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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서재 Part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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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컹리 Jul 29. 2018

채식주의자

#92 한강 [채식주의자]


p.11

   아내는 말수가 적은 편이었다. 나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일을 드물었고, 내 귀가시간이 아무리 늦어도 관여하지 않았다. 어쩌다 함께 있는 휴일에 어딘가로 외출하기를 청하지도 않았다. 내가 오후 내내 텔레비전 리모컨을 쥐고 뒹구는 동안 아내는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아마도 일을 하거나 책을 읽는 모양으로─아내의 취미라 할 만한 것은 기껏 책 읽기 정도였는데, 그 책들이란 대부분 표지를 열어보기도 싫을 만큼 따분해 보이는 것들이었다─끼니때에만 문을 열고 나와 말없이 음식을 만들었다. 사실, 그런 아내와 산다는 게 그다지 재미있는 일일 리는 없었다. 그러나 하루에도 몇번씩 직장동료나 친구 들의 휴대폰을 울려대는 아내들, 주기적으로 바가지를 긁어 요란한 부부싸움을 벌이곤 한다는 아내들이 피곤하게 느껴지던 터였으므로 나는 감사히 여겼다.

   오직 한가지 아내에게 남다르다고 할 만한 점이 있다면 브래지어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짧고 민숭민숭했던 연애시절, 우연히 그녀의 등에 손을 얹었다가 스웨터 아래로 브래지어 끈이 만져지지 않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조금 흥분했었다. 혹 그녀가 나에게 무언의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인지 판단하기 위해 잠시 새로운 눈으로 그녀의 태도를 관찰했다. 관찰의 결과는, 그녀가 신호 따위를 전혀 보내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신호가 아니라면, 게으름이나 무신경인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차라리 두툼한 패드를 넣은 브래지어를 하고 다녔다면 친구들에게 보일 때 내 체면이 섰을 것이다.

   결혼한 뒤 아내는 집에서 아예 브래지어를 벗고 지냈다. 여름철에 잠깐 외출할 때면 동그랗게 돌출된 젖꼭지의 윤곽이 드러날까봐 할 수 없이 브래지어를 했지만, 일분 안에 호크를 풀어버렸다. 옅은 색의 얇은 상의나 약간 끼는 옷을 입었을 경우에는 풀린 호크가 역력히 드러나는데도 그녀는 괘념하지 않았다. 내가 나무라자, 그녀는 찌는 듯한 더위에 조끼를 겹쳐입는 것으로 브래지어를 대신했다. 답답해서, 브래지어가 가슴을 조여서 견딜 수 없다고 아내는 변명했다. 나야 브래지어를 해본 적이 없으니 그것의 착용감이 얼마나 숨막히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모든 여자들이 그녀만큼 브래지어를 싫어하지 않으리라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으므로, 그녀의 과민함은 의아하게 느껴졌다.




p.23

   봄이 올 때까지는 아내는 변하지 않았다. 매일 아침 풀만 먹게 되긴 했지만 나는 더이상 불평하지 않았다. 한 사람이 철두철미하게 변하면 다른 한 사람은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녀는 하루하루 말라갔다. 그러잖아도 튀어나온 광대뼈가 볼썽사납게 뾰죽해졌다. 화장하지 않으면 피부가 병자처럼 핼쑥했다. 육식을 끊는다고 모두 아내처럼 살이 빠진다면 누구든 체중감량에 애를 끓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나는 알고 있었다. 아내가 여위는 건 채식 때문이 아니었다. 꿈 때문이었다. 아니, 사실상 그녀는 잠도 거의 자지 않았다.

   아내는 결코 부지런한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늦은밤에 귀가하면 아내는 먼저 잠들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한데 이제 그녀는 내가 자정 넘겨 들어와 씻고 잠자리에 든 뒤에도 안방으로 자러 들어오지 않았다. 책을 읽는 것도 아니고, 인터넷채팅을 하는 것도 아니고, 밤새 케이블티브이를 보는 것도 아니었다. 말풍선에 대사를 쳐넣는 작업이 그렇게 많을 리도 없었다.

   그녀는 새벽 다섯시쯤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고, 한시간쯤 자는 둥 마는 둥하고는 짧은 신음을 뱉으며 깨어나곤 했다. 헝클어진 머리에 까칠한 얼굴, 빨갛게 금이 간 눈으로 그녀는 내 아침식탁을 지키고 있었다. 자신은 한 숟가락도 뜨지 않은 채 였다.

   더욱 신경쓰이는 것은 그녀가 더이상 나와 섹스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내는 늘 군말없이 내 몸의 요구에 응하는 편이었고, 때로는 먼저 내 몸을 더듬어올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내 손이 어개에 닿기만 해도 조용히 몸을 피했다. 언젠가 나는 이유를 물었다.

   "뭐가 문제야?"

   "피곤해."

   "그러니 고기를 먹으라고. 고기를 안 먹으니 힘이 없지. 전에는 이러지 않았잖아."

   "사실은."

   "뭐?"

   "…냄새가 나서 그래."

   "냄새?"

   "고기냄새. 당신 몸에서 고기냄새가 나."

   나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방금 못 봤어? 나 샤워했어. 어디서 냄새가 난다는 거야?"

   그녀의 대답은 진지했다.

   "…땀구멍 하나하나에서."

   나는 가끔 불길한 생각을 했다. 혹시 이것이 초기증상에 지나지 않는다면? 말로만 듣던 편집증이나 망상, 신경쇠약 따위로 이어질 시초라면.


p.42

   꿈에 누군가의 목을 자를 때, 끝까지 잘리지 않아 덜렁거리는 머리채를 잡고 마저 칼질을 할 때, 미끌미끌한 안구를 손바닥에 올려놓을 때, 그러다 깨어날 때. 생시에, 뒤뚱거리며 내 앞을 걸어가는 비둘기를 죽이고 싶어질 때, 오래 지켜보았던 이웃집 고양이를 목조르고 싶을 때, 다리가 후들거리고 식은 땀이 맺힐 때, 내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때, 다른 사람이 내 안에서 솟구쳐 올라와 나를 먹어버린 때, 그때

   입 안에 침이 고여. 정육점 앞을 지날 때 나는 입을 막아. 혀뿌리부터 차올라 입술을 적시는 침 때문에. 입술 사이로 새어나와 흘러내리려는 침 때문에.


   잘 수 있다면. 단 한시간이라도 의식을 놓을 수 있다면. 셀 수 없이 깨어나 맨발로 서성거리는 밤에 집은 식어 있어. 식은 밥, 식은 국처럼 싸늘해. 검은 창밖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어두운 현관문이 간혹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지만, 문을 두드린 사람 따위는 없어. 돌아와 이불 밑에 손을 넣어보면, 다 식어 있어.


   이제는 오분 이상 잠들지 못해. 설핏 의식이 나가자마자 꿈이야. 아니, 꿈이라고도 할 수 없어. 짧은 장면들이 단속적으로 덮쳐와. 번들거리는 짐승의 눈, 피의 형상, 파헤쳐진 두개골, 그리고 다시 맹수의 눈. 내 뱃속에서 올라온 것 같은 눈. 떨면서 눈을 뜨면 내 손을 확인해. 내 손톱이 아직 부드러운지, 내 이빨이 아직 온순한지.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아직 괜찮은 거야. 그런데 왜 자꾸만 가슴이 여위는 거지. 이젠 더이상 둥글지도 않아. 왜지. 왜 나는 이렇게 말라가는 거지. 무엇을 찌르려고 이렇게 날카로워지는 거지.



p.60

   저 여자가 왜 우는지 나는 몰라. 왜 내 얼굴을 삼킬 듯이 들여다보는지도 몰라. 왜 떨리는 손으로 내 손목의 붕대를 쓰다듬는지도 몰라.

   손목은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아픈 건 가슴이야. 뭔가가 명치에 걸려 있어. 그게 뭔지 몰라. 언제나 그게 거기 멈춰 있어. 이젠 브래지어를 하지 않아도 덩어리가 느껴져. 아무리 길게 숨을 내쉬어도 가슴이 시원하지 않아.

   어떤 고함이, 울부짖음이 겹겹이 뭉쳐져, 거기 박혀 있어. 고기 때문이야. 너무 많은 고기를 먹었어. 그 목숨들이 고스란히 그 자리에 걸려 있는 거야. 틀림없어. 피와 살은 모두 소화돼 몸 구석구석으로 흩어지고, 찌꺼기는 배설됐지만, 목숨들만은 끈질지게 명치에 달라붙어 있는 거야.

   한번만, 단 한번만 크게 소리치고 싶어. 캄캄한 창밖으로 달려 나가고 싶어. 그러면 이 덩어리가 몸 밖으로 뛰쳐나갈까. 그럴 수 있을까.

   아무도 날 도울 수 없어.

   아무도 날 살릴 수 없어.

   아무도 날 숨쉬게 할 수 없어.



p.104

   그녀는 그의 점퍼를 걸치고, 벗어놓았던 바지를 다시 입고, 김이 피어오르는 머그잔을 감싸쥐고 있었다. 슬리퍼를 신지 않은 맨발로 가볍게 바닥을 디딘 채였다.

   "춥지 않았어?"

   재차 묻는 그에게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힘들지 않았어?"

   "가만히 있기만 했는걸요. 바닥이 따뜻했어요."

   그녀는 놀라울 만큼 호기심이 없었고, 그 덕분에 어느 상황에서도 평정을 지킬 수 있는 것 같았다. 새로운 공간에 대한 탐색도 없었으며, 당연할 법한 감정의 표현도 없었다. 그저 자신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그녀의 내면에서는 아주 끔찍한 것,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어, 단지 그것과 일상을 병행한다는 것만으로 힘에 부친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일상에서는 호기심을 갖거나 탐색하거나 일일이 반응할 만한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은 건지도 몰랐다. 그런 짐작을 하게 되는 것은, 이따금 그녀의 눈이 단지 수동적이거나 백치스러운 담담함이 아니라 어떤 격렬함을, 동시에 그것을 자제하는 힘을 머금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지금 이 수간 그녀는 따뜻한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싸쥐고 추운 병아리처럼 몸을 웅크린 채 자신의 발치를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그 자세는 연민을 불러일으키기보다, 보는 사람을 불편하게 할 만큼 단단한 고독을 음영처럼 드러내고 있었다.



p.129

   J는 만류하는 그의 손을 뿌리치며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자신의 작품이, 아직 정도 떨어지지 않은 꽃들의 회오리가 무채색의 셔츠 속으로 파묻혀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p.146

   그제야 아내가 온 것을 안 듯 처제는 멍한 얼굴로 이편을 건너다보았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시선이었다. 처음으로 그는 그녀의 눈이 어린아이 같다고 생각했다. 어린아이가 아니면 가질 수 없는, 모든 것이 담긴, 그러나 동시에 모든 것이 비워진 눈이었다. 아니, 어쩌면 어린아이도 되기 이전의, 아무것도 눈동자에 담아본 적 없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그들에게서 몸을 돌려 베란다 쪽으로 다가갔다. 미닫이문을 열어 찬바람이 일시에 밀려들어오도록 했다. 그는 그녀의 연둣빛 몽고반점을 보았고, 거기 수액처럼 말라붙은 그의 타액과 정액의 흔적을 보았다. 갑자기 자신이 모든 것을 겪어버렸다고, 늙어버렸다고, 지금 죽는다 해도 두렵지 않을 것 같다고 느꼈다.

   그녀는 베란다 난간 너머로 번쩍이는 황금빛 젖가슴을 내밀고, 주황빛 꽃잎이 분분히 박힌 가랑이를 활짝 벌렸다. 흡사 햇빛이나 바람과 교접하려는 것 같았다. 가까워진 앰뷸런스의 사이렌, 터져나오는 비명과 탄성, 아이들의 고함, 골목 앞으로 모여드는 웅성거리는 소리들을 그는 들었다. 여러개의 급한 발소리들이 층계를 울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 베란다로 달려가, 그녀가 기대서 있는 난간을 뛰어넘어 날아오를 수 있을 것이다. 삼층 아래로 떨어져 머리를 박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만이 깨끗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에 못박혀 서서, 삶의 처음이자 마지막 순간인 듯, 활활 타오르는 꽃 같은 그녀의 육체, 밤사이 그가 찍은 어떤 장면보다 강렬한 이미지로 번쩍이는 육체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p.161

   그날 이후 그녀가 그에게 바란 것은 자신의 힘으로 그를 쉬게 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애써 기울인 여러 배려들에도 불구하고, 결혼 후에도 그는 여전히 지쳐 보였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일로 바빴고, 어쩌다 집에 머물러 있는 시간에는 마치 여관에 든 여행자처럼 서름서름해 보였다. 특히 작업이 잘 풀리지 않을 때면 그으 침묵은 고무처럼 질기고, 바위처럼 무거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한가지 사실을 깨달았는데, 그녀가 간절히 쉬게 해주고 싶었던 사람은 그가 아니라 그녀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열아홉살에 집을 떠난 뒤 누구의 힘도 빌지 않고 서울생활을 헤쳐나온 자신의 뒷모습을, 지친 그를 통해 그저 비춰보았던 것뿐 아닐까.


p.179

   보고 있던 보호사가 다가와 그녀들을 로비 한켠의 면담실로 안내했다. 원무과 옆의 면회실로 내려오기 어려울 만큼 증상이 무거운 환자들은 이곳에서 가족과 면회한다고 했다. 아마 의사와의 면담이 진행되는 곳인 것 같았다.

   그녀가 탁자에 음식을 풀어놓으려 하자 영혜는 말했다.

   언니. 이제 이런 거 안 가져와도 돼.

   영혜는 웃었다.

   나, 이제 안 먹어도 돼.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녀는 홀린 듯이 영혜의 얼굴을 보았다. 이렇게 밝은 영혜의 얼굴을 그녀는 오랜만에, 아니, 어쩌면 처음 보았다. 그녀는 물었다.

   아까는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언닌, 알고 있었어?

   대답 대신 영혜는 물었다.

   …뭘?

   난 몰랐거든. 나무들이 똑바로 서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이제야 알게 됐어. 모두 두 팔로 땅을 받치고 있는 거더라구. 봐, 저거봐, 놀랍지 않아?

   영혜는 벌떡 일어서서 창을 가리켰다.

   모두, 모두 다 물구나무서 있어.

   까르륵 영혜가 웃었다. 그제야 그녀는 영혜의 표정이 어린 시절의 어느 순간과 닮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외꺼풀 눈이 가늘어지며 온통 까매지는 순간, 영혜의 입에서 까르륵, 무구한 웃음이 터져나오곤 했다.

   어떻게 내가 알게 됐는지 알아? 꿈에 말이야. 내가 물구나무서 있었는데… 내 몸에서 입사귀가 자라고, 내 손에서 뿌리가 돋아서… 땅속으로 파고들었어. 끝없이, 끝없이… 사타구니에서 꽃이 피어나려고 해서 다리를 벌렸는데, 활짝 벌렸는데

   열에 들뜬 영혜의 두 눈을 그녀는 우두망찰 건너다보았다.

   나, 몸에 물을 맞아야 하는데. 언니, 나 이런 음식 필요없어. 물이 필요한데.



p.191

   왜, 죽으면 안되는 거야.

   그 질문에 그녀는 어떻게 대답해야 옳았을까. 그걸 대체 말이라고 하느냐고, 온힘을 다해 화라도 냈어야 했을까.

   오래전 그녀는 영혜와 함께 산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었다. 그때 아홉살이었던 영혜는 말했다. 우리, 그냥 돌아가지 말자. 그녀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금방 어두워질 텐데. 어서 길을 찾아야지.

   시간이 훌쩍 흐른 뒤에야 그녀는 그때의 영혜를 이해했다. 아버지의 손찌검은 유독 영혜를 향한 것이었다. 영호야 맞은 만큼 동네 아이들을 패주고 다니는 녀석이었으니 괴로움이 덜했을 것이고, 그녀 자신은 지친 어머니 대신 술국을 끓여주는 맏딸이었으니 아버지도 알게모르게 그녀에게만은 조심스러워 했다. 온순하나 고지식해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지 못하던 영혜는 어떤 저항도 하지 않았고, 다만 그 모든 것을 뼛속까지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제 그녀는 안다. 그때 맏딸로서 실천했던 자신의 성실함은 조숙함이 아니라 비겁함이었다는 것을. 다만 생존의 한 방식이었을 뿐임을.

   막을 수 없었을까. 영혜의 뼛속에 아무도 짐작 못할 것들이 스며드는 것을. 해질녘이면 대문간에 혼자 나가 서 있던 영혜의 어린 뒷모습을. 결국 산 반대편 길로 내려가 집이 있는 소읍으로 나가는 경운기를 얻어타고 그들은 저물녘의 낯선 길을 달렸다. 그녀는 안도했지만 영혜는 기뻐하지 않았다. 아무 말없이, 저녁빛에 불타는 미루나무들을 보고 있었을 뿐이다.


   그 저녁, 영혜의 말대로 그들이 영영 집을 떠났다면 모든 것은 달라졌을까.

   그날의 가족모임에서, 아버지가 영혜의 뺨을 치기 전에 그녀가 더 세게 팔을 붙잡았다면 모든 것은 달라졌을까.

   영혜가 처음 제부를 인사시키려 데려왔을 때, 어쩐지 인상이 차가워 보여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육감대로 그 결혼을 그녀가 만류했다면 모든 것은 달라졌을까.

   그렇게 그녀는 영혜의 운명에 작용했을 변수들을 불러내는 일에 골몰할 때가 있었다. 동생의 삶에 놓인 바둑돌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헤아리는 일은 부질없었을뿐더러 가능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생각을 멈출 수는 없었다.

   만일 그녀가 그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마침내 거기에 생각이 이를 때, 그녀의 머리는 둔중히 마비되곤 했다.


p.196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기억이 그녀에게 있다. 아마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년 전 사월, 그러니까 그가 영혜의 비디오를 찍던 해의 봄에 그녀는 한달 가까이 하혈을 했다. 피에 젖은 속옷을 빨 때마다 수개월 전 영혜의 손목에서 허공으로 솟구치던 선혈이 떠오르는 까닭을 그녀는 알 수 없었다. 병원에 가는 것이 두려워 하루하루 진찰을 미루며 그녀는 생각했다. 만일 나쁜 병이라면, 남은 시간은 얼마나 될까. 일년. 육개월. 아니면 삼개월. 그때 그녀가 처음으로 생생하게 의식한 것은 그와 함께 살아온 긴 시간이었다. 기쁨과 자연스러움이 제거된 시간. 최선을 다한 인내와 배려만으로 이어진 시간. 바로 그녀 자신이 선택한 시간이었다.

   마침내 지우를 낳은 산부인과로 향하던 오전, 그녀는 국철 왕십리역의 실외승강장에 서서 유난히 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맞은편에는 후락한 철조 가건물들이 서 있었고, 차량이 다니지 않는 가장자리의 침묵들 사이로 손질 안된 풀들이 웃자라 있었다. 문득 이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느낌이 드는 것에 그녀는 놀랐다. 사실이었다. 그녀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오래전의 어린시절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선량한 인간임을 믿었으며, 그 믿음대로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성실했고, 나름대로 성공했으며, 언제까지나 그럴 것이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후락한 가건물과 웃자란 풀들 앞에서 그녀는 단 한번도 살아본 적 없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떨림과 수치심을 숨기고 침대에 올랐을 때, 중년의 남자 의사는 차가운 복강경을 질 속 깊이 밀어넣고는 질벽에 붙은 혀같은 폴립을 떼어냈다. 날카로운 통증에 그녀는 몸을 뒤틀었다.

   이것 때문에 출혈이 있었던 거군요. 깨끗이 떼어냈으니 며칠간 출혈이 더 심해졌다가 멎을 겁니다. 난소엔 이상이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순간 그녀는 뜻밖의 고통을 느꼈다. 살아야 할 시간이 다시 기한 없이 남아 있었는데, 그것이 조금도 기쁘지 않았던 것이다. 지난 한달 동안 염려했던 큰병의 가능성은 오히려 사소한 번민에 불과했다는 것을 그녀는 깨달았다. 돌아오는 길, 다시 왕십리역의 승강장에 섰을 때 그녀의 다리가 허전거린 것은 방금 시술한 자리의 통증 때문만은 아니었다. 마침내 굉음과 함께 기차가 플랫폼으로 밀려들어오자 그녀는 더듬더듬 철제의자 뒤로 몸을 숨겼다. 그녀 안의 누군가가 자신을 그 단단한 차체 앞으로 내던질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후 그녀가 보낸 사개월여의 시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혈은 이주쯤 더 계속되다가 상처가 아물며 멈췄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몸에 상처가 뚫려 있다고 느꼈다. 마치 몸뚱이보다 크게 벌어진 상처여서, 그 캄캄한 구멍 속으로 온몸이 빨려들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p.230

   범법자들을 부르는 수많은 세부명칭이 있는 이유는 그들을 법의 어휘로 호명할 때 그들이 지닌 불온성이 '이해가능한' 대상으로 순화되기 때문이다. 그녀는 단지 고기를 먹고 싶지 않아서 먹지 않은 것일 뿐이다. 그저 몸이 일러주는 대로 소박한 원칙을 실천했던 그녀에게, 사람들은 '채식주의자'라는 이름표를 달아주려 했다. 그녀의 시간과 그녀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누군가가 실철하는 행위와 사람들이 그것의 속성을 규정하는 행위 사이에는 결코 해소할 수 없는 간극이 굳게 버티고 있음을 지켜보게 된다. '주의(主義)라는 말은 대개 특정 대상에 대한 강력한 신념을 전제로 한다. 이런 점에서 그녀는 '채식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단지 자연습럽게 '고기를 먹지 않는' 방향으로 이끌렸을 뿐이다. 사람들은 그녀가 왜 고기를 먹지 않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타인을 이해할 수 없을 때 그/녀를 그저 자연스럽게 움직여가도록 놓아주는 것도 이해의 방편 중 하나이다. 생각보다 타인의 습성과 문화에 대해서 이해하려 노력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채식주의자'는 사람들이 그녀의 행위를 이해하기 쉬운 속성으로 환원한 호칭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녀를 채식주의자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녀가 고기를 먹지 않게 된 이유이다. 현실에 파동을 일으킨 것은 그녀의 꿈이었다. 꿈은 다른 서체(이탤릭체)로 기록된다. 꿈의 언어와 현실의 언어는 다소간 다른 층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흐릿하게 번진 그녀의 음성은 그녀 자신에게도 닿을 수 없을 것처럼 낮고 조용하게 들려온다. 추상적인 이미지에 가까웠던 꿈은 시간과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점처 구체적인 트라우마의 실체에 근접해간다. 그녀를 식육의 세계로부터 잘라낸 것은 아버지의 잔인함인가, 남편의 잔인함인가, 아니면 자신을 포함한 인간 모두의 잔인함인가. 그녀를 물었다는 이유로 비참하고 고통스럽게 죽음을 맞은 개에 대한 죄의식은 꿈의 기저에 분명하게 자리하고 있다. 일상 속에서 그녀를 채근하고 두렵게 하고 불편하게 했던 남편에 대한 책망도 꿈속에 섞여든다. 고기조각처럼 둔탁하고 칼조각처럼 반짝거리는 불안감.

   자신을 포함한 인간의 야수성을 감지하기 시작하면서 그녀는 처벌의 한 형태로 '자기파괴'를 선택한다. 사람들은 농담처럼 '남의 살'이 맛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는 '남의 살'을 베어먹고 물어뜯는 식육의 행위가 지닌 파괴력에 전율한다. 그녀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다른 생명체를 먹는 것에 대한 모종의 죄의식에 시달리고 있는 듯하다. 그녀는 자신의 세포 하나하나를 이루고 있을 '남의 살'을 몸피에서 덜어낸다. 과잉소비의 쾌락을 위해서 수많은 생명체를 공장 구조에서 '생산'하는 것을 윤리적으로 비판하는 행위가 오히려 비정상적인 것으로 평가되는 시대에 말이다. 팽창의 시대에 축소를 택한 그녀에게 남은 일은 시대착오의 의미 그대로, 살아 있는 화석이 되는 것뿐이다.

   그녀가 인간에서 비인간으로 '퇴행적 진화'를 하는 과정은 흡사 일상 속의 고행처럼 보인다. 이 고행자에게는 심오한 각성을 하겠다는 형이상학적 목표도 없다. 그녀는 그저 꿈이 시키는 대로, 몸이 시키는 대로, 시간 속에서 풍화작용을 시작하는 것일 따름이다. 대부분의 신비가들은 일상과 몽상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광기를 경험하게 된다. 진리를 향한 명철한 의식은 살쾡이의 눈빛처럼 위협적으로 빛난다. 세속에서 경험하기 힘든 절대성의 아찔한 경지를 맛본 자들의 눈빛은 똑바로 미쳐 있다. 영혜, 그녀의 말과 몸짓은 똑바로 미친 자만이 담지할 수 있는 명료한 광기를 향해 나아간다. 영혜, 그녀는 어린아이에 가까워졌기에 비가시적인 세계의 진실을 엿볼 수 있었으리라. 집에서 집으로, 집에서 병원으로, 병원에서 병원으로, 죽음의 끝을 향해 나아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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