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쯤 완전히 나을까요?"
진료실에서 가장 오래 머무는 질문입니다.
입 밖으로 나온 뒤에도 사라지지 않고, 환자의 눈 속에 고여 있다가, 문이 닫힌 뒤에도 한참을 남습니다.
'만성'이라는 단어는 시간을 품고 있습니다.
어제의 평온이 오늘의 피로를 약속하지 않고, 오늘의 통증이 내일의 예측이 되지 않습니다.
이 불규칙한 파동 속에서 사람들은 '완치'라는 단단한 땅을 갈망합니다.
멀리 보이는 그 지평선만 바라보며 걸음을 내딛습니다.
하지만 모든 여정이 도착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길에서는 걷는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됩니다.
잃어버린 일상을 한 뼘씩 되찾는 발걸음, 그것이 치료이고 회복이며,
저는 이 과정을 **'공존의 기술'**이라 부릅니다.
질병을 받아들인다는 말이 싸움을 포기한다는 뜻은 아니라, 오히려 더 정교한 싸움입니다.
적의 얼굴을 똑바로 보고, 그 움직임을 읽고, 내 몸의 지형을 파악하는 일.
어디서 멈춰야 하는지, 언제 다시 나아가야 하는지, 자신만의 리듬을 몸으로 익혀가는 과정입니다.
이 기술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고, 약처럼 처방받을 수도 없습니다.
오직 살아내면서, 실수하면서, 때로는 무너지면서 배웁니다.
홀로 배울 수 없기 때문에 누군가의 손이 필요하고, 그래서 공존은 기술이면서 동시에 관계입니다.
진료실에서 제가 가장 오래 기억하는 순간들은 수치가 정상을 향해 움직일 때가 아닙니다.
염증 수치가 떨어졌다는 결과보다 더 선명하게 마음에 남는 것은, 환자의 얼굴에 다시 불이 켜지는 순간입니다.
"밤새 뒤척이지 않고 잤어요."
"불안이 밀려왔는데, 휩쓸리지 않았어요." "
오랜만에 출근했어요. 반나절만요. 그래도요."
이 문장들은 어떤 검사 결과보다 정확하게 치료의 방향을 말해줍니다.
숫자는 몸의 일부를 설명하지만, 이 고백들은 삶 전체를 보여줍니다.
아프다는 사실이 '나'를 정의하지는 않습니다.
류마티스 환자, 루푸스 환자, 섬유근육통 환자—이 모든 명칭은 의무기록을 위한 분류일 뿐 한 사람의 이름이 될 수 없습니다.
질병은 삶의 한 조각으로, 때로는 무겁고 날카로운 조각일 수 있지만, 그래도 조각일 뿐입니다. 전체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조각을 어디에 둘 것인가입니다.
삶의 한가운데 두고 모든 것을 그 주위에 맞출 수도 있고, 한쪽으로 살짝 밀어두고 나머지 공간을 다른 것들로 채울 수도 있습니다. 그 배치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이 공존의 시작입니다.
저는 매일 진료실에서 손을 내미려고 합니다.
처방전을 내는 손이기도, 그저 함께 있어주는 손이기도 합니다.
의사는 병을 고치는 사람이라고 배웠지만, 오래 이 일을 하면서 알게 된것은,
고칠 수 없는 것들 앞에서도 여전히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을.
함께 서 있는 것,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 그 사람의 속도에 맞춰 걸어주는 것.
완치라는 지평선에 닿지 못하더라도, 그 여정은 실패가 아닙니다.
오늘 하루를 살아냈다면, 그것은 이미 도착입니다.
불완전한 하루에도 삶은 계속됩니다.
그리고 그 지속을 지탱하는 힘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