 않고 손쉽게 돈을 벌었다.

   왜 노동자들은 최저 임금만을 받을까? 앞서 말했듯이, 상품의 가치는 상품에 투입된 노동의 가치에 의해 결된다. 노동(력) 또한 하나의 상품이다. 따라서 노동(력)의 가격은 노동자의 생산 및 유지, 즉 재생산에 필요한 화폐량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최저 임금이다.

   일반적으로 자본가는 노동자들에게 그들이 생산한 것을 구매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임금을 지급하지 않는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에게 돌아올 일정한 몫을 받기 위해 투쟁한다. 앞서 살펴본 예에서, 공연 티켓 가격이 10달러라고 한다면, 비록 여으히가 공연에 10달러의 가치를 추가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받는 보수로는 공연  티켓을 구할 수 없다. 혹시 영희가 공연 배우의 상반신만 보겠다고 약속한다면, 단장이 할인된 가격으로 티켓을 살 수 있게 해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만일 이윤이 노동 착취에서 비롯한다면, 이윤율은 생산된 잉여 가치의 양 대 총투하된 자본(불변 자본과 가변 자본)의 비율이라 정의할 수 있다. 좀 더 쉽게 설명하면, 이윤율을 r, 생산된 잉여 가 치의 양을 s, 불변 자본을 c, 가변 자본을 v라고 했을 때, 이윤율 r=s/(c+v)라는 공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자본가는 자신이 고용한 노동자들의 노동 시간을 늘림으로써 이윤을 높일 수 있다. 또는 남성 노동 이외에 여성 노동과 아동 노동을 착취함으로써 더 많은 이윤을 취할 수도 있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집필하고 있던 시기에 평균 근로 시간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었고, 더 많은 여성과 아동이 공장 노동자로 투입되고 있었다.

   이제 우리는 이윤이 어떻게 해서 착취에 의존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런데 왜 이런 상황이 계속해서 유지될 수 없을까? 결국 노동자들을 절망에 빠뜨릭 자본가들을 무릎 꿇게 만드는 자본주의 법칙이란 무엇인가? 마르크스는 사회 혁명이 그저 아무 때나 일어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자본주의에 내재한 경제적 모순들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했다. 아래에서는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파국으로 몰아가는 것으로 지목했던 다섯 가지 '법칙 laws' 또는 '경향 tendencies'에 대해 살펴보자. 보이지 않는 손은 자본주의에 갈채를 보내기는커녕 그것을 파괴한다. 


(앨프리드 마셜의 한계적 사고)

p.335

   그렇다면, 탄력성의 정도를 결정하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가장 분명한 것은 대체재 substitutes의 존재 여부다. 선택의 여지가 많으면 많을수록 소비자들은 좀 더 쉽게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배우 로버트 드 니로는 비탄적일 수 있다. 그를 대신할 수 있는 배우는 내가 또한 좋아하는 알 파치노 밖에 없는 것 같다.  (중략) 두 번째, 대체재를 찾을 수 있는 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수요는 그만큼 더 탄력적일 수 있다. 1973년 가을에서 1974년 겨울까지 제 1차 오일 쇼크 기간 동안 휘발유 가격은 45퍼센트 정도 상승했다. 그리고 그해 휘발유 수요는 8퍼센트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몇 년 뒤, 제2차 오일 쇼크가 발생했을 때, 소비자들은 제1차 오일 쇼크 때와 달리 훨씬 더 탄력적으로 대응했다. 그들은 연비가 좋은 좀 더 작은 차량을 구입했고, 교통비를 아끼기 위해 대중교통을 이용했으며, 그리고 주택 냉난방을 위해 단열재 등으로 주택을 개량했다. (중략) 탄력성의 정도를 결정하는 세 번째 요인은 어떤 상품이 가계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다. 만일 어떤 상품이 가계 예산에서 별다른 비중을 차지 않는다면, 소비자는 가격 변동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다. 즉, 그런 상품은 비탄력적일 수 있다. 이쑤시개를 예로 들어보자.


p.340

   비록 마셜이 빈민 문제에 대해 깊이 관여했지만, 사회주의와는 상당한 거리를 두었다. 오히려 그는 사회주의를 '인류가 당면한 가장 큰 위협'이라고 비판했다. 아리스토 텔레스 이후 많은 철학자들과 경제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마셜은 공동 소유 collective ownership에 대해 두려움을 표시했다. 그는 "공동 소유 제도를 도입하기 전에 인류가 이기심을 버리고 공공선에 헌신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은 인류의 활력을 빼앗고, 경제 발전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고 예견했다. 특히 마셜은 자신의 점진적이고 진화론적인 벨트안샤웅, 즉 세계관에 기초해 "인내심 강한 경제학도라면 삶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조건을 갑작스럽게 폭력적으로 재조직화하려는 계획이 이로움보다는 오히려 더 해로운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 것이다"라고 목을 박았다.

   앨프리드 마셜에게 '조급한 것impatient'은 '부정직한 것dishonest' 만큼이나 엄청 모욕적인 것이었다.

   마셜은 염세적인 고전파 경제학자들과 낙관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 모두 틀렸다고 생각했다. 정체 상태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인구 증가가 식량 생산을 앞지르지도 않았다.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더 이상 지주가 아니다. 비록 일부 시민들이 빈곤에 시달리고 있기는 하지만.


   19세기에 노동자 계급의 생활수준이 꾸준히 향상되었다는 엄연한 사실에서 우리는 빈곤과 무지가 점차 자취를 감출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증기 기관을 개발로 인간은 소모적이고 반복적인 노동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임금은 올랐고, 교육은 향상, 보급되었다. 철도와 인쇄기의 발달로 다른 지역에서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서로 손쉽게 교류할 수 있게 되었고, 광범위하고 장기적인 정책을 수립하고 수행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다. 한편, 지적 노동에 대한 수요 증대로 장인 계급 artisan classes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지금은 비숙련 노동자들의 수를 초과했다. 상당수 장인들은 과거와 달리 더 이상 '하층 계급 lower classes'에 속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일부 장인들은 1세기 전 대다수 상층 계급들이 누렸던 생활보다 더 화려하고 귀족적인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카를 마르크스를 제외하고 자본주의에 대해 이보다 더 열렬한 찬사를 보낸 사람도 없다.

   비록 마셜이 자본주의를 지지하기는 했지만,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우려할 만큼 그렇게 심성이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알았다. 그는 제자들에게 간청하듯이 경제학을 인간의 삶의 조건을 향상시키는 데 필요한 도구가 될 수 있도록 갈고 연마하라고 부탁했다. 그는 자신이 목격한 빈곤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되는 것에 몸서리를 쳤지만, 그렇다고 이런 개인적인 감정에서 경제학 논리를 전개하지는 않았다. 생물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자연이 하루아침에 비약하지 않듯이 빈곤도 일순가에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경제학계의 구세주, 케인스)

p.417

   그렇다면 정통파 바보 멍청이들이 세이의 법칙에서 간과한 것은 무엇일까? 그들은 세이의 법칙에서 가정하는 생산자에서 소비자로,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경제의 주기적인 흐름에서 뭔가 중요한 누수가 있다는 것을 간과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그들은 가계저축을 간과했다. 그렇다면 왜 가계 저축이 중요한가? 세이의 법칙대로라면, 상품 생산은 생산자와 공급업자에게 소득을 발생시킨다. 그리고 생산자와 공급업자, 즉 소비자들은 이렇게 벌어들인 소득을 그 상품을 구입하는 데 모두 지출한다.

   그런데 그들이 벌어들인 소득의 일부를 지출하지 않고 저축한다면? 생산된 상품은 전부 판매되지 않고 창고에 쌓여갈 것이다. 케인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정통파 바보 멍청이들도 이에 대한 해답은 가지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바로 아래에서 논하겠다. 그런데 그들의 해답이 옳았을까? 케인스는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정통파 바보 멍청이들의 두 가지 기본 명제를 반박했다.


1. 고전파 경제학자들에 따르면, 가계는 소득의 일부를 소비하고 나머지는 저축한다. 만일 소비자가 소비를 줄이고 저축을 더 많이 한다면, 재화와 용역에 대한 소비는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이때 자본가들은 더 많은 투자를 하기 때문에 생산과 소비는 다시 상쇄된다. 그렇다면 왜 자본가들은 더 많은 투자를 하려고 할까? 보통 돈을 저축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이불 밑이나 벽장에 보관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그것을 은행에 가져간다. 은행은 그 돈을 자본가들에게 빌려준다. 만일 사람들이 은행에 더 많은 돈을 저축하면, 은행은 그 돈을 빌려주면서 받는 비용, 즉 금리를 낮출 것이다. 그리고 은행이 이렇게 금리를 낮추면, 자본가들은 투자를 위해 더 많은 돈을 빌리려 할 것이다. 대출 금리가 낮기 때문에 돈을 빌려 투자를 늘릴 수 있다. 마셜류의 논리에 따르면 변동 금리 flexible interest rate는 투자와 저축을 하나로 묶는다. 소비자는 저축의 공급자이고, 자본가는 저축의 소비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저축은 금리(예금 금리)가 오르면 증가한다. 반대로 금리가 오르면 저축의 소비는 줄어든다.

  사람들이 소비를 줄이고 대신 저축을 늘리고 있다고 하자. 이것은 조만간 경기 침체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상의 논의대로라면, 저축이 늘어나면서 금리가 떨어질 것이고, 자본가들은 투자를 늘릴 것이다. 물론 이 돈은 다시 사람들의 호주머니로 돌아올 것이고 경제의 주기적인 흐름은 별 문제없이 이전대로 흘러갈 것이다.


2. 가변 임금과 물가 flexible wages and prices는 세이의 법칙을 지지한다. 모든 자본가들이 절름발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들은 소비자들이 서둘러 저축을 늘리고 있는데도 마음만 앞서지 냉큼 은행으로 달려가지 못한다. 따라서 자본가들은 줄어든 소비를 보상할 수 있을 만큼 서둘러 투자를 할 수 없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심하진 않더라도 경기 침체는 불가피해 보인다. 그러나 임금과 물가가 자본가들의 구세주로 떠오른다. 즉, 임금과 물가는 재화와 용역에 대한 수요가 줄어든 것에 발맞춰 동반 하락한다. 임금이 떨어지면서 실직한 노동자들이 다시 고용된다. 물가가 떨어지면서 공급 과잉된 상품들이 하나둘씩 팔려 나간다. 언제 경기침체가 있었냐는 듯 세상을 평온하다.


   애술 애호가로도 유명했던 케인스는 이렇게 산뜻하고, 논리적이고, 고풍스러운 명화가 바보 멍청이들인 현실주의 학파 realism school(고전파 경제학)의 컬렉션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이 학파는 이 명화의 진가를 알지 못한다. 단지 그 명화를 보고 추억과 감성에 잠길 뿐.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감상에 잠길 만큼 아름답지 않다. 더구나 1936년에는 더욱 더.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고전파 경제학에 대해 양면 공격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첫째, 그는 저축과 투자가 자동적으로 연결된다고 보지 않았다. 가계와 기업은 완전히 다른 이유에서 저축하고 투자한다. 가계는 습관적을 또는 자동차 구입이나 노후 대비 같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 저축할 것이다. 반면 기업은 정치 상황, 확신, 기술, 환율, 또는 어느 팀이 프로야구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할지에 따라 투자 계획을 바꿀 것이다.

   이렇게 저축과 투자 목적이 다른 가계와 기업이 이자율 하나로 서로 조화를 이루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만일 가계 저축이 기업의 투자를 초과하면, 상품의 공급 과잉 현상이 나타날 것이고, 기업은 이에 맞서 우선적으로 종업원들을 해고할 것이다. 그 결과 소비는 더욱 위축된다. 1997년과 1998년에 일본의 가계는 중앙은행이 단기 대출 금리를 0.5퍼센트 인하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출을 줄였다. 소득이 줄어들면, 저축은 투자 수준에 맞춰 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완전 고용 상태에서는 반드시 그렇게 되지 않는다.

   둘째, 케인스는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임금과 물가에 대해서도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물가가 상품의 수요와 공급에 따라 항상 적정 수준에서 오르락내리락 할 것이라고 말하는 정치가들이 있다면, 그들은 "수리수리하면 올라가고, 마수리하면 떨어질 것이다"라고 주문을 외는 점술가나 마찬가지다. 독점 상황에서 상품의 수요와 공급이 저절로 조절된다는 생각 자체가 무지의 소치다. 고전파 경제학 이론에 따르면, 경기 침체가 닥치면 실질 임금은 떨어져야 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명목 임금 하락을 납득핮 못하리라고 케인스는 생각했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경기가 후퇴하면 기업은 투자를 줄인다고 주장했다. 맞는 말이다. 그리고 저축은 결국 투자와 일치하게 된다. 그런데 왜 그렇게 될까? 그것은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투자가 늘어나기 때문에 아니라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으면서 저축할 여력도 동시에 잃기 때문이다. 게다가 임금과 물가가 서로 조정되기까지는 상당한 기일이 걸리기 때문에 경기 침체나 공황은 상당 기간 오래 지속될 수 있다.

   그리고 1930년대 초에 저축과 투자가 일치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즉, 저축도, 투자도 없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고전파 경제학의 화려한 쇼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케인스에 반기를 든 통화주의의 창시자, 밀턴 프리드먼)

p.443

   이번 장에서는 케인스의 모델을 비판했던 경제학의 한 지적 흐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통화주의는 다음 두 가지 측면에서 케인스의 모델을 비판했다.

   첫째, 정부는 대개 훌륭한 운전사가 되지 못한다.

   둘째, 경제의 가속 페달과 브레이크는 재정 정책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통화주의 mometarism라 불리는 경제학의 한 지적 조류는 경제가 가속 페달과 브레이크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가속 페달은 '화폐의 공급을 늘리는 것 higher money supply'이고, 브레이크는 '화폐의 공급을 줄이는 것 lower money supply'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통화주의자들은 누가 운전석에 앉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케인스주의자들과 의견을 달리한다. 케인스주의자들에 따르면, 정부 지출과 조세 정책에 대해 권한을 갖고 있는 의회가 운전석에 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대로 통화주의자들은 금융 업계를 관장하는 FRB가 운전석에 앉아야 한다며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다.


p.447

   적정 화폐 공급량 또는 수준이란 무엇일까? 해답은 간단하다. 생산된 모든 상품을 구매하기에 충분할 뿐만 아니라 물가 상승 없이 완전 고용을 달성할 수 있는 양이다. 그러나 이 대답은 다음과 같은 결정적인 문제를 간과한다. 그렇다면 완전 고용과 물가 안정을 위해 유통되어야 하는 통화의 양은 엉ㄹ마나 되어야 할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돈을 얼마나 빨리 지출하는지 알아야 한다. 사람들은 수중에 있는 돈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는 편일까 아니면 바로 써버리는 편일까? 돈은 얼마나 빨리 사람들 손에서 손으로 옮겨 다니고, 경제를 관통하며 유통할까? 만일 화폐가 빨리 움직인다면, 비록 사람들이 화폐를 양말 서랍에 넣어 놓고 몇 달 동안 쓰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많은 양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현재 많은 경제학자들과 국민 경제가 이런 단순한 문제에 매달리고 있다. 화폐량이 1년 동안 회전하는 비율은 화폐의 유통 속도 velocity of money라 불린다. 경제학자들은 이것을 GDP, 즉 국내총샌산Gross Domestic Product과 비교하면서 화폐의 소득 유통 속도 income velocity of money(이것을 V로 표기한다)에 대해 이야기한다. 따라서 V는 GDP를 화폐 공급량으로 나눈 것 과 같다.

   예를 들어, GDP가 36조 달러이고 화폐 공급량이 6조 달러라면, V는 6이 된다. 만일 화폐가 1년 동안 6번 회전한다면, 사람들은 현금 또는 당좌 예금 형태로 자신의 연간소득 가운데 약 2개월 치에 해당하는 금액을 보관한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화폐의 유통 속도는 왜 중요할까? 이 문제에 대해 정말 진지하고 속 시원하게 논의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만일 화폐의 유통 속도가 안정적이라면, 그리고 중앙은행이 화폐 공급량을 통제할 수 있다면, 정부는 경제의 속도를 높이거나 늦출 수 있는 강력한 도구를 갖는 셈이다. 가속 페달과 브레이크 페달은 엔진을 직접 컨트롤하는 '화폐 공급량'을 나타냈다. 반대로 화폐의 유통 속도가 불안정하다면, 즉 사람들이 현금과 당좌 예금 형태로 많은 돈을 가지고 있어야 할지 적게 가지고 있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오락가락한다면, 화폐 공급량 통제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하며, 가속 페달도 제대로 말을 듣지 않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한 양측의 입장을 간단히 정리하면, 통화주의자들은 화폐의 유통 속도가 안정적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케인스주의자들은 불안정하다고 간주한다. 이런 면에서 보면, 통화주의자들이 화폐 공급량을 정부가 운전하는 자동차에서 가장 강력한 페달로 간주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반면 케인스주의자들은 재정 정책을 무엇보다 가장 중요시하며, 통화주의자들의 통화 정책을 자동차의 앞 유리 와이퍼 정도로 밖에 여기지 않는다. 불안정한 화폐의 유통 속도는 이미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는 차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통화주의 역사와 그에 대한 찬반 논쟁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FRB가 화폐 공급량을 어떻게 조절하는지 간략하게 정리하고 넘어가자. 화폐 공급량을 조절하기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 도구가 종요하다. 첫 번째, FRB는 은행들이 고객들에게 대출해 줄 수 있는 예금의 비율을 통제한다. 이것을 지급준비율 cash reserve ratio이라고 한다. (중략) 화폐 공급량, 즉 M1은 시중에 유통되는 통화량과 당좌 예금(요구불 예금)을 합한 것과 같다는 것을 잊지 말자. (중략) 그런데 어느 날 FRB가 지급 준비율을 기존 20퍼센트에서 25퍼센트로 올린다면, 시중 은행들은 그들이 빌려준 돈의 일부를 회수해야 한다. 이때 화폐 공급량은 줄어든다. 은행이 더 많은 돈을 빌려주면 빌려줄수록, 화폐 공급량은 그만큼 더 늘어나게 된다. 반면, 은행이 FRB의 지급준비율 상향 조정에 따라 고객들에게 빌려준 돈을 회수하면 회수할수록 화폐 공급량은 그만큼 줄어들게 된다.

   두 번째, FRB는 간혹 시중 은행들에 자금을 빌려준다. 이런 자금에 대해 금리를 인상함으로써 FRB는 은행들의 대출을 억제해 화폐 공급량을 통제한다. 이런 금리 인상을 재할인율 discount rate이라 부른다.

   세 번째, FRB는 공채 government securities를 사고 팜으로써 화폐 공급량을 통제한다. 이것을 공개시장조작 open market operations이라 부른다. 공개 시작 조작은 FRB가 화폐 공급량을 통제하는 데 있어 이상 언급한 세 가지 도구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사용하는 도구다. 법인과 개인을 포함해 일반인들은 1조 달러에 달하는 공채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매년 적정 이율의 이자를 지급받는다. (중략) 우선, 1달러짜리 지폐와 종이 한 장을 준비하자. 종이 위에 '채권 BOND'이라고 큼지막하게 쓰자. 그리고 테이블 한쪽 끝에 '채권 소유자'가 있고, 다른 한쪽 끝에 'FRB'가 있다고 하자. 누차 이야기하지만, FRB가 가지고 있는 지폐는 화폐 공급량의 일부가 아니다. 즉, 그것은 통화량에 속하지 않는다. FRB가 수중에 가지고 있는 자금으로 채권 소유자에게 채권을 구입한다. 다양한 이야기지만, 이 채권은 화폐 공급량의 일부가 아니다. 물론 채권 소유자는 그 대가로 수표 또는 지폐를 받는다. 이 수표가 현금화되거나 예탁될 경우, 그것은 화폐 공급량의 일부가 된다. 즉, 통화량은 늘어난다. 혹시나 하는 노파심에서 다시 이야기하지만, 시중 은행이 아닌 FRB가 채권을 보유하고 있는 상태에서 그것은 화폐 공급량의 일부로 간주되지 않는다. 다른 한편, FRB는 보유하고 있는 채권을 개인이나 시중 은행 등 기관에 판매함으로써 개인의 계정에서 인출되는 수표나 지폐를 거둬들인다. 이때 화폐 공급량은 줄어든다. 왜냐하면, 구매자가 받는 채권은 화폐가 아니며, 한편 FRB가 채권 판매를 통해 거둬들이는 자금은 화폐이기를 중단하기 때문이다.


(정치는 곧 비즈니스라고 외친 공공선택학파의 창시자, 제임스 뷰캐넌)

p.492

   만약 가격 지지 정책이 소비자들의 지갑을 털어간다면, 왜 소비자들은 이런 정책을 무력화하기 위해 세력화하지 않는 걸까? 사실 별로 돈이 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앞의 예로 다시 돌아가자. 우유생산자 연합 위원회는 가격 지지 정책을 로비하면서 5만 달러를 쓰고 1천만 달러의 이득을 보았다. 따라서 소비자들이 부담해야 하는 총비용은 1,000만 달러가 된다. 만일 인구가 2억 5,000만 명이라고 하면, 소비자가 1인당 부담해야 하는 비용은 4센트다. 반면, 인구 1퍼센트를 차지하는 위원회의 회원들은 1인당 4달러의 이득을 본다. 즉, 가격 지지 정책에 있어서 우유 생산업자들은 우유 소비자들에 비해 100배 더 많은 관심을 보일 것이다. 더구나 인구 대비 규모가 작은 우유 생산업자들은 소비자들보다 더 쉽게 뭉칠 수 있다.


p.494

   올슨은 자신의 주장에 광범위한 역사 법칙을 끌어들임으로써 논쟁의 지형을 넓혀 나갔다. 그는 안정된 사회일수록 특수한 이해관계에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고 가정한다. 그리고 '장기적으로 안정되어 있는' 사회는 상대적으로 새롭게 안정을 이룬 사회보다 더 느리게 성장한다고 주장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거머리들은 번식에 번식을 거듭해 곳곳에서 국가의 피를 빨아 먹는다. 만약 이것을 방치하면, 어느 순간에는 극단적인 혁명이나 전쟁이 경제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특수 이익 집단들이 자기 목을 스스로 조를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국가의 흥망성쇠에 대한 올슨의 주장과 결론을 따르는 경제학자는 거의 없다. 그렇다고 해도 특수 이익 집단들에 대한 그의 치밀한 분석은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맨커 올슨의 주장대로라면,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런 특수 이익 집단들이 갖는 역설은 해결 불가능하다. 정말 그럴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특수 이익 집단들의 주요 로비 대상인 의회가 이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사정을 달라질 수 있다. 만약 대통령이나 의회 의원들이 일괄 정부 예산 삭감이나 각종 정부 보조금, 가격 지지 정책, 그리고 그 외 다양한 보호 제도들을 폐지하거나 바꿀 수 있는 권한이 있다면, 경제의 효율성 증대로 인해 오직 특수 이익 집단들만 누렸던 특혜를 모든 국민들이 같이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런 역사적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정치가들은 앞으로도 특수 이익 집단들의 로비에 대해 계속 강경한 발언들을 이어갈 테고, 그때마다 특수 이익 집단들은 잠시나마 목소리를 낮출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바뀌는 것은 하나도 없다.


p.496

규제받는 사람들은 규제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통제하는가

   왜 정부는 많은 산업들을 규제할까? 이에 대한 대답은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즉, 이런 산업들은 독점이거나 과점이기 때문에 소비자들은 이들 독과점의 부당한 착취에서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대답이 함축하는 것은 이런 산업들이 규제를 싫어한다는 것이다.

   미국 태생의 경제학자로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 스티글러의 주도 아래 공공선택학파 경제학자들은 이 문제에 또 다른 가능한 해답 하나를 추가했다. 산업들 또는 기업들은 규제가 치열한 경쟁에서 오는 위험에서 자신들을 보호해주기 때문에 선호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실제로 규제를 위해 의회 의원들을 상대로 로비를 한다. 경제학자들은 이것을 '포획 이론 capture theory of regulation'이라 부르는데, 규제를 당하는 대상이 규제자들을 '사로잡는' 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정부 산화 기관으로 이발사위원회라는 것이 있다고 하자. 이 위원회는 일정한 규정과 기준, 예를 들어, 모든 이발사는 자신들이 사용하는 빗과 가위를 위생적으로 청결하게 유지하고, 머리가게처럼 덥수룩한 고객은 거부하는 등과 같은 규정과 기준을 주장하고 있다. 위원회의 이런 간섭으로 유지 관리 비용은 조금 상승할 수도 있지만, 이발사들은 이런 규제안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위원회에 좀 더 큰 이익을 보장해 줄 수 있는 다른 규정들, 특히 자격증 발급 기준을 강화함으로써 신규 이발사들의 시장 진입을 규제해달라고 촉구할 수도 있다. 이 위원회는 이발사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1년 동안 자메이카에서 라스타파리언의 드레드록스를 자르거나 공인된 비듬 클리닉에서 3년 동안 최저 임금으로 인턴 생활을 하도록 규제함으로써 진입 장벽을 만들 수 있다. 이런 규제는 소비자들을 경험이 일천한 이발사들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목이지만, 실제로는 이발사들의 상호 경쟁을 방지하고 서로의 이득을 최대화하기 위한 텃세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미숙한 이발사들 때문에 고객들이 이발 도중 두피에 상처를 입을 수는 있다. 애리조나 주는 미용업에 진출하고자 하는 미용사들에게 정부 공인 미용 학교에서 1,600시간의 수업을 의무적으로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애리조나 주가 경찰관에게 의무적으로 부과하는 훈련 시간을 얼마나 되는지 아는가? 고작 600시간이다. 다시 말해 , 애리조나 주에서 미용사가 되기 위해서는 경찰관보다 3배나 더 많은 훈련 시간을 이수해야 한다.

   정부 규제가 어떤 산업에 완전히 이롭거나 완전히 해롭거나 한 경우는 거의 없다. 정부는 우유 생산업자들에게 플라스틱 우유 용기 대신 고가의 스테인리스 스틸 용기만을 사용하도록 규제할 수 있다. 이런 규제가 우유 생산업자들에게 골칫거리가 될 수도 있지만, 이런 규제를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그들은 정부의 가격 지지 정책이나 보조금 등의 수혜를 누릴 수 있다.

   그렇다면 규제를 받는 산업들이 공공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관들, 특히 정부를 포획하는 데 성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앞에서 다룬 합리적 무시, 즉 특수 이익 집단의 역설을 떠올려보자. 기업들은 정부나 정부 산하 기관들을 설득하기 위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학계 자료를 수집할 수 있다. 실제로 경제학자들은 경제 잡지나 법률 잡지에 자신들의 전문 연구 성과를 게재함으로써 어떤 기업을 직접 대변하기도 한다. 정보의 우위나 전문성에 의존하는 것이다. 규제 당국은 종종 기업들의 이런 전략에 속아 넘어가 그들의 설득이나 로비에 넘어간다. 더구나 국민들은 이런 일에 크게 개의치 않는다. 마지막으로 이보다 좀 더 냉소적인 설명도 있다. 규제하는 자들이 규제받는 자들과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경우가 있다. 정부 산하의 각종 기관과 위원회의 소속 위원들은 대다수가 민간 부문 출신들로 임기가 끝나면 다시 민간 부문으로 되돌아간다. 눈살을 찌푸리는 것보다 친구가 되는 것이 서로를 위해 상부상조하는 길이다. (중략)

   공공선택학파 경제학자들이 모든 규제가 기업들에게 이롭고 소비자들에게는 해롭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순전한 자유방임경제학을 논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들이 자유시장의 결과를 정부 규제에 대한 현실적인 모델과 비교해야지 공공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자비심 많은 정부라는 이상주의적인 시각과 비교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합리적 기대와 불확실성이 동시에 지배하는 기상천외의 세계)

p.550

   경제학자이자 시카고대학교 교수, 1995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로버트 루커스 Robert Lucas와 미국의 경제학자 토머스 사전트 Thomas Sargent를 포함한 합리적 기대이론가들은 정부가 시장에서 행사할 수 있는 힘은 극히 미미하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주식시장에서 시작해 경제 전반을 분석 대상으로 삼는다. 만일 정부가 키디 항공사의 주식을 매입함으로써 주가를 일시적으로 끌어올리려고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키디 항공사의 원래 주가는 미래의 기대 수익과 배당금이 감안된 '적정 correct' 가격 수준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가격은 주식 투자자들에게 적절한 수익률을 보장할 것이다. 그런데 정부가 주식시장에 개입해 키디 항공사의 주식을 매입함으로써 주가가 뛰었다면, 주식투자자들은 주가가 정부로 인해 인위적으로 과대평가되었다고 판단해 곧장 주식을 내다 팔 것이다. 반면, 정부가 기존에 보유한 키디 항공사의 주식을 한꺼번에 매각한다면, 주식 가격은 갑자기 폭락할 것이고 주식 투자자들은 정부의 과도한 투매로 인해 키디 항공사의 주식이 인위적으로 과소평가되었다고 판단해 곧장 주식을 매입하려고 할 것이다. 결국 정부가 시장에 어떤 식으로 개입을 하든지 간에 새로운 정보가 흘러나와 투자자들에게 새로 형성된 주식 가격이 정상 가격이라는 확신을 주지 않는 이상 주가는 '적정' 가격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p.598

   우리의 생물학저 시계는 더 이상 우리의 생활 방식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200년 전에 많은 여성들이 스무 살의 나이에 아이를 가졌다. 그러나 당시 그들은 세상이 자신들에게 무엇을 제공할지, 자신들이 무슨 직업을 갖게 될지, 자신들의 미래가 어떠할지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자식들에게 살아남는 방식을 가르칠 수 있었다. 오늘날 20대 젊은이들 중에 자신들이 25세에 무엇을 하고 있을지 또는 무엇을 하게 될지 알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현대 세계는 우리에게 정말 많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듯이, 너무 넘쳐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오히려 너무 많은 기회 때문에 자식들의 삶은 둘째치고 자기 자신의 삶을 제대로 보살피지도 예측하지도 못하고 있을 수 있다. 현재 우리의 아이들은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들의 보살핌과 인내를 받고 있지 못하다. 그것은 부모들이 무능하거나 게을러서가 아니라 세계가 너무 거대해져 더 이상 그것을 한눈에 파악하는 것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부모들은 자신들의 자식들에게 확실성을 보장하는 방법이 아닌 불확실성을 다룰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칠 수 있도록 스스로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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