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는 작가인가 - 마이클 록>을 읽고
동어반복, 유의어 반복이라는 같은 말을 또 하는 행위는 ‘무의미한 잉여’이자, 글의 가독성을 해치는 방법이라고 배워왔다. 같은 표현이라도 같은 글줄 안이라면 조금씩 바꾸기 위해 사전을 뒤적인다. 이러한 과정은 의도적으로 글쓰기의 맥을 끊어 버린다. 흐름처럼 흘러나오는 줄기들이, 동어를 만나는 순간 자연적인 흐름이 아닌 수평의 모양새를 띄는 것 같다.
“ 귀여운 인형의 귀여운 손’에서는 ‘귀엽다’가 부각이 되지 않는다. 유의어조차 아닌 동어 사이에 대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완벽한 작가의 주관성으로 존재한다. 전달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귀여운, 귀여운, 귀엽고, 귀여웠고, 앞으로도 귀여울, 인형의 귀여운 손.’이라는 글에서는 반복을 통한 강조가 다양한 어휘 사용에서 나오는 대비를 무시할 정도의 효과를 가져온다. 동어반복의 게으른 권태로움이 열정적 지지자처럼 보인다.
이를 롤랑 바르트는 기존 체제를 유지하고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기득권층의 언어이며, 특정 이익집단이 지배하는 현대사회의 신화라고 표현한다. 게으름과 순수한 지지자의 화법은 권력의 시각에서 악의 자리에 자리한다. 현대 사회에서 동어 반복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광고처럼 머릿속을 울린다. 이러한 주술적인 반복은 언어를 하나의 기호로 환원한다. 억압의 위계가 고착된다. “될 놈은 된다.”라는 표현처럼 듣는 이를 억압한다. 이러한 억압이 아니더라도 설명이 막히는 순간 우리는 동어 반복의 늪으로 빠져 버린다. “어…어…그…” 등의 단말마와 함께 텍스트의 다양성을 상실한다. 언어로 표상하는 행위에 대해 실패한다. 언어를 거부한다.
그러나 디자이너는 창작한다. 언어에 무너진 나를 위한 새로운 매체와 약속을 다룰 수 있다. 동어 반복의 죽은 세계를, 움직이지 않는 세계를 언어 이외의 것으로 재정립한다. 실패한 언어를 이미지로 치환하고, 시간의 흐름, 시각적 흐름에서 읽히는 텍스트를 한눈에 파악하는 화면으로 정립한다. 실패한 언어를 이미지로 동어 반복한다. 디자인 혹은 이미지, 언어를 벗어난 매체로 하는 반복은 과연 작가적인 권위의식일까?
디자이너는 게으르고 언어에 권태를 느끼는, 자신의 세계에 열정적 지지자가 아닐까? 아포리아, 아파시아, 언어의 불가능에서 딛고 일어난 작가로서의 옹립을 독자의 옹립을 막아서는 권위적 갑의 위치에 놓을 수 있을까? 권위를 신봉하는 종교적 지지자들과, 과학의 신봉자, 하루키의 글보다, 하루키의 신작을 원하는 독자들 사이에서 작가적 권위는 누굴 위한 것일까?
나는 디자이너를 작가라고 생각한다. 무너진 세계를 재정립하는 창작자라고 생각한다. 언어로 표상하는 것에 실패한 세계를 다시금 구조화하고, 확장시키는 행위자라고 생각한다. 결국은 개인은 개인이다. 스스로 옹립하려 하지 않아도 자신의 세계를 쌓아 올린다. 독자든 작가든, 결국 자신이 쌓아 올린 세계에 대한 주관성을 가진다. 위계에서의 위치는 누군가 쥐어주는 것이 아닌 스스로 보는 행위를 통해 쥐어간다.
"디자이너의 창작은 일종의 동어반복이며 창작에 앞선 '서사'를 무시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