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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서재 Part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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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컹리 Jul 19. 2018

경제e

#89 EBS 지식채널e [경제e]

p.27

(국가의 부는 국민의 부다)

   1764년 애덤 스미스는 글래스고대학을 그만두고 젊은 공작의 수행 개인교사가 되어 여행길에 오른다. 수년간 유럽 전역을 떠돌면서 스미스는 볼테르, 벤저민 프랭클린 등 당대의 지성들과 교분을 쌓는데, 특히 중농주의의 거두 프랑스와 케네와 깊이 매료된다.

   당시 유럽은 산업혁명을 코앞에 두고 정치적으로는 국왕에게 권력이 집중된 절대왕정이, 경제적으로는 대외교역에 중점을 두는 중상주의가 절정에 달해 있었다. 처음 얼마간 두 진영은 서로의 존재와 목적에 무심했으나, 사치를 일삼는 절대왕정과 더 많은 이윤을 원하는 상인들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면서 곧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 무역상과 제조업자 들이 왕실의 자금줄이 되어주자 국왕은 이들에게 독과점을 허용하고 특허권을 내주는 등 여러 특혜로 보답했다. 무엇보다 '국가의 부는 그 나라가 보유한 귀금속 양과 같다'라는 중상주의자들의 입장에 동조하여 각종 보호ㆍ규제책을 통해 수출을 독려했다. 국부 유출을 막겠다면서 흉작일 때조차 곡물 수입을 불허하는 극단적인 수입 규제책도 함께 폈다. 그 결과 국가의 귀금속 양은 늘고 상인과 제조업자 들은 막대한 수익을 올렸지만, 대다수 국민의 삶은 날로 피폐해졌다.

   금과 은은 쌓이는데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하는 비참한 아이러니 앞에서, 애덤 스미스는 한 나라의 부는 귀금속 양이 아니라 '생산'에서 비롯된다는 케네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생산이 늘지 않는 한 악순환은 끊을 수 없다는 입장도 공유한다. 그러나 중농주의자로서 부의 원천을 농업과 지력에서 찾은 케네와 달리, 스미스는 매뉴팩처(공장제 수공업)가 발달한 스코틀랜드의 상황을 염두에 두어 공업과 노동력을 부의 원천으로 여겼다.

   커콜디로 돌아온 스미스는 이러한 관점 아래, 여행하는 동안 "시간을 보내려고" 쓴 글을 다듬어 1776년 『국부론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을 출간한다. 군주 같은 최고통치자에게 시장을 운용하는 법을 '조언'하는 정도에 그쳤던 정치경제학이 거시적인 관점에서 인간과 사회를 조망하는 '과학'으로 정립하는 순간이다.


   '국부의 원인과 본질에 대한 연구'라는 원제가 일러주듯이 『국부론』은 국가의 부는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늘어나는가를 탐구한 책이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에 대한 중상주의자들의 통념을 비판하면서, 국부는 "그 나라 국민이 연간 소비하는 생산물의 총합"이라는 새로운 견해를 내놓는다. 한 나라의 부를 가늠하는 척도는 '화폐의 총량'이 아니라 '자본의 총량'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한 나라 국민의 연간 노동은 그들이 연간 소비하는 생활필수품과 편의품 전부를 공급하는 원천이며, 이 생활필수품과 편의품은 언제나 이 연간 노동의 직접 생산물로 구성되거나 이 생산물과의 교환으로 다른 나라에서 구입해온 생산물로 구성된다." 따라서 국부를 늘리려면 노동 생산력이 우선 확대되어야 하고, 그러려면 분업이 필요 불가결해진다. "노동자 한 명이 혼자 작업하면 하루에 핀을 20개박에 만들지 못하지만, 노동자 열 명이 분업하면 하루 4만 8000개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생산력이 늘면 소득이 늘고, 생활에 여유가 생긴 사람들은 시장에서 물건을 사기 시작한다. 시장이 커지면 자본이 생기고, 축적된 자본은 생산에 재투자될 것이므로 생산력은 더욱더 확대된다. 안정된 생활을 보장받은 노동자는 생산 현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국부는 날로 증가한다. 다만 분업에 따른 단순노동으로 노동자의 정신이 심신이 피폐해지는 것이 문제인데, 이를 위해 국가는 공교육 제도 및 공공시설 등 사회 시스템과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힘써야 한다.


(자기 이익, 경쟁, 자유방임의 역학)

   이 과정에서 개인은 각자 자기 이익에 따라 행동한다. "우리가 저녁식사를 기대할 수 있는 건 푸줏간 주인, 술도가 주인, 빵집 주인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 이익을 챙기려는 생각 덕분이다. 우리는 그들의 박애심이 아니라 자기애에 호소하며, 우리의 필요가 아니라 그들의 이익만을 그들에게 이야기할 뿐이다." 그러나 모두가 자기 이익만을 그들에게 이야기할 뿐이다." 그러나 모두가 자기 이익만 챙긴다면 사회는 구심력을 잃고 엉망진창이 될 것이다. ;공정한' 경쟁이 시장의 수요와 공급, 가격을 자연스럽게 조정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계몽주의 시대 도덕철학자로서 애덤 스미스는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 자연법칙을 믿었다. 『도덕감정론』에서 논한바, 공감 능력에 바탕을 둔 공정한 관찰자가 인간의 자기애와 사회질서를 매개한 것처럼, 합리성에 바탕을 둔 공정한 경쟁이 인간의 자기 이익과 사회 질서를 매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스미스는 인간의 사적인 욕망을 통제하고 가격 균형을 유도하는 이 힘을 '보이지 않는 손 invisible hand'이라고 명명하면서, 『도덕감정론』의 공감 원칙을 시장으로까지 넓혀 적용한다. 




p.28

   국가의 부는 국민의 부다. 그러니 모든 사람이 공정한 법 질서 안에서 자유롭게 경쟁하며 자기 이익을 추구하도록 내버려두라. 이것이 인구 1200만 명 가운데 200만 명이 빈민이던 18세기 영국의 현실과, 몇몇 이익집단의 권익을 보호하느라 수백만 명의 목숨을 내팽개친 절대왕정에 내린 애덤 스미스의 처방전이었다.


('보이지 않는 손'의 두어 가지 그림자)

   "성서 이래 가장 위대한 책"이라는 평가를 받는 『국부론』이 발간된 이래, 애덤 스미스는 자유주의 시장경제학자들의 국부國父로 추앙되었다. 주류경제학을 장악한 자유주의 시장경제학자들은 애덤 스미스의 이론 가운데에서 도덕적 공감 능력, 공정성, 국가의 책무 대신 경쟁, 이기심, 시장에 주목했다. 이들은 『국부론』을 오독해 경쟁 시장을 경제의 조절자로 파악하고, 경제를 국가 권력이나 도덕적 책무와 전혀 상관없는 독자 영역으로 떼어놓았다. 자유주의 시장경제라고 하면 으레 떠오르는 '반복지 친기업' 슬로건과 냉혹한 시장주의자 애덤 스미스의 이미지는 이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1980년대 '야경국가'를 표방하며 기업에 대한 각종 규제 철폐와 부자 감세를 추진한 미국의 레이거노믹스 Reaganomics가 애덤 스미스를 상징으로 삼은 것이 단적인 예다.

   그러나 일본 경제학자 도메 도쿠오는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을 면밀히 분석하여 애덤 스미스의 오명을 씻어낸다. 다쿠오는 먼저 스미스가 『도덕감정론』에서는 이타심을, 『국부론』에서는 이기심을 말한다면서 두 책을 단절된 것으로 보는 기존의 해석에 의문을 표한다. 이는 애덤 스미스가 "시장경제의 기본 원리를 해명하면서 결코 '인간'의 문제를 놓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오류라는 것이다. 이에 다쿠오는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사유로 『국부론』과 『도덕감정론』을 연결하며, "도덕 원리가 자연스럽게 경제 원리로 연결되고, 도덕의 세계가 경제의 세계와 이음매 없이 완전히 하나가 되는 세계"를 꿈꾼 계몽주의 도덕철학자로 애덤 스미스를 복권한다.


p.68

   독점을 규제하는 구체적인 정책 수단은 크게 세 가지다. 첫번째 방법은 다른 기업의 진입을 허용하거나, 비슷한 회사들끼리의 인수ㆍ합병을 정부가 불허하거나, 마이크로소프트사 같은 독점 기업을 여러 개로 쪼개 경쟁체제를 유지하는 것이다. 독점기업이 가격을 올리지 못하도록 정부가 가격을 규제하는 차선책도 가능하다. 하지만 공급가를 너무 낮추면 기업의 의욕을 떨어뜨릴 수 있고, 그 손실을 세금으로 보전해주려니 또다시 비효율이 발생한다. 그래서 정부는 세번째 방법, 즉 한국전력이나 철도공사처럼 해당 기업을 공기업을 삼는 방안을 택하게 된다.


p.81

   한국의 가계대출 규모는 1997년 외환위기를 거치며 확대되었다. 이전까지 기업대출을 주로 했던 금융기관은, 1997년 이후 기업 대신 가계로 눈을 돌려 대출 문턱을 크게 낮췄다.

   당시 한국 사회는 IMF 구제금융을 받아들이면서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수행하고 있었다.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지고 비정규직 일자리가 늘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 증폭된 가운데 저금리 기조와 부동산 붐이 일면서 중산층들은 대출을 받아 부동산 투자에 뛰어들었다.

   아파트 값이 급등하며 '레버리지 효과 leverage effect'로 돈을 벌었다는 사람이 늘어나자, 많은 사람들이 대출을 받아 집을 사기 시작했다. 레버리지 효과는 타인의 자본을 지렛대로 삼아 자기자본 이익률을 높이는 경제행위로, 가령 자기자본 100억 원으로 10억 원의 순익을 올리면 자기자본이익률을 10퍼센트가 된다. 하지만 자기자본 50억 원에 타인자본 50억 원을 더해 10억 원의 수익을 내면 자기자본이익률은 20퍼센트로 두 배가 뛴다. 빚이 더 큰 이익으로 돌아오는 이 마술은, 빌린 돈에 지불하는 이자보다 수익률이 높을 때에만 '참'이 된다.

   가계대출 수요가 줄어들자 금융권을 대출 조건을 더욱 완화해갔다. 주택담보대출의 경우 20~30년 동안 채무자가 성실히 돈을 갚는다면 대출금의 두 배 이상을 이자로 받을 수 있고, 혹여 못 갚는다 해도 집을 압류하면 되기 때문에 은행으로서는 손해 볼 일이 없었다. 이와 함께 자산 가치를 높이기 위해지는 빚은 '좋은 빚'이고, 소비하기 위해지는 빚은 '나쁜 빚'이라는 이분법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p.116
(100년 전쟁의 서막)

   오스트리아학파는 1차 세계대전 이전에 결성돼 전쟁 및 마르크스주의와 부딪히며 이론적 체계를 갖춘 근대 경제학파다. 카를 멩거를 시조로 삼아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를 신봉하고 사회주의적 계획경제보다 자유시장과 경쟁의 우위성을 주장했으며, 특히 상품의 가격과 기회비용을 중요하게 여겼다.

   1920년대까지 하이에크는 오스트리아학파의 이름 없는 새내기에 불과했다. 그러나 1929년 빈대학 경제학과 객원강사직 자리를 놓고 시연한 공개강의에서, 소비를 줄이고 저축을 늘리면 경기불황이 온다는 케인스의 '저축의 역설'을 비판하며 영국에 진출할 기회를 잡는다. 당시 영국 경제학은 케임브리지대학의 신고전학파가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었는데, 그 중심에는 알프레드 마샬과 케인스가 있었다. (중략) 하지만 1929년 10월 미국에서 촉발된 대공황은 논점을 예상치 못한 곳으로 옮겨, 케인스와 하이에크는 '경제사 100년 전쟁'의 화두, 즉 시장경제를 무너뜨리는 요인은 무엇이고, 이에 대한 올바른 대응은 무엇이며, 향후 같은 상황을 예방할 최선의 길은 무엇인가를 놓고 격돌하게 된다.

   먼저 케인스는 유효소비가 줄어든 것이 불황의 원인이며, 정부가 제3의 경제주체로 항상 존재하면서 통화정책, 세금인하, 공공사업 등으로 유효소비를 늘려야 한다고 보았다. 이에 하이에크는 많은 투자로 인한 과도한 신용 확대를 불황의 원인으로 꼽고, 저축으로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키는 한편, 시장이 자생적으로 질서를 회복하도록 기다려야 한다고 반박했다.

   "시장은 이성을 갖춘 합리적 인간이 완벽한 계획을 갖고 만나는 장소가 아니라 불완전한 인간이 제한된 정보를 갖고 만나는 장소이며, 시장에 대한 굴절된 정보는 시장에 참여하는 당사자들이 가장 잘 안다. 따라서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는 어떤 행위도 결과적으로 왜곡을 초래할 수밖에 없으니, 개인이 자유시장에서 공정한 경쟁을 펼치고, 그 경쟁이 최대한 유익한 결과를 낳도록 제도를 만드는 데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 하이에크의 요지였다.

   이런 맥락에서 하이에크는 시장경제 같은 자생적 질서를 계획경제 같은 인공적 질서로 바꾸려는 모든 정치적 시도를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다. 1944년 출간된 『노예의 길』은 하이에크의 주장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낸 저서다. 하이에크는 당시 유럽에서 세를 불려나가던 사회주의가 파시즘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내다보았고, "경제의 자유 없이 개인적ㆍ정치적 자유가 있어 본 적이 없"으며 "자유시장을 버리고 계획경제를 주창하는 사람들은 의도가 아무리 좋다 한들 결국 폭정을 초래하기 쉬운 길로 들어선다"고 주장했다. 『노예의 길』은 훗날 신자유주의의 초석, 마거릿 대처의 정전이 된다.


(1승 1패)

   1936년 케인스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고용, 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이하 일반이론)을 펴낸다. 하이에크는 1941년 『자본에 대한 순수이론』으로 맞불을 놓지만, 우선 승자는 케인스로 결정된다. 대공황에 대한 하이에크의 진단이 옳았다 치더라도 해결방안이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인데, 변변한 호구지책도 없는 극심한 불황에 저축은 꿈도 꿀 수 없었던 것이다.

   1940년대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국가들은 신고전주의 경제학을 수정한 케인스의 『일반이론』을 그야말로 '일반이론'으로 받아들여 대공황을 탈출했다. 케인스는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를 구원했고, 그의 아성은 전 세계적으로 이후 30여 년간 지속된다. 그러나 1970년대 두 차례에 걸쳐 아랍 산유국들이 원유생산과 수출을 제한하여 원유 값이 급등하여 '석유파동'이 일면서 하이에크의 역습이 시작된다.

   원자재 값이 오르자 생산과 일자리는 줄어드는데 물가는 상승하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케인스주의는 '불경기에는 물가가 떨어지고, 호경기에는 물가가 오른다'는 기존 이론을 거스르는 사태에 우왕좌왕했다. 불황에 대한 두 가지 대처법 중 하나가 오류에 빠지자 곧바로 다른 하나가 소환되었다. 그런데 이때 불려온 하이에크는 혼자가 아니었으니, 밀턴 프리드먼, 조지 스티글러 등 포진한 시카고학파가 지원사격에 나섰다. 시카고대학을 중심으로 한  경제학자들로서 '신자유주의학파'로도 불리는 시카고학파는, 자유시장을 가장 공정하고 효율적인 부의 분배방식으로 여기며 물가상승을 억제하려면 자유로운 가격기능이 부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이에크와 시카고학파는 1979년 마거릿 대처가 영국 총리에 당선되고, 1980년 로널드 레이건이 미국 대선에서 승리하면서 주류경제학으로 부상했다. 영국과 미국은 공공지출 삭감, (부자)감세, 국영기업 민영화, 노조활동 규제, 통화정책에 입각한 인플레이션 억제 등으로 교착상태를 돌파했고, 이들이 펼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은 다른 자본주의 국가의 귀감이 되었다. 그러나 정작 하이에크는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를 "현 시대에 기대할 수 있을 만한 적당한 정책"이라고 평가절하했다.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국방을 제외한 국가의 역할과 기능을 사기업에 완전 일임하는 데 있었다.


(양자택일을 둘러싼 질문들)

   1974년 하이에크는 자유주의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한 공로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이후 30여 년간 하이에크는 절대 지위를 누리지만, 2007년 판세는 또다시 뒤집힌다.

   2000년대 초 조지 부시 미국 대 통령은 IT버블 붕괴, 9ㆍ11테러, 아프간ㆍ이라크 전쟁 등으로 악화된 경기를 부양하고자 초저금리 정책을 펼친다. 주택융자 금리가 인하되고 부동산 가격이 상승하자,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한 주택담보대출인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거래량도 큰 폭으로 증가했다. 부동산 거품이 꺼지고 서브프라임 모기지 금리가 오르면서 원리금을 갚지 못해 파산하는 대출자들이 잇따랐다. 설령 대출자가 망하더라도 주택 가격이 대출원금보다 높으니 손실 걱정은 없다고 판단해서 증권화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을 잔뜩 사들인 금융기관들은 결국 대출금 회수불능 사태에 처했고, 손실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결국 2007년 리먼브라더스 등 대형 금융사와 증권회사들이 파산을 선고하며 세계경제를 충격에 빠트렸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에 케인스주의자들은 신자유주의의 종말을 선언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2009년 8250억 달러는 사상 최대 규모의 정부 차입금을 경기회복에 쏟아부으며 이에 부응했다. 하지만 케인스식 처방에도 실물경제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2010년 정부부채 위기가 터지면서 움츠리고 있던 하이에크 진영이 반격을 재개했다.

  

   케인스와 하이에크를 따라 먼 길을 돌아 또다시 불황 앞에 선 지금, '시장 혹은 정부'라는 양자택일은 간단치 않은 질문들을 포함한다. 이를테면 오늘날 정부의 역할은 무엇이며, 무엇을 위해 재정적자를 감수해야 하는가. 시장은 과연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이 펼쳐지는 장소인가. 정부가 포괄하는 사회안전망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실업자들을 방치할지언정, 공장을 놀릴지언정, 대공황에 허덕이는 수많은 대중의 절망을 못 본 체할지언정, 그로 말미암아 자본주의 시스템의 명성이 손상될지언정 진정한 원리를 찾아 후퇴하고 싶다 않다는 진선 보수주의자"들을 어떻게 설득하고 통제할 것인가. 위기마다 시장과 정부 중 하나를 선택하는 행위는 의미 있는 일인가. 우리의 선택지는 이것뿐인가.


p.128

(종이가 된 종이돈)

   금융 전문가이자 『카런시 워』의 저자 제임스 리카즈는 '통화 전쟁 currency war'을 수출과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 각 나라가 경쟁적으로 외환시장에 개입해 자국 통화가치 하락을 의도적으로 유도함으로써 벌어진 경제전쟁으로 정의한다. 1930년대 대공황을 촉발한 1차통화전쟁(1921~1936), 브레튼우즈 체제가 붕괴된 2차통화전쟁(1967~1987)에 이어 2010년 이후 현재까지 세 차례 발생했으며, 첫번째 진원지는 1921년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이었다.

   1918년 11월 11일 1차세계대전 휴전협정을 체결한 독일과 연합국은, 이듬해 6월 28일 파리강화회의에서 '베르사유조약'을 맺고 전후 처리 문제를 마무리지었다. 이에 따라 패전국 독일은 해외 식민지를 몰수당하고 프랑스에 알자스-로렌 지방을 반환하는 등 영토의 13퍼센트를 내놓았으며, 영국과 프랑스 등에 징벌적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전범국으로서 인구와 영토를 잃은 데다 기간산업마저 파괴돼 조약을 이행할 길이 없었던 독일 정부는 통화가치를 인위적으로 조절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돈을 많이 찍어서 마르크화 가치를 떨어뜨리면 해외에서 독일 상품의 가격이 저렴해질뿐더러, 다른 나라의 독일 내 투자도 늘어날 테니 손해 볼 일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전후 생필품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시중에 많은 양의 돈이 풀리자 통화가치가 급락하기 시작했다.

   1921년, 통화가치 하락 정책으로 인해 인플레이션 조짐이 나타났으나 이를 위협으로 여기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물론 부자들은 일찌감치 마르크화를 스위스프랑이나 금, 귀금속 등으로 바꿔 해외로 옮겨놓았다. 자산에 맞먹는 부채를 갖고 있던 독일 은행들도 그때까지는 손실을 입지 않았다. 노동조합에 속한 노동자와 공무원 들은 물가상승률에 상응한 급여를 받았고, 일부 회사는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빚의 가치가 줄면서 오히려 부유해졌다. 주식부자들은 떨어진 통화가치 대신 주가가 오른 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반면 여기에 속하지 않는 대다수 시민은 치솟는 물가로 인해 완전히 파산했다. 사람들은 생계를 잇기 위해 가재도구를 내다팔았다. 피아노가 화폐 대용으로 사용되고, 재산권과 관련한 각종 범죄와 약탈, 자살과 폭동이 끊이지 않았다.

   1922년, 인플레이션은 통제불능한 상태까지 물가가 오르는 하이퍼인플레이션 hyper inflation으로 바뀌었다. 과도한 통화공급으로 부채와 재정적자도 지속 불가능한 수준에 도달했다. 반면 미국 달러의 가치는 독일 내에서 거스름돈을 내줄 수 없을 정도로 치솟아 1달러가 4조 2000억 마르크에 이르렀다. 마르크화에 대한 신뢰가 사라진 독일은 대혼란에 빠졌다. 그나마 양심적인 식당은 음식값을 선불로 받았는데, 식사가 끝나면 가격이 올라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폐의 액면가치가 아닌 무게를 달아 값을 치르고, 지폐를 담뱃불로 쓸 만큼 돈이 흔해지자 독일의 중앙은행 라이히스방크는 잉크를 아끼려고 한쪽 면만 인쇄한 마르크화를 유통시켰다.

   1923년 11월 독일 정부는 하이퍼인플레이션을 저지하고자 대체 통화인 렌덴마르크를 발행했다. 당시 1렌덴마르크는 1조 마르크에 값했다. 그러나 렌덴마르크로도 폭등하는 물가를 막지 못하자 곧이어 더 높은 단위의 라이히스마르크를 발행했다. 지난 화폐는 모두 폐기처분되었다.


(참 좋은 시절로의 회귀)

   독일의 사태에 놀란 연합국은 배상금 액수를 줄여주는 한편, 종이돈의 안정성을 제고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으려 했다. 이에 1922년 4월 10일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세계 34개국은 이탈리아 제노바에 모여 종이돈의 가치를 금에 묶어놓는 금본위제 복귀를 논의하게 된다.

   국제금융에서 금본위제의 장점은 단순하다는 것이다. 금복위제를 택한 나라는 자국의 종이돈 가치에 상당하는 금의 양을 발표하기만 하면(순금 1온스당 300파운드), 즉시 그 가격으로 다른 나라의 금을 원하는 대로 사고팔 수 있었다.

   또한 금의 표준 중량에 기반을 둔 두 나라의 통화가 동시에 서로의 통화에 기반을 두는 형식을 취하기 때문에 매우 안정적이고, 금 채굴량 변화와 같은 외부 충격에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이러한 수요공급의 역학은 국가 간 무역에도 작용한다. 어떤 국가가 생산과 수출에 따르는 여러 조건을 개선해 무역수지 흑자를 이루면, 다른 국가에서는 무역수지 적자가 발생한다. 적자 국가는 흑자 국가에 금을 지불하고, 두 나라 간 금의 양에 변화가 일면서 물가가 흔들린다. 금이 많아진 흑자 국가는 인플레이션이 오는 반면, 적자 국가는 금의 양이 줄어 디플레이션이 생긴다. 그리고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이 두 나라의 무역 조건을 뒤바꾸면서 금은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다. 이것은 영국 철학자 데이비드 흄이 주장한 '가격-정화 흐름 메커니즘 price-specie flow mechanism'이다.

   서구 국가들은 평화로웠던 과거를 그리며 금본위제 재도입을 추진했지만 세상이 이미 변해 있었다. 전쟁물자 구입을 위해 금의 40퍼센트가 미국으로 유입되었다. 국제무역의 중심지가 영국에서 미국으로 옮겨갔고, 세계 교역량의 규모가 급속히 늘면서 금의 공급량도 달리는 상황이었다. 전쟁 기간 유럽 국가들이 국부가 유출되는 일을 막는 바람에 금화와 금괴도 이전처럼 자유로이 오가지 못했다. 이에 따라 1922년 5월 19일 제노바회의는 각국의 중앙은행이 금과 다른 국가의 통화를 함께 보유하도록 하는 금환본위제를 채택하기로 합의했다.


(세계경제를 위협한 천덕꾸러기)

   금환본위제의 약점은 곧 드러났다. 종전 후 1924~1929년은 세계 각국이 경제성장을 하면서 통화와 신용에 대한 요구가 강력했던 시기였다. 세계경제가 점점 더 많은 돈을 필요로 하면서 국제적 준비금도 함께 늘어야 했지만, 통화금융은 서서히 증가한 반면, 사용되는 화폐량은 빠르게 불었다. 문제는 그 자체로 온전히 자산인 금과 달리 화폐(종이돈)는 보유자에게는 자산이지만 은행에는 부채라는 점이다. 결국 각국의 중앙은행들은 제한된 금의 기반 위에 '준비금'이라는 명목으로 피라미드처럼 채무를 쌓아 올렸다.

   금환본위제는 성문화되지 않은 '게임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제도였다. 이를테면 프랑스가 교역 대금으로 받은 파운드화를 영국이 화폐 공급을 유지하도록 영국 은행은 돈을 재예치하는 한, 금환본위제는 문제없이 운영된다. 그러나 프랑스가 갑자기 영국에서 예금을 빼가면서 중앙은행에 금을 내놓으라고 하면 영국의 화폐 공급은 급격히 위축된다. 금본위제에서 이것은 그리 대수로운 일이 아니지만 변화에 취약한 금환본위제에서는 쉽게 공황으로 연결될 수 있다. 이런 사태를 막으려면 수출이 잘 돼 돈을 많이 번 나라는 '알아서' 금리를 올리고 경기를 수축시켜서 적자 나라에 돈이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

   처음 얼마간 국가들은 얌전히 규칙을 따랐다. 그러나 1923년 전쟁 전 금값에 환율을 맞추면서 자국 통화를 평가절하 했던 프랑스가 (주로 영국에 대해)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하고 나서도 국내 정치상황을 이유로 금리인하를 거부했다. 그 결과 지난날의 명성을 지키느라 환율을 전쟁 이전 수준으로 높여 금환본위제에 복귀했던 영국이 큰 타격을 입었다. 영국 정부는 고환율을 지탱하기 위해 긴축재정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 바람에 수출은 격감했고, 공장들이 줄줄이 문을 닫았으며, 수백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전쟁 채무국은 빚이 감당 못할 정도로 불었고, 민생은 파탄으로 치달았다.

   유럽의 경제위기는 1929년 10월, 미국의 대공황과 함께 폭발했다. 공황은 미국의 경제수준을 20년 이상 후퇴시킨 후 다시금 유럽으로 향하여, 공업과 농업을 파괴하고 수많은 은행을 도산시켰다. 각국은 뒤늦게 환율인하, 수출보장, 수입억제 등 자국의 어려움을 이웃나라로 전가하는 '근린 궁핍화정책 beggar-my-neighber policy'을 펼쳤지만 상황은 이미 걷잡을 수 없었다.

   독일에서 시작된 1차통화전쟁은 1931년 영국이 금환본위제 정지를 선언하고, 미국이 은행휴업령과 함께 시중에 유통되는 금을 압수하는 등 강력한 조치를 단행하고 나서야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다. 1933년 미국은 금환본위제 카르텔을 탈퇴했다.


p.140

(달러는 곧 금이다)

   2차세계대전 종전을 앞두고 미국과 영국 등 연합국 44개국은, 베르사유조약과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1944년 미국 뉴햄프셔주 브레튼우즈에서 통화금융회의를 열고 '브레튼우즈 체제 Bretton Woods system'를 출범시켰다.

   새로운 금융체제의 핵심은 국제통화와 금융의 안정성을 확보하고, 자유무역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연합국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피폐해진 유럽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금을 보유한 미국 달러에 모든 통화를 고정시키고, 미국은 다시 이를 금에 고정하기로 합의했다(순금 1온스당 35달러). 당시 전쟁의 최대 수혜국인 미국은 전 세계 금의 70퍼센트를 보유하고 있었다. 때문에 연합국은 금 대신 달러를 갖고 있다가 필요한 때에 미국에서 금과 맞바꾸면 되는 일이었다. 연합국은 달러에 대한 각국의 환율이 일단 정해지고 나면 다른 국가의 동의 없이는 바꿀 수 없도록 하는 고정환율제를 도입했다. 대공황시대에 벌어진 통화전쟁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이로써 세계의 기축통화 key currency가 파운드에서 달러로 이동했고, 세계경제는 미국 달러가 통용되는 단일 영토로 재편되었다.


(브레튼우즈 체제의 딜레마)

   브레튼우즈 체제의 약점은 미국이 누리는 절대 지위였다. 체제 자체가 미국의 강력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기반으로 한 만큼, 그 힘이 약해지는 순간 시스템은 붕괴될 터였다.

   위기는 1960년대에 시작되었다. 1964년 선거에서 대승을 거두며 재선에 성공한 민주당 린든 존슨 대통령은 빈곤 타파를 목표로 한 '위대한 사회 Great Society' 정책을 선언했다. 1965년에는 베트남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막대한 사회정책 비용과 전쟁 비용을 지불하면서 미국은 2차세계대전 이후 호황을 가져온 여러 가지 경제정책을 포기하게 되었다. 이 와중에 무역적자 규모는 날로 커졌고, 인플레이션도 가중되었다. 1965년 1.9퍼센트였던 인플레이션은 이듬해 3.5퍼센트로 늘었고, 이후 20년 동안 통제불능으로 치달았다.

   문제는 미국이 적자 규모를 상쇄할 만큼의 금을 구비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1965년 2월, 프랑스 샤를 드골 대통령이 가장 먼저 준비금 1억5000만 달러를 태환하며(지폐를 금으로 바꾸며) 미국의 지위에 의구심을 표했다. 뒤이어 스페인도 준비금 6000만 달러를 금으로 바꾸었다. 이렇게 달러와 미국의 영향력이 흔들리자 투기꾼들이 런던 금시장으로 몰려들었고 금값이 뛰기 시작했다.

   '트리핀 딜레마 Triffin dilemma'는 당시 미국이 처한 상황을 설명한 이론이다. 벨기에 경제학자 로베르 트리핀은 브레튼우즈 체제에는 구조적을 ㅗ모순이 내재해 있다고 지적했다. 세계 기축통화인 달러가 제 역할을 하려면 국제교역에 필요한 만큼 달러를 무한공급하거나 대외거래에서 적자를 ㄹ일으켜야 한다. 하지만 미국의 재정적자 상태가 오래되면 부족한 금 보유량으로 인해  달러화의 신용가치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반대로 미국이 장기간 무역수지 흑자 상태를 지속한다면 달러화 가치는 안정되겠지만 유통되는 달러량이 줄면서 세계경제는 나빠질 것이다.

   모순에 빠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미국은 마침내 달러를 방어하기로 결심했다. 1971년 8월 15일,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금태환을 중지하고 미국에 수입되는 모든 제품에 10퍼센트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선언했다.


(기축통화 구하기 대작전)

   닉슨의 '금태환 중지령'으로 인해 전 세계 교역시장에 커다란 혼란이 벌어졌다. 이에 선진 10개국(G10)은 1971년 12월 18일 워싱턴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서 긴급히 국제통화조정 협정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G10은 브레튼우즈 체제는 유지하되 미국의 부담은 덜어주는 '스미스소니언 체제'를 출범하기로 결의했다. 이에 따라 순금 1온스 가격이 종전 35달러에서 38달러로 상향 조정되었고, 각 나라 환율도 재조정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는 계속 늘어갔다.

   미국의 경제력을 유지하면서 환율을 붙잡아두려는 시도가 모두 실패하자 결국 1973년 자메이카 킹스턴에서 열린 IMF회의에서 브레튼우즈 체제는 폐지되었다. 이로써 국제금융에서 금의 역할이 공식적으로 끝나고, 달러화 중심의 고정환율제도 퇴장했다. 정부나 시장이 원하는 수준으로 통화가치를 정하는 변동환율제, 이른바 '킹스턴 체제'가 시작된 것이다. 그럼에도 미국 경제는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미국은 1973~1981년까지 세 차례나 경기후퇴를 겪었다. 그 사이 달러 가치는 총 50퍼센트 하락하고, 두 차례의 석유파동과 함께 유가는 네 배가 올랐다. 불황과 물가상승이 동시에 발생하는 스태그플레이션 stagflation에 미국 경제는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렸다.

   1981년 대통령에 취임한 도널드 레이건은 이 난국을 수습하고자 안으로는 각종 ㅅ금을 감면하고 규제를 철폐하는 레이거노믹스를, 밖으로는 달러 강세 정책을 펼쳤다. 덕분에 재임 3년간 미국 국내총샌산은 급성장했으나 무역적자 및 실업률은 여전히 높은 수준에서 요지부동이었다. 이에 레이건 정부는 대미무역 흑자를 기록하고 있던 독일과 일본에게 마르크화와 엔화 가치를 올리라고 압박했다. 두 나라와의 무역적자를 반전시키려는 속셈이었다. 1985년 9월 21일 뉴욕 플라자호텔에서 미국은 독일, 일본, 영국, 프랑스 등을 종용해 안정적인 달러 평가절하를 골자로 한 '플라자협정'을 통과시켰다.

   이를 계기로 달러 가치가 빠르게 하락하자, 플라자협정국에 캐나다, 이탈리아를 더한 G7은 1987년 2월 파리 '루브르협정'을 통해 더 낮은 수준으로 달러 가치를 안정화하는 데 합의했다. 20여년간의 2차통화전쟁은 이렇게 일단락되었다.


p.152

(후유증)

   2001년 일본에서 처음 시행된 양적완화 quantitative easing는 정책금리라 제로에 가까운 초저금리 상태에서 중앙은행이 경기를 부양하려고 시중에 유동성(돈)을 푸는 통화정책이다. 주로 정부 국채나 여러 금융자산을 매입해 시장에 화폐를 공급하며, 자국의 통화가치를 낮춰 수출 경쟁력을 높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1985년 1달러당 238엔이던 환율은 1988년 플라자협정 이후 128엔으로 치솟았다. 2년 만에 엔화 가치가 두 배 가까이 평가절상된 일본은 수출 경쟁력을 상실했고 경제정책의 중심축을 내수로 옮길 수 밖에 없었다. 1987년 일본 중앙은행은 경기침체의 우려와 내수경기 뒷받침을 위해 대규모 금융완화 조치를 취했다. 1985년 5.0퍼센트이던 정책금리는 2년 만에 절반인 2.5퍼센트로 떨어졌다. 수출 외에 돈 벌 길을 찾던 기업들은 힘들이지 않고 수익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을 마다하지 않았고, 싼 이자로 대출을 받아 사업 규모를 키우고 재테크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주식과 땅값이 오르고 기업의 담보 가치와 차입 여력이 확대되었으며, 이것이 다시 자산 가격을 높여 부동산 거품을 만들었다. 보동산이 돈이 된다는 속설은 연일 투자자를 끌어모았다. 매매차익으로 돈을 벌었다는 사람이 늘면서 주식이나 채권을 마구 팔아버리는 투매 현상도 심화되었다. 부동산 열풍이 절정에 달했을 때 "도쿄의 땅을 다 팔면 미국을 살 수 있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하지만 장밋빛 미래는 하루아침에 암울한 현실이 되었다. 1990년 5년간 지속되었던 '버블'이 붕괴되자 구가가 곤두박칠쳤다. 부풀려졌던 부동산 가치는 담보 가격 아래로 폭락했다. 이미 투자된 과잉 설비는 기업을 도산시켰고 이것이 불량채권으로 돌아와 은행들을 무너트렸다. 실업이 늘고 소득이 줄자 소비가 침체하고 생산과 고용이 감소했다. 여기에 노동인구 감소와 저출산이 겹치면서 1998년 GDP는 전년대비 마이너스 0.6퍼센트 성장으로 돌아섰다. 경기침체의 악순환이 한때 세계경제 2위의 일본을 디플레이션에 빠뜨리고 만 것이다. 적극적이고 선제적인 구조조정이 필요한 상황에서 일본의 집권보수 세력은 수동적인 수습책을 일관했다. 이후 시도된 20차례 경기부양책은 실패했고, 세계 최고 수준의 국가채무만을 남겼다. 2001년 집권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양적완화 정책으로 불황을 떨치려 했으나,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와 2001년 대지진 여파로 결국 '잃어버린 20년'을 맞았다.


(통화전쟁 재장전)

   2012년, "경기회복 이 길밖에 없습니다"라는 슬로건으로 총선을 승리로 이끌며 총리에 취임한 자민당 아베 신조는 경기침제를 극복할 수 있는 마지막 카드로 대규모 양적완화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아베노믹스 Abenomics를 주창했다.

   세계는 아베의 정책에 대해 반신반의하였다. 양적완화는 수출기업의 수익을 증대시키지만, 반대로 수입품과 원자재의 가격상승을 불러일으켜 중소기업과 노동자들의 생활을 더욱 어렵게 할 위험이 있다. 또한 장기적으로 과도한 국가부채를 발생시켜 미래에 엄청난 재정부담을 안기게 된다. 이러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아베노믹스는 추진 2년 만에 가시적인 지표의 변화를 끌어냈다. 일본 기업들의 해외사업 수익이 50퍼센트 증가했고, 이러한 수출기업들의 성과에 힘입어 2012년 8500이던 닛케이 주가는 2015년 4월 20000을 돌파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4600억 엔(약 4조2000억 원) 규모의 적자를 냈던 도요타는 2015회계연도(2014년 4월~2015년 3월)에서 2조7502억 엔이라는 사상 최대 실적을 거뒀다. 영업이익률은 무려 10.1퍼센트다. 수십 년간 정체됐던 일본의 GDP는 2015년 1분기 2.4퍼센트 증가했으며, 이것은 노동자의 임금인상과 취업률 상승으로 이어졌다.

   미국의 양적완화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시작되었다. 2009년 3월과 2010년 11월 두 차례에 걸친 대규모 양적완화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실물경기가 회복되지 않자 오바마 정부는 2012년 9월 13일,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다달이 400억 달러의 주택저당증권을 사들이고, 0퍼센트 수준의 기준금리를 2015년 중반까지 유지한다는 3차 양적완화를 발표하면서 통화전쟁에 뛰어들었다. 이같은 특단의 조치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어, 2008년 이후 내내 마이너스를 기록하던 미국의 경제성장률은 2014년 상반기 4.6퍼센트까지 회복되었다.


(남의 주머니 털어 내 주머니 채우기)

   각국이 통화정책을 펼치는 동기는 언제나 실업률 상승, 성장률 감소, 국가재정 악화 등 국내경제의 어려움과 관련된다. 생활이 어려워진 소비자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지갑을 열지 않는다. 기업은 소비자가 제품을 지금 당장 혹은 가까운 미래에 살 거라고 확신하지 않는 한 투자를 늘리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대개의 경우 정부가 지출을 늘려 유효소비를 촉진하기 마련이지만, 불경기가 오래되다보니 정부의 재정적자는 이미 불어날 대로 불어 있고, 그렇다고 세금이나 대출을 늘려 재정을 확보하자니 허리띠를 있는 대로 졸라맨 유권자들 눈치가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남은 길은 단 하나, 순수출을 증가시키는 것뿐인데 그러려면 자국의 통화가치를 떨어트리는 일이 가장 쉽고 빠르다.

   문제는 일본이나 미국 같은 선진국 간의 통화전쟁의 부작용이 언제나 국제적으로 전개된다는 데에 있다. 오늘날 전 지구화된 산업구조 안에서 하나의 상품은 여러 국가에서 제조된다. 이런 상황에서 달러 가치가 하락하면 원자재 값은 상승하게 되고, 제조업 국가들은 결국 비싼 값에 재료를 사들여야 한다. 결국 해당 국가는 제조업 시장을 잃고 공장 폐쇄와 해고, 파산, 경기후퇴 등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선진국들이 양적완화로 챙기는 이익이 사실상 다른 나라가 쌓아놓은 돈을 빼앗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보는 이유다. 결과적으로 양적완화는 교역 상대국의 경제적 어려움을 야기하고, 이로 인해 또다시 수출이 줄어드는 경제의 악순환을 불러온다.

   중국이나 한국 같은 신흥국에서는 '붐-버스트 사이클 boom-bust cycle'이 일어날 수도 있다. 제로금리에 가까운 선진국의 통화는 자본 이득을 좇아 상대적으로 금리가 높은 신흥국 자산 시장으로 유입된다. 이로 인해 신흥국에서는 갑자기 통화량이 팽창하며 일시적인 경기호황을 누리게 된다. 하지만 물가가 상승하고 자산거품이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지게 되면 외국인 투자자들은 그 나라의 경제 건전성에 의문을 품고 자본을 거둬들인다 이것이 붐-버스트 사이클이 말하는 경제위기디ㅏ. 실제로 2010년 미국이 양적완화를 선언한 후, 고수익을 노리는 핫머니가 달러에 대해 고정환율을 고수하는 중국으로 대거 흘러들어가 위안화 절상 효과와 인플레이션을 일으킨 바 있다.


("돈 풀기를 멈추고 실물 부문을 바로잡아라.")

   국제 금융시장에서 미국처럼 기축통화 지위를 누리는 것도 아니고, 일본처럼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없는 신흥국이 선진국들의 양적완화에 대응할 길은 많지 않다. 일본과 미국의 양적완화도 실상 실물 부문을 내버려둔 채 돈을 풀어 환율을 조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주요 각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들이 돈 풀기를 멈추고 실물 부문을 바로잡지 않는 한 불황과 디플레이션에서 탈출할 방법은 없다.

   불황은 소비재가 아니라 자본재에서 시작되며, 불황을 멈추는 길은 시장이 넘쳐나는 자본을 스스로 정리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오스트리아학파에 동의하지 않는 다수의 전문가들도 저금리 정책이 매우 위험하다고 입을 모은다. 양적완화가 끝나면 미국은 기준금리를 올릴 텐데, 한국이 금리를 낮게 유지하면 한국에 투자한 외국인들이 대량으로 주식을 팔아 자본을 미국으로 이동시키면서 주가를 떨어뜨릴 위험이 있다. 투자자본이 대량 유출돼 금융위기가 발생할 가능성도 높아진다. 또한 변동금리 대출이 대부분인 한국은, 미국이 기준금리를 올리면 따라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서민들이 이자부담이 더욱 커진다. 이는 가계부채를 늘리고 서민 경제에 악영향을 끼쳐서 소비 위축으로 이어지게 된다. 

   물론 저금리 정책이 무역 여건을 강화하고 미국이 기준금리를 인상할 때의 충격을 최소화할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지난 몇 년간 저금리 기조에도 외국 자본은 꾸준히 유입되었고, 금리를 내릴 때마다 달러 대비 원화 가치가 오르는 기현상이 계속 된다는 점에서 이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2015년 6월 5일 한국은행은 기준금리를 종전 1.75퍼센트에서 역대 최저인 1.5퍼센트로 낮추었다.

   2014년 10월 29일 양적완화 종료를 선언한 오바마 정부는 2015년 6월 18일, 올 하반기에 기준금리를 올리겠다고 예고했다. 풀었던 돈을 거두어 달러가 다시금 강세를 띠면 미국 기업의 수출과 이윤은 떨어지고 가뜩이나 침체에 빠진 세계경제가 더 위축될 거라는 우려도 있었으나, 미국 경제가 인플레이션 위험에 노출 되기 전에 한 발짝 빠른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p.183

   최종 지향이 확정되고 동지도 생기자 마르크스는 사회주의를 뒷받침할 철학적 당위로서 '역사적 유물론'을 정립해나간다. 뼈대는 헤겔철학, 단 "물구나무 선 헤겔철학"이었다.

   헤겔의 관념론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세계는 정신으로 구성돼 있고(물질도 정신에서 나온다), 정신은 정반합이라는 변증법적 운동 원리에 따라 '절대 진리'를 향해 나아간다. 이것이 지금껏 인류 역사가 발전해온 길이다. 마르크스는 헤겔 철학을 가져오되 '정신'의 자리에 '물질'을 넣는다. 즉 세계는 물질로 구성돼 있다(정신도 물질에서 나온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인류 역사는 물질이 변증법적 운동 원리에 따라 진보한 과정이며, 생산수단을 차지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관계에 대한 기록이다. 고대 로마시대는 귀족이 노예라는 생산수단을 점유했다. 봉건시대에는 영주가 땅과 농기구를 소유했다. 자본주의시대에는 자본가가 공장과 기계를 가졌다. 그리고 그 아래로 여러 계급이 헤쳐 모여 서로 갈 길을 모색하며 사회 변혁을 이끌었으니 "지금까지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인 것이다.

   그런데 문득 의문이 솟는다. 왜 노예, 농노, 노동자 들은 지배계급에 저항하지 않을까. 헤겔 철학의 중핵은 여기서 중요해진다. 지배계급은 법, 도덕, 종교, 문화 등 정신을 이용해 자신들이 생산수단을 갖는 것이 '정당해 보이도록' 피지배계급의 눈을 가린다. 이에 피지배계급은 근면, 성실, 긍정 같은 지배계급이 만든 윤리를 자연스럽게 수용하고, 시스템이 제공하는 꿈(이를테면 '열심히 일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을 제 것인 마냥 꾼다.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변화는 없다. 그러나 지배계급도 어쩔 수 없는 역사적 변수가 있으니, 바로 기술 발전이다. 기술이 발전하면 노동과 자본은 요동하고, 그때마다 지배계급은 자신의 지위를 심각하게 위협받는다. 물질적 조건이 바뀌는 속도를 제도가 미처 따라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방적기가 발명돼 면직물 생산이 폭증하고, 산업이 발달하여 자본이 쌓이고, 자본을 굴리던 자본가가 봉건영주를 몰락시킨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이대로 생산력이 계속 발전한다면 또다시 "물질생산력과 사회제도가 서로를 구속해 마침내 사회혁명의 시기가 오게 된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예견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다. 혁명의 그날이 오면 생산수단은 프롤레타리아의 몫이 되고, 계급이 사라진다.


   마르크스가 역사적 유물론의 꼴을 갖추는 동안 1949년 프랑스에서 '2월혁명'이 일어났다. 보수정권에 불만을 품은 시민들의 분노, 선거권과 처우 개선을 요구한 노동운동의 영향, 1840년대 내내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던 경제공황이 합쳐진 결과였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혁명의 불길이 전 유럽에 퍼져 빈 체제를 해체하자, 때가 왔다고 판단한 마르크스는 엥겔스와 함께 『공산당 선언』을 서내려간다. 이들은 계급투쟁의 당위, 자본주의가 망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 등을 적은 글을 "잃을 것은 사슬이고 얻을 것은 온 세계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는 선동 문구로 마무리하고 파리, 브뤼셀, 퀼른 등지를 돌며 투쟁을 독려한다.

   2월혁명은 민중의 승리로 끝난다. 그러나 열매는 부르주아와 결탁한 온건 공화주의자들이 독식한다. 노동자와 사회주의자가 전선을 형성해 저항하지만 무력진압당하고 또다시 반동의 시대가 온다. 계급사회의 종말을 고한 '불온한 사상가' 마르크스는 1849년 프랑스 공화정으로부터 추방되어 런던으로 망명한다.


(노동자가 가난한 이유)

   러시아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은 마르크스주의의 세 가지 원천이 독일 철학과 영국 경제학, 프랑스 사회주의이고, 이에 대응하는 세 가지 구성부문은 역사적 유물론과 정치경제학,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말했다.

   2월혁명의 실패를 통해 "혁명이 의지와 소망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고 과학이라는 지렛대를 필요로 한다는 뼈아픈 교훈"을 얻은 마르크스는 경제학이 바로 그 지렛대라고 확신한다. 이에 가난이 삶을 파괴하고 자녀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참혹한 조건에서 수년간 매일 오전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대영박물관 도서관에 틀어박혀 경제학 공부에 매달린 끝에 1857년 '노동자의 성서', 을 펴낸다.


   변증법에 따라 총 3권으로 구성된 『자본』의 첫 권은 자본의 생산과정에 대한 것이다. 마르크스가 통찰하기에 1840년대 일어난 크고 작은 혁명을 촉발한 요인은 가난이다. 물론 유사 이래 가난은 늘 있었으나 생산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지금의 가난은 과거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역사상 빈부 차가 이토록 첨예하고 이토록 많은 사람이 비참한 삶에 내몰린 적이 있었던가. 유럽의 공장을 한번 둘러보라. "십분만 있어도 먼지 때문에 숨을 쉴 수 없는 열악한 작업실"에서 "일곱 살 아이가 하루 열여섯 시간을 일한다." 가는 곳마다 "제대로 먹거나 쉬지 못해 육체적ㆍ정신적으로 쇠잔한" 노동자가 넘쳐나는데, 이들은 "침실 하나를 널빤지 몇 개로 나눈 질식한 것처럼 작은 침실에서, 한 침대에 두 명씩 누워 자다가 그대로 죽는다." 빈자리는 곧 "굶어죽기 직전의 과부의 손에 이끌려온 어린이"로 채워진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지옥도가 자본주의 생산과정에 연유한다고 보고, 원인을 자본가의 '노동착취'에서 찾았다.

   고전경제학에서 한 상품의 가치(가격)는 그 상품의 생산에 소요된 노동량에 의해 결정되며, 노동자는 가치 생산에 기여한 만큼 보수를 받는다. 따라서 상품의 가치는 노동자의 임금과 일치한다. 이게 참이라면 이윤이 생길 여지는 없다. 하지만 현실의 자본가들은 엄청난 이윤을 챙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마르크스에 따르면 방적공장 사장은 면직물을 생산하기 위해 공장, 방적기, 목화 등의 불변자본과 노동자라는 가변자본을 산다. 이렇게 면직물을 만들고 나서는 그 가치가 지금껏 쓴 돈을 합친 것보다 많도록 온 힘을 다한다. 그런데 불변자본은 말 그대로 가치가 변하지 않는 자본이라 이윤을 남기려면 가변자본을 줄이는 수밖에 없다. 이에 자본가는 꾀를 내어 노동자들이 생산에 기여한 만큼이 아니라 '먹고살 만큼'만, 목숨을 부지해 다시 일할 수 있을 만큼만 임금을 주고 나머지(잉여가치)는 전부 빼앗는다. 예컨대 노동자가 하루 먹고사는 데 5만원이 들고, 5만 원어치 면직물을 생산하는 데 다섯 시간이 걸린다면, 자본가는 노동자를 일당 5만 원에 고용해 열 시간을 부린다.

   그렇다면 노동자가 일당 10만 원을 요구하면 되지 않나. 예비 노동력이 넘치는 마당에 이는 어림없는 소리다. 게다가 마르크스가 정의한바 자본은 "무한증식하려는 속성을 지니고" 있어서 자본가는 더 많은 돈을 남기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런데 앞서 보았듯이 이윤은 노동착취에서 오고, 이윤율은 잉여가치와 총 투입자본(불변자본+가변자본)의 비율로 결정된다. 결국 이윤율을 높일 방법은 노동시간을 늘리거나, 싼 기계를 쓰거나, 임금을 줄이는 길뿐인데 자본가는 이 모두를 동시에 수행한다. 노동자가 가난을 면치 못하는 이유다.


(매번 위기로 구원돼야 하는 악순환)

   그러나 제아무리 부조리할지언정 하루아침에 자본주의를 폐기할 수는 없다. 혁명은 반드시 실천을 담보해야 하고, 실천에 이르려면 여러 조건들이 무르익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자본주의는 노동자의 희생을 딛고 역사적 유물론에 따라 진보하며 인류의 번영을 가져온다. 자본주의의 성숙은 사회주의 혁명의 필요조건이다. 이와 함께 자본주의는 경제학 법칙에 따라 차분히 나파의 길을 걷는데, 그 첫번째 징후가 이윤율과 자본축적률 하락이다.

   자본주의체제에서 자본가는 끝없이 경쟁할 운명에 처해 있다. 동종업계 누군가가 생산규모를 키우고 능률을 높이면, 나머지도 그에 준하는 요건을 갖춰야만 시장에서 도태되지 않는다. 그래서 자본가들은 너도나도 사세를 확장하고 더 많은 노동자를 고용한다. 이렇게 노동 수요가 늘면 임금에 소요되는 금액이 오르게 되고 이윤율을 높여야 하는 자본가는 노동자 대신 기계를 들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수요가 늘어난 만큼 기계값은 오르기 마련이라 자본가는 진퇴양난에 빠진다. 기계를 안 사자니 경쟁에서 밀리고, 사자니 불변자본 비중이 높아진다. 그러나 선택지는 없다. 자본가는 비싼 기계를 살 수밖에 없고, 이윤율과 자본축적률은 그만큼 낮아진다.

   이 과정에서 자본 없는 영세 기업은 퇴출돼 몇몇 대기업이 시장을 장악한다. 기계가 노동자를 대체한 데 이어 실질적인 일자리가 줄면서 유효수요는 격감한다. 물건이 팔리지 않아 기업은 도산하고 주식은 폭락하고 투자율은 땅에 떨어진다. 이렇게 한 번 공황이 휩쓸고 나면 상황은 좀 나아진다. 살아남은 기업들은 노동자를 고용해 생산을 재개하고, 자본주의는 희생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같은 일이 반복된다. 마르크스는 이런 악순환이야말로 자본주의의 기본 속성이라고 말한다. 자본주의의 비극은 위기 자체가 아니라, 매번 위기로써 구원돼야 한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는 사이 늘어난 실직자는 한동안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는 희망으로 구직활동을 계속하고, 덕분에 자본가들은 싼값에 노동력을 부릴 수 있게 된다. 하지만 희망은 곧 절망으로 바뀐다. 노동자들은 가난과 끝 모를 불안으로 하루하루를 소진한다. 그러다 마침내 스스로의 처지를 깨닫고 떨쳐 일어나, 자본가에게 빼앗긴 생산수단은 물론 마음과 정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되찾는다. 이제 노동자는 이윤이 아니라 '창조적인 삶'을 위해 일한다.

   그리고 그 다음은? 알 수 없다. 마르크스는 『자본』의 첫번째 권만을 완성하고 1883년 3월 사망한다. 이후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메모와 원고뭉치를 정리해 나머지 두 권을 펴내지만, 사회주의체제에 이르는 구체적인 행로는 영영 괄호로 남았다. 후대는 다만 이후에 레닌과 카를 카우츠키, 로자 룩셈부르크가 그랬듯 『공산당선언』의 다음 구절을 이정표 삼아 저마다의 길을 모색할 뿐이다.


   가장 진보된 나라들에서는 다음과 같은 방책을 일반적으로 적용할 것이다.

1. 토지 사유를 폐지하고 모든 토지 임대료 수입을 국가 경비로 삼는다.

2. 높은 누진세를 적용한다.

3. 상속권을 폐지한다.

4. 모든 망명자와 반역자의 재산을 몰수한다.

5. 배타적인 독점권을 가진 국립은행이 국가의 수중에 신용을 집중시킨다.

6. (철도ㆍ통신 등) 모든 운수기관을 국유화ㆍ중앙집권화한다.

7. 국유 공장과 생산용구를 늘린다. 공동계획으로 황무지를 개간ㆍ개선한다.

8. 모두가 평등하게 노동의 의무를 진다. 산업예비군 특히 농업예비군을 설립한다.

9. 농업과 제조업 경영을 결합한다. 인구를 분산해 도시와 농촌간 대립을 점진적으로 철폐한다.

10. 모든 아동을 무료로 교육하고, 아동 노동을 금지한다. 교육과 물질적 생산을 결합한다.


('자본'에 대한 처방을 꿈꾸며)

   주류경제학이 마르크스경제학을 불신하는 가장 큰 이유는 '비과학성'이다. 경제학은 과학이며, 과학은 이론이나 가설을 수학적으로 모델링할 수 있어야 하는데, 마르크스주의는 이게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전망도 많은 부분 예측을 빗겨가며 불신을 키웠다. 이를테면 마르크스는 사회주의 혁명이 고도로 발달된 자본주의 국가에서 나타난다고 했는데 실제로는 러시아, 중국, 베트남 같은 저개발국가에서 실현되었다. 이런저런 비판에 마르크스주의경제학은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고, 1991년 현실공산주의를 상징하던 소련이 해체하면서 '실효성 없는 과거의 몽상'으로 밀려났다.

   한편 자본주의경제학은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을 단적으로 드러낸 대공황을 케인스주의로 돌파한 후, 일련의 위기들을 '수정 가능한 오류'로 다루며 현재에 이르렀다. 하지만 케인스주의는 자본주의체제의 (임시)처방전은 되었을지언정 생산수단을 돌러싼 관계로서 '자본'에 대한 처방전은 되지 못했다. 오늘날 노동을 둘러싼 물리적 조건은 분명 개선되었으나, 노동이 처한 실질적 조건, 즉 높은 실업률과 가난, 긴 노동시간, 비인간적 처우,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실질임금과 급격한 빈부 차이는 19세기 유럽과 그리 다르지 않다.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가 자본주의의 모순을 다시 한번 폭로했을 때, 전 세계에 마르크스주의 열풍이 분 이유다.

   『자본』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계급투쟁'이라는 낡은 깃발을 고쳐 맨 사람들에게 한국의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경제학자 고 김수행은 이렇게 독려한다. "자본주의를 가장 이상적인 경제체제로 여기는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처럼 현실에 순응하지 않기를, 계급투쟁을 통한 역사발전론을 주장한 마르크스처럼 역사변혁의 주체가 되기를 바란다."


p.215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아이디어를 잊는 것이다."

- 존 메이너드 케인스


p.219

   1차세계대전 여파로 잠시 주춤거리긴 했지만 20세기 초 미국은 엄청난 지원과 기술력을 밑거름 삼아 세계경제의 중심으로 급성장했다. 신용제도는 정비되고 산업 전반은 기계화되어 생산력을 배가시켰으며, 거대해진 기업은 선진적인 경영법으로 효율을 높였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발전함에 따라 미국 경제는 유례없는 호황을 누렸다. 1922년 뉴욕을 배경으로 한 상류층 여인 데이지와 신흥 부자 개츠비의 비극적 연애담 『위대한 개츠비』는 당시 미국이 구가했던 물질적 번영(과 정신적 빈곤)이 어느 정도인가를 보여준다.

   성장이 눈부신 만큼 구조적 모순도 첨예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문제는 소득불평등이었다. 전체 인구의 5퍼센트에 해당하는 부자들이 전체 소득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바람에 대다수 국민들의 구매력은 날로 줄었다. 소비되지 못한 물건이 창고에 쌓이자 공장 가동률은 떨어졌고, 투자처를 찾지 못한 자본은 증권 시장에 몰렸다. 그다음부터는 악순환이었다. 과도하게 증권시장으로 쏟아진 여유자금 때문에 주가가 실질가치 이상으로 치솟는 '거품현상'이 생겼고, 거품 낀 주가는 다시 자본을 끌어들였다. 증권시장이 과열 양상으로 치달으며 주가 폭락이 우려되었지만 투자 열기는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결국 1929년 10월 뉴욕 증권거래소에서 주가가 대폭락하며 세계경제를 파탄에 빠트린 대공황이 시작되었다.

   이후의 상황은 참혹했다. 1933년까지 "자유시장의 기능은 완전히 마비되었다. 3퍼센트였던 실업률은 25퍼센트로 치솟고 국민총생산량은 절반으로 줄었다." 은행 대출을 갚지 못한 기업이 줄도산하고, 전재산을 날린 투자자들이 매일 목숨을 끊었다. 노동자들은 혹여나 일자릴 구할까 싶어 거리를 전전했고, 곳곳에는 비상급식소가 들어섰다. 미국이 진원지가 되어 전 세계 자본주의 국가 대부분이 휘말린 대공황은 1939년까지 여파를 남겼다.


("장기적으로 우리는 모두 죽는다")

   학계를 장악한 신고전학파는 경제에 부정적인 여러 오인이 '공교롭게도' 동시에 작용하는 바람에 대공황이 일어났다고 분석했다. "1920년대 활발했던 투자기회가 줄어든 때, 소비자들은 하필 소비를 줄이고 국가는 하필 보호무역 장벽을 높이고 연방준비은행은 하필 긴축정책을 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지금 당장은 상황이 조금 어렵지만 장기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손'이 알아서 해결할 거라고 낙관했다.

   케인스는 이론에 함몰돼 현실에 눈 감아버린 학자들의 속 편한 전망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화폐론』에서 이미 "장기적으로 우리는 모두 죽는다"라며 비아냥거렸던 그는 『일반이론』을 통해 가장 먼저 신고전학파의 금과옥조인 '세이의 법칙 Say's law'을 반박한다. 프랑스 경제학자 J. B. 세이의 이름을 딴 세이의 법칙은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는 내용의 경제학 법칙이다. 그에 따르면 모든 생산자는 동시에 소비자이며 이들은 상품을 생산해 번 돈을 다른 상품을 구입하는 데 쓴다. 따라서 경제 전반에 걸쳐 수요와 공급은 딱딱 맞아떨어진다.

   이 '순진한' 법칙은 크게 두 개의 축으로 돌아간다. 먼저 금리가 유연하게 움직여서 저축을 투자로 연결한다. 개인이나 가계는 보통 번 돈의 일부는 쓰고 나머지는 저축한다. 그런데 가계 소비가 줄고 저축이 늘면 은행은 돈이 많아진 만큼 금리를 낮출 것이다. 기업들은 싼 이자에 돈을 빌릴 수 있으니 투자를 늘릴 것이고, 투자가 늘면 고용도 늘기 마련이니 경기가 살아날 것이다. (물론 저축이 줄면 반대 현상이 나타날 것이다.) 그런데 만약 기업들이 낮은 금리에도 투자를 늘리지 않는다면? 소비가 줄어든 마당에 투자도 늘지 않았으니 경기는 침체될 것이다. 임금이 낮아지면 기업은 더 많은 노동자를 고용하고, 물가를 떨어지면서 상품 소비도 증가할 테니 경기는 곧 회복된다.

   하지만 케인스는 세이의 법칙이 가계와 기업의 총수입과 총소비가 완전히 일치할 때만 작동한다고 보았다. 경제학자이자 성공한 투자자로서 자신의 경험에 비춰봐도, 저축은 그렇게 쉽게 투자로 연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가계는 단순히 집을 사려고 저축을 하지만 기업은 정치, 환율, 금리, 날씨 같은 조건들을 고려해 투자를 결심하기 때문이다. 임금과 물가는 또 어떤가. 독점기업과 노조가 떡하니 버티고 선 현실에서 임금과 물가는 그럽게 자유롭게 오르내리지 못한다. 결국 불경기가 지속되는 한 기업은 투자를 줄일 것이고, 투자가 줄면 일자리도 줄 것이며, 일자리가 줄면 소비와 저축도 준다. 신고전학파의 말처럼 저축이 투자를 유도하는 게 아니라 투자가 저축을 견인하는 것이다. 더욱이 임금과 물가가 현실에 맞게 조절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불황은 장기화될 가능성이 있다. 대공황은 둘째 치고 지난 수십 년간 영국의 경제상황만 보더라도 세이의 법칙과 현실의 거리는 너무 멀다.

   주류경제학을 조목조목 비판한 케인스는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린다. "우리가 살고 있는 경제사회에서 나타나는 가장 큰 문제는 이 체제가 완전고용을 보장하지 못하고 부와 소득을 임의로 그것도 불평등하게 분배한다는 데 있다."


(불확실성을 통제하라)

   불황은 공급이 수요를 초과할 때 발생한다. 즉 사람들이 충분히 소비를 하지 않으면 물건은 팔리지 않고 기업은 감원에 들어갈 것이며 결국 총생산은 줄어든다. 누군가 자의든 타의든 근검 절약을 실천하는 순간, 누군가는 해고되고 경제는 불황에 빠지는 것이다. 반대 상황도 가능하다. 누군가 기분에 겨워 충동구매를 하는 순간, 누군가는 일자리를 얻고 경기는 회복된다. 사소한 절약 혹은 소비가 국가 경제를 좌우할 만큼 커다란 파급효과를 낳는다는 통찰, 이것이 그 유명한 케인스의 '승수이론'이다.

   

   "개인이나 시청, 정부 부서가 지출을 삭감할 경우 다음날 아침 틀림없이 누군가는 실직당할 것이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실업자가 된 그 친구는 이제 원하든 원하지 않든 소비를 줄일 수 밖에 없을 것이고, 그 결과 그 다음날 아침 누군가는 실직당할 것이다. (…) 한 번 이 파급효과가 시작되면 이것을 멈추기란 지극히 어려워진다.


   (중략) 불황이 소비와 직결된 문제라면 해법은 간단하다. 부족한 만큼 돈을 쓰면 된다. 하지만 가계가 얼마나 소비(저축)할지, 기업이 언제 어떤 계기로 얼마를 투지할지 알 수 없는 일이고, 이러한 불확실성에 기대는 한 실업과 불황은 반복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그 어떤 제도보다 자본주의가 경제적 목표를 더 효율적으로 달성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케인스는 시스템에 내재한 위험 요소를 최소화하여 자본주의를 안전하게 지속할 방안를 찾는다.

   정부의 재정정책은 이 대목에서 중요해진다. 가계와 기업이 소비를 줄인 마당에 돈을 풀 가장 확실히 주체는 정부뿐이기 때문이다. 만약 시장에 필요한 돈이 100만 원인데 가계와 기업의 소비가 70만 원밖에 안 된다면, 정부는 세금을 깎든 공공투자를 늘리든 30만 원을 써야 한다. 재정적자가 걱정되겠지만 어차피 이 돈은 경기가 회복되면 곧 채워진다. 정부는 지출을 통해 투자를 망설이는 기업에 안정성을 보장하고, 사회적 부를 재분배하고, 고용과 유효소비를 촉진해야 한다. 


   특수한 조건에서만 참인 세이의 법칙을 일반 조건에서도 무리없이 움직이도록 수정한 케인스의 이론은 즉각 반발에 부딪혔다. 자유방임을 절대 명제로 여겼던 신고전학파는 케인스의 아이디어 자체를 이단으로 받아들였다. 철학자들은 정부의 기능 확대가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일이라면서 케인스를 '사회주의자'라고 비난했다. 영국과 미국 재무성은 재정적자를 감수하라는 조언을 찜찜하게 여겼다. 하지만 대공황의 원인을 설명하고 극복 방안을 제시한 유일한 경제이론으로서 케인스의 혁명적인 주장은 조금씩 학계에 스며들어, 2차세계대전을 전후해서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일반적인 재정정책이 되었다. 이와 함께 불확실성을 통제할 제도도 하나둘 마련되었다. 실업급여와 누진세가 그 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케인스주의?)

   "우리는 모두 케인스주의자다"라는 리처드 닉슨의 선언처럼, 20세기 대부분의 자본주의 국가는 케인스주의를 경제 기조로 삼았다. 물론 부침은 있었다. 1970년대 석유파동으로 경기가 침체하는데도 물가가 오르는 스태그플레이션이 계속되자, 미국은 케인스주의 대신 신자유주의 정책을 백식으로 채택했다. 1980년대 레이거노믹스도 그 연장선상에서 추진되었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정책'은 달라졌을지언정 '골조'는 언제나 케인스주의였다. 2007년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모순이 폭발하면 미국발 금융위기가 몰아쳤을 때, 경제학자들이 다시금 『일반이론』을 펼치든 것은 우연이 아니다.

   돌아온 케인스 경제학의 핵심은 역시나 불확실성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포스트케인스주의자 폴 데이비드슨은 한 기고문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미래를 불확실한 것으로 여겼던 케인스의 고찰을 깡그리 잊었기 때문에 벌어졌다고 말한다. 이들이 통계를 이용해 채무자가 빚을 갖지 못할 확률을 계산하고, 이를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마치 신고전학파처럼 미래를 예측 및 통제 가능한 것으로 다루었기 때문에 일어난 참사라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전 세계를 잠식한 불황(의 공포)에서 벗어나려면, 불확실성을 수긍하고 이에 대처할 방안들을 또다시 모색하는 수밖에 없다.

   다만 이때의 케인스 경제학은 지난날과는 다른 것이어야 한다. 살아생전 주장이 변덕스럽다고 조롱받은 케인스가 "정보가 변하면 결론을 수정한다"고 대꾸했듯이, 1936년과 지금의 경제지표는 전혀 다르다. 하지만 영국 경제학자 로버트 스키델스키는 복잡하고 모호한 케인스 경제학이 수용되는 과정에서 신고전학파의 입맛에 맞춰 단순하고 명쾌한 케인스주의 경제학으로 왜곡되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 결과 케인스주의는 불황 같은 특정 상황에서만 유용하다고 인식되어 왔는데, 이는 두 가지 면에서 잘못되었다. 우선 케인스는 자유방임 시장에는 늘 심각한 경기침체 가능성이 잠재한다고 믿었고, 따라서 정부의 역할은 언제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케인스는 평생 부와 윤리적 목적과의 관계를 고민했으며, 돈에 대한 사랑이 '선한 삶 the good life'으로 이끌 때에만 정당하다고 보았다.

   스키델스키는 "불확실성이 인간 행동에 미치는 효과를 명확히 인식한 케인스 경제학의 진수를 파악하고", 돈과 윤리에 대한 케인스의 고민을 '일반이론'으로 받아들여야만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서 '케인스주의'가 아닌 '케인스 정신'의 부활을 요청했다.


p.233

   시카고학파를 비롯한 최저임금제 반대파는 최저임금제를 시행하면 법정임금을 줄 수 없는 영세업체를 위기로 몰아넣어 학생, 주무, 외국인 등 비숙련 노동자들의 실업을 불러올뿐더라 빈곤과 소득불평등을 해소하는 데 매우 비효율적이라고 반박한다. 밀턴 프리드먼은 "사람들이 저지르는 가장 심각한 실수 중 하나가 바로 정책의 성과를 그 정책의 결과가 아닌 의도로 결정짓는 것"이라고 했는데, 1988년 푸에르토푸리코 정부가 최저임금을 미국과 같은 3.35달러(평균임금의 63퍼센트)로 올리자 고용이 9퍼센트나 급락한 것이 하나의 사례다.


p.246

   로널드 레이건이 공화당 대통령 후보이던 시절, 래퍼가 어느 날 워싱턴의 한 음식점에서 냅킨에 그려 보였다는 래퍼 곡선은 향후 전개될 레이거노믹스의 기반이 되었다. 집권기 레이건은 최고 세율을 70퍼센트에서 30퍼센트로 인하했지만, 1980~1990년까지 미 연방정부 세수는 거의 두 배로 뛰었다. 세금을 낮춰 부자들의 투자와 고용 의욕을 복돋아 새로운 부가 창출되엇고, 그 효과로 사회는 발전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유명한 '트리클다운 trickle down', 낙수 이론이다.

   증세 찬성 측의 반론도 래퍼의 이론으로 시작한다. 레이건의 경제고문이던 아서 래퍼의 말대로 부자 감세를 단행한 결과, 레이건 정부는 국내총생산 대비 세수 비중은 줄고 거대한 재정적자를 떠안게 되었고, 결국 민주당 빌 클린턴에게 차기정권을 내주어야 했다. 세금을 올리면 경제성장이 둔화된다는 주장도 어불성설인 것이, 클린턴 대통령은 임기를 시작하자마자 곧장 증세를 단행했지만 첫 2년 동안 매달 약 25만 개 일자리가 생길 정도로 경제호황을 맞았다. 이 현상은 그 자체로 트리클다운에 대한 반증이기도 한다.


p.265

   어떤 이들은 감정노동이 모든 업종에서 수행되는 일의 한 형태라면서 혹실드의 주장을 반박한다.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회적 얼굴' 하나쯤은 갖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감정을 조절하는 것과 감정노동은 여러 가지로 다르다. 감정조절은 정서조절의 주체가 개인에게 있지만, 감정노동은 정서조절의 주체가 문서화된 계약에 있다. 예컨대 회사에서 대인관계가 좋지 않은 직원은 직장생활이 조금 힘들어질 뿐이지만, 전화상담원이 계약서에 명시된 친절을 베풀지 않으면 해고 사유가 된다.


p.279

(다시 원점)

   1970년대 영국은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경제성장률은 연 3퍼센트를 밑도는데, 일본과 독일에 제조업 경쟁력이 밀리는 통에 무역수지 적자는 경제성장률을 넘어섰다. 뿐만 아니라 두 차례의 석유파동을 거치며 인플레이션은 연평균 20퍼센트를 웃돌았다. 정부가 민간제조업의 투자와 설비를 근대화하고, 임금과 물가상승을 억제하는 법안을 마련해 경제회복에 사력을 다했으나, 1976년 IMF 구제금융을 받을 정도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은 이것이 과도한 복지와 노조 탓이라고 몰아붙였다. 노동자들이 공짜로 돈을 받다보니 나태하고 무능한 '영국병'에 걸려서, 임금과 물가는 오르는데 생산성은 떨어지는 고복지ㆍ고비용ㆍ저효율의 경제구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보수당 대표 마거릿 대처는 1979년 총리로 입각하자마자 '영국병'을 일소해 국가 재정과 무역수지를 건전화하겠다면서 복지비용 등 공공 지출 삭감, 부자 감세, 노동활동 규제 등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펼쳤다. 노동자들은 1984년 광부파업 등 대규모 파업을 조직해 맞섰지만 참담히 패배했다. 재임 11년 동안 대처는 반노동법 여덟 개를 통과시키면서 영국 노조운동을 무력화했다.

   동시에 가난한 하급 노동자들은 '차브 Chav'라는 경멸적인 말로 불리기 시작했다. 대처는 "사회는 없다. 개인만 있을 뿐"이라면서 가난과 범죄의 책임을 개인에게 묻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보수당은 하층민 범죄에 의도적으로 이름을 붙이고, 조사 과정에서 검경이 선별적으로 정보를 흘리고, 보수신문이 자극적인 제목과 함께 사건을 경쟁적으로 보도하는 방식으로 사회적 충격과 공포를 조장하는 전략을 폈다. 그 결과 가난한 하층민은 범죄자라는 인식이 형성되었다. 공공주택에 살면서 아이를 낳아 받는 돈으로 생계를 꾸리는 미혼모, 여자에게 빌붙어 마약과 폭행, 도박을 일삼는 남자 등 전형적인 이미지도 만들어졌다. 버버리 노바체크 패턴의 야구모자, 아디다스 운동복, 싸구려 액세서리와 '짝퉁' 프라다 운동화 등은 차브의 드레스코드가 되었다. 2015년 개봉한 영화 <킹스맨>에서 에그시(와 주변)에 대한 묘사는 '차브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보수당의 문화전쟁은 하층계급 노동자들을 태생적인 사회악, 구제불능으로 '낙인' 찍어 사회 밖으로 추방했다. 1997년 총선에 압승한 토니 블레어의 노동당이 중산층을 정치적 짝패로 삼고, '완전고용', '재분배' 등 과거의 가치들을 축소ㆍ폐기하며 '제3의 길'을 선택하는 데에는 베를린 장벽과 구소련의 붕괴 등 달라진 정치 환경 외에 이러한 사회문화적 배경이 깔려 있다.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인 노동당의 집권 기간 동안 양극화는 가중되고 하층민의 삶은 고달파졌으며 전통적 지지자인 노동게급은 대거 이탈했다. 2010년 노동당은 또다시 실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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