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피터 틸 [제로 투 원]
p.18
역사가 흐른다고 새로운 기술이 저절로 나타난 적은 없었다. 고대인들은 정적인 균형이 계속되는 제로섬 사회에 살았다. 그런 사회에서 성공이란 남의 것을 빼앗는 것이었다. 고대인들은 새로운 부의 원천을 거의 창출하지 못했고, 장기적으로도 보통 사람들을 극도의 빈곤으로부터 구해낼 대책을 끝내 마련하지 못했다. 그러고 나서 1만 년이 흐르는 동안, 원시시대의 농경, 중세의 풍차, 16세기의 천문관측기와 같은 간헐적인 진보가 일어났다. 그리고 1760년대에 증기기관이 출현하면서 현대사회는 갑자기 폭주하는 기술적 진보를 경험했다. 이런 추세가 대략 1970년대까지 이어진 결과, 우리는 이전 세대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풍요로운 사회를 물려받게 되었다.
p.37
경제학자에게는 모든 독점이 똑같아 보인다. 정직하지 못한 방법으로 경쟁자를 몰아냈건, 정부로부터 면허를 획득했건, 또는 혁신을 통해 최고의 자리에 올랐건 상관없이 말이다. 이 책에서는 불법적인 악덕 기업이나 정부의 비호를 받는 기업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이 책에서 '독점'이라고 할 때는 자기 분야에서 너무 뛰어나기 때문에 다른 회사들이 감히 그 비슷한 제품조차 내놓지 못하는 회사를 가리킨다. 구글은 0에서 1을 이룬 대표적인 회사다. 구글은 2000년대 초반 이후 검색 분야에서 경쟁자가 없었고, 마이크로소프트와 야후를 크게 따돌렸다.
p.49
하지만 19세기 물리학이 예측한 장기적 균형이란, 우주의 열역학적 죽음이라고도 알려진, 모든 에너지가 균등하게 분배되고 모든 것이 멈춰 선 상태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는 우리가 열역학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와는 무관하게 아주 강력한 은유가 된다. 비즈니스에서 균형이란 정체를 뜻하고, 정체는 곧 죽음이다. 어느 산업이 경쟁적으로 균형 상태에 도달했다면, 그 산업에 속한 어느 기업이 사라진다고 해도 세상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을 것이다. 구분되지 않는 또 다른 경쟁자가 그 기업의 자리르 대신할 테니 말이다.
완벽한 균형이란 우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빈 공간을 뜻할지도 모른다. 혹은 수많은 기업들이 갖고 있는 특징과도 같을지 모른다. 하지만 모든 새로운 창조는 균형과는 아주 거리가 먼 상태에서 만들어진다. 경제 이론을 벗어나 실제 세계에 나가보면, 모든 기업은 남들이 할 수 없는 것을 해내는 만큼, 딱 그만큼만 성공할 수 있다. 따라서 독점은 병적 현상이나 예외적 현상이 아니다. '독점은 모든 성공적 기업의 현 상태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는 다음과 같은 예리한 통찰로 시작한다. "행복한 가정들은 모두 비슷비슷하다. 불행한 가정들은 모두 제각각의 이유로 불행하다." 하지만 비즈니스는 이와는 정반대다. 행복한 기업들은 다들 서로 다르다. 다들 독특한 문제를 해결해 독점을 구축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실패한 기업들은 한결같다. 경쟁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p.95
명확하게 낙관적인 미래라면 공학자들이 수중 도시와 우주 정거장을 디자인해야 하겠지만, 불명확하게 낙관적인 미래라면 금융가와 변호사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 금융이야말로 불명확한 사고의 전형이다. 왜냐하면 어떻게 해야 부를 창출할 수 있는지 전혀 모를 때 유일하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바로 금융이기 때문이다.
똑똑한 대학 졸업생들이 로스쿨을 가지 않으면 월스트리트로 향하는 이유도 커리어에 대한 제대로 된 계획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골드만삭스에 들어가게 되면, 심지어 금융 '내부'에서도 모든 게 불명확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도 사람들은 여전히 낙관적이다. 돈을 잃을 거라고 생각하고 시장에 뛰어드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융계 내부의 기본적 교리는 시장은 아무 원칙도 없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구체적이거나 실질적인 것은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극도로 중요해지는 것이 '투자의 다각화'다.
p.105
사실 현대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이미 한번쯤은 들어보았다. 계획 없는 진보를 우리는 '진화 evolution'라고 한번쯤은 들어보았다. 다윈도 그렇게 말했다. 생명체는 아무도 의도하지 않아도 '진보 progress'하는 경향이 있다고.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다른 어떤 유기체의 무작위적 재현이며, 그 재현을 가장 잘 해낸 개체가 승리한다고 한다.
p.111
1906년에 경제학자 빌프레도 파레토 Vilfredo Pareto는 나중에 '파레토의 법칙' 혹은 '80-20의 법칙'을 발견했다. 파레토는 20퍼센트의 사람들이 이탈리아 땅의 80퍼센트를 소유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그리고 이는 그의 정원에 있는 20퍼센트의 완두 꼬투리가 80퍼센트의 콩을 생산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얼마 안 되는 소수가 다른 경쟁자들을 압도적으로 능가하는 이 엄연한 패턴은 자연 상태와 사회 상태를 가릴 것 없이 우리 주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가장 파괴적인 지진은 작은 지진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몇 배나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대도시들은 작은 마을을 모두 모아놓은 것보다도 훨씬 크다. 그리고 독점기업은 무차별한 수백만의 경쟁자들보다 더 많은 가치를 차지한다.
p.122
그런데 학교에서는 이와는 정반대되는 교육을 실시한다. 제도권 교육은 획일화된 일반적 지식을 퍼 나르느라 바쁘다. 미국에서 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거듭제곱법칙대로 생각하지 '않도록' 배운다. 모든 고등학교의 수업은 어떤 과목이든 45분간 진행되고, 모든 학생들은 비슷한 속도로 진도를 나간다. 모범적인 대학생들은 미래의 위험을 회피하는 데 집착한 나머지 별로 중요하지 않은, 듣도 보도 못한 각종 능력들을 수집하듯이 익히고 있다. 대학들은 모두 '우수'라는 말을 신봉한다. 임의로 나눠진 학과에 따라 100페이지는 족히 되는, 알파벳순으로 된 '개설 과목 안내서'를 마련해두는 이유는 '무엇을 하든지 잘하기만 하면 돼'라고 학생들을 안심시켜주려는 의도로 보인다.
하지만 이런 사고는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다. '무엇을 하는지'가 중요하다. 우리는 한눈팔지 않고 오로지 '잘하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다만 그전에 반드시 그 일이 미래에 가치 있는 일이 될 것인지를 먼저 치열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스타트업의 세계에서 이는 곧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도 꼭 자기 회사를 차릴 필요는 없다는 말이 된다. 요즘은 오히려 너무 많은 사람이 회사를 차리는 게 문제다. 거듭제곱법칙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새로운 벤처의 설립에 관해 남들보다 더 많이 망설일 것이다.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최고의 회사에 합류하면 얼마나 크게 성공할 수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거듭제곱법칙은 또한 회사들 '사이의' 차이가 회사 '내부'의 차이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p.137
비즈니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관해 누구나 생각할 수 있지만 아무도 미처 발견하지 못한 숨겨진 비밀을 발견할 때 위대한 기업이 만들어질 수 있다. 언제나 우리 주변에 있지만 자주 무시되고 있는 여력들을 활용해 사업을 일군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들을 한번 생각해보자. 에어비엔비 Airbnb가 생기기 전에는 여행자들이 비싼 값을 치르고 호텔방을 잡는 것 말고는 다른 대안이 거의 없었다. 에어비엔비는 방치되어 있던 이런 공급과 수요를 알아봤다. 다른 사람들은 전혀 가치를 발견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개인 자동차 서비스 업체인 리프트 Lyft와 우버 Uber도 마찬가지다. 어느 장소에 가고 싶은 사람과 기꺼이 태워다 주고 싶은 사람을 단순히 연결해주는 것만으로 수십억 달러짜리 기업을 세울 수 있을 거라고 상상해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우리에게는 이미 주 정부의 허가를 받은 택시와 사설 리무진 업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숨겨진 비밀을 믿고 그것을 찾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보편화된 관습을 넘어 뻔히 보이는 곳에 숨어 있는 기회들을 볼 수 있다. 페이스북을 포함한 수많은 인터넷 기업들이 자주 과소평가되는 것도 똑같은 이유(너무 간단하다는 것) 때문이며, 이것 자체도 하나의 숨겨진 비밀이다. 너무나 간단해 보이는 것을 다시 생각할 수 있는 통찰력만으로도 중요하고 가치 있는 기업을 세울 수 있다면 세상에는 아직도 세울 수 있는 훌륭한 회사들이 많이 남아 있다.
p.164
'내부적으로 각 개인은 업무에 의해 확연히 구분되어야 한다.'
신생기업에서 직원들에게 책임을 분배할 때 처음에는 각자의 재능과 업무를 효율적으로 서로 짝지어주는, 간단한 최적화 문제로 생각하고 접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찌어찌하여 이 과제를 완벽하게 제대로 해냈다고 하더라도 그 해결책은 금세 무너져버릴 것이다. 부분적으로 이는 신생기업의 경우 빠르게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각자의 역할이 오랫동안 변동 없이 유지될 수 없는 탓도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는데, 업무 분배가 단순히 직업과 업무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직원과 직원 사이의 관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경영자로서 페이팔에서 내가 가장 잘한 일은 회사의 모든 사람이 오로지 한 가지 일에만 책임을 지게 한 것이었다. 모든 직원의 그 한 가지는 고유한 업무였고, 그래서 모든 직원은 내가 그 한 가지만을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처음에 내가 이렇게 한 것은 그저 사람을 관리하는 일을 단순화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심오한 결과가 나타났다. 역할을 구분해주다 보니 충돌이 줄어들었던 것이다. 회사 내에서 싸움이 벌어지는 것은 대부분 같은 책임을 놓고 동료들끼리 경쟁할 때다. 신생기업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특히 높은데, 왜냐하면 회사의 초기 단계에서는 업무 역할이 유동적이기 때문이다.
경쟁을 제거하면 모든 사람이 단순한 직업 관계를 넘어 장기적인 관계를 형성하기 쉬워진다. 게다가 신생기업은 내부 관계가 평화롭지 않으면 아예 살아남을 수가 없다. 신생기업이 실패하면 우리는 회사가 경쟁 생태계 내에서 다른 강적에게 무릎을 꿇었겠거니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모든 회사가 그 자체가 하나의 생태계다. 파벌 다툼은 회사의 외부 위협에 취약해지게 만든다. 내부 갈등은 자가면역질환과 비슷하다. 사망의 기술적 원인 폐렴일지 몰라도 진짜 이유는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를 수 있다.
p.170
아마추어, 전문가, 장인에 이르기까지 세일즈 능력의 수준은 천차만별이다. 심지어 대가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도 있다. 아직 세일즈의 대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면, 그건 실제로 접해본 적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기술이 너무 정교해 뻔히 눈앞에 있어도 보이지가 않기 때문이다. 톰 소여는 동네 친구들을 설득해서 자기 대신 울타리에 흰색 페인트를 칠하게 했다. (중략)
연기와 마찬가지로 세일즈는 숨겨져 있을 때 가장 큰 효과를 나타낸다. 유통과 관련된 직업(세일즈, 마케팅, 광고 등등)을 가진 사람들이 죄다 무관한 직함을 가진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광고를 파는 사람은 '거래처 담당자'라고 부르고, 고객에게 일을 파는 사람은 '비즈니스 개발'에 종사한다고 말한다. 회사를 파는 사람들은 '투자 은행가'라고 부르며, 자기 자신을 파는 사람들은 '정치가'라고 부른다. 이렇게 이름을 바꿔 부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우리 중에 그들의 설득에 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