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진중권 [미학 오디세이3]
p.38
과거의 화가들은 달리는 마차의 바퀴살을 또렷이 그려넣었다. 그래서 달리는 마차도 그 자리에 멈춰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달리는 마차 바퀴살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돌아가는 자전거 바퀴살이 어디 눈에 보이던가? 인상주의 화가라면 마차의 바퀴살을 일일이 그려넣지 않고, 그 부분을 슬쩍 흐릴 게다. 그럼 마차는 실제로 달리는 양 속도감을 갖게 된다. 인상주의는 이런 도시적 속도의 구현이다.
과거의 화가들은 사물을 '있는 대로' 그렸다. 반면 인상주의 화가들은 '보이는 대로' 그렸다. 과거의 화가들이 '객관'을 지향했다면, 인상주의 화가들은 '주관'을 지향했다. 과거의 화가들이 '대상'을 그렸다면, 인상주의 화가들은 현대인의 '시각'을 그리려 했다. 모네는 수련을 그린 게 아니라, 도시인의 눈에 비친 인상을 그렸다. 모네가 그린 것은 수련이 아니다. 모네는 결코 수련을 그리지 않았다. 모던의 지각을 그렸다.
p.50
형상의 금욕주의
회화에서 대상성이 사라지면서 전통적인 '진리 미학'은 힘을 잃게 된다. 고전 회화와 달리 현대 회화에는 도대체 '내용'이라는 게 없기 때문이다. 대상성이 사라진 추상 회화 앞에서 사람들이 의존할 유일한 이론은 칸트의 '형식 미학'이었다. 이제 예술의 본질을 내용의 올바름이 아니라 형식의 아름다움에서 찾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추상이 '절대주의'의 단계에 도달하면, 그때는 형식 미학도 더 이상 우리를 돕지 못한다. 형과 색의 자유로운 유희도 저 검은 사각형 안에서는 갑자기 멈춰버리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즐거움을 준다. 추상이든 구상이든 미적 쾌감을 주는 한, 여전히 미적 쾌락주의 아래 놓여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저 검은 도형을 보라. 거기 어느 구석에 아름다움이 있단 말인가. 형을 보는 쾌감, 색이 주는 쾌감은 외려 금지된 것처럼 보인다. <검은 사각형>은 미적 쾌감을 주지 않는다. 거기서 우리는 외려 고통을 느낀다. 우리가 거기서 보는 것은 미적 금욕주의다. 감각적 쾌락(pleasure)을 포기한 고통스런 금욕의 대가는? 그 모든 감각적 쾌락을 합한 것보다 더 큰 정신적 열락 delight이다. <검은 사각형>은 미가 아니라 숭고를 지향한다.
《구약성서》<출애굽기>에서 신은 인간들에게 십계명을 내려 명하기를, 이 세상의 어느 것이든 눈에 보이는 것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했다. 헬라의 신들은 아름다운 형태의 유한성 속에 갇혀 기꺼이 조각이 되었으나, 히브리의 신은 자신의 무한성을 유한한 상태에 가두어놓기를 거부했다. 절대주의는 이 '형상 금지(Bildverbot)'의 세속적 형태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했다. 말레비치의 사각형은 고귀한 침묵으로 눈에 보이는 모든 대상을 집어삼키며, 그 검은색으로 세계의 죽음을 애도한다.
p.59
매체와 숭고
사라진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세계와 그림이다. 모네는 세계의 동일성 identity을 물그림자 같은 환영들(differences) 속으로 흩어져 사라지게 했다. 말레비치는 세계의 그림을, 말하자면 캔버스 위에서 대상들의 재현을 사라지게 했다. 세계 자체는 물그림자들 같은 환영들 속으로 해체되고, 세계의 재현은 검은 사각형 속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졌다. 자연도 사라지고 모방도 사라진다. 세계도 사라지고 거울도 사라진다. 현실도 사라지고 재현도 사라진다. 이로써 자연의 모방, 세계의 거울, 현실의 재현이라는 고전 회화의 원리는 무너진다.
남은 것은 무엇인가? 세계의 시뮬라크르들, 물그림자처럼 흐늘거리는 세계의 영상들, 견고한 세계가 아닌 세계의 유령 같은 환영들이다. 그뿐인가? 아니, 남은 게 하나 더 있다. 모든 형상이 사라진 흑과 백의 텅 빈 절대주의적 캔버스. 세상의 모든 대상을 집어삼켰다가 다시 뱉어내는 우주의 특이점. 존재자가 튀어나왔다가 다시 그리고 돌아가는 존재의 근원. 재미있게도 말레비치의 작품 <검은 사각형>은 블랙홀과 화이트홀이 맞붙은 모양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이것이 현대인의 세계 감정이다. 19세기에 카메라가 발명됨으로써 사진이 세계를 재현할 의무를 떠맡게 된다. 사람들은 이제 사물의 영원한 상을 담은 회화가 아니라, 순간적 인상을 낚아챈 사진을 통해 세계를 들여다본다. 재현의 과제를 사진에 넘겨준 회화는 이제 눈에 보이는 '존재자'를 재현(representation)할 의무에서 벗어나, 점저 더 눈에 보이는 형상을 지우고 보이지 않는 근원적 '존재'를 현시(presentation)하는 쪽으로 나아간다. 클레의 말대로 "현대 회화는 가시적인 것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한다".
모네는 단 하나의 성당을 묘사하기 위해 서로 비슷한 계열의 그림들을 그렸다. 오늘날 예술가들을 사진 , 영화, 인터넷 등의 '매체 미학'으로 그 과제를 해결한다. 물감으로 그려진 연작의 자리에 다양한 매체를 통해 복제되는 기술적 영상들이 나타난다. 그럼 말레비치의 절대주의적 기획은? 그것은 오늘날 삭면 추상(color field abstract)이나 모노크롬(monochrome)의 '숭고 미학'으로 계승되고 있다. 현대의 캔버스는 화면을 비우고 단색의 바탕을 지향한다. 어느 미디어 철학자의 말처럼 20세기 예술은 "형상금지와 영상의 홍수라는 양면으로부터 협공" 당하고 있다.
p.61
세계의 웃음
고양이 없는 웃음처럼 세계는 사라지고 세계의 웃음만 남았다. 정말 우습지 않은가?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을까? 세계상이 변했기 때문이다. 뉴턴의 우주는 견고한 것이었다. 아인슈타인의 우주는 다르다. 그 안에서 시간은 속도에 따라 줄어들거나 늘어지고, 공간은 중력에 따라 이리저리 휘어진다. 데카르트의 사물은 연장을 가진, 말하자면 길이와 부피를 가진 것이었다. 아인슈타인의 사물은 다르다. 그 유명한 공식에 따라 길이도 없고 부피도 없는 에너지로 증발해버린다. 질량은 얼마든지 에너지로 전화될 수 있다. 현대 물리학에서 전통적인 세계는 사라져버린다.
교통과 통신의 발전 때문일 수도 있다. 초음속기와 고속전철은 시공의 관념을 바꿔놓는다. 파리에서 아침을 먹고 뉴욕에서 점심을 먹을 때, 서울로 출근하고 부산으로 퇴근할 때, '시간'과 '공간'은 해체된다. 게다가 미디어의 발달로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진 일이 실시간으로 내 방으로 전송되고, 클릭 한 번으로 나는 대양 건너편의 나라로 날아갈 수 있다. 이로써 시공의 관념은 희미해진다. 칸트는 시간과 공간을 세계를 구성하는 원리로 보았던가? 그럼 시공이 해체되면서 당연히 세계도 사라질 수 밖에.
아니면 지각의 세계가 바뀌었기 때문일까? 더 이상 우리는 세계를 맨눈으로 보지 않는다. 세계에 대한 우리의 체험은 대부분 신문, 방송, 인터넷 등을 통해 얻은 것이다. 세계는 이제 육안으로 본 게 아니라 기술복제된 영상들로 구성된다. 미국에 가보지 않은 나도 미국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것은 사진, 영화, 컴퓨터 영상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면 내게 미국은 현실인가? 아니면 환영인가? 어느 쪽으로도 대답하기 힘들다. 이렇게 세계는 고양이 없는 웃음처럼 허공에서 녹아 없어지고, 모네의 성당처럼 물 위에 뜬 그림자가 되어 흐늘거린다.
p.79
말은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다. 실은 세상 모든 게 말이다. 모든 피조물은 그 안에 언어의 본질을 갖고 있어, 아득한 옛날에는 소리 없는 자연도 그것에 힘입어 인간에게 말을 건넬 수 있었다. 그리고 타락하기 전의 인간은 그 소리 없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실은 우리 모두 한때는 그런 감성을 갖고 있었다. 가령 아이들이 노는 것을 보라. 꽃에게 말을 걸고, 개미와 얘기하고, 책상을 꾸짖지 않는가.
'철'이 들면서 우리는 이 능력을 잃게 된다. 합리적 사고를 하게 되면서 인류는 소리 없는 말을 들을 수 없게 된다. 이제 자연은 말 못하는 죽은 대상으로 여겨진다. 인간은 '주체', 자연은 '객체'가 된다. 인간은 1인칭, 사물은 3인칭이 된다. 이렇게 양자는 지배-피지배의 관계에 놓인다. 이게 바로 '근대'라는 이름의 문명이다. 아득한 옛날엔 달랐다. 그때 자연은 객체가 아니라 내게 말을 건네는 또 하나의 주체였다. 그때 인간과 자연은 1인칭, 2인칭을 사용하며 '나와 너'의 평등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p.81
바벨의 언어
바벨탑 이전의 언어는 우리 것과 달라, 그 낱말만 들으면 사물의 본질이 저절로 떠올랐다. 애초에 이름을 아무렇게나 붙이지 않고 음성에 사물의 본질을 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벨탑을 쌓은 죄뢰 인간은 아담의 언어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때부터 언어는 더 이상 이름하지 못하고, 자의적인 기호가 되어버린다. '자의적'이라는 말은 '제멋대로'라는 뜻이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바벨의 언어는 제멋대로 붙인 딱지이기에, 그 음성을 들어도 그 안에 사물의 본질이 떠오르지 않는다.
제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 아무렇게나 짓는가? 애써 그 이름에 '아이가 커서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으려 애쓰지 않는가. 옛날에 인간들은 사물에 이름을 붙일 때 마치 제 자식에게 이름을 주듯이 그렇게 붙였다. 하지만 바벨의 타락 후에 모든 이름은 한갓 자의적 기호가 된다. 심지어 인간의 이름마저도. 기억하는가? 학창 시절 우리는 가끔 이름이 아니라 번호 불렸다. "37번, 나와!" 아직도 이 사회는 내 정체성을 주민등록번호로 인식한다.
아담의 언어에서는 음성과 사물 사이에 보이지 않는 유사성이 있어,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사물의 참모습을 알 수 있었다. 그때의 진리는 직관적이었다. 하지만 바벨의 언어는 다르다. 여기서 이름과 사물의 관계는 '자의적'이다. 그러니 이름을 아무리 들어도 사물의 본질이 보일 리 없다. 이 언어는 '주어+술어'의 구조로 이루어진다. 주어만으로는 사물의 본질이 드러나지 않기에, 그것을 여러 가지 술어로 보충할 수밖에 없다. 이제는 진리도 주어+서술어의 형태로만 주어진다. 이를 철학에서는 '명제'라 부른다.
p.86
닮기와 되기
합리적 사유로는 우습게 들릴 게다. 갯벌에 나가 아무리 귀를 기울여 보라. 어디 조개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들리는가? 아니, 조개들이 어떻게 말을 한단 말인가. 합리적 사유에서는 이렇게 자연이 말 못하는 '객체(대상)'로 여겨진다. 합리성이 지배하는 시대에 철학은 자연을 대상으로서 '표상'하고, 예술은 자연을 대상으로서 '재현'한다. 그리하여 학문은 '자연의 거울',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 된다. 이게 근대 철학이며 근대 예술문화다.
스님은 갯벌 생물들의 말을 들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간단하다. '나 홀로 주체'라는 오만에서 벗어나 스스로 갯지렁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자연을 '미메시스' 했기 때문이다. 미메시스는 인식론적 모방(imitatiom)이 아니다. 그것은 주위 환경에 맞춰 제 몸의 색깔을 바꾸는 카멜레온과 같은 존재론적 '닮기'를 말한다. 가령 어린이들을 보라. 장사꾼과 선생님만이 아니라 풍차와 기차도 '연기'하지 않는가. 심지어 무생물이 될 수도 있으니, 이 얼마나 뛰어난 미메시스의 능력인가?
우리는 자연이란 '자원의 보고'라고 배웠다. 한마디로 인간이 맘대로 갖다 쓸 수 있는 재료들의 창고라는 얘기다. 우리는 그런 문명의 폐해를 시커멓게 죽어가는 자연 속에서 보고 있다. 반면 옛사람들은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돌멩이 하나, 벌레 한 마리도 대화의 상대로 여겼다. 생명이 없는 사물에까지도 영혼을 부여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가? 거꾸로 영혼이 있는 생명까지도 사물화(事物化)하고 사물화(死物化)하여, 결국 사물화(私物化)하지 않는가. 이게 타락한 바벨의 언어로 만든 자본주의 문명이다.
p.110
존재사건
하지만 정말로 한 송이 꽃을 위해 세상의 시간이 멈추는 경우가 있다. 어느 시인이 독재정권하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그만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 갇혔다. 그때 그는 감옥 창문 쇠창살 아래에 핀 자그만한 들꽃을 보고, 그 생명의 힘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충격과 전율을 느꼈다고 한다. 적어도 그 순간, 그 한 송이 꽃을 위해 세상의 모든 시간이 정지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걸 '미적 체험'이라고 불러야 할까? 고작 꽃의 아름다움에 반하는 체험이라 해야 할까? 그렇지는 않을 게다. 이것은 뭔가 다른 체험, 말하자면 '숭고의 체험'에 가깝다.
'존재'와 '존재자'는 다르다. 꽃의 모양과 색깔을 즐길 때, 우리는 그 꽃을 '존재자'로 대하는 것이다. 반면 시인의 체험은 분명 꽃의 아름다움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를 전율에 빠뜨린 것은 꽃이 거기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게 바로 '존재'의 체험이다. 과거의 예술은 존재자를 모방하려 했다. 하지만 하이데거에 따르면 예술의 본질은 모방이나 재현에 있는 게 아니다. 예술의 진리는 무엇보다도 사건을 일으키는 데 있다. 즉 모든 존재자 아래에 묻혀 잊힌 존재의 체험을 일으켜, 우리를 존재망각의 상태에서 깨어나게 하는 데 있다.
p.115
재현에서 현시로
다시 앞의 시인의 체험을 생각해보자. 하이데거도 비슷한 체험을 한 모양이다. 그는 고흐의 <구두> 앞에 섰더니, 갑자기 구두라는 도구의 '존재'가 자신에게 열려 보이더란다. 아마도 이 그림을 우리와는 다르게 본 모양이다. 이 작품에서 우리는 그저 다 떨어진 구두를 볼 뿐이다. 이것은 한 켤레의 구두다. 구두가 뭔지 모르는 사람도 있던가? 구두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다. 우리는 그것을 아무 생각 없이 신고 다니다가 집에 들어오면 툴툴 벗어던진다. 구두, 그것은 발을 보호하는 도구다. 고흐의 작품은 그 도구를 그린 것이다. 그것은 구두의 '재현'이다. 아닌가?
하지만 저 작품의 진리가 기껏 '이것은 구두다'라는 데에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게다. 그 작품은 적어도 하이데거에게는 어떤 장(場)을 열어주었다. 이때 작품과 철학자 사이의 공간(space)은 어떤 특별한 장소(place)로 변한다. 이렇게 "작품 앞에서 우리는 통상 있던 곳이 아닌 어떤 다른 데에 있게 된다". 그 순간 구두 역시 통상 보아오던 것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다가온다. 한마디로 저 작품 앞에서 우리는 구두를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로서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감추어지고 잊혔던 구두의 진정한 의미. 그것이 작품 앞에서 불현듯 열리는 체험. 하이데거는 이를 구두라는 도구의 '존재'가 드러나는 사건이라 불렀다. 고흐의 작품 앞에서 구두를 바라보는 우리의 일상적 시각은 깨지고, 우리는 그것을 완전히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된다. 이때 우리에게 은폐되고 망각된 존재자의 '존재'가 눈에 들어온다. 이런 존재체험, 이런 존재사건을 일으키는 데 예술 작품의 본질이다. 작품의 진리는 '존재자'의 재현(representation)이 아니라 '존재'의 현시(presentation)에 있다. (중략)
'도구'는 그저 눈앞에 달랑 놓인 물건에 불과한 게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를 품고 있다가, 볼 줄 아는 자의 눈앞에 그 세계를 펼쳐 보여준다. 우리 집 주방에 있는 스테인리스 칼도 제 몸 안에 우리의 세계를 품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평소에 칼을 들고 파를 썰 때 언제 그런 생각을 했던가? 이렇게 일상적으로 우리에게 감추어진 것, 평소에 우리에게 망각된 것을, 예술 작품은 불현듯 우리 눈앞에 열어 보여준다. 이렇게 작품의 진리는 개시(開示)의 진리, 즉 은폐(lethe)를 들춰내고, 망각(lethe)을 일깨우는 비 은폐(aletheia)로서의 진리다.
작품은 제 앞의 공간을 어떤 특별한 장소로 바꾸어놓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문득 어떤 다른 곳에 있게 된다. 그때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이 갑자기 낯설게 다가온다. 사물을 보는 일상적 시각이 무효가 되면, 이때 감추어졌던 사물의 진정한 의미가 불쑥 모습을 드러낸다. 구두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고흐의 작품 속에서, 구두는 그저 신고 다니다가 버리는 물건에 불과한 게 아니다. 그것은 농촌 아낙네가 밟고 다니던 농촌의 대지와, 그 위에 세워진 농민들의 삶의 세계를 품고 있다가 불현듯 우리 눈앞에 열어 보여준다.
대지에 이러한 도구가 귀속해 있고, 농촌 아낙네의 세계 안에 이 도구가 보호되어 있다.
p.125
실제로 다빈치의 원작은 어느 수도원의 식당에 걸려 있었던 것으로 안다. 거기에 걸려서 수도사들의 식사를 예수의 마지막 만찬으로 바꾸어놓았던 것이다. 우리는 <최후의 만찬>을 르네상스 양식의 예로 보아, 예수의 머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삼각형에서 원근법을 찾아내지만, 원래 그 작품이 열어주는 진리는 그런 게 아니었다. 그 작품의 진리는 식당이라는 세속적인 공간을 예수의 마지막 만찬이 이루어지는 성스런 장소로 변용시키는 데에 있다. 그렇다면 외려 어머니 쪽이 작품의 진리에 가까이 있는 셈이다. 어머니는 그 그림의 진리를 보존했다. 즉 작품의 진리를 진리이게 했던 것이다.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예술을 대하는 태도를 변경하기 위해 <예술작품의 근원>을 썼다고 했다. 실제로 근대에 들어서면서 예술 작품은 더 이상 교회의 필요가 아니라 세속의 필요에 따라 제작되기 시작한다. 성당에 걸려 있던 그림들마저 점차 그 공간적 맥락에서 떨어져 나와 박물관에 수집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작품은 한갓 미적 대상으로 전락한다. 이게 근대의 예술문화다. 하지만 이렇게 작품을 미적 대상으로 격하할 때 작품의 진리는 사리지고, 그것이 열어주는 세계는 붕괴한다. 그래서 작품을 대하는 현존재의 태도를 바꿔야 하는 것이다. 변화된 태도를 가지고 작품을 볼 때, 작품은 존재자의 모방이 아니다. 그곳은 존재의 진리가 일어나는 신전이다.
p.141
관리되는 사회
기술합리성은 자연만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도 지배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엄청난 효율을 자랑한다. 하지만 거기서 아도르노는 어떤 전체주의적 위험을 본다. 가령 우리 앞에 연필과 공책이 있다고 하자. 둘은 사용가치가 다르다. 어느 게 더 귀중한지 비교할 수 없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어디까지나 교환가치를 위한 생산이다. 그래서 질적으로 다른 사물들을 약분할 수 있게 만든다. 가령 사물의 가치를 가격으로 환산하면, 서로 비교할 수 있는 수가 된다. 자본주의는 이렇게 사물의 고유한 질을 지우고, 그것들의 가치를 화폐의 양으로 환원한다.
자본주의는 인간마저도 획일화한다. 사회를 보라. 어디를 가나 인간은 번호가 매겨진 개인 정보의 더미로 처리되어 합리적으로 관리되지 않는가. 태어나자마자 국가로부터 열세 자리의 숫자를 나눠받지 않는가. 태어나자마자 국가로부터 열세 자리의 숫자를 나눠받지 않는가. 권력은 자신의 관리 대상이 감시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 어둠에 묻히는 것을 싫어한다. 권력은 모든 인간의 위치가 명석판명이라는 합리주의적 이상 아래 일목요연하게 파악되어야 비로소 안심한다. 권력을 안심시키기 위해 인간은 '번호'가 되어 합리적으로 관리되어야 한다.
하나의 '코드'로 수많은 복제를 찍어내는 게 자본주의 생산의 특징이다. 그래서 자본은 인간마저도 제 버릇대로 '코드'로 찍어내려 한다. 자본은 인간 개개인의 고유성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저 자신을 확대 재생산해줄 클론을 원할 뿐이다. 예컨대 우리의 대학을 보라. 자본의 요구에 맞추어 시장원리가 대학에 도입되자, 학과들의 다양성이 급속히 사라져버렸다. 이런 획일적인 틀 속에서 관리된 인간들이 얼마나 다양할 수 있겠는가? 바로 이것이 합리적으로 관리되는 사회의 비합리성이다.
p.143
타자의 미학
제 언어의 본질이 부정당하자 자연은 애도의 침묵을 지켰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관리되는 사회의 비인간성에 항의하기 위해 예술은 이 침묵을 미메시스한다. 현대 예술은 사회와의 소통을 거부한다. 왜? 소통은 '코드'를 전제하고, '코드'는 획일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획일화하는 동일성의 폭력에 저항하기 위해 예술은 사회 안에 통용되는 '코드'를 거부한다. 그 결과 오늘날의 예술은 평균적인 대중에게는 이해될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 이는 현대 예술이 관리되는 사회의 비인간성에 항의하는 방식이다.
고전 예술은 대중과 '코드'를 공유했다. 현대 예술은 일부러 그 공통의 '크도'를 깨고, 다양한 형식 실험을 통해 오직 자기만의 '코드'를 만들어낸다. 현대 예술이 어려운 것은 이 때문이다. 왜 현대 예술은 사회에 널리 공유되는 코드를 거부하고 굳이 이해되지 않으려 하는가? 그것은 모든 것을 획일화하는 동일성의 폭력으로부터 자기의 개별성과 고유성을 지키기 위해서다. 오직 이렇게 할 때만이 예술이 비인간적인 사회 속에서 유일하게 인간적인 존재로 남을 수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 문화산업은 일탈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것은 제아무리 난해한 작품도 대중이 이해하는 코드로 번역해 상품으로 판매한다. 한때 충격을 주었던 피카소와 칸딘스키의 작품도 오늘날 무리 없이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예술은 끝없이 자신을 혁신할 수밖에 없다. 자기를 상투적 코드 안에 가두려는 문화산업의 추적을 피해 끝없이 탈주하며, 끝까지 이해되지 않는 이성의 타자로 남으려 한다. 자연을 전혀 닮지 않으면서도 현대 예술은 이렇게 자연을 미메시스한다.
p.146
가상의 파괴
예술의 탈주는 혁신 innovation을 통해 이루어진다. 동일성의 폭력에서 벗어나려면 기존의 코드를 깨고, 늘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내야 한다. 아방가르드는 이렇게 낡은 '아름다움' 대신에 형식의 '새로움'을 추구한다. 그래서 이제 예술은 내용 없는 형식이 된다. 하지만 내용이 없다고 진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예술의 진리는 형식을 '통해' 전달되는 내용이 아니라, 형식 '안에' 침전되는 소리 없는 목소리로 존재한다. 그 목소리를 들으려면 그것이 침전된 형식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현대 예술은 추하다. 왜 그래야 할까? 생각해보라. 과거의 예술가들은 자연을 모방하면서 그것을 이상적 아름다움으로 끌어올렸다. 그렇게 탄생한 '아름다운 가상' 속에서 예술과 사회, 이상과 현실은 조화를 이루었다. 하지만 아직도 이런 화해가 가능할까? 그렇지 않다. 오늘날의 예술이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 될 것이다. 왜? 사회가 추할 대로 추해졌기 때문이다. 바로 이를 정직하게 증언하려면 현대 예술을 추해져야 한다.
현대 예술은 추상적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인간들의 관계 자체가 추상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사물의 질적 측면들을 사상하고, 거기서 교환가치의 양을 추상해낸다. 인간들 사이의 협력도 화폐라는 추상적 관계를 매개로 하여 이루어진다.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스>에서 볼 수 있듯이 자본주의적 노동은 그 자체가 추상적이다. 농부의 노동은 유기적 전체이지만, 공장 노동은 무기적 파편이다 피카소와 브라크의 작품은 그 파편적 형식으로써 불구화된 노동을 기린다.
현대 예술은 고통스럽다. 고전 음악을 드는 것은 미적 향유라 할 수 있지만, 현대 음악을 듣는 것은 거의 고문에 가깝다. 예술은 이렇게 합리적으로 관리되는 사회에서 사물과 인간이 당하는 고난을 증언한다. 그리고 그 고통의 체험에 우리를 동참시킨다. 현대 예술은 사회를 비난하는 메시지를 발하지 않으나, 갈기갈기 찢겨진 그 형식 속으로 우리 사회의 어떤 부정적 상태가 침전되어 들어온다. 이렇게 현대 예술은 사회를 재현하지 않고도 사회의 고통을 미메시스한다.
가상의 구제
'보편성의 폭력 앞에서 개별자로 남으라.' 이것이 오늘날 보존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진리다. 예술은 바로 그 참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표현할 수는 없다. 반면 철학은 그것을 말로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스스로 참을 가질 수는 없다. 이 시대의 참은 개별성에 있는데, 철학은 보편적 개념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예술과 철학은 서로 상보적 관계를 이루게 된다. 오늘날 전시회 카탈로그에 철학적 담론이 난무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현대 예술은 기호가 아니다. 그것은 내용 없는 형식, 새로운 사물일 뿐이다. 하지만 베냐민의 얘기대로 말 없는 사물에도 언어의 본질이 깃들어 있다. 우리는 현대 예술의 추함에서 우리 사회의 추함을 보고, 예술의 추상성에서 자본주의적 관계의 추상성을 읽고, 예술이 주는 고통 속에서 불구화된 개별자들이 지르는 비명을 듣는다. 철학은 이처럼 말 못하는 예술의 참을 인간의 언어로 옮겨놓는다. 이렇게 말없는 사물의 참을 구원하는 작업을 우리는 '비평'이라 부른다.
하지만 개별자의 참을 보편적 개념에 담을 수 있을까? 물론 불가능하다. 개별자의 참은 결코 온전히 개념에 담길 수 없다. 현대 예술이 수수께끼처럼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철학이 작품에 대해 하나의 해석을 내놓으면, 작품은 거기서 달아나버린다. 그 뒤를 쫓아가 또 하나의 해석을 내놓으면, 또다시 달아난다. 무지개를 쫓는 아이들이 무지개에 닿지 못하고 뒤로 수많은 발자국만 남기듯이, 작품의 참을 좇는 철학도 결코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고 뒤로 수많은 해석만 남기게 된다
그럼 작품의 진리는 어디에 있을까? 뒤에 남은 해석들, 그 발자국들의 총체 속에 흩어져 있다. 그리고 발자국은 끝없이 이어진다. 해석은 작품의 언어적 본질을 개념이라는 바벨의 언어로 옮기는 번역이다. 하지만 번역이 의미의 손실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무한히 펼쳐지는 번역들을 통해 외려 우리는 근원적 언어로 상승한다. 바로 이것이 보편적 개념으로 된 인간의 언어를 가지고 개별자의 참에 접근하는 유일한 방법일 게다.
예술의 존재 미학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그림도 그림이다. 가상 없는 예술도 어떤 의미에서는 여전히 가상이다. 앞에서 우리는 그 가상을 '참'으로써 구원했다. 그럼 이제 우리가 구원받을 차례가 아닌가. 우리는 구원의 유토피아를 그려서 실현하려던 운동이 이 땅에 결국 디스토피아만 남겼음을 안다. 자신의 추한 모습을 아름다운 유토피아로 치장했던 사회들도 얼마 전에 모두 사라졌다. 그럼 구원은 없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 그러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바로 예술의 정신 속에 있다.
위험에 처한 자연을 구원하는 것은 미메시스다. 우리를 계몽해 자연의 폭압에서 해방시킨 합리성이 오늘날 자연을 총체적으로 위협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 얼마나 비합리적인가. 그래서 이제 합리성도 계몽되어야 한다. 합리성을 계몽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미메시스뿐이다. 가령 새만금의 어느 스님을 생각해보라. 인간이 갯벌의 뭇 생명을 대신해 말을 하다니, 이 얼마나 우스운 얘기인가. 하지만 이 비합리 속에는 그 어떤 합리성보다 더 큰 지혜가 들어 있다.
관리되는 사회에서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탈주'의 실천이다. 개별자의 고유성을 지우고 모든 것을 획일화하는 사회. 이런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존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진리는 거기에 동화되기를 거부하고 단독자로 남는 것이다. 자신을 쫓아오는 모든 동일성의 폭력에서 끝없이 벗어나는 것. 바로 그것만이 이 사회에서 인간이 참되게 존재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이 존재 미학도 소통을 거부하는 현대 예술에서 배웠다.
불꽃놀이
그렇다면 사회를 구원할 길은 없을까? 그 길을 어쩌면 현대 예술의 '구성 composition'에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고전 예술은 전체주의적이다. 그 속에서 요소들은 전체 효과를 위해 존재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토리 진행에 필요 없는 삽화들은 생략하라고 가르쳤다. 현대예술의 '구성'은 다르다. 그것은 개별 요소들의 존재를 배려하며, 그것들을 폭력적이지 않은 방식을 통해 전체로 종합한다. 이렇게 전체를 위해 개별자를 희생하지 않고, 개별자의 고유성을 배려하는 사회. 그런 질서는 불가능한 것일까?
오늘날 누군가가 또다시 완성된 유토피아의 '타블로'를 그린다면, 그것은 극악한 거짓말이 될 것이다. 현대 예술은 이상적인 사회의 상을 그리지 않는다. 그러나 유토피아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게 또한 인간이다. 따라서 그를 위해 여전히 해방된 사회의 모습을 미리 보여줘야 한다. 오늘날 유토피아는 '타블로'가 아니라 '현현 appartition'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예술 작품 속에서 마치 밤하늘의 불꽃놀이처럼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아련히 스러진다. 보지 못했는가? 방금 우리 눈 앞을 불꽃처럼 스치고 지나갔는데…….
p.158
고전 예술과 현대 예술
디오게 : 그렇지, 자네가 방금 '악몽'이라 부른 사회들이 실은 자네의 미학을 충실히 실현했다는 걸 아나?
아리스 : 제 미학이 전체주의적이라는 얘깁니까?
디오게 : 그럼. 자네가 낳은 고전주의 미학은 작품의 모든 요소에 위계 질서를 만들지 않나. 가령 색은 형에 종속되고, 형은 제재에 종속되고, 제재는 주제에 종속되고…….
아리스 : 그런데요?
디오게 : 반면 현대 예술을 보게. 내용의 독재가 사라지고, 형과 색이 자율성을 얻지 않았나?
아리스 : 무정부주의 카오스 상태군요.
디오게 : 자네 눈에 질서는 곧 위계질서로 보이나 보지?
아리스 : 그럼, 다른 질서도 있나……?
디오게 : 게다가 <시학>에서 뭐라고 말했나? 전체 줄거리의 진행에 관계없는 삽화들은 빼라고 하지 않았나.
아리스 : 그래야 짜임새가 생기지요.
디오게 : 하지만 그게 사회의 구성원리라면, 얼마나 끔찍하겠는가. 전체에 도움이 되지 않은 개인은 배제되어야 한다, '반동분자' 혹은 '반국가분자'로…….
아리스 : 그럼 현대 예술은 뭐가 다른가요?
디오게 : 다르지. 현대 예술에서 일단 형과 색은 자율성을 얻지 않았나? 게다가 현대 예술의 '구성 compostition'은 요소들의 개별성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화면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네…….
아리스 : 보통 힘든 게 아니겠네요.
디오게 : 유토피아가 어디 쉽게 실현되겠나?
아리스 : 쩝…….
디오게 : 자, 이제 자네의 첫 질문에 대답하겠네. 이 새로운 사회의 영감이 어디서 나왔겠나? 현대 예술의 구성을 보다가 머릿속에 불꽃처럼 스쳐가지 않았다면…….
p.174
재현과 개시
데리다는 이제 샤피로에게 화살을 돌린다. 샤피로는 그림을 재현으로 본다. 그래서 그 모델이 된 주인을 밝히려는 것이다. 그에게 작품의 진리는 재현의 올바름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비판은 철저히 근대 미학의 틀에 갇혀 있다. 하지만 그 틀을 하이데거는 이미 넘어섰다. 이 철학자에게 예술의 진리는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누구의 구두를 재현했느냐'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 구두가 화가의 것이라면, 그는 위에서 인용한 구절의 도시적 버전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비판을 하는 샤피로가 실은 비판을 받은 하이데거보다 외려 한 시대 뒤떨어진 셈이다.
샤피로 역시 제 비판이 사소하다는 것을 안다. 그리하여 구두의 주인을 잘못 밝힌 것은 큰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결정적인 오류는 다른 데에 있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그 구두가 실은 고흐의 '다른 자아 alter ego'라는 점을 놓쳤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고흐는 장갑이나 파이프 같은 개인 소지품 personal object을 즐겨 그렸다. 이 정물들은 일종의 제유법으로서 화가 자신 personal subject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그 구두 역시 잘려나간 그의 왼쪽 귀처럼 화가 자신을 암시하는 일종의 초상화로 봐야 한다. 하이데거는 작품의 이 본질적 측면을 놓친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철저하게 근대 미학의 한계에 갇혀 있다. 작품의 진리를 예술가의 주체성의 표현에서 찾기 때문이다. 이게 '주체 subjet'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근대 형이상학의 한계다. 하이데거는 작품의 본질을 화가의 주체성에서 찾지 않는다. 작품이 열어주는 진리는 한갓 화가라는 한 주체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예술가 개인을 넘어서는 어떤 객관적 사태, 어떤 절대적 진리의 일어남이다. 작품을 통해 말하는 것은 화가가 아니다. 말을 하는 것은 작품 그 자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말하지 않았던가. "이것이 말을 했다."
p.179
다시 미로 속으로
예술의 진리를 '존재자의 재현'에서 찾은 샤피로와 달리 하이데거는 '존재의 개시'로서의 진리를 말한다는 점에서 탈근대적이다. 하지만 샤피로와 똑같이 작품의 최종적 진리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그는 여전히 근대의 한계에 머문다 데리다는 이마저 해체하려고 한다.
그가 반대하는 것은 하나의 작품에 최종적 해석이 있다는 믿음, 누군가 구 진리를 독점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중요한 것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풀어주고, 그것을 무한히 전개하는 것이다. 최종적 해석은 이 창조적 놀이를 중단하고, 그 결과 진리를 사라지게 할 것이다.
그럼 작품에 대한 데리다 자신의 해석은 어디에 있는가? 유감스럽지만 데리다는 에세이가 끝날 때까지 어떤 해석도 주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가능한 모든 해석을 암시한다.
가령 구두가 켤레가 아닐 가능성, 도플갱어일 가능성, 각자 다른 켤레에서 왔을 가능성 등등. 만약 작품에 '진리'란 게 있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의 해석 안에 남김없이 현전(現前)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서로 조금씩 차이를 내며 무한히 전개되는 수많은 해석 속에 존재하는 듯, 부재하는 듯 그렇게 살짝 모습을 비치며 덧없이 스쳐갈 뿐이다.
샤피로와 하이데거의 우주는 '근대적 미로'다. 이 미로는 선형적(線形的)이다. 미로 안에서 바깥 출구로 이어지는 하나의 선이 존재한다. 샤피로는 합리적 시행착오를 통해, 그리고 하이데거는 존재의 계시를 통해 출구를 발견한다. 그들의 해석은 문제 상황에서 해결에 이르는 선형적 구조를 갖고 있다. 반면 데리다의 우주는 '탈근대적 미로'다. 이 미로는 리좀이다. 그 안에는 하나의 길만 있는 게 아니라, 마치 나무 뿌리의 조직처럼 서로 복잡하게 얽힌 수많은 길이 공존한다. 하지만 그 길들 중 어느 것도 우리를 출구로 인도하지는 않는다. 왜? 그것은 안과 밖, 시작과 끝이 없는 무한한 미로이기 때문이다.
p.191
재현의 파괴
재현 회화는 두 가지 원칙 위에 서 있다. 첫 번째 원칙은 도상과 문자가 하나의 화폭에 함께 나타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가령 중세의 <수태고지>에서는 마리아에게 나타난 천사의 입에서 띠가 흘러나오고, 이 녹음 테이프 위에 예술의 탄생을 알리는 천사의 말이 적힌다. 하지만 르네상스 이후 서양 회화는 가시적 공간의 재현을 목표로 삼게 된다. 그 결과 눈에 보이지 않는 말은 화폭에서 사라져버린다. 여기서 문자는 밖으로 나가 제목이 되거나, 굳이 그림 안에 등장하려면 묘비의 명문, 책 위의 글자, 아니면 악보 위의 음표와 같은 형태로 그려져야 한다.
이 원리를 파괴한 사람은 클레였다. 그는 밖으로 쫓겨낫던 문자를 다시 그림 안에 받아들인다. <언젠가 밤의 어스름 속에 나타나>를 보라. 언뜻 보기에는 색채 구성처럼 보이나 자세히 보면 그 안에 독일어로 된 시 텍스트가 적혀 있다. 이것은 회화가 눈에 보이는 것을 재현하기를 포기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의 그림에 종종 등장하는 화살표로 공간적 이미지를 문자 텍스트처럼 '선형적'으로 읽으라고 지시한다. 이 점에서 마그리트는 어딘지 클레와 통하는 데가 있다. 이 초현실주의자의 작품에도 도상과 문자가 한 공간에 사이좋게(?) 공존하기 때문이다.
재현 회화의 두 번째 원칙은 '유사의 원리'다. 그림은 되도록 실물을 닮아야 하고, 그 닮음으로써 그 대상의 기호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원리를 파괴한 것은 칸딘스키였다. 그의 이미지들은 아무것도 닮지 않았고, 그래서 현실의 대상들을 가리키지 않는다. 마그리트 역시 '유사의 원리'를 파괴한다. 하지만 그의 방식에는 독특한 점이 있다. 칸딘스키와 달리 유사를 파괴하기 위해 마그리트는 되도록 닮게 그린다. 실제로 그의 묘사를 보라. 거의 백과사전의 삽화를 방불케 할 정도로 실물을 닮지 않았는가.
p.235
공감각
'기관 없는 신체'는 부화하다가 만 알과 같은 것이다. 가령 부화를 시작한 지 보름 정도 지난 알을 깨뜨린다고 하자. 껍질 밖으로 나온 내용물은 아직 유체 상태일 것이다. 거기서 기관들은 미처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며 서로 겹치거나 서로 경계를 넘나든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화하다가 만 알과 같이 생긴 신체에서는 '하나의 색, 맛, 촉각, 냄새, 소리, 무게 사이에 존재론적인 소통'이 일어난다. 이를 우리는 흔히 '공감각'이라 부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감각들이 겹치는 비이성을 극도로 경계했다. 기관들의 횡단은 명석판명이라는 합리주의 이상과도 정면 배치된다. 정신의학에서도 공감각을 일종의 정신착란으로 간주해왔다. 하지만 우리는 예술에서 이 공감각의 능력이 어떤 효과를 가져오는지 알고 있다. 가령 알파벳에서 색깔을 느끼는 랭보, 회화에서 음악을 듣는 칸딘스키, 음악에서 색채를 느끼는 스크랴빈을 생각해보라. 20세기를 전후하여 러시아 예술은 아예 공감각의 실현을 목표로 삼기로 했다.
얼굴에는 오감의 기관이 모두 모여 있다. 그래서 베이컨은 얼굴을 지워버린다. 기관을 지운 얼굴은 그냥 머리가 된다. 곤충의 더듬이 같은 안테나가 된다. 시각이나 청각 없는 동물은 있어도 촉각 없는 동물은 없다. 다른 감각은 모두 촉각에서 분화되어나간 것ㅇ다. 그런 의미에서 촉각이야말로 기관 아닌 기관, 공감각의 기관이라 할 수 있다. 얼굴을 지워버린 머리는 고감도의 안테나가 되어 전파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주위의 기를 받아들인다. 이것이 '감각'이다. 이것은 분화된 기관을 통해 들어온 '지각'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베이컨의 회화는 지각이 아니라 감각을 표현한다. 가시적 대상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기를 가시화한다. 우리의 몸처럼 세계도 실은 두 겹으로 되어 있음을 아는가? 가령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보라. 그 사진은 뚜렷한 윤곽을 가진 형상들을 보여줄 것이다. 우리는 이를 '현실'이라 부른다. 하지만 이 가시적 현실이 세계의 전부일까? 그렇지 않다. 이번에는 열감지 카메라로 찍어보라. 그 사진은 뭉클뭉클 비정형적인 에너지 덩어리를 보여줄 것이다. 이것이 베이컨이 드러내려 했던 또 다른 현실이다.
p.297
팬텀
앗제의 사진 중에는 유령을 담은 게 있다. 노출 시간을 기게 하다 보니 움직이지 않는 건물은 뚜렷한 형태로 찍히고, 그사이를 걷는 인간은 희미한 흔적만 남게 된 것이다. 물론 의도했던 효과는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그가 의식적으로 그 효과를 노린 작품이 적어도 하나가 있다. 그의 자화상이다. 저기서 앗제는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스스로 거리의 유령이 된다. 이 작품은 복제영상의 어떤 존재론적 특성을 정확하게 담아내고 있다. 저 사진 속에 앗제는 존재하는가? 부재하는가?
안더스는 텔레비전으로 전송되는 복제영상을 '팬텀 fandom'이라 부른다. 그것은 가상도 아니고 실재도 아닌 유령과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특히 이는 실시간 중계를 할 때 뚜렷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9ㆍ11 테러 때 우리는 쌍둥이 빌딩이 불타는 것을 CNN을 통해 실시간으로 지켜보았다. 그 거대한 빌딩이 방 안에 들어와 있을 수 없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가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바로 그 시간에 쌍둥이 빌딩은 정말로 불타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동시에 '실재'다.
독일어 모상을 '나흐빌트 Nachbild'라 한다. 여기서 '나흐 nach'는 '뒤에' 혹은 '따라서' 라는 뜻이다. 모상은 이렇게 원상의 뒤에, 원상을 따라서 만들어지는 형상이다. 하지만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영상에는 원상과 모상을 가르는 이 시간차가 존재하지 않는다. 모상과 원상, 복제와 원본, 가상과 실재를 가르는 기준도 모호해진다. 그래서 그것은 가상도 실재도 아닌, 제3의 존재층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세계는 점점 더 가상도 실재도 아닌 이 팬텀이 되어간다.
텔레비전만이 아니라 기술복제된 모든 영상이 그러하다. 가령 시위가 벌어지면 우리의 보수신문은 무식한 시위대가 막대기로 착한 경찰을 때리는 사진을 올린다. 이것은 가상일까? 실재일까? 시위 중에 얻어맞는 건 대부분 시위대라는 점에서 그 사진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조작된 것이 아니다. 사진에 찍힌 그 장면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동시에 참이다. 복제영상은 이렇게 참, 거짓의 구별마저 흐려버린다.
매트릭스
베냐민은 영화의 몽타주 기법을 감추어진 진리를 드러내는 탁월한 방식으로 보았다. 하지만 안더스는 몽타주라는 편집기술에서 외려 탁월한 조작의 수단을 본다. 소위 편집의 예술이라는 게 있다. 동일한 영상의 요소라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그것들의 전체적 의미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안더스는 편집자를 세계의 건축가로 만드는 이 편집의 틀을 '매트릭스'라 부른다. '팬텀'이 세계를 이루는 재료라면, '매트릭스'는 그 재료로 세계를 짜는 활판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파업이 일어났다 하자. 우리의 신문은 이를 제시하는 선험적 틀을 갖고 있다. 1면 톱뉴스 '노조, 파업 돌입. 수출 자질 우려', 사설 '불법 파업, 단호히 대처해야', 칼럼 '가뭄으로 멍든 농심 파업으로 또 멍드나', 사회면 '기업 탐방, 무노조의 신화', 경제면 '노조 천국, 기업이 떠나고 있다', 긴급 인터뷰 '파업왕국, 투자 매력 상실', 해외면 '중국이 쫗아온다', 특파원 기고 '영국, 노조병 어떻게 치유했나', 석학에게 듣는다 '평등의 허상', 휴지통 '화염병의 역사', 만평 '귀족이 따로 있나'. 세계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칸트는 시간과 공간을 주관의 선험적 형식이라고 했다. 우리가 보는 세계는 실은 우리의 의식이 시공의 형식에 따라 구성한 것이라는 애기다. 편집의 몽타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신문을 짜는 원리는 곧 세계를 짜는 원리다. 과거의 조작은 사실을 날조하거나, 해석을 왜곡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오늘날의 조작은 그렇게 유치하지 않다. 더 중요한 조작은 편집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조작은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보여주지 않을지 선택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위계의 전복
존재한다고 사실이 아니다. 일어난다고 사건이 아니다 사실이 존재하려면 보도가 되어야 하고, 사건이 일어나려면 카메라에 복제되어야 한다. 미디어로 복제되지 않는 한 사실은 존재할 수 없고, 사건은 일어날 수 없다. 사실과 사건을 있게 하는 것은 미디어다. 그것이 비로소 사건을 사건으로, 사실을 사실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의 사실이 원본의 형태로보다 복제의 형태로 더 중요해질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때는 복제가 현실을 베끼는 게 아니라 거꾸로 현실이 복제를 베끼는 사태가 벌어진다.
실제로 카메라가 없었다면 아예 일어나지 않았을 사건이 얼마나 많은가. 언젠가 야당과 여당의 선거운동원이 거리에서 충돌한 적이 있다. 가벼운 몸싸움이었으나, 텔레비전 화면에 비친 양측은 모두 병원 침대에 누워 상대방의 폭력성을 몸으로 증언하고 있었다. 카메라가 없었다면, 아마 얼굴에 밴드 하나 붙이고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한마지로 카메라가 현실을 복제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현실이 카메라 앞에서 자신을 연출하는 것이다.
언젠가 모든 일간 신문의 1면에 같은 인물의 사진이 실린 적이 있었다. 대단한 사건이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 어느 국회의원이 대정부질의를 하다가 자기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시중의 일간신문들을 차례로 들었다 놓았을 뿐이다. 다음 날 모든 신문은 저마다 이 의원이 자기 신문을 들고 있는 사진을 올렸다. 이로써 그 의원은 자기가 원하던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카메라가 없었다면 과연 그가 신문들을 차례로 집어드는 세레모니를 했겠는가?
표상과 세계
이게 그저 과장에 불과할까? 오래전에 '도시산업선교회'라는 단체가 있었다.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는 단체였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노조를 지원하는 활동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당시 신문과 방송은 "도산이 들어오면 기업이 도산한다"고 떠들어댔다.
그러더니 급기야 이들을 폭력혁명을 부추기는 반국가단체로 바꾸어놓았다. 경찰에 저항하느라 주워 든 여공의 재봉가위는 '흉기'로 둔갑하고, 수련회의 촛불의식은 충성의 서약식이 되어버렸다. 진실은 공장 안에 갇혀버리고, 공장 밖의 세계는 미처 돌아갔다.
그렇다면 현실은 어느 것인가? 공장 안의 좁은 공간? 아니면 공장 밖의 저 거대한 공간? 허구는 어느 것인가? 공장 안의 소수가 믿는 것? 아니면 공장 밖의 모든 이가 믿는 것? 그 단체를 이끈 두 목사는 그 뒤 세상을 등졌다. 산속에서 홀로 농사를 지으며 사는 두 사람에게 물었다. 다른 이는 텔레비전은 가끔 보나, 드라마만 본다고 했다. '왜'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드라마는 미리 거짓이라고 밝히니까."
당시만 해도 사람들 대부분은 미디어가 떠드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였다. 이거, 누구의 작품일까? 나라 전체를 착란에 빠뜨린 그 매트릭스의 건축가는 누구였을까? 그리고 이게 단지 과거만의 일일까? 내가 지금 보는 이 세계는 또 얼마나 현실적인가? 혹시 이 역시 누군가의 매트릭스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그의 꿈을 현실로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양수로 가득 찬 거대한 수조 속에서 웅크린 채 꿈을 꾸는 우리에게 매트릭스의 건축가가 말한다.
나의 표상이 너희의 세계다.
누가 한 말인지 아는가? 그의 꿈은 현실이 되었고, 그 현실은 모든 이의 악몽이었다. 소각장을 만든 저 유명한 '박애주의자'(?) 아돌프 히틀러의 말이다.
p.309
디즈니랜드
보드리야르가 보기에 미국이라는 나라는 거대한 시뮬라시옹이다. 그 유명한 디즈니랜드 성은 실은 독일의 어느 성을 베낀 것이다. 하지만 복제가 어디 디즈니랜드에만 있던가? 유럽의 유명한 건축물을 베낀 건물은 미국 곳곳에 널려 있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처음부터 유럽 문명의 복제로 출발했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 자체가 거대한 디즈니랜드인 셈이다. 디즈니랜드는 이를 감추기 위해 존재한다. 유치함은 디즈니랜드에만 있고, 그 밖의 세계는 마치 유치하지 않다고 말하려는 듯이…….
하지만 미국이 거대한 가상이라 함은 단지 이 때문이 아니다. 자본주의 자체가 거대한 시뮬라시옹이고, 그 자본주의가 가장 급진적인 곳이 바로 미국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생산은 하나의 코드로 같은 제품을 대량으로 찍어내는 재상산(복제)의 체제다. 여기서 사물은 곧 시뮬라크르가 된다. 그런 자본주의하에서도 예술은 유일물을 만드는 장인적 생산의 영역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 마지막 아성을 무너뜨리고 캠벨 수프 깡통, 브릴로 박스, 만화의 커트가 예술 작품이 된 곳이 바로 미국이다.
소비는 어떤가? 멀쩡한 제품을 고장나기도 전에 새것으로 바꾼다. 가령 10년 쓸 자동차를 3년 쓰고 버릴 때, 소비자는 자동차 가격의 30퍼센트만 지불한 게 아니다. 100퍼센트 다 지불하고, 실제로는 30퍼센트만 소비하는 것이다. 그럼 나머지 70퍼센트는? 그것은 아마 기호의 값일 게다. 자본주의 사물의 사용가치가 아니라 한 상품과 다른 상품의 차이를 소비한다. 사물을 소비하는 게 아니라 기호를 소비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이렇게 인간이 상품과 상품 '사이'를 소비하고 그 '차이'를 지불하기 위해 일하는 거대한 꿈의 세계, 어른들의 디즈니랜드다.
워터게이트
경제적 토대만 그런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상부구조인 정치 역시 거대한 시뮬라시옹이다. 과거의 조작은 사실의 날조, 해석의 왜곡으로 이루어졌다. 여기에 안더스는 가장 중요한 조작은 카메라로 무엇을 비추고, 무엇을 비추지 않을 것인가를 선택할 때부터 일어난다고 했다. 보드리야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오늘날의 조작은 아예 거대한 가상세계를 만들어 운영하면서, 그 안으로 현실이 침입해 들어와 이 가상의 가성성을 폭로하는 것을 막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 유명한 워터게이트 사건을 보라. 그동안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의 허상은 비교적 성공적으로 유지되어왔다. 그런데 아주 우연하게 어느 기자가 대통령의 도청 사실을 폭로하고 나섰다. 물론 이는 미리 입력되지 않은 돌발 사태였다. 현실의 영역에서 치고 들어온 이 돌발 사태는 까딱하면 미국식 민주주의라는 거대한 시뮬라시옹의 허구성을 폭로할 뻔했다. 하지만 그것은 성공적으로 저지되었다. 부정과 부패는 권력의 일반적 속성이 아니라 닉슨이라는 한 개인의 부덕으로 처리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이 사건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미국식 민주주의의 허상을 보여주는 예가 아니라, 외려 미국식 민주주의의 빛나는 승리로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최고 권력자도 잘못하면 탄핵할 수 있다. 보라, 이것이 미국의 민주주의다. 이 얼마나 완벽한 조작인가? 이렇게 오늘날의 조작은 시뮬라시옹을 만들어 유지하면서, 거기에 침입한 현실의 돌발 사태가 가상의 가상성을 폭로하는 것을 막는 '저지 전략'의 형태를 띤다.
과거에는 가상이 현실을 위협했다. 이제는 현실이 가상을 위협한다. 여기서 현실은 프로그램에 미리 입력되지 않은 '버그'의 신세가 된다.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위해서 버그는 발견되고, 추적되거, 제거되어야 한다. 여기서 왜 <메트릭스>에서 보드리야르의 책이 등장하는 지 알 수 있다. <매트릭스> 1편에서 네오와 그의 친구들이 바로 프로그램을 망치는 이 버그이기 때문이다. 스미스 일당은 이 버그를 집요하게 추적하여 제거하려 한다.
p.317
하이퍼리얼리티
베냐민은 복제가 원본의 권위를 약화시킨다고 했다. 안더스는 영상이 실물의 가치를 떨어뜨린다고 했다. 보드리야르에게서 가상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실재가 된다. 이렇게 현실보다 더 실재적인 가상의 세계를 '하이퍼리얼리티 hyper reality'라 부른다. 이건 SF의 상황이 아니다. 어느 잡지의 기사에 따르면 인터넷에 범람하는 포르노그래프로 인해 현실의 성생활에 지장을 받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포르노의 세계는 현실 섹스의 단순한 복제가 아니라 그것보다 더 강렬한 어떤 하이퍼리얼리티의 세계다.
하이퍼리얼리즘은 바로 그런 세계의 예술적 반영이 아닐까? '하이퍼리얼리즘'을 '극사실주의'라 옮기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사실주의'의 극한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주의자는 복제에 대한 우너본의 우위를 인정하나, 하이퍼리얼리스트들은 그 위계를 전복시킨다. 그들은 사진으로 회화를 복제하는 게 아니라 회화로 사진을 흉내낸다. 이를 위해 슬라이드 필름을 화폭에 비추어놓고 그대로 본을 뜨는가 하면, 아예 화폭에 인화물질을 발라 캔버스 자체를 거대한 인화지로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앞에 나온 미국 사회의 이미지들을 보았는가? 사실을 말하자면 저것들은 사진이 아니다. 물감이나 아크릴로 그린 그림이다. 혹은 조각이다. 하이퍼리얼리스트 작품은 실재를 우리가 보는 것보다 더 실재적으로 느끼게 해준다. 그들의 작품에는 사람 없는 파리의 거리를 담은 앗제의 사진처럼 어떤 강렬함이 있다. 그 황량함의 강렬함은 외려 육안으로 보는 거리를 희미한 가상으로 여기게 만든다. 저 그림은 카메라의 확대 촬영을 닮아 육안으로 체험하는 현실보다 더 강렬하다. 거인국에 간 걸리버가 그곳 여인의 젖가슴 피부의 거칢에 소스라치게 놀라듯이, 가상은 현실보다 강렬하다.
p.341
초미학
가치의 황홀경. 여기서 미적 가치도 자유로울 수 없다. 과거에는 예술과 현실, 작품과 사물의 구별이 비교적 분명했다. 하지만 뒤샹이 변기를 들여오고, 워홀이 브릴로 박스를 들여온 후, 두 세계를 구별해주던 기준도 사라졌다. 미적인 것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다 보니 어느새 가치의 황홀경에 도달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드리야르는 뒤샹과 워홀을 높이 평가한다. 그들의 작품은 그가 진단한 어던 시대적 징후의 예술적 증언이기 때문이다. 특히 워홀의 작품은 같은 이미지를 수없이 반복하는 동일자의 무한 증식을 구현하고 있지 않은가.
보드리야르가 보기에 워홀은 동일자의 무한 증식을 '증언'했다. 하지만 그 뒤의 작가들은 그저 동일자의 무한 증식을 '실천'할 뿐이다. 말하자면 뒤샹과 워홀 이후에 등장한 수많은 작가는 하나도 새로운 게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그 자체가 동일자의 무한 증식에 불과하다. 어쩌면 뒤샹과 워홀은 '차이'를 생산한 마지막 작가일지도 모른다. 오늘날 그들의 흉내를 내는 작가들은 모두 무한 증식하는 스미스들 중 하나일 뿐이다. 미술관에서는 변기를 두 개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
평범한 것과 미적인 것. 둘 사이의 구별이 지워지는 현상을 보드리야르는 '초미학'이라 부른다. 미적인 것이 극점에 달하면 그것은 외려 사라진다. 모든 게 예술이 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예술은 또한 모든 것이 되고 있다. 나날이 아름다워지는 도시 풍경, 예술을 방불케하는 기발한 상업광고, 작품을 연상케 하는 멋진 상품들. 예술은 현실로 실현되고 있다. 모든 것이 예술이 되고, 예술이 모든 것이 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예술에 종언을 고한다.
예술이 더이상 없기 때문이 아니라, 예술이 너무 많기 때문에 예술은 죽는 것이다.
예술의 종언
예술이 아직 재현이었을 대, 현실은 원상이고, 그림은 모상이었다. 모상의 진리는 원상과의 일치에 있다. 복제는 원본과 일치할 때에만 참된 존재다. 원본과 다른 사본은 사기다. 실재는 실재, 허구는 허구. 이때마 해도 모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오래전에 예술은 재현을 포기했다. 예술의 과제는 있는 현실의 재현 representation이 아니라, 없는 현실을 비로소 있게 하는 presentation가 되었다. 작품으 진리는 있는 현실의 정직한 증언이 아니라, 없는 현실을 만드는 창조의 힘에 있다. 한 세기 동안 우리는 그 창조의 즐거움을 만끽해왔다.
하지만 없는 현실의 창조란 있는 현실의 조작일 수 도 있다. 예술이 새로운 현실을 만드는 힘이라면, 우리의 현실은 허구다. 그럼 그것은 대체 누구의 허구인가? 게다가 오늘날 세계 체험은 주로 미디어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런데 미디어도 예술을 닮아서 더 이상 현실을 재현하지 않고, 없는 현실을 만들어내려 한다. 그렇다면 그렇게 만들어진 세계의 건축가는 누구일까? 우리는 대체 누구의 작품 속에 사는 것일까? 그렇기 때문에 창조의 미학은 존재의 윤리로 견제되어야 한다. 가상과 실재, 허구와 현실은 어쨌든 구별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의 문제는 이것이다. 실재와 가상을 가르는 기준 역시 가상이며, 현실과 허구를 나누는 기준마저 허구일 수 있다는 것. 도대체 무엇이 실재이며 무엇이 가상인가? 대체 어디까지 현실이며 어디부터 가상인가? 그런 의미엣 사라지는 것은 예술만이 아니다.
예술이 종언을 고할 때 사라지는 것은 외려 현실, 더 정확히 말하면 현실에 대한 낡은 관념인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허구와 실재가 복잡하게 뒤엉킨, 새로운 현실을 살아야 한다. 이것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어쨌든 우리에게 익숙했던 현실은 사라지고 있다. 앨리스 앞의 체셔 고양이처럼 천. 천. 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