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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컹리 Aug 15. 2018

사다리 걷어차기

#93 장하준 [사다리 걷어차기]


p.8

   선진국들은 자신들이 경제 발전을 도모하던 시기에는 보호 관세와 정부 보조금을 통해 산업을 발전시켜 놓고 정작 지금에 와서는 후진국들에게 자유 무역을 채택하고, 보조금을 철폐하라고 강요한다. 과거 자신들은 여성, 빈민, 저학력자, 유색 인종에 대해서는 투표권조차 주지 않았으면서 지금은 후진국들에게 민주주의가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면 경제 발전도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자신들은 다른 나라의 특허권과 상표권을 밥 먹듯이 침해했으면서도 이제는 후진국들에게 지적 재산권을 선진국 수준으로 보호하라고 압력을 넣는다.



p.12

   또 우리 역시 위선적인 행동을 피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과거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강력하게 보호 무역을 하고 외국인 투자를 규제했다. 그런데 이제는 WTO 협상에서 앞장서서 후진국들에게 관세 장벽을 낮추고 외국인 투자 규제를 풀라고 떠들고 다닌다. 신병 시절 구타를 받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일등병이 신병을 구타하는 것과 유사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끝나면 그래도 낫다. 공산물 관세나 외국인 투자 문제가 나오면 개방의 목소리를 높이다가, 정작 우리에게 불리한 농산물 보호 문제가 나오면 우리는 아직도 후진국이라며 '개발도상국 지위 유지'를 협상의 목표로 삼는다. 자기 편한 대로 이편에 붙었다가 저편에 붙었다가 하는 '박쥐 외교'나 다름없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식의 '박쥐 외교'가 우리가 강한 (공업) 분야에서는 이득을 최대화하고, 우리가 약한 (농업) 분야에서는 손해를 최소화하는, 선진국과 후진국의 중간에 낀 우리나라 같은 입장에서는 국익을 증진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변호한다. 그러나 이는 지극히 근시안적인 관점이다. 이렇게 '소승적'으로 행동하다가는 장기적으로는 국제 사회에서 믿을 수 없는 나라, 말 바꾸는 나라로 낙인 찍혀 고립되기 쉽고, 그렇게 되면 장기적으로는 국익을 해치게 된다.

   차라리 우리의 중간자적 입장을 이용하여 국제 사회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하면서 영향력을 높이려 하는 '대승적' 민족주의를 추구하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국익을 위하는 길이다. 우리의 경우 선진국에게는 얼마 전까지 후진국이었던 우리의 바탕으로 후진국의 어려움에 대해 알려 줌으로써 현재도 후진국에 불리하게 되어 있고, 점점 더 이들에게 불리하게 되어 가는 국제 경제 질서를 개선하는 데 촉매 역할을 할 수 있다. 또 후진국들에게는 세계 시장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경제 성장을 이루어 낸 우리의 경험을 들려주면서 개방을 무조건 두려워하지만 말고 세계화에 동참하되 같이 힘을 합하여 부당한 국제 경제 질서를 차근차근 바꾸어 나아가자고 권할 수 있다.



p.24

   리스트는 다음으로 자유 무역은 비슷한 수준의 산업적 발전을 이룬 국가들 사이에서 이루어질 때 이득이 된다고 주장한다. 당시 영국을 따라 잡으려는 다른 나라의 경제학자들처럼 리스트는 자유 무역이 영국에게만 이득이 될 뿐 영국보다 덜 발전된 국가에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물론 자유 무역이 개발도상국의 농산물 수출업자에게는 유익할 수 있음을 인정했지만, 제조업자에게는 유해할 수 있는 만큼 장기적으로는 국가 경제에 해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리스트 시대의 영국 정치인들과 경제학자들이 자유 무역의 이점에 대해 설교한 것은 리스트가 '코스모폴리티컬 독트린 cosmopolicital doctrine'이라 이름 붙인 보편적 표현에는 포함될지 몰라도 자국만의 이익을 위한 발상으로 간주되는데, 그에 대한 리스트의 평가는 음미할 만하다.


   사다리를 타고 정상에 오른 사람이 그 사다리를 걷어차 버리는 것은 다른 이들이 그 뒤를 이어 정상에 오를 수 있는 수단을 빼앗아 버리는 행위로, 매우 잘 알려진 교활한 방법이다. 바로 이 방법에 스미스 Adam Smith의 코스모폴리티컬 독트린과 동시대 위대한 정치가 피트 William Pitt의 코스모폴리티컬 경향 cosmopolitical tendencies, 그리고 이후 피트의 정치적 후계자들의 비밀이 담겨 있다.

   보호 관세와 항해규제를 통해 다른 국가들이 감히 경쟁에 나설 수 없을 정도로 산업과 운송업을 발전시킨 국가의 입장에서는 정작 자신이 딛고 올라온 사다리(정책, 제도)는 치워 버리고 다른 국가들에게는 자유 무역의 장점을 강조하면서, 지금까지 자신이 잘못된 길을 걸어왔고 뒤늦게 자유 무역의 가치를 깨달았고 참회하는 어조로 선언하는 것보다 더 현명한 일은 없을 것이다.



p.41

   다행히도 1980년대부터 작은 정부의 장점, 자유방임주의 정책, 그리고 개방적 국제 관계를 강조하는 신자유주의가 등장하면서 대부분의 국가들이 개입주의적 정책을 포기하였다. 이는 1970년대 말 이미 '바람직한good' 정책을 추구하고 있던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개발도상국들의 경우 경제 성장이 둔화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성장의 실패가 1980년대 초기의 일련의 경제 위기로 표출되면서 구시대적인 개입주의 및 보호주의의 한계가 노출되었다.

   그에 따라 대부분의 개발도상국이 신자유주의에 바탕을 둔 정책 개혁을 실시하기 시작하였는데, 바그와티Bhagwati는 그오 관련 이 시기에 나타난 가장 대표적인 변화로서 1980년대까지 종속 이론Dependency theory의 권위자였던 카르도소Fernando Henrique Cardoso 브라질 대통령이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인 것과 전통적으로 반미 국가이던 멕시코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North American Free Trade Agreement)에 가입한 것, 그리고 한때 보호주의와 규제의 철옹성으로 불리던 인도가 자유ㆍ개방형 경제로 전환한 것 등의 세 가지 사례를 꼽고 있다. 자유화와 개방을 지향한 이러한 변화의 흐름은 1989년 공산주의의 붕괴로 그 절정에 도달했다. 공산주의의 붕괴로 2차 대전 이후 반세기 가까운 세월을 풍미했던 국제적 폐쇄 무역 체제라는 '역사적 이상 현상'에 종지부가 찍혔기 때문이다. 국가적 차원의 이러한 정책 변화들과 함께 세계무역기구WTO로 대변되는 새로운 국제통치기구들의 설립으로 과거 자유주의의 '황금 시대'(1870~1914년)에 필적할 만한 잠재적 번영의 가능성을 가진 새로운 국제 경제 체제가 만들어졌다. 세계무역기구의 초대 사무총장을 지낸 루지에르Renato Ruggiero의 주장에 따르면 이 새로운 경제 체제 덕분에 이제 인류는 "국제 빈곤 문제를 21세기 초기에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게 되었다. 불과 십수 년 전만 해도 비현실적인 주장이었지만, 이제는 현실성 있는 가능성이 되었다."


   이후 확인되겠지만 이와 같은 내용의 자본주의 정사official history는 강한 설득력을 가진 듯하지만 근본적으로 사실을 오도하고 있다. 다만 19세기 말을 자유방임주의의 시기로 간주할 만한 근거가 몇 가지 있음은 인정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p.51

   조지 1세Geroge Ⅰ시기(1714~1727년)에 영국의 초대 총리를 역임한 월폴Robert Walpole에 의해 발의된 1721년의 상법 개정은 영국의 산업 및 무역 정책들의 초점에 대단한 변화를 가져왔다.

   1721년까지 영국 정부의 정책들은 (식민화 및 영국과의 교역은 반드시 영국 선박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항해조례 등을 통해 실행된 것과 같이) 대체로 무역을 장악하고, 정부 수입을 늘리는 데 중점을 두었다. 위에서 언급된 것처럼 모직업을 장려한 것은 매우 중요한 예외적 경우였지만 이것 또한 부분적으로는 정부 수입을 늘리기 위한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와는 반대로 1721년 이후 도입된 정책들은 제조업을 장려하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된 것들이었다. 이 새로운 법에 대한 왕의 의회 연설을 통해 월폴은 "제조품의 수출과 원재자의 수입이 국민 복지를 위한 최선의 길임을 확신한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1721년의 법률 제정과 이후 수반된 추가적 정책 변화들에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조치들이 포함되었다. 첫째, 제조업자들이 수입하는 원자재에 대한 수입 관세는 감소되었거나 심지어 폐지되기도 하였다. 둘째, 수출용 제조품의 생산에 필요한 원자재를 수입할 경우에는 관세 환급분이 인상되었다. 비버 가죽의  수입 관세는 인하되었고, 수출을 목적으로 수입했을 경우에는 지불된  수입 관세의 50퍼센트를 환급해 주는 식이었다. 셋째, 대부분의 제조품들의 수출 관세는 폐지되었다. 넷째, 수입 제조품의 관세는 현저히 인상되었다. 다섯째, 수출 보조금은 비단silk 관련 상품들과 화약 등의 새로운 상품들에 대해 각각 1722년과 1731년부터 확대 지급되었고, 범포와 정제 설탕에 대한 수출 지원금은 각각 1731년과 1733년에 인상되었다. 여섯째, 파렴치한 제조업자들에 의해 해외 시장에서의 영국 상품의 명성이 손상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제조품들, 특히 섬유 제품의 품질을 감독할 수 있는 법률을 마련하였다.

   브리스코Brisco는 이 새로운 법률의 근본 원리가 "(제조업자들은) 국내의 시장에서 벌어지는 수입 상품들과의 경쟁에서 보호되어야 한다, 가능하다면 정부 보조금과 공제를 통해 제조업을 장려해야 한다."는 데 있다고 정리하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1721년의 개정을 통해 제정된 법률들과 이 법률들의 기본 원리들이 2차 대전 이후 일본, 한국 그리고 타이완 같은 국가들이 사용한 것과 너무 비슷하다는 사실이다.



p.55

   영국이 자유 무역 체제로 전환할 수 있었던 것은 선진화된 기술력을 지녔기 때문이며, 이런 기술력 뒤에는 '오랜 기간 동안 유지된 높은 관세 장벽'이 있었다는 사실은 주목해야 할 중요한 사항이다. 19세기 중반에 발생한 영국 경제의 전반적인 자유화(무역자유화는 그 일부임)는 자유방임주의에 의해 이룩된 것이 아니라 정부의 감독 아래 진행된 고도의 관제 사건임에도 역시 주목해야 한다. 영국의 경우 또한 "매우 점진적으로 자유 무역 체제를 도입했다는 사실에도 주목해야 한다. <국부론 Wealth of Nations>의 발간에서 1860년의 글래드스톤 예산까지는 84년이 소요되었고, 워털루 전쟁에서 1846년의 승리까지는 31년이 소요되었다.

   더욱이 영국의 자유 무역 체제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1880년대에 이르자 어려움에 처한 몇몇 제조업자들이 정부에 보호를 요청하였다. 또 20세기 초기에는 미국과 독일이 영국의 제조업 분야를 빠르게 잠식해 들어왔고, 그에 따라 영국의 정치권에서는 보호주의의 제도입 여부를 놓고 뜨거운 논쟁을 벌였다. 이런 정세를 입증하는 것은 당시의 저명한 정치인 채임벌린Joseph Chamberlain의 지휘 아래 1903년에 설립된 관세개혁연맹Tariff Reform League의 영향력이었다. 그 결과 영국은 더 이상 제조업 분야의 최강국이 아님을 인정하고 1932년 관세를 광범위하게 재도입함으로써 영국의 자유 무역 시대는 그 막을 내렸다.



p.61

   관세와 노예 제도를 둘러싸고 빚어진 이 같은 북부와 남부 사이의 긴장감은 지속되었고, 결국 남북전쟁 시기(1861~1865년)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최고조에 달하게 되었다. 그와 관련 흔히들 노예 제도를 남북전쟁의 유일한 원인으로 제시하곤 했는데, 관세 문제 역시 남북전쟁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 개러티Garraty와 칸스Carnes에 따르면 "북부 사람들의 대다수가 노예 제도에 반대하는 전쟁까지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남부의 주들이 연방을 탈퇴한 주된 이유는 노예 제도였지만, 북부 사람들은 노예 제도가 아니라 남부의 연방 탈퇴에 반발했던 것으로, 거기에는 북부 사람들의 연방에 대한 헌신적 태도가 자리 잡고 있었다." 게다가 남부에서는 관세 문제를 자신들이 연방에 속함으로써 지게 되는 가장 큰 부담이라고 생각했지만, 노예 제도의 폐지에 대서는 여전히 가능성이 희박한 것으로 간주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남부의 연방 탈퇴에 있어서 관세 문제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링큰A.Lincoln의 당선(1860년)은 강력한 보호주의 정책을 유지하겠다는 공화당의 대선 공약이 없었더라면 커다란 난관에 부딪혔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보호주의를 선호하는 펜실베이나와 뉴저지 같은 주들이 공화당으로 돌아서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화당의 보호 무역에 관한 지지를 표방한 공약의 '12번째 강령'은 자유 무역 세력들을 무마시키기 위해 매우 조심스럽고 모호하게 작성되었다. 때문에 보호주의를 선호하던 주들은 링컨을 보호주의자로 보았고, 따라서 그가 당선되면 보호주의의 정신에 입각한 정책들을 펴 줄 것으로 믿었다.

   링컨의 정치 인생은 강경한 보호주의 노선을 취하던 휘그당에서 시작되었으며, 그는 클레이Henry Clay의 열렬한 신봉자였다. 클레이는 '영국식' 자유 무역과는 전혀 다른, 유치산업 보호(모국산업의 보호)와 사회간접자본 투자(국토 발전internal improvement)로 이루어진 '미국식' 체제를 주장한 인물이었는데, 링컨은 그러한 견해를 전적으로 지지한 것이다. 다양한 세력들로 이루어진 신생 정당의 단결을 위해 링컨은 선거 기간 동안 관세 문제를 포함해서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대부분의 문제에 대해 침묵으로 대처하였지만 필요에 따라서는 보호주의에 대한 자신의 확고한 신념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링컨은 노예 제도에 대해 지속적으로 반대하였지만 그렇다고 노예 제도의 폐지를 강력히 지지하는 입장도 아니었다. 그는 흑인들을 열등한 인종으로 보았고, 흑인들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는 것에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이런 정황들을 감안할 때 남부는 링컨의 노예 제도에 관한 입장보다는 그의 관세에 관한 입장에 대해 더 많은 염려를 했을 것이다. 실제로 링컨은 연방제의 존립을 위해서라면 남부의 노예 제도를 인정할 의사가 있음을 남북전쟁 기간 동안 명백하게 밝혔었다. 그러니까 1862년의 링컨의 노예해방 선언은 그의 도덕적 신념보다는 남북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전략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p.67

   19세기의 미국은 보호주의 정책의 철옹성일 뿐만 아니라 보호주의의 사상적 고향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미국 학자들은 "새로운 국가는 구세계 즉 유럽에 존재하는 것과는 다른 정치 제도 및 경제 조건을 가정하고 세워진, 새로운 경제학을 필요로 한다."고 믿었다. 몇몇 학자들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유럽의 대기업들이 공격적 덤핑으로 미국 기업을 몰락시키고 시장을 독점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므로 국제 경쟁력을 갖춘 기업이라도 보호 관세를 통해 정부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세기 말까지도 대다수의 미국 경제학자들이 유치산업 보호론을 지지하였다. 유치산업 보호론을 지지한 레이몬드와 매튜 케리는 19세기 초반의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학자들이었고, 케리의 아들 헨리 케리는 19세기 중기부터 후기에 걸쳐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학자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50년대 초기에 헨리 케리를 가리켜 '미국의 유일한 중요 경제학자'라고 일컬었는데 그는 링컨 정부에서 경제 고문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불행히도 이제 이 경제학자들 중 대부분은 의도적으로 역사에서 지워졌지만, 당시 미국 경제학을 이끌었던 이들은 (그 당시 영국 경제학자들이 이류로 여긴) 미국의 고전주의학파 경제학자들이 아니라 바로 이들이었다.

   당시 상황 중에서 특히 흥미로운 사실은 '따라잡기 기간' 동안의 미국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이 영국 고전주의학파가 주장한 자유 무역 이론이 미국의 실정에 맞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라이너트의 경우 제퍼슨Thomas Jefferson이 리카도의 저서인 <원론Principles>의 미국판 출간을 금지하려는 (헛된) 시도를 한 이유가 바로 이와 같은 우려 때문이었다고 보고 있다. 라이너트는 또 리스트와 동시대에 살았던 어느 미 의회 의원이 했던 말을 리스트의 글에서 인용하고 있는데, 이 의원에 따르면 영국의 무역 이론은 "대부분의 영국 제조품과 마찬가지로 수출을 겨냥해 만든 것이지, 국내 소비용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19세기 초기 보호주의를 지지한 저명한 정치인이자 링컨의 존경을 받았던 헨리 클레이는 자신의 경제 강령을 '영국식'의 자유 무역 체제에 상반되는 '미국식 체제'라고 일컬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헨리 케리는 자유 무역이란 미국을 영원히 1차 산업품 수출국을 묶어 두려는 영국 제국주의 체제의 일부라고 주장하였고, 그가 주요 지식 창구의 역할을 담당하였던 1860년의 선거 운동 기간 동안에는 보호주의를 지지하는 주 출신의 공화당원들이 민주당원들을 가리켜 "남부-친영국-반관세-반연방주의적 정당"이라고 맹렬히 비난하는 일이 벌어졌다.



p.74

   시민혁명 이전의 프랑스의 경제 정책은 루이 14세 시기의 유명한 재무장관이었던 콜베르Jean-Baptiste Colbert의 이름을 딴 이른바 콜베르주의Colbertism라 알려진, 강력한 개입주의적 정책이었다. 예를 들어 18세기 초기의 프랑스의 경우 영국보다 상대적으로 기술력이 낮았기 때문에 다수의 숙련된 노동 인력을 영국으로부터 영입하는 일에 정부가 직접 앞장서서 나섰다. 더욱이 당시의 다른 유럽 국가들이 그랬듯이 시민혁명 이전의 프랑스 정부는 특정 기술을 입수한 이들에게 보조금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산업스파이 활동을 조장하였고, 심지어 이름은 그럴듯한 외국 제조품 관찰관이라는 관직을 만들어 놓고 실제로는 산업스파이 활동을 지휘하도록 하였다. 프랑스가 영국과의 기술력 차이를 극복하고 시민혁명 시기까지 성공적인 산업화를 이룰 수 있었던 데에는 프랑스 정부의 이 같은 노력도 한몫을 하였다.

   시민혁명은 프랑스의 이런 방향에 상당한 변화를 일으켰다. 밀워드와 사울은 이 시민혁명이 프랑스의 이런 방향에 상당한 변화를 일으켰다. 밀워드와 사울은 이 시민혁명이 프랑스 정부의 경제 정책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절대왕정의 붕괴는 혁명가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더욱 자유방임적인 제도를 도입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시민혁명 직후의 정부들, 특히 나폴레옹 정부는 산업 발전, 그 중에서도 기술 발전을 촉진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런 노력은 사업 박람회의 조직, 특정 기계의 개발을 위한 공개 경쟁, 그리고 정부와의 협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기업협회의 설립 등으 ㅣ방법을 통해 이루어졌다.

   자유방임주의 정책은 나폴레옹 정권의 붕괴 이후 프랑스에서 뿌리를 내리게 된 이래 이후 2차 대전까지 존속되었는데, 많은 역사가들은 자유방임주의 체제의 한계가 19세기에 나타난 프랑스 산업의 상대적 침체으 주요 원인으로 간주하고 있다.



p.98

   근래의 한국 경제의 위기와 일본 경제의 지속적인 불경기로 인해 적극적인 산업ㆍ무역ㆍ기술ITT 정책이 잘못된 것임이 증명되었다는 논리가 힘을 얻고 있다. 여기서는 이와 같은 논쟁을 다루지는 않겠지만 그와 관련된 몇 가지 사항을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근래의 일본과 한국의 경제 문제가 적극적인 산업ㆍ무역ㆍ기술ITT 정책에서 기인된 것인지의 여부를 떠나 이들 국가의 '기적'적인 경제 성장 뒤에 산업ㆍ무역ㆍ기술ITT 정책이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둘째, 타이완 역시 적극적인 산업ㆍ무역ㆍ기술ITT 정책을 채택해 왔지만 금융 위기와 거시 경제 위기를 겪지 않았다. 셋째, 일본 경제를 연구해 온 전문가들은 근래의 경기 침체를 정부의 산업 정책 탓으로 돌릴 수 없다는 점에 동의하고 있다. 오히려 구조적 과잉 저축과 (거품 경제를 일으킨) 시기 부적절한 금융 자율화, 그리고 거시 경제의 운용과 같은 요소들이 근래의 경기 침체와 더욱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넷째, 한국의 경우 근래에 위기를 일으킨 채무 증가가 시작된 1990년대 중반에는 산업 정책들이 대부분 소멸된 상태였다. 따라서 적극적인 산업ㆍ무역ㆍ기술ITT 정책이 근래 경제 위기의 원인이라고 비난 받는 것은 부적절하다. 오히려 적극적인 산업ㆍ무역ㆍ기술ITT 정책의 소멸이 '중복 투자duplicative investments'를 더욱 용이하게 함으로써 경제 위기의 원인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p.101

1. 식민지 국가들에 대한 앞서가기 전략

   영국은 식민지 국가들, 특히 미국의 제조업 발전을 막기 위해 일련의 강력한 정책을 도입하였다. 리스트는 대 피트가 1770년에 "뉴잉글랜드의 최초의 제조업체 설립 시도에 불안감을 느꼈으며, 식민지 국가들은 말편자의 못을 제조하는 것조차 허락되어서는 안 된다고 단언하였다."고 전한다. 또 브리스코의 월폴 통치 하의 식민지 정책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술은 그 같은 영국 계획의 본질을 보여 준다.


   식민지의 경우 통상 및 산업 규제들을 통해 영국이 발전시키고자 하는 산업에 필요한 원자재만을 생산하도록 제한되었고, 어떤 식으로든 영국의 제조업체들과 경쟁할 가능성이 있는 식민지 제조업체에 대해서는 해당 사업들을 포기하도록 강요하였으며, 식민지 시장은 영국의 무역 상인들과 제조업자들에게만 개방되었다.


   영국이 식민지에 사용한 정책들은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담고 있다.

   첫째, 식민지 국가들에게 1차 산업품의 생산을 권장하는 정책들이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1720년대에 월폴은 미국에 수출되는 상품에는 수 보조금을 제공하였고, 미국에서 수입되는 원자재(대마, 목재, 가공된 목재)에 대한 수입 관세는 폐지하였는데, 이 모두는 식민지 국가들에게 원자재의 생산을 권장함으로써 이들이 영국과 경쟁하게 될 수 있는 제조업에 뛰어드는 것을 견제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것은 코브던이 곡물법의 폐지를 정당화할 때 사용했던 논리와 동일한 것인데, 그는 곡물법이 유럽과 미국의 농산물 수출을 어렵게 만듦으로써 결국에는 이들의 산업화를 돕는 꼴이라고 생각하였다.

   둘째, 일부 제조업 활동은 금지되었다. 예를 들어 미국에 새로운 압연 공장과 절단제강 공장이 건설되는 것을 금지함으로써 미국의 철강 산업이 고부가가치 상품의 생산보다는 무쇠와 철봉 같은 저부가가치 상품의 생산에 주력하게 만드는 식이었다. 몇몇 역사가들은 당시의 미국이 제조업 분야에서 비교우위를 갖고 있지 못했으므로 이와 같은 영국의 정책이 미국 경제에 실질적인 피해를 주지는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안약 미국이 (농업과 상업을 중심으로 한) 발전의 초기 단계를 넘어서까지 식민지로 남아 있었다면 이런 정책이 미국의 산업 발전에 중대한 장애 요소가 되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온당한 것 같다.

   셋째, 영국 상품들과 경쟁 관계에 있던 식민지 상품들의 수출이 금지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18세기 인도의 면 섬유 산업이 갤리코라는 (영국의 면 섬유보다) 우수한 상품을 생산하고도 영국의 인도산 면 섬유 제품에 대한 수입 금지 조치 이후 커다란 위기에 직면하게 된 것이 하나의 사례라 할 수 있다. 또 다른 사례로 영국은 1699년 (양모법을 통해) 식민지 국가들의 양모 옷감의 수출을 금지하였고, 그 결과 아일랜드의 모직업이 몰락하고 말았으며, 미국 내의 모직업체 설립 또한 억제된 것을 들 수 있다. 1732년에는 미국의 비버 가죽으로 만든 모자 산업을 겨낭한 법이 제정되었는데, 이 법에 의해 식민지 국가들이 비버 가죽으로 만든 모자를 다른 국가 또는 식민지에 수출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넷째, 식민지 당국이 관세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였고, 재정 마련을 위해 불가피하게 필요한 경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관세의 효과를 상쇄시키는 조치가 취해졌다. 1859년 인도의 영국 식민지 당국은 순수한 재정상의 이유로 섬유 상품에 대해 (3~10퍼센트 정도의) 약간의 수입 관세를 부과하면서 '공평한 경쟁의 장'을 제공해야 한다는 이유로 인도의 섬유 생산업자들에게도 수입 관세와 같은 수준의 세금을 부과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보상 조치'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그하고 영국의 면직업자들은 수입 관세를 폐지시키기 위해 지속적으로 정부에 압력을 가하였고, 그 결과 1882년 결국 섬유 상품에 대한 수입 관세가 폐지되었다. 1890년대 인도의 영국 식민지 당국은 다시 한 번 면 상품에 대한 수입 관세를 부활시키려는 시도를 감행하려 했지만 ─이번에는 재정상의 목적이 아닌, 인도의 면직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면 섬유 제조업자들의 압력에 의해 좌절되었다. 그리고 그 후 1917년까지 인도에 수입되는 면 상품에는 관세가 부과되지 않았다.



p.116

   거의 모든 선진국들이 '따라잡기' 시기에 어떤 형태로건 유치산업 촉진promotion 전략을 채택했음은 이미 밝힌 바 있다. 그 과정에서 대부분의 국가들이 보호 관세를 유치산업 보호의 주요 수단으로 사용하였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유치산업 보호에 있어서 유일한 또는 가장 중요한 수단은 아니었다. 다만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보호 관세를 가장 적극적으로 사용한 국가들이 바로 자유 무역의 발상지로 여겨지는 영국과 미국이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고찰한 나라들 중에서 이 같은 역사적 패턴의 예외적 경우에 해당되는 것이 명백한 국가는 스위스, 네덜란드 그리고 정도는 좀 약했지만 벨기에이다. 그러나 이들의 경우에도 몇 가지 단서가 붙어야 한다. 스위스의 경우에는 산업 발전에 중대한 시점에서 나폴레옹 전쟁으로 말미암아 '자연적' 보호의 혜택을 누렸다. 네덜란드 정부는 16세기와 17세기에는 강력한 해상 및 통상 패권을 확립하기 위해 공격적인 정책들을 사용하였고, 1830년대에는 산업 금융 기관들을 설립하고 면직 산업을 장려하였다. 19세기의 벨기에는 자은 관세율을 적용했을지 모르지만 벨기에를 18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통치하였던 오스트리아 정부는 보다 강력한 보호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몇몇 부문들은 19세기 중반까지 매우 엄격하게 보호되었다. 사정이 이렇다 하더라도 이들 세 국가들, 아니 적어도 스위스와 네덜란드의 경우 자유주의적 산업ㆍ무역ㆍ기술ITT 정책 아래 발전한 국가들로 묘사하는 것은 여전히 합당한 것 같다.



p.124

도둑에서 파수꾼으로 - 경제 발전에 따른 정책의 변화

   이 장에서의 논의를 통해 드러난 사실 가운데 중요한 것 한 가지는 현 선진국들이 국제 경쟁 속에서의 상대적 위치에 따라 정책 방향을 바꿔 왔다는 것이다. 그 원인 가운데 일부는 교묘하게 준비된 '사다리 걷어차기'이지만, 그와 함께 과거를 현재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도 일정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자신들이 '따라잡기 기간'에 있는 동안 현 선진국들은 유치산업을 보호하고, 외국의 숙련된 노동 인력을 빼돌렸으며, 선진국들이 수출을 금지한 기계를 밀수입하였고, 산업스파이를 고용하는가 하면, 다른 국가들의 특허권 및 상표를 계획적으로 도용하였다. 그러나 일단 자신들이 선진국의 대열에 오르면 자유 무역을 주장하고, 숙련된 노동 인력 및 기술의 유출을 금지하기 시작하였으며, 특허권 및 상표를 강력히 보호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해서 한때 도둑질을 일삼던 이들이 하나씩 파수꾼이 된 것이다.

   19세기에는 독일과 미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이 영국에 대해 반감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18세기에 그 어느 국가보다 강력한 유치산업 보호를 실행하였던 영국이 19세기에는 자유 무역의 장점을 역설하고 나서는 것이 위선적으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오늘날 미국의 통상 문제를 협의하는 담당자들이 개발도상국에게 자유 무역의 장점을 역설할 때나, 스위스의 제약 회사들이 개발도상국에게 지적 재산권의 강력한 보호를 요구할 때 현재의 개발도상국들 역시 현 선진국들이 상시 지녔던 것과 같은 반감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p.146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현 선진국들의 민주주의를 향한 여정은 평탄치 않은 것이었다. 이들 국가들이 민주주의의 기초적인 제도인 보통선거권과 무기명 투표의 정립에 성공하게 된 것은 (여성 또는 흑인들의 선거권 운동과 같은) 수십 년에 걸친 정치 운동과 선거 개혁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보통선거권과 무기명 투표 등이 정립된 이후에도 선거 부정과 매표 그리고 푝력으로 인해 민주주의의 실행은 난관에 부딪혀야 했다.

   민주주의의 실행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사실은 발전 초기 단계의 현선진국들과 현 개발도상국들을 비교할 경우 현 개발도상국들이 실제로 더 나은 모습을 보여 왔다는 점이다. <표 2.2>에 나타나듯 현 선진국들은 1인당 소득이 2,000달러(1990년의 미 달러 기준으로 환산된 수치)를 넘어선 상태에서 보통선거권을 부여하였다. 하지만 <표 2.2>에 소개된 대부분의 개발도상국들은 1인당 소득이 2,000달러에 훨씬 못 미치는 경우에도 보통선거권을 인정하였다.

   물론 이들 중 많은 국가들이 민주주의를 이룩하는 과정에서 현 선진국들이 그랬던 것처럼 군사 쿠데타와 같은 반전을 경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재의 개발도상국들에 존재하는 비민주적 정부의 경우 선거 자체를 금지한 적은 있지만 ─ 현 선진국들이 초기에 투표권을 부여할 때 척도로 삼았던 요소들인 ─ 재산 소유 여부나 성별, 인종 등에 입각한 선별적인 투표권 박 탈을 도입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주목해야 할 중요한 사항이다. 이것은 현재의 개발도상국들과 현 선진국들을 동등한 발전 단계에서 비교할 경우 보통선거권에 대한 신념이 개발도상국들에서 보다 널리 수용되었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p.156

재산권과 경제 발전에 대한 몇 가지 오해들

   오늘날에는 재산권 보호가 부의 창조를 촉진하는 만큼 재산권 보호가 강력하게 이루어질수록 경제 발전에는 더욱더 도움이 된다는 것이 정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재산권 보호에 대한 불확실성의 지속이 장기적인 투자와 성장에 유해하다는 주장은 논리적 타당성을 갖출 수 있는지는 몰라도 실제 경제 발전에서 재산권이 담당하는 역할은 이런 종류의 주장이 제시하는 것보다도 훨씬 복잡하다.

   재산권 보호의 경우 그 자체가 경제 발전에 유익한 것이라고 간주되기는 어렵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일정한 재산권의 보호가 경제 발전에 유해하고, 현행 재산권의 침해가 (그리고 새로운 재산권을 제정하는 것이) 경제 발전에 유익한 것으로 증명된 사례들이 다수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국의 엔클로저가 아마도 이런 경우의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엔클로저는 공유지에 울타리를 설치함으로써 기존의 공동체적 재산권communal property rights을 침해하게 되지만, 그렇게 해서 탈취된 토지가 양 사육에 쓰임으로써 모직업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그런 예는 그 밖에도 많이 있다.

   데 소토는 무단 침입자들의 권리를 인정함으로써 현행 재산 소유자들의 권리를 침해한 것이 미국 서부의 개발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지를 기록하고 있으며, 업햄은 펜실베이니아 주 대법원이 당시 펜실베이니아으 주력 산업이던 석탄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맑은 물의 이용을 요구하는 지주들의 정당한 권리를 유리한 1868년의 샌더슨 사건의 사례를 제시한다. 또 2차 대전 이후 일본, 한국, 타이완에서 실행된 토지 개혁은 지주들의 재산권을 침해한 것이지만, 이후 해당 국가들의 경제 발전에 기여하였으며, 역시 2차 대전 이후 오스트리아, 프랑스와 같은 국가들이 실행한 산업 국유화는 보수적이고 비역동적인 산업 자본가들의 산업 재산의 일정 부분을 근대 기술 및 적극적 투자를 선호하는 전문적인 공공 부문 경영자들에게 이양함으로써 해당 국가들의 산업 발전에 기여하였다고 많은 이들이 주장한다.

   따라서 경제 발전에 중요한 것은 현행의 모든 재산권을 무조건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알맞게 재산권의 보호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만약 어떤 재산을 현행 소유주보다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단체가 있다면, 소유주의 재산권을 보호해 주는 것보다 그 단체에게 소유물을 양도시킬 수 있는 새로운 재산권을 수립하는 것이 그 사회에 더욱더 유익하다는 것이다.



p.168

회계, 재무 보고, 공시 제도의 역사

   재무 감사와 정보 공시의 중요성에 대한 관심은 최근의 아시아 경제 위기 이후 증가하였다. 대부분의 외국인 채권자들은 경제 위기 국가들에 대한 부실 대출 결정의 책임을 불투명한 기업 회계, 감사 및 공시에 관한 느슨한 규제 탓으로 돌리고 있다. 하지만 이런 주장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우선 이들 국가들이 기업 차원 정보와 관련해 이 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사실은 경제 위기 이전부터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이런 상황에서 신중한 자금 대여자로서 당연히 취해야 할 태도는 이들 국가의 기업체에 대출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 국제 자금 대여자들이 '정보 부재'를 문제 삼는 것은 자기 정당화라고 할 수밖에 없다.

   물론 기업 정보의 질적인 측면과 공시 제도의 개선이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부분이 동의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이 같은 제도들을 수립하였을 경우에 발생하는 이득과 그 개발에 필요한 인적, 재정적 자원에 대한 비용과의 비교 평가는, 특히 이런 자원이 부족한 개발도상국들에게 필요한 사항이다.

   현 선진국들의 역사를 살펴보면 기업 재무 보고 및 공시 의무에 관한 제도의 수준이 20세기에 들어서까지도 매우 조잡하였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p.189

사회복지 제도의 역사

   경제 위기의 발생 빈도가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대규모의 경제 혼란을 불러올 수 있는 자유화 및 규제 완화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개발도상국들 사이에서는 이 같은 변화들로 말미암아 피해를 입은 이들의 생계를 지원하는 일에 지대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재정 적자 문제에 빠져 있는 개발도상국들이 국제통화기금IMF(International Monetary Funds)이나 세계은행마저도 지금은 사회적 '안정망safety net' 수립의 필요성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관련 제도에 대한 요구 수준은 아직 낮은 편이지만 어쨌든 개발도상국들에게 최소한의 사회복지 제도를 수립하라는 압력이 (비록 '바람직한 통치 제도;라는 담론에서 언급되는 다른 제도에 비해서는 매우 낮은 편이기는 하지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복지 제도들은 단순한 사회적 '안전망' 이상의 것이다. 신중하게 계획되고 시행된다면, 사회복지 제도를 통해 효율성과 생산성의 성장을 높일 수 있다. 정부가 제공하는 효율적인 의료와 교육은 노동력의 질적 향상을 가져옴으로써 효율성을 높이고 생산성 성장을 촉진할 수 있다. 반면 사회복지 제도의 존재는 사회 불안을 감소시키고 정치 체제의 정당성을 강화할 수 있는 만큼 장기적 투자를 위한 더욱 안정된 환경을 제공하게 된다. 또 실업수당 같은 수단을 통해서는 소비 변동 폭을 줄임으로써inter-temporal smoothing of consumption 경기 변동의 진폭을 줄일 수 있다.

   물론 사회복지 제도를 통해 꾀할 수 있는 이와 같은 잠재적 이득은 이런 제도로 말미암아 생길 수 있는 잠재적 손실과 비교되어야 한다. 첫째, 사회복지 제도는 잠재적으로 수혜자들의 근로 윤리work ethic나 자존심을 좀먹는 부정적 효과를 지니고 있다. 둘째, 사회복지 제도의 효율성과 타당성을 결정하는데 잠재적 혜택과 기여의 수준이 적절하게 설정되었는지의 여부나 해당 제도의 운영이 공정하고 효율적인지의 여부, 해당 제도를 이용한 부정행위를 조사할 효과적 장치가 존재하는지의 여부에 대한 평가와 같은 기술적인 문제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는 것은 명백하다. 셋째, 사회복지 프로그램의 정치적 정당성이 확고하게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해당 프로그램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세금을 인상하려 할 경우 부유층의 '투자 파업investment strikes'으로 이어지거나, 아니면 아옌데 정권 하의 칠레의 경우처럼 과격한 반전을 지지하는 쪽으로 진행될 수도 있다.

   특정한 사회복지 제도의 장단점이 정확하게 어떤 것이든지 간에 현 선진국들이 오랜 기간을 거쳐 일련의 공통된 제도를 (단, 아직 종합 의료보험 제도를 갖추지 않은 미국의 경우는 제외한다.) 발전시켜왔다는 사실은 모든 나라들이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어떤 공통의 어려움이 존재함을 암시한다. 다만 대부분의 국가에서 사회복지 제도는 발전의 마지막 단계 쯤에 수립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중요한 사항이다.



p.195

   영국에서의 아동 근로 규제를 위한 최초의 시도는 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9살 미만의 아동 채용을 금지하고 아동의 근로 시간을 제한한 1819년의 면직 공장 규제법을 둘러싼 논쟁 중에 일부 상원의원들은 '노동은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반대편은 아동들은 '자유 의지를 가진 행위자free agent'가 아니라고 반박하였다. 게다가 초기의 법(1802년, 1819년, 1825년, 1831년)들은 대부분 효과적이지도 않았는데, 그 원인은 부분적으로 의회가 법의 시행을 위해 필요한 예산을 통과시켜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1819년의 법에 의거한 적발 사례가 1825년까지 단 두 건에 불과했던 것은 그래서였다.



p.212

   현 선진국들을 현 개발도상국들과 동등한 발전 단계에서 비교할 경우 현 선진국들이 현 개발도상국들보다 뛰어났던 유일한 분야는 1880년대부터 놀라운 발전을 보여 온 사회복지 제도 분야이다. 1913년까지 (캐나다, 미국, 포르투갈을 제외) 대부분의 현 선진국들이 비록 매우 불충분하기는 했어도 산업재해보험과 의료보험(네덜란드, 뉴질랜드, 스페인, 핀란드, 오스트레일리아 제외), 국가연금 제도(노르웨이, 핀란드, 스위스, 스페인 제외)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실업보험은 여전히 생소한 것이었다. 실업보험이 최초로 도입된 곳은 1905년의 프랑스였고, 1913년까지 아일랜드, 영국, 덴마크, 노르웨이가 도입하였다. 그러나 노르웨이와 스웨덴 같은 국가들은 실업보험 수혜자들의 투표권을 박탈하였다.

   근로 시간, 근로 현장의 안전성, 여성 및 아동 근로자들에 관한 다수의 노동법들이 이즈음에 만들어졌지만, 그 기준은 상당히 낮았으며, 적용 범위는 제한되어 있었고, 시행은 미흡하였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근로 시간을 일일 10시간으로 제한한 것조차도 고용주들과 보수적인 법관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고, 연방 수준에서 아동 근로를 금지한 것은 이 시점을 기준으로 약 25년 후(1938년)의 일이었다. 현 선진국들 중에서 그 어느 국가도 (주 40시간은 말할 것도 없고) 주 48시간의 근로 시간을 이 시기까지 도입하지 않았다.



p.214

   혁신적 국가들이 수립한 새로운 제도가 나머지 선진국들로 확산되는 데에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표 2.6>은 언제 어디서 다른 제도들이 등장하였는지, 이 제도들이 대다수 현 선진국들에게 채택된 시기는 언제이며, 모든 선진국들에게 받아들여진 시기는 언제인지를 표로 만든 것이다. 이 표는 '전근대적인' 특허법과 같은 예외적인 사례를 제외한다 하더라도, 어떤 혁신적인 제도가 등장한 이후 과반수의 선진국들이 채택하기까지는 (국가연금state pension과 실업보험 같이) 20년 정도부터 (현대적 중앙은행과 같이) 150년 정도까지의 기간이 소요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또한 이 표는 어떤 제도적 혁신이 이루어지고, 이것이 선진국들 사이에서 '국제 기준'으로 받아들여지기까지는 (즉 대다수 선진국들이 이것을 지지하기까지는) 수십 년이 아닌, 수세대에 걸친 기간이 소요되었음을 보여 준다. 선진국들의 제도 발전이 이렇게 더디게 이루어진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존재한다.

   첫째, 다수의 제도들이 특히 초기 발전 단계에서 '감당할 수 있는affordable' 수준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채택되지 않았거나, 채택되더라도 효과적이지 않았다. 이와 관련한 가장 분명한 사례는 사회복지 및 노동 법규의 부재이지만, 그뿐만이 아니라 기업 지배나 금융 등 여타 제도들도 그 관리 및 시행에 필요한 자원의 부족으로 실효성이 매우 떨어졌다.

   둘째, 이 제도들을 '감당할 수 있는' 경우에도 이 같은 제도의 도입으로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손실을 입는 이들의 저항 때문에 도입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유산 계급이 민주주의나 노동 법규, 소득세에 반대한 것은 이와 관련한 가장 좋은 사례일 것이다.

   셋째, 당시에는 이 제도들의 이면에 담겨 있는 경제 논리들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에 도입되지 않는 경우들도 종종 발생하였다. 유한 책임 제도와 중앙은행 제도가 도입되었더라면 혜택을 보았을 이들이 이러한 제도에 반대한 것은 이와 관련한 좋은 사례이다.

   넷째, 어떤 제도들이 분명히 '감당이 되고', 그 이면의 논리들 역시 이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결정적 선입관 epochal prejudices' 때문에 도입되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잭슨 파의 전문직에 대한 선입관 때문에 미국에 전문 관료 제도의 도입이 늦어진 사례, 스위스에서 여성 보통선거권의 도입이 늦어진 사례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다섯째, 어떤 제도들은 상호의존적 관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해당 제도들을 동시에 발전시키는 것이 필요하였고, 그 결과 제도 발전이 더디어진 경우도 종종 발생하였다. 예를 들어 조세를 징수할 공공 재정 제도의 발전 없이 근대적 전문 관료들에게 적절한 봉급을 지급하기는 어려운 일이었고, 발전된 세무 관료 제도 없이 공공 재정 제도를 발전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근대적 관료 제도와 국가의 재정력이 보조를 맞추며 발전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닌 것이다.

   특정 제도가 특정 시기에 특정 국가에 어째서 도입되지 않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더욱 자세한 역사적 지식이 필요하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문제는 이 책에서 다루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분석을 통해 분명히 드러난 사실은 제도 발전을 이루는 데에는 수세대는 아니더라도 대체로 수십 년의 기간이 소요된다는 점이다. 이런 맥락에서 현 개발도상국들이 '국제 기준'에 부합하는 제도들을 즉각 또는 적어도 5~10년 이내에 수용해야 하며, 이를 어길 경우에는 이에 상응하는 제재를 받게 될 것이라는 현 선진국들의 근래의 주장은 자신들이 걸어온 제도 발전의 역사에 상반되는 행위이다.



p.222

   이 소득 비교 내용을 앞에서 제시한 현 선진국들에 대한 세 가지의 역사적 묘사와 견주어 보면, 초창기 현 선진국들이 유사한 발전 단계에 있는 현 개발도상국들보다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의 제도 발전을 이루었음을 단번에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1820년의 영국은 현재의 인도보다 다소 높은 수준의 발전을 이루었지만, 인도에 존재하는 보통선거권(당시 영국은 남성 보통선거권조차 갖추고 있지 않았다.) 중앙은행, 소득세, 법제화된 유한 책임 제도, '근대적' 파산법, 전문 관료 제도 또는 실효성 있는 유가증권법 등 가장 '기본적인' 제도에 해당하는 것 중 대부분을 갖추지 못하였다. 소수의 산업 분야에 존재하였던 한두 가지의 최저 수준의, 그리고 거의 시행되지도 않았던 아동 근로에 대한 규제들을 제외한다면, 1820년의 영국은 최저 수준의 노동 관련 법률조차 갖추고 있지 않았다.

   이와 비슷하게도 1875년의 이탈리아는 현재의 파키스탄과 유사한 발전 수준에 있었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파키스탄이 수십 년째 보유하고 있는) 남성 보통선거권, 전문 관료 제도, 화폐 발행의 독점권을 지닌 중앙은행, 경쟁법, 심지어 최소한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지닌 사법권을 갖추고 있지 못하였다.

   또 다른 예로 1913년의 미국은 현재의 멕시코 정도의 발전 수준을 이루었지만, 미국의 제도 발전 수준은 멕시코에 비해 상당히 뒤처져 있었다. 미국 대부분 지역에서 여성의 선거권은 여전히 공식적으로 박탈된 상태였고, 흑인과 다른 소수 민족의 선거권 역시 사실상 박탈된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또 당시는 연방 파산법(1898년)이 도입되고 겨우 10여 년이 지난 후였고, 1891년 외국인의 저작권을 인정한 지 20여 년 정도가 지난 시기였다. 더욱이 당시의 미국은 여전히 매우 미비한 중앙은행 체제를 갖추고 잇었으며, 소득세는 이제 막 도입(1913년)된 상태였고, 실질적인 경쟁법은 클레이턴 법이 제정된 1914년에야 등장하였다. 증권 거래 또는 아동 근로에 관한 연방 법규는 여전히 존재하지 않았고, 소수의 주들이 갖추고 있던 법률조차도 매우 낮은 수준의 것이었을뿐더러 그 시행도 미흡하였다.

   이런 예들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경제 발전의 초창기에 있던 현 선진국들과 현 개발도상국들을 유사한 발전 단계에서 비교할 경우 당시의 선진국들은 매우 낮은 수준의 제도적 기반만 가지고 있었다. 당시 현 선진국들이 갖추고 있던 제도의 수준이 현 개발도상국들에 강요되고 있는 '국제 기준'에 훨씬 못 미치는 것들이었음은 따라서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p.230

   지난 몇 세기에 걸쳐 지속적으로 관찰된 바와 같이 모든 따라잡기 경제가 겪게 되는 공통적 문제는 경제 발전의 관건인 고부가가치 산업으로의 전환이 '자연스럽게naturally'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인데, 그 원인은 따라잡기 경제의 경우 고부가가치 산업이나 유치산업에 대한 사회적 투자 수익률과 개인적 투자 수익률이 다양한 원인들로 말미암아 일치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그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런 형태의 투자에 따른 위험을 사회적으로 분산할 수 있는 장치를 수립할 필요가 있는데, 그 경우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반드시 보호 관세나 정부 보조금과 같은 직접적 정책 개입이 포함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며, 단지 해당 투자에 따른 위험을 사회적으로 분산할 수 있는 제도를 수립하는 것만으로도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제도 중심의 해결 방안은 심각한 제약을 가지고 있다. 첫째, 본래 제도는 일반적인 규칙들을 구현하고 있기 때문에 특정 산업과 과련된 문제를 처리하는 데에는 비효율적일 수 있다. 둘째, 제2부에서 논의되었듯이 새로운 제도의 수립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할 수 있는 만큼 그 나라가 새로운 도전에 빠르게 대처하는 능력에 제약을 가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많은 경우 제도적 해결책보다는 보다 집중적이고 신속한 정책 개입이 더 바람직하다.

   하지만 정부의 직접 개입이─특히 산업ㆍ무역ㆍ기술ITT 정책의 형태로 나타나는  정부 개입이─유치산업의 발전과 관련된 위험의 사회적 분산에 필수적인 경우가 많다고 해서 오직 그것만이─즉 보호 관세만이─유일한 방법임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제1부의 논의에서 본 것처럼 각 국가는 기술의 상대적 후진성이나 국제 환경, 인적 자원의 부존량 등에 따라 자신들의 목적에 맞는 정책 수단을 다양하게 사용하였다. 또 특정 국가의 산업 진흥의 초점 역시 변화하는 국내외 환경과 맞물려 계속해서 변화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점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성공한 국가란 정책 초점을 변화하는 환경에 적합하도록 능숙하게 바꾸어 나간 국가들인 것이다.

   게다가 적극적 산업ㆍ무역ㆍ기술ITT 정책의 사용이 필수적이라 해서 그런 정책을 사용한 국가 모두가 반드시 경제적 성공을 이룩한 것은 아니다. 2차 대전 이후의 개발도상국들의 경험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처럼 이런 정책의 성공 여부는 한편으로는 정책의 세부적인 내용들의 의해,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정책을 실행에 옮기는 정부의 능력과 의지에 따라 판가름 난다.


   역사적 고찰을 통해 드러나는 결론은 분명하다. 현 선진국들은 자신보다 선진화된 국가들 따라잡기 위한 노력 과정에서 유치산업을 촉진시키기 위해 개입주의적 산업ㆍ무역ㆍ기술ITT을 사용했다. 그 형태와 중점 사항은 국가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그런 정책들이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상대적으로 말하자면─즉 보다 발전된 국가들과의 생산성의 차이를 감안하자면─과거 많은 선진국들이 현재의 개발도상국들보다 더욱 강력하게 자신들의 산업을 보호한 것이다.

   만약 사실이 그렇다면 최근에 (후진국들에게) 권고되고 있는, 자유무역과 자유방임주의적 산업ㆍ무역ㆍ기술ITT 정책들의 장점을 강조하는 '바람직한 정책' 패키지는 현 선진국들의 역사적 경험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네덜란드나 스위스와 같은) 한두 가지 경우를 제외하면 현 선진국들은 이러한 정책 패키지를 기반으로 현재의 발전을 이룩한 것이 아니다. 현 선진국들이 현재의 번영을 이룩하기 위해 사용하였던 정책은 바로 이들이 경제 발전에 미칠 부정적 영향을 이유로 현재의 개발도상국들에게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정책들─즉 적극적 산업ㆍ무역ㆍ기술ITT 정책들이다. 

   그러면 현 선진국들과 이들이 조종하는 국제개발정책의 주도세력들IDPE이 개발도상국들에게 권고하고 있는 정책은 개발도상국들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에게 이로운 정책 아닌가? 그 같은 정황은 19세기에 영국이 보호주의를 이용해 자신을 따라잡으려는 미국과 다른 현재의 선진국들에게 자유 무역을 수용하도록 압력을 행사한 것과 유사한 것 아닌가? 개발도상국의 적극적 산업ㆍ무역ㆍ기술ITT 정책 실행을 제약하는 세계무역기구WTO의 합의는 영국을 비롯한 여타의 현 선진국들이 반독립 국가들에게 강요하였던 다양한 '불평등 조약'의 현대판에 불과할 뿐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은가? 보다 직접적으로 말해 개발도상국들의 손이 닿지 않는 정상에 오른 선진국들이 개발도상국들이 따라 올라오지 못하도록 '사다리 걷어차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불행히도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그렇다'이다.

   '사다리 걷어차기'라는 비난에 대해 현 선진국들이 제기할 수 있는 유일한 반론은 과거 자신들이 사용했던 적극적 산업ㆍ무역ㆍ기술ITT 정책들이 경제 발전에 유익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시대가 변하였기' 때문에 이런 정책들이 더 이상 예전과 같은 효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주장일 것이다. 그러니까 과거의 '바람직한 정책'이 현재도 '바람직한 정책'인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주장이다.

   어떻게 이런 논리가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납득할 만한 이유가 부족한 것은 접어두고라도, 최근 20년 동안 나타난 개발도상국들의 저조한 경제 성장률은 현 선진국들의 논리 자체가 이치에 닿지 않음을 암시한다. 이 기간 동안 대부분의 개발도상국들이 '정책 개혁'을 통해 경제 성장에 좋다는 '바람직한' ─최소한 '보다 나은'─정책들을 채택하였다. 그런데 그 결과는 한마디로 말해 매우 실망스러웠다.

   신자유주의적 '정책 개혁'이 핵심 목표로 내세웠던 경제 성장의 촉진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신자유주의적 정책들이 실행에 옮겨질 당시 현 선진국들이 주장한 것은, 비록 이 같은 '개혁'이 단기적으로는 (그리고 아마 장기적으로도) 경제적 불평등을 증대시킬 수 있지만, 2차 대전 직후 사용된 개입주의적 정책보다 더욱 빠른 경제 성장을 촉진하고, 결국에는 모든 이들의 생활을 보다 효과적으로 향상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최근 20년 동안 개발도상국들에서 실현된 것은 이 같은 예견들의 부정적인 측면뿐이었다. 당초 예상대로 소득 불평등은 증가하였다. 하지만 경제 성장이 가속화된다는 예상은 어긋나고 말았다. 실제로 '바람직하지 않은bad' 정책들이 사용된 1960~1980년대와 비교해서 최근 20년 동안 특히 개발도상국들에서 경제 성장이 눈에 띄게 감소하였다.



p.237

   현재 '바람직한 통치 제도good gevernance' 패키지의 일부로 개발도상국들에게 권고되고 있는 대부분의 제도는 현 선진국들의 경제 발전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물에 해당된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이 제도들 중에서 과연 어느 정도가 현 개발도상국의 발전에 실제로 '필요'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럼에도 국제개발정책을 주도하는 세력들IDPE의 주장대로 이런 제도들이 강력한 양자간 혹은 다자간 압력을 통해서라도 개발도상국들에게 수립되어야 할 정도로 중요한 것일까?

   더욱이 어떤 제도들이 '유익'하다거나 '필수적'이라고 동의하다 할지라도 그 제도가 정확히 어떤 형태로 채택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주의할 필요가 있다. 어떤 제도이건 그 형태에 관해서는 논쟁이 지속되고 있음을 이미 제2부에서 언급한 바 있다. 과연 어떤 형태의 관료 제도가 경제 발전에 유익한 것인가? 재산권의 경우 얼마나 강력하게 현행 재산권을 보호해야 하는가? 파산법은 얼마나 채무자 위주로 만들어져야 하는가? 중앙은행은 어느 정도 독립적이어야 하는가? 이와 같은 질문들은 끊임없이 이어질 수 있다. 어떤 국가에 어떤 종류의 제도가 필요한지를 결정하는 것은 이 책으 범위를 벗어난 것이다. 그러나 제2부에서의 논의를 통해서 모든 국가들이 채택해야만 하는 단 한 종류의 ─대개의 경우 영미식의 제도를 의미하는─ '가장 훌륭한' 제도가 존재한다는, 최근에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견해에는 큰 문제점이 잇음이 증명되었기를 바란다.



p.240

   소위 '자본주의의 황금기' (1950~1973년) 동안에 나타난 현 선진국들의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 황금 기간 전후의 경제 성장과 비교해 보면 경제 성장 및 안정에 있어서 제도의 중요성이 명백해진다. 이 황금기 동안 현 선진국들의 일반적 경제 성장률은 1인당 연 3~4퍼센트였지만, 황금기 이전의 보편적 경제 성장률은 연 1~2퍼센트였고, 황금기 이후의 보편적 성장률은 연 2~2.5퍼센트 수준이었다.

   매디슨(1989년)의 연구에 의하면 황금기 동안 16개 현 선진국의 1인당 소득 성장률은 연 3.8퍼센트였으며, 일본(8퍼센트), 독일 및 오스트리아(4.9퍼센트), 이탈리아(4.8퍼센트) 같은 국가들은 예전에 없던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였다. 현 선진국들이 이 같은 황금기를 누릴 수 있었던 원인으로 대부분의 논자들은 2차 대전 이후 도입된 개선된 제도들을 꼽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들로는 적극적인 (케인스적) 재정 제도, 완숙해진 복지 제도, 더욱 엄격해진 금융 시장 관련 법규, 조합주의적 임금 협상 제도corporatist wage bargaining institutions, 투자 조정 제도investment coordination institution, 그리고 일부 경우에는 (특히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경우에는) 산업 국유화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런 제도들이 보다 나은 거시 경제 및 금융의 안정, 더 나은 자원 배분, 더 평화로운 사회를 가져옴으로써 현 선진국들의 고속 성장을 도왔다는 것은 현재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사실이다.



p.244

   이 모든 사항들은 '사다리 걷어차기'라는 주장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까? 만약 제도 향상을 요구하는 국제적 압력이 현실성을 띠고 추구되고 또 이와 함께 적절한 정책들이 추구된다면, 이런 압력이 경제 발전 과정에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 책도 동의한다. 그러나 현 개발도상국들에게 가해지고 있는 제도 향상 요구는 이 같은 방식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지 않으며, 또 하나의 '사다리 걷어차기'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현 선진국들은 자신들이 현 개발도상국들과 유사한 발전 단계에 있을 때 갖추지 않고 있던 제도를 강요함으로써 이들에게 이중 잣대를 효과적으로 적용하고 있으며, 불필요하거나 감당할 수 없는 제도를 강요함으로써 이들을 궁지로 몰고 있다. 예를 들어 개발도상국들이 '국제적 기준'에 맞는 재산권과 기업 지배구조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국제적 수준의 변호사들과 회계사들을 양성해야 한다. (또는 외국의 이런 압력을 채용해야 하는 더욱 심각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은 현 발전 단계에서 개발도상국들에게 더욱 절실할 수 있는 교사나 엔지니어의 양성에 소요될 (국제 지원금이나 자국의 예산과 같은) 자금이 어쩔 수 없이 줄어들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맥락에서 현 선진국들은 정책 분야뿐만 아니라 제도 분야에서도 '사다리 걷어차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p.256

   이 책에서는 선진국들의 이 같은 행동이 바로 '사다리 걷어차기'임을 지적하고 있다. 물론 이 '사다리 걷어차기'가 (잘못된 정보에 기초하기는 했지만) 진정한 호의에서 비롯된 것일 수 도 있다. 개발도상국들에게 정책과 제도를 권고하는 현 선진국들의 정책 담당자나 학자 중 일부는 정말 잘못된 정보를 지니고 있을 수도 있다. 이들은 자국의 경제 발전이 자유 무역과 자유방임주의를 통해 이룩되었다고 생각하고, 개발도상국들도 이 같은 정책의 혜택을 누리기를 원할 수 있다. 그러나 동기가 순수하다 하더라도 이러한 행동이 개발도상국들에게 유해하기는 마찬가지다. 아니, 이 경우 실제로 자국의 이익만을 위한 '사다리 걷어차기'보다 더 위험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자기정의는 이기심보다 훨씬 더 완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다리 걷어차기'의 숨은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소위 '바람직한' 정책과 제도들은 국제개발정책의 주도세력들IDPE에 의해 적극적으로 권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 20여 년 동안 공언된 성장 역동성growth dynamism을 보여 주지 못하고 있다. 아니, 사실상 많은 개발도상국들의 경제는 성장을 멈추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그에 대한 세부적인 사항을 자세히 설명하는 것은 이 책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지만 다음의 사항들은 언급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선진국들의 경제 발전에 관한 역사적 사실이 더 많이 알려져야 한다. 이것은 '역사를 바로잡는' 문제일 뿐만 아니라, 개발도상국들이 그들에게 합당한 정책과 제도에 대해 올바른 정보를 가지고 선택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와 관련 경제 발전에서의 정책과 제도의 역할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서는 더욱 많은 연구들이 이루어져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이론가들과 정책 담당자들의 눈을 가릭 있는 역사적 통념과 지나치게 추상적인 이론의 장막을 젖혀야 한다.

   특히 정책적 측면에 대해 언급하자면, 대부분의 현 선진국들이 개발을 진행 중이던 시기에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하던 '바람직하지 않은 정책'을 개발도상국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선진국들과 이들이 조정하는 국제개발정책의 주도세력IDPE이 양해는 해 주어야 한다. 적극적 산업ㆍ무역ㆍ기술ITT 정책이 때로는 관료적 형식주의나 부정부패로 변질될 수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런 정책의 사용을 전면적으로 금지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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