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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서재 Part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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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컹리 Jul 21. 2018

철학연습

#91 서동욱 [철학연습]


p.8

   지혜에 대한 애정, 지혜를 배신하지 않는 친구. 그것이 철학(필로소피)이란 명칭이 간직하고 있는 뜻이다. 더할 나위 없이 건전해 보이는 이름을 지닌 이 학문은 사실 얼마나 우리를 괴롭히는가? 누구도 철학 앞에 와서 '나는 잘 살고 있구나.'라는 삶의 면죄부를 얻어가지 못한다. 오히려 철학은 우리 삶이 믿고 있는 안전하게 보이는 진리와 가치의 지반을 무너뜨린다. 철학은 대면하기 싫은 친구이고 환란을 주는 자이다. 철학은 인간을 못 견디게 하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고, 환대 대신 독배가 주어진 저 소크라테스의 운명이 보여주듯, 삶의 작위적인 형태들과 자주 충돌한다.

   그러나 철학은 한 번도 삶을 배신한 적이 없다. 그것은 생명을 죽음으로 이끌지 않으며 죄의식 같은 마음의 감옥을 짓지도 않는다. 우리를 비루한 존재로 비추어주는 무서운 단죄의 거울도 아니다. 한마디로 철학은 천진한 학문으로서, 그저 삶을 온전히 살도록 만든다. 그러나 삶을 지배하는 모든 세력, 편견과 돈과 인기 모리배와 법의 권위로부터 배척당한다. 도대체 인간은 삶을 어디로 끌고 가는 것인가?




p.21

이성은 가졌으나 지혜는 가지지 못한 자


   이렇게 공통적 이성에 기반을 둔 소통을 통해 그리스인들은 지혜에 도달하고자 했다. 그런데 이것이 숨기고 있는 바는 철학자란 '지혜'를 아직 가지지 못한 자라는 사실이다. 보통 가장 지혜롭다고 알려진 철학자가 실은 지혜를 가지지 못한 자라니! 가령 소크라테스는 늘 자신을 가리켜 "지혜에 관한 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아는 자"라고 일컫기 좋아했다. 철학하는 자들이란 다만 "지혜(소피아)를 좋아하는 일(필로스)"을 하는 자이고 이 일을 후에 사람들은 '필로소페인(철학하다)'이란 명칭으로 고착시켰다.

   지혜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자기가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을 욕망하는 일, 즉 지혜를 사랑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전제군주와 제사장과 현자들은 신처럼 특별한 원천으로부터 부여받은 지혜를 애초부터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들과는 대화하거나 토론할 수 없으며, 오직 그들의 가르침과 명령에 복종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철학자는 지혜는 없고 지혜를 사랑할 뿐이며,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남들도 다 가지고 있는 이성밖에 없는 가난한 자들이다. 따라서 철학자들은 복종해야 할 권위를 가지는 대신에 보편적인 이성을 공유하는 '친구들'을 가진다.

   그리스인들에게 지혜는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며, 지혜에 접근하기 위해선 자신이 가진 유일한 생각함의 도구인 이성이 '일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이성은 모든 사람이 나누어 가진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성은 자신이 생각한 것이 정말 '보편성'에 위배되지 않는지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깃든 이성에게 묻고 교정받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이성이 노동하는 방식으로서의 '대화'이다. 그러니 당연스럽게도 철학은 '의견'을 내놓고, 그 의견을 교정하기 위해 논쟁을 하고, 교정되어 보다 나은 의견을 다시 내놓는 그런 생각함의 과정을 가지는 것이다.

   이렇게 철학은 '의견'을 지닌 자들의 전쟁터다. 옆집 아저씨의 인생 철학도, 사장님의 경영 철학도, 철학관을 운영하는 점쟁이의 신묘한 철학도 혼자 방 안에 있을 땐 철학이 아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몽상이며, 나아가 "이것 맞지? 이거 맞는 얘기잖아!"라고 다짜고짜 옆사람에게 강요될 때는 사람을 피곤케 하는 독선과 폭력이 된다. 그러나 개인들이 지닌 그런 다양한 생각들이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이성의 전쟁터에서 생존을 시험받게 될 때 그것들은 이미 철학의 반지를 손에 넣기 위한 모험을 시작한 것이다.



p.23

   그런데 대화 속에서 교정 중인 또는 치료 중인 '의견들'은 언제 '지혜'가 될 수 있을 것인가?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의 공동체라기보다는 지혜에 대해 공통의 흥미를 지닌 친구들의 공동체는 저 무한한 대화를 끝낼 날을 맞을 수 있을 것인가? 더구나 대화의 장이 공정하지 못하고 힘의 논리에 의해 불균형하게 편성될 수도 있다면? 대화의 장이 힘의 논리에 따라 매우 쉽게 불균형해질 수 있다는 것은 다양한 사례를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가령 대화의 꽃 중의 꽃인 의회민주주의가 합법적으로 관철시킨 바들이 진리나 정의와 거리가 멀었던 경우들을 생각해보라. 그래서 이성적 대화라는 이 철학함의 형태에 염증을 느낀 인류는 시로, 종교로, 정치적 실천으로, 욕망의 구현으로 종종 빠져나가 지혜에 접근하는 새로운 길을 모색해보기도 한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이렇게 곁길들이 인류의 정신을 철학의 피로함으로부터 구출해 보다 싱싱하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이런 곁길들의 체험과 더불어, 현대철학은 이성적 대화뿐 아니라, 로고스의 지평에서 표상되지 않는 것들에 관한 경험 역시 소중히 끌어안는다.



(바루흐 스피노자)

p.31 

미신에 의한 통치 

약한 지성과 강한 상상력의 합작품


   대중들이 쉽게 빠져드는 예속이 스피노자를 사로잡았던 주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사람들은 마치 자신들의 구원을 위한 것인 양 자신들의 예속을 위해 싸우고 한 사람의 허영을 위해 피와 목숨을 바치는 것을 수치가 아니라 최고의 영예라 믿는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아마도 사람들이 넓은 의미에서 미신에 빠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스피노자가 말하듯 대중을 통치하는 수단으로 미신보다 더 효과적인 것은 없다. 미신이란 근본적으로 우리가 약한 지성과 강한 상상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다. 지성은 앎을 획득하는 능력인데, 앎이라는 것은 늘 원인에 대한 앎이다. 결과의 인식 자체는 늘 원인에 대한 인식에 의존한다. 가령 살해된 시체를 앞에 두고 살인 사건에 대해 인식한다고 해보자. 단지 시체(결과)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그를 왜, 어떻게 죽였는지(원인)를 알아야 우리는 참다운 인식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인과관계를 이해하는 지성이 약할 경우 상상력이 잘못된 원인을 고안해낸다. 가령 어떤 사람이 벼락을 맞아 죽었다고 하자. 벼락의 원인인 기상현상을 지성이 파악하지 못할 때 우리는 상상력을 동원해 이렇게 미신적 원인을 고안한다. '그는 자쁜 사람이었고, 신이 그에게 벌을 내린 것이다.' 자연법칙이 상상력을 통해 징벌을 내리며 복종을 강요하는 공포스러운 신의 도덕법으로 변질되는 순간이다. 어떤 타인이 이 신의 명령에 위배될 때 그는 '증오'의 대상이 되며, 내가 신의 명령을 위배할 경우 나는 '죄의식'의 대상이 된다. 예속적 법의 탄생과 더불어 삶에 대한 긍정이 있어야 할 자리를, 주어진 삶을 부정하는 두 방식인 증오와 죄의식이 차지하는 것이다.

   인류 역사를 통해 이런 식으로 상상된 원인을 신에게 귀속시키는 일이 여러 종교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은 공포 속에서 신을 통치자, 입법자, 왕, 자비롭고 정의로운 자로 상상하고 거기에 복종하고자 했다. 한마디로 인간은 자기 모습대로 신을 상상하고 복종한다. 그리고 이러한 복종은 정치적 지배력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군자가 자신에게 계시된 신의 명령에 따라서만 명령을 내린다고 믿으면 사람들은 더욱 더 군주의 지배 아래 있게 될 것이다."



(마르틴 하이데거)

p.77

어떻게 번잡한 근대적 일상에서 빠져나올 것인가


   우리는 무엇을 좇아서 사는가? 대개 세인(그들)의 말을 뒤좇아서 산다. 무엇을 전공으로 선택해야 하며 무슨 직업을 갖는 것이 좋은지, 남들의 시선과 의견에 귀를 열어놓는다. 남들의 의견에 파묻힌 이런 삶은, 무엇이 우리 존재함의 참다운 방식인지 묻는 일을 망각하고 있는 한에서, 한마디로 '잡담'에 따라 사는 것이다. 또 우리는 '호기심'에 끌려다닌다. 맹목적으로 유행을 찾고 첨단의 것에 몰입한다. "언제나 새것과 만나는 일을 계속 바꿈으로써 생기는 동요와 흥분을 찾는다." 그리고 동요와 흥분 속에서 역시 참된 존재 방식은 잊힌다. 참된 삶은 가난해지고, "가장 요란한 잡담과 가장 솜씨 좋은 호기심이 '사업(Betrib)'을 관장하고 있는 곳에, 일상적으로는 모든 것이 일어나고 있지만 근본에서는 아무것도 일어나고 있지 않은 곳인 거기에 존재한다." 여기서 '사업'이란 근대적 이성이 낳은 테크놀로지에 입각한 바쁜  현대인의 삶을 뜻한다. 현대적 일상의 화려한 잡담과 호기심 속에서는 겉치레뿐인 것이 실상 추락임에도 상승으로 착각된다. 이렇게 존재함의 진정한 방식이 흐려져 있는 것이 '애매성'이다.

   이러한 잡담, 호기심, 애매성은 진정한 존재 방식을 망각한 '뿌리 뽑힌 존재 양식', '비본래적(uneigentlich)' 존재 양식을 표현한다. 하이데거 철학 안에는 뚜렷한 방향성이 있다. 바로 우리 존재의 이런 비본래성으로부터 '본래성'으로의 이행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찾는 것이다.


'존재'는 '존재자'가 아니다

'현존재'가 존재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존재(Sein)'란 무엇일까? 여기서 물음의 대상이 '존재'이지 '존재자'가 아니라는 것에 유념하기 바란다. 우리는 사물들을 감각적으로 지각하기도 하고, 가령 인과율 같은 것을 통해 이치에 맞게 이해하기도 한다. 이렇게 우리가 존재자를 인식할 대 마음의 두 가지 능력, '감성(아이스테시스)'과 '지성(노에시스)'이 작동한다. 그런데 이 두 가지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존재하는 것(존재자)'의 내용을 차지하는 정보들뿐이다. (저것은 붉은 색이다. 나는 인간으로 분류된다 등등) 즉 존재자의 '존재함' 자체는 마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샘물처럼 우리 인식 능력이 포착할 수 있는 범위 바깥으로 사라져버린다. 어떤 것이 먼저 '존재'하고 난 후에야, 감성과 지성이라는 인간의 인식 능력 앞에 '존재자'로서 출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철학사는 감성과 지성을 가지고 존재자의 생김새만 훑고 있었지, 그것의 존재함이라는 사건은 '망각'하고 있었다.

   그러면 어떻게 '존재'에 접근할 수 있을까? 주변의 존재자들에서부터 차근차근 생각해보자. 책상이나 의자 같은 물건의 존재 의미는 무엇인가? 그들의 존재 의미는 바로 용도에서 찾아진다. 즉 서류나 책을 펼쳐놓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책상이고, 앉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의자다. 이들을 사용하는 자는 대체 누구인가? 바로 존쟁 대해서 물음을 던지는 자이다. 책상의 존재 의미는 무엇인가? 바로 내가 사용하는 데 그것의 존재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책상을 사용하며 살아가는 나 자신의 존재 의미는 무엇인가? 이런 식으로 존재의 의미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행위가 그의 존재 방식 자체인 자를 가리켜 '현존재(Dasein)'라 한다. 바로 우리 자신 말이다. 모든 사물의 존재 의미는 바로 그것을 이해하려는 현존재에 종속된다. 왜냐하면 사물들의 의미는 현존재의 존재 의미에 좌우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물음은 바로 우리 현존재 자신의 존재 의미에 대한 물음으로 환원되는 것이다.



p.81

죽음 앞에서의 불안

불안은 우리의 본래적인 존재를 찾아준다


   그렇다면 무에 대한 불안을 야기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무엇일까? 하이데거는 '죽음'이라고 답한다. "죽음 앞에서의 불안은 가장 고유한, 무연관적, 건너뛸 수 없는 존재가능 '앞에서'의 불안이다." '존재가능'은 세계 안에서 '현존재에게 가느한 것'을 통칭한다. 그리고 세계 안에서 가능한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죽음이다. 이 죽음을 통해 현존재는 무에 직면하는데, 바로 죽음 앞의 불안은 이 무의 가능성을 드러낸다.

   이렇게 존재의 근본적인 가능성에 무가 속한다. 존재의 근본에 무가 속한다는 것을 편의상 인간학적으로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는 언젠가 필멸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존재의 본질에 무가 속해 있다는 사실이 주는 섬뜩함으로부터 달아나서 '세인들' 사이에 숨으려고 한다. 세인들 사이에서 잡담, 호기심, 애매성을 즐기며, 대중들의 엄뜻한 해석을 척도 삼아 자기 삶을 평가해보려고 한다. 그러나 늘 엄습하는 죽음에의 불안은 궁극적으로 이런 도피를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린다.

   오히려 불안은 이제껏 공공의 잡담 속에서 망각되었던 자신의 고유한 존재함의 방식을 드러내준다. "불안은 현존재 안에서 가장 고유한 존재가능으로 향한 존재를 드러내준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을 선택하고 장악하는 자유에 대해서 자유로운 존재를 드러내준다." 어떻게 죽음이라는 소멸의 사건 앞에서 자신을 선택하고 장악하는 자유가 가능해진단 말인가? 우리가 보통 생각하듯이 죽음은 파멸의 사건이 아닌가?

   사정은 이와 전혀 다르다. 오히려 죽음이 있기에 우리는 비로소 한 사람의 '유한자'로 설 수 있게 된다. 죽음 앞에서 "현존재는 그가 거기에서 끝나버리는 그런 종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유한하게 실존한다." 왜 꼭 유한한 실존이어야 하는가? 무한한 존재란 마치 아무런 제한도 규정도 없는 태초의 카오스 같은 것이다. 고대인들은 이런 무제한성을 악으로 여겼다. 따라서 고대의 조각상이 본래적인 실존을 얻으려면, 아무런 규정이 없던 대리석이 조각가의 노력을 통해 형식(형태)속으로 들어가 한정되어야만 한다. 또 문명으 빛이 들려면, 삶의 장소를 한정해서 폴리스라는 형식을 얻어야만 한다. 그리고 신이 임재하려면 제한 없던 어두운 대지 위에 신전의 경내를 설정(제한)해야 한다. 온통 '유한하게 제한하는 일'이 관건인 것이다.

   하이데거의 실존도 마찬가지다. 죽음에 의해서 유한하게 되는 방식으로만 비로소 실존하는 자에게 자신을 선택하고 장악하는 자유가 찾아온다. 우리가 죽음에 의해 제한되지 않고 무한하게 사는 존재자라고 생각해보라. 이런 삶에는 인생의 어떤 계획도 들어설 수 없고, 성취를 위한 척도도 있을 수 없다. 무한한 시간을 뭐하러 계획하며, 또 어떻게 계획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아무런 지표도 기준도 가질 수 없는, 앞뒤로 뻗어 있는 망망대해와 같다. 오로지 우리가 유한한 존재일 때만, 우리는 인생에서 앞날을 '염려'하며 시간을 쪼개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고 가치 있는 일을 선택하는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죽음은 우리에게 이런 모든 자유와 선택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끝'이다. 그러므로 하이데거에게 이 '끝'이라는 것은 완성이라는 의미에서의 끝마침을 의미하는 것이다." 



(장폴 샤르트르)

p.96

   사르트르는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글쓰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말이란 '탄약을 장전한 권총'인 것을 알고 있다. 말을 한다는 것은 권총을 쏘는 것이다." 또 이렇게 말한다. "말한다는 것은 행동한다는 것이다. 모든 사물은 일므 붙여지지마자 이미 그 이전의 것과는 완전히 똑같은 것이 아니며, 그 순결성을 상실하게 된다." 말은 의미를 전달한다. 이 의미가 사물에 씌어지자마자 사물은 순결성을 상실하며, 의미의 포로가 된다. 그런데 의미를 통해 대상을 규정하는 활동을 하는 것이 바로 앞서 말한 '지향적 의식'인 것이다. 의식은 말을 통해 대상에 의미 부여를 하고 의미를 통해 대상을 규정하는 일을 한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사르트르가 자신의 성장에 관해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나는 글쓰기를 통해서 다시 태어났다. 글을 쓰기 전에는 거울 놀이밖에는 없었다." 거울 놀이 속에서 자기 시선을 통해 자기 자신을 규정하는 소극적인 방어를 했던 어린이는, 이제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의식 바깥의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규정하려고 한다.



(모리스 메를로퐁티)

p.108

현상학의 핵심, 의식의 지향성

대상은 의식에 주어지는 방식대로 존재한다


   그러나 먼저 물어야 할 것은 도대체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현상학의 창시자 후설의 사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을 하나 꼽으라면 의식의 '지향성'을 들 수 있다. 종래에 의식은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것(res cogitans)'이라는 개념에서 보듯 일종의 고립된 사물처럼 다루어져 왔다. 그러나 의식은 고립되어 있지 않고 늘 무엇인가를 향하고 있다. 여러분도 한번 실험해보라. 눈을 감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함으로써 여러분의 의식이 가닿는 각종 대상, 상념, 수학적 개념, 물리학적 이론, 기억 등으로부터 의식을 고립시키려고 해보라.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의식은 잠을 잠으로써 의식 없음(무의식)에 도달할 수는 있을지언정, 깨어 있는 의식은 그 자체만으로 모든 것과 무관하게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늘 무엇에 대한 의식, 무엇인가를 지향하고 있는 의식이다. 이것이 의식의 지향성이다.

   의식이 늘 어떤 대상에 대한 의식이라는 것은, 대상은 항상 의식에 주어지는 대상으로서만 존재하지, 의식 바깥의 대상일 수는 없다는 것을 뜻한다. 다르게 얘기하면, 대상의 존재 양식이 별도로 있고, 그것이 의식에 주어지는 형태가 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은 의식에 주어지는 방식대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때 의식에 주어지는 그 대상을 '현상'이라고 부른다. 왜 굳이 여기에 '현상'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가? 이 말의 어원을 조사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그리스적 어원을 가지는 이 현상이라는 단어, 즉 '파이노메논'은, '자신을 그 자체로 내보여준다.'는 의미의 동사 '파이네스타이'에서 나왔다. 스스로 존재하는 모습대로 나타나는 것이 그리스인들이 애초에 부여했던 '현상'의 의미인 것이다. 이 '현상에 대해 논하는 일'이 바로, '현상(Phanomen)'과 '말함(logos)'이 결합된 단어인 '현상학(Phanomeno-logie)'이라는 명칭으로 불린다.

   현상, 즉 의식에 주어진 대상에 대해 말하는 것은 곧 그 대상의 존재 방식을 기술하는 일과 동일하다. 앞서 말했든 대상은 의식에 주어지는 방식대로 존재하니까 말이다. 따라서 현상을 제대로 기술한다면, 우리는 대상의 참다운 존재 양식을 가능케 하는 대상의 '본질'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다양한 대상들이 저마다 의식에 주어지는 방식이 다르다면, 이 다양한 방식을 기술하는 현상학의 작업은 무궁무진할 것이다. 이런 방법론으로서 현상학이 가지는 강력한 힘이 지난 세기 현상학을 사회학ㆍ정치학ㆍ미학 등등 여러 학문에 그토록 널리 파급되도록 했다.



(에마뉘엘 레비나스)

p.123

아우슈비츠 체험

서구 존재론의 폭력성을 사유하다


   무엇보다 레비나스 사상의 성립에 가장 결정적이었던 것은 그의 개인적 불행이자 전세계의 불행이기도 했던 제2차 세계대전의 체험이다. 아우슈비츠에서 가족들을 모두 잃은 그는 2차대전 이후 평생 독일 땅을 밟지 않았다. 레비나스가 보기에 서양 존재론은 타자를 동일자로 환원하는 전체성의 철학이다. 고유성을 무시하고 타자를 전체성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 서양 철학의 지배적인 사유 방식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통찰은 저 아우슈비츠의 체험에 힘입은 바 크다. 레비나스는 인간이 타자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상실하고, 타자를 나의 영향권 아래 종속시키기 위해 국가사회주의 같은 전체주의의 이념을 강요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묻는다. 전체주의의 한 형태인 나치즘과 파시즘이 일으킨 전쟁은 단순히 정치적ㆍ경제적인 관점에서 해명되지 않으며, 또 여러 형태의 휴머니즘을 통해서 방지되거나 치유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타자를 동일자(나)로 환원하는 서구 존재론의 구조에서 필연적으로 유래할 수밖에 없는 전쟁이었다. 그래서 레비나스의 첫째가는 관심은, 나라는 동일자로 흡수되지 않는 절대적인 타자가 있음을 드러내고, 그 타자에 대해 가지는 윤리적인 책임성이 나의 나됨, 즉 나의 주체성을 구성하는 근본임을 보이는 것이 된다.


자신에게 몰두하는 존재론

슬픔을 달래고 죽음을 극복하기엔 충분치 않다


   먼저 물어야 할 것이 있다. '진정한 삶'이 부재하는 세계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사는가? 우리는 우리와 다른 대상을 먹거나, 우리에게 필요한 물건으로 바꾸거나, 또는 우리의 인식의 대상으로서 소유한다. 욕구하는 대상을 흡수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나에게 종속된 것으로 만든다. 한마디로 나는 미다스 왕처럼 온갖 타자를 자기 소유의 황금으로 바꾸면서 내가 주인인 세계를 구성한다. 자기보존 욕구를 타고난 존재자 일반은 자기 욕구를 충족시키게끔 되어 있다. 요컨대 존재자가 자기 자신에게 전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레비나스는 내가 세계의 주인으로써, 나의 욕구에 따라 세계를 즐기고 관리하는 이러한 존재 양식, 혹은 나 자신에게 몰두하여 끊임없이 나의 세계로 귀환하는 사유를 일컬어 '존재론'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나의 존재에 전념하는 "이 시간은 슬픔을 달래고 죽음을 극복하기엔 충분치 않다." 그것은 노동을 하고 먹을 거리를 벌어 나를 먹이는 일의 반복일 뿐 아무런 질적 도약이 없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노동과 향유를 통해 세계 안의 모든 것을 자기의 소유물로 만든 이 고독한 부자에게 찾아올 새로운 손님이란 죽음밖에 없는 것이다. 죽음이 도착할 때까지 노동과 향유라는 천편일률적인 순간들이 반복되리라.

   이와 반대로, 나의 존재 유지를 위해 먹고 마시고 도구를 만드는 나의 세계로부터 떠나, 나의 바깥 혹은 나와 절대적으로 다른 자에게로 가고자 하는 사유를 일컬어 '형이상학'이라고 부른다. 우리에겐, 나의 존재 유지를 위 해 대상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와는 다른 '욕망'이 있다. 이 욕망은, 플라톤이 '욕망할 수 있는 최고의 것으로서 존재들 너머에 있는 최고선의 이데아'를 이야기했을 때의 욕망, 곧 '초월'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레비나스 철학은 나의 세계를 떠나 낯선 자에게로 가는 이 '초월'의 가능성, 바로 세계 저편으로 가는 형이상학의 가능성을 숙고한다.



p.128

타자의 얼굴

신은 고통받는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도래한다


   출산을 통해서만 나의 세계 밖으로 초월이 가능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나의 존재함을 위한 세계에 속하지 않는, 나와 다른 자와 맞닥뜨리는 상황은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일어나는가? 타자는 모든 것이 박탈된 궁핍한 얼굴의 모습으로 나에게 현현한다. 나는 다른 사물을 인식하듯 타자를 인식할 수 있다. 또 타자를 수단으로 이용할 수도 있다. 나의 세계를 구성하기 위해 여러 방식으로 타자를 소유할 수 있다. 그러나 고통받는 얼굴은 내가 어떤 식으로도 소유할 수 없는, 절대적으로 나와 다른 자이다. 그 얼굴은 나의 모든 능력에 반대하여 나에게 '저항'한다. 얼굴의 저항이란, 대상 세계를 소유하고 지배하려고 하는 나의 힘을 무력화시키고 나의 윤리적 행동을 촉구하는 '윤리적 저항'이다. 고통받는 타자의 얼굴은, 가령 '살인하지 말라'고 나에게 명령한다. 타자는 나보다 높은 곳에 있는 나의 주인처럼 내가 윤리적으로 행동하기를 명령하고 나는 그 명령을 회피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어떤 식으로도 나에게 규정되지 않고, 오히려 나의 힘을 무력화시키고 나에게 명령하는 타자의 얼굴이란, 형이상학의 대상, 규정 불능의 무한자, 곧 신의 흔적과도 같다. 신은 바로 타자의 얼굴을 통해서 내게 말을 건넨다. 레비나스는 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 어떤 것도 신을 통해서 정의하고자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들 간의 관계를 통해서 내가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신이지, 그 역은 아니다. 내가 신에 대해서 무엇인가 말하고자 할 때, 그것은 언제나 인간들 간의 관계에서 출발한다. 나는 위대하고 전능한 존재의 현존(exercise)으로부터 출발하지는 않는다. 신의 추상적인 관념은 인간적 상황을 명백하게 해줄 수 없는 관념이다. 반대로 인간적 상황이 신의 관념을 명백하게 해준다.


   이렇게 신은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라는 맥락 속에서만 의미있는 것이 된다. 그러니 교회가 아니라, 이기적인 바람을 담은 기도 속에서가 아니라, 먼저 고통받는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신은 도래한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타자와의 관계가 '신'이라는 말이 비로소 의미를 지니게 되는 맥락이라면, '존재자'로서의 신을 믿지 않고도 우리는 신이란 말을 유의미하게 사용할 수 있지 않은가? 레비나스의 초월 또는 형이상학이란 바로, 타자의 얼굴을 자신의 흔적 삼아 나타나는 무한자와 관계함을 말한다. 이 관계란, 내가 나에게 전념하는 세계를 떠나, 나와 전혀 다른 자에게로 가서 그를 위해 나를 종처럼 건네주는 일이다. 이렇게 레비나스는 형이상학, 초월, 무한자 등의 고전적인 개념의 의미를 윤리학적 맥락 안에서 새롭게 이해한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p.140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의식 아래 숨겨진 보편적 구조를 탐색하다


   흔히 레비스트로스를 '구조주의자'라고 한다. 도대체 구조주의란 무엇인가? 레비스트로스와 함께 종종 미셸 푸코, 자크 라캉, 롤랑 바르트 등을 구조주의자라 통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러 사상가들을 통칭하는 명칭이 흔히 그렇듯, 구조주의자로서 저들의 공통점을 찾으려 하면 할수록 구조주의는 공허한 개념이 될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는 오로지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만을 이야기하도록 하자.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적 여행기이자 자서전이기도 한 『슬픈 연대』에서 그는 젊은 시절 자신을 자극한 학문으로 지질학,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마르크스주의를 들고 있다. 이 세 가지의 공통점은 뭘까? 바로 의식할 수 있는 표면이 아닌, 의식이 접근하지 못하는 심층에서 진실을 찾으려 한다는 것이다. 가령 레비스트로스는 마르크스로부터 몇몇 교훈들을 간직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의식은 자신을 속인다."라는 것이다. 이 짧은 문장만큼 구조주의의 핵심을 잘 이야기해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신화학』2권에서 구조주의의 야심을 이렇게 명시하고 있다.


구조적 분석은 인간사회의 분명한 다양성 너머 근본적이고 공통적인 특성에 도달하기를 주장한다. 또한 구조적 분석은 각 민족지적 사실들의 생성을 지배하고 있는 불변적 법칙들을 명시하려고 한다.


   구조주의는 의식되지는 않지만 여러 집합들에 공통적으로 작동하는 원리를 발견하려는 학문인 것이다. 이 점은 체계와 구조를 구별하는 레비스트로스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잘 드러난다.


구조(structure)는 체계(systeme)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체계는 요소들과 그 요소들을 결합시키는 관계들로 구성된 총체를 말하지요. 구조라는 말을 할 수 있으려면 요소들과 여러 집합들의 관계들 사이에 불변하는 유사점이 드러나야 합니다. 한 집합이 변형을 통해 다른 집합으로 이행해갈 수 있도록 말이에요.


   레비스트로스의 사유가 일생 동안 어떻게 전개되어왔는지 엿볼 수 있는 대담집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에 나오는 구절이다. 체계는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관계 전체인데, 이와 달리 구조는 여러 집합에 공통적인 원리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러 집합에 공통적인 이 원리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p.146

겸손한 지성

서구 문명은 우월한가


   이러한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가 알려주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서구 문화가 철학이라는 이름 아래 맹신했던, 스스로 발전하는 이성의 형태(그 대표적 예가 '변증법적 이성'이다.)가 어쩌면 하나의 몽상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점일 것이다. 그는 서구 문화를 반성적으로 음미하며 이렇게 말한다.


프랑스 대혁명은 유럽과 전세계를 열광시켰으며, 한 세기 이상 동안 프랑스에 아주 특별한 위신과 명성을 제공했던 이념과 가치를 유통시켰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서구에 몰아닥친 대재앙들이 바로 거기에 기원을 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대혁명을 통해 사람들은 사회가 추상적인 사상에 의해 지배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성요. 사실은 습관과 관습에 의해 형성되는 것인데도 말이죠.


   여기서 사회의 발전을 이끄는 것으로 사람들이 믿게 되었다는 추상적 사상이란 바로 합리주의라는 보편적 이름 아래 행해진 이성에 대한 낙관론을 뜻한다. 실제 프랑스 혁명을 이끌었던 로베스피에르는 이렇게 말했다. "무력에 의한 힘이 아니라 이성의 힘이 우리의 영광스러운 혁명의 원리를 전파시킬 것이다." 19세기에 헤겔은 이 이성이 스스로 발전해나간다는 것을 철학적으로 입증했다. 이성에 대한 이런 낙관론은 전적으로 좋은 것이었을까? 이 낙관론은 동시에 서구적 이성을 지나지 않은 사회를 배타적으로 평가절하하는 시선을 길러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위에서 레비스트로스가 '대재앙'이라 일컬은 식민주의, 인종주의 등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적 자서전인 『슬픈 열대』에는 서구의 이성이 불러온 이런 대재앙에 대한 분노와 슬픔이 곳곳에 눈에 띈다. 인도의 한 지역을 목격하고 그는 이렇게 쓴다.


이곳 주민들의 비극적인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을 안으로 들어가 봐야만 한다. 겨우 한 세기 전만 하더라도 이들의 시체가 온통 들판을 뒤덮었다. 대부분 베틀로 베를 짜면서 살아오던 그들은, 식민지 지배자들이 맨체스터에 면직물 시장을 개설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전래의 가업을 행하는 것을 금했기 때문에 굶주림고 죽음으로 몰렸다.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는 서구의 이성이 철학이라는 거울에 자기 자신을 비추어보면서 빠져 있던 나르시시즘을 파괴한다. 이성이 역사를 통해 스스로 발전해나가는 법칙(이것을 설명하는 학문이 '역사철학'이다.)은 허구적일 수 있으며, 따라서 그 법칙을 발견하고 따르는 사회가 다른 사회에 비해 우월한 것이 아니다.(우리는 종종 '이성'을 '사유 일반'과 혼동하는데, 구조주의가 비판하는 이성은 좁게 정의된 것으로서 바로 이런 역사철학적 이성, 변증법적 이성을 가리킨다.) 오히려 모든 사회는 그 나름의 긍정적인 법칙을 가지고 있다고 그는 믿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역사학자 폴 벤느가 푸코에게 내렸던 평가를 레비스트로스에게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야심찬 '이성(reason)'에  대립하는 '지성(오성, understanding)'의 사상가였다.'라고. 역사를 통해 최종 목적을 향해 이질적인 사회를 전체화하며 스스로 발전해나가는 이성은 한낱 특정한 사회(서구)의 독특한 사고방식의 소산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란 레비스트로스에겐 규칙적 발전이 아니라 한낱 우연이다. "역사는 당연히 되돌릴 수 없는 우연에 속한다." 수많은 우연 때문에 문화들은 '우열 없이' 서로 쪼개져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런 무질서한 인간 삶의 파편들 속에서 '최소한의' 동질적 구조를 계산해내는 '겸손한 지성'이 레비스트로스가 이성 대신 접어든, 학문의 도구이자 대상이다. 다음고 같이 말이다.


구조 분석이 모든 사회 활동을 설명해줄 수 있다는 생각은 나로서는 터무니없어 보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사회생활과 그것을 둘러싼 경험적 현실은 인간 세계에서 무작위로 펼쳐지는 영역인 것으로 내게는 생각됩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나는 전적으로 우연적인 역사에 복종합니다. 나는 그저, 무질서가 지배하는 이 거대한 경험의 수프 속에서 여기저기에 구성(organization)의 섬들이 형성된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변증법적 이성이 '전체'라는 이념을 현실화하는 데 몰두한다면, 레비스트로스의 인간과학은 무질서와 우연 속에 흩어진 채 가느다란 끈처럼 이어지다 또 끊어지고 마는 구조를 사유한다.



(자크 라캉)

p.157

코기토에 대한 비판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무엇보다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라고 정의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상징계 자체가 타자의 영역이므로, 상징계 안의 욕망은 타자가 지정해주는 것에 대한 욕망일 수밖에 없다. 우리의 욕망을 들여다보라. 선호하는 직업, 선호하는 배우자 등등은 모두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타자들이 욕망의 대상을 지정해놓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욕망의 "주체는 타자의 장에 종속된 상태로서만 주체일 수 있다." 우리는 욕망의 대상을 발명하지 않고, 타자로부터 지정받는다. 그리고 이 점은 『정신현상학』에서 헤겔이 이미 다음과 같이 통찰하고 있던 바였다. "사실상 욕망의 본질은 자기의식이 아닌 타자에게 안겨지는바,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자기의식에게 욕망의 진상이 밝혀진다." 이렇기에 라캉은 '오늘날의 헤겔'이라 불리기도 한다.

   아울러 '주체'가 '타자의 장'에 귀속한다면, 데카르트의 코기토('나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나는 생각하는 것으로서 존재한다.') 같은 주체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반성'은 거울에 비추어 보듯 자신을 대상화하는 이자적 관계이다. 그리고 반성하는 자는 반성된 형태로 자신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즉 생각하는 자는 '생각하는 것'을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생각함과 존재함이 일치하는 동일성을 지닌 이 주체의 지위는 '상상된 자아', '상상을 통해 오인된 자아'이다. 왜냐하면 주체의 사유란 모두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며 언어는 타자의 장에 속하기 때문이다.(언어는 나의 발명품이 아니라 늘 이미 있어온 것, 타자의 것이다.) 즉 주체는 내가 아닌 곳, 즉 타자의 땅에서 생각하고 타자의 땅인 이 상징계에서부터 소외된 무의식으로서 존재한다. 이것이 라캉의 다음과 같은 유명한 정식이 의미하는 바이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곳에 존재하지 않고,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 철학에 대한 라캉의 기여는 자기반성이라는 이자적 관계(나와 자기 자신)에 의존하는 데카르트적 자아가 상상적인 것임을 보이고, 주체의 참다운 위치는, 제삼자에 해당하는 객관적인 질서(언어적 질서)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밝힌 점이다.



p.242

차별의 세계엔 타자가 없다

차이란 수많은 물방울 같은 다양한 것이 함께하는 공존의 바다


   역사 속에서 착취라는 무서운 결과로 이어진 이러한 차별의 본성은 무엇인가? 차별은 어떤 원리에 따라 작동하는가? 일단 차별은, 모든 이에게 적용하기 위한 하나의 척도 속에서 작동한다. 가령 유럽인들에겐 그 척도 가운데 하나가 백인의 흰 얼굴이었다는 점을 들뢰즈 『천 개의 고원』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종주의는 '백인'의 얼굴에 의해 일탈의 격차들을 결정함으로써 진행되었다." 즉 차별의 한 형태인 인종주의에서는, 백인 남자의 얼굴을 이상적 척도로 삼고, 이 이상에 얼마나 많은 부적절한 성질들이 끼어들었는가에 따라 황인종과 흑인과 아랍인을 위계적으로 구별한다.

   결국 차별은 자기가 가진 척도를 타인에게 강요하고, 그 척도에 맞추어 타인이 지닌 가치를 열등성의 편차에 따라 위계화하는 것을 본질로 한다. 요컨대 '타자 없는 세계', 자신의 이상과 가치만이 절대화된 세계가 차별의 세계다. 그리고 이런 차별은 역사 속의 저 식민지 시대 같은, 우리와 멀리 떨어진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일상 속의 종교, 성별 간의 위상, 심미관, 특정 음식에 대한 혐오, 옷 입는 방식, 헤어스타일과 머리 염색에 대한 취향 등등이 한 가지 형태로 절대화될 때 그것은 우리 일상적 삶을 노예 상태로 떨어트리는 무서운 차별의 도구로 작동하게 된다.

   이에 반해 '차이'란 열등성이나 우월성의 편차에 따라 짜인 위계적 질서가 없는 '다양성'을 뜻한다. '차별'의 상태 속에선 타자를 내가 가진 척도에 따라 규정하고 판단한다. 이와 달리 '차이'란 자신이 지닌 어떤 가치도 타자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지 않고, 오로지 '너는 나와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서 성립한다. 여기서 '나와 다르다'가 지니는 함의는 무엇인가? 바로 '너는 나의 것과 다른 너의 고유한 가치들을 지니고 있으며, 그 가치들을 따라 살아가는 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한다. 즉 '차이'는 가치들과 개별적인 특징들의 평등한 '다양성'을 가능하게 해주는 개념이다. 이런 다양한 것들이 공존하는 차이의 세계를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천 갈래로 길이 나 있는 모든 다양체들에 대해 단 하나의 똑같은 목소리가 있다. 모든 물방울들에 대해 단 하나의 똑같은 바다가 있다." 차이의 세계란 수많은 물방울들 같은 다양한 것들이 함께하는 '공존의 바다'와 같은 곳이다.



p.257

반플라톤주의

기원, 역사, 합목적성의 부재


   반면 시뮬라크르는 반플라톤주의적인 현대적 사유 일반의 근본 성격을 반영하는 개념이다. 이 개념의 바탕에서 으르렁거리고 있는 현대철학의 세 가지 주제가 기원의 부재, 역사의 부재, 합목적성의 부재이다.

   기원과 역사와 합목적성은 아마도 플라톤의 신화를 통해 가장 잘 설명될 것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우리는 원본적인 모범적 진리인 이데아와 더불어 있었다. 그런데 이 세상으로 오는 동안 망각의 강 레테를 건너면서 이데아에 대한 인식을 상실했다. 그래서 이승에 있는 모든 불완전한 존재자들의 목적은 다시 저 모범적인 고향, 이데아계를 어떤 식으로든 되찾는 것이다. 모범적 기원의 상실은 역사라는 과정을 만들어내며, 역사라는 과정은 궁극 목적으로서 저 잃어버린 기원을 되찾을 때 완성될 것이다.

   이러한 플라톤적 모델은 이후 그대로 서구 기독교 세계의 사고방식을 지배하게 되었다. 잃어버린 기원이 잃어버린 낙원의 산화로 바뀌면서 말이다. 시뮬라크르를 사유하는 대표적인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들뢰즈는 「플라톤과 시뮬라크르」(1966)라는 글에서 이 점을 설명하면서, 왜 시뮬라크르가 위험스러운 것으로 경시되게 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신은 그 자신의 형상에 따라 인간을 만들었으나, 인간은 죄로 인해 신과의 그 유사성을 잃어버리고 타락했으며, 우리는 시뮬라크르가 되었고 감성적 실존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도덕적 실존을 상실했노라고. 이러한 설교는 시뮬라크르의 악마적인 속성을 강조하고 있다.


   기원과 역사와 합목적성이라는 세 악기가 연주하는 철학에서 모범적 기원으로의 회귀를 부정하는 시뮬라크르는 이렇게 악마적인 것으로 위험시되었다. 그렇다면 현대철학은 왜 이토록 위험해 보이는 시뮬라크르를 높이 떠받드는 것일까? "플라톤주의를 전복한다는 것, 그것은 이미지에 대한 원형의 우위를 부인한다는 것이며, 시뮬라크르의 지배를 찬양한다는 것이다."

   시뮬라크르에 대한 몰두의 이면에는 기원적인 것, 원본적인 것에 대한 추구가 오히려 더 큰 위험을 간직할 수 있다는 경계가 담겨 있을 것이다. 원형적인 것, 본질적인 것, 순수한 것을 탐구하는 구도자적인 제스처가 은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삶과 멀리 떨어진 형이상학적 주제로만 보이는 기원의 신화는 실은 우리 삶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다음과 같은 문답을 주고받으며 우리 삶을 위협할 수 있다. 원형적인 순수한 인종은 누구인가? 그것은 백인이다. 원형적인 성, 보다 우월한 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남성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원이 누리는 영광의 배후엔 늘 기원보다 열등한 주변부가 영광의 그늘로 자리잡는다. 순수한 원천에 대한 향수와 자만심으로부터 등을 돌리면 거기엔, 순수하지 못한 것이 섞여든 유색인종들, 혼혈아들, 불법 이민자들이 있다. 시뮬라크르에 대한 긍정은 바로 순수한 원형적 모범의 기준을 벗어나는 이 모든 것에 대한 환대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나의 가짜 인생이여, 복제와 인용으로 가득 찬 삶이여! 나는 너를 사랑할 수 밖에 없구나. 그런데 '나의 가짜 인생'은 좀 어폐가 있는 표현 아닌지? 가짜와 진짜를 구별할 수 없는데, 다른 것들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나'라고 불리는 순수한 것이 있겠는가? 삶은 이렇게 오리지널리티를 지니는 '자아'가 사라진 익명성의 터널로 들어간다. 어떤 사람들은 이 사태를 '주체의 죽음'이라 부르기도 했다. 주체가 죽은 시대에, 이 모범도 원본도 없는 복제물들의 파편을 가지고서 어떤 삶을 꾸며나갈 수 있을까? 인터넷과 스마트폰과 아바타와 RPG게임이라는 시뮬라크르의 놀라운 생산자들 속에서 표류하는 우리가 오늘날 던져야 하는 윤리적ㆍ정치적 물음이란 이런 것이다.



p.276

돈의 탄생과 화폐의 익명성

나만의 버찌씨에게 모든 사람의 추상적인 돈으로


   "돈의 객관성은 양도할 수 없는 재산의 폐지이며, 타인의 출현을 전제한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이렇게 말한다. 양도할 수 없는 재산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누구도 알 수 없고 오로지 소유한 사람만이 아는 재산이다. 교과서에 실려 있는 폴 빌리어드의 「이해의 선물」(1970)을 기억하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이 소설에서 네 살짜리 주인공은 위그든 씨가 운영하는 사탕가게에서 버찌씨를 돈으로 지불하고 사탕을 산다. 물론 이 사탕은 위그든 씨의 이해에서 비롯된, 동심에 주어진 선물이며, 여기서 버찌씨는 오로지 이 네 살짜리 어린아이의 세계 속에서만 가치를 지니는 돈, 그 무엇과도 등가적이지 않은 양도할 수 없는 돈, 소통되지 않는 돈이다. 어른이 되어 타인과의 관계 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이 양도할 수 없는 재산인 버찌씨를 폐지하고, 타인들 사이에 약속된 추상물인 돈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돈의 객관성은 타인의 출현을 전제한다는 말의 의미다.

   루소는 이러한 돈의 성격에 대해 『에밀』(1762)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사물들 사이의 계약에 입각한 평등은 돈을 발명하게 했다. 왜냐하면 돈이란 여러 가지 사물들의 가치에 대한 비교의 표적이기 때문이다." 사물들은 돈을 기준으로 삼아 가치의 '양'을 가질 수 있게끔 되었다는 것, 즉 객곽적 기준에 따라 양도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돈의 탄생이다. 개개인에게 아주 사사롭게 양도 불능의 가치를 지니던 사물들은 화폐의 익명성 속에서 거래되기 시작한다. 우리는 낙원에서 쫓겨나듯, 또는 어린 시절의 버찌씨를 잃어버리듯 나만의 구체적이고 생생한 가치로부터 쫓겨난 돈이라는 추상적인 약속 속으로 들어선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적 소통의 맥락을 놓친 자는 당연히 돈이라는 약속도 모르는데, 바로 이상의 소설 「날개」(1936)의 주인공이 그렇다. "나는 벌써 돈을 쓰는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것 같았다."라고 그는 말한다. 돈의 가치를 모르는 것은 더불어 사는 것, 사회를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돈은 객관적으로 소통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모든 이가 믿고 따르는, 보편적인 종교처럼 되어버린다. 돈에 대한 만인의 신뢰 덕에 사람들은 일회적인 접촉을 넘어서 지속적인 관계를 형성한다. 요컨대 돈이야말로 우리 삶을 지탱하는 '믿음의 형식'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돈의 세계 안에서 지내는 시간은 존재자가 존재하기 위한 최적의 요람인가? 철학자 레비나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 시간은 슬픔을 달래고 죽음을 극복하기엔 충분하지가 않다." 경제적 질서에 따라 약속받은 대로 노동을 하고 봉급ㅇ르 타는 이 세계 안에서의 삶은 천편일률적인 것이다. 노동을 하고 돈을 받아 자기를 먹이는 일이 이루어진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그다음엔? 역시 노동하고 돈을 받아 자기를 먹인다. 그다음엔? 소멸에 이르기까지 그다음도 계속 똑같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그 돈이 자기 존재가 아닌 다른 존재에 대해 쓰인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예측할 수 없는 미지의 사업에 투자하는 것과 같은 것이며,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미래를 열어가는 일이라고도 부른다. 사람은 죽을 때 모든 돈이 나의 존재와 더불어 사라지는 데 관심을 쏟기보다는, 자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미래에 대해 열렬히 관심을 가진다. 가령 죽어가는 이는 돈을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쓸 수 없음에도 재산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에 빠지는 노력을 감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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