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정화의 불꽃] EP7_잠든 소녀_인플라마

-혈관 벽의 그늘에서

by 이지선

혈관 벽 근처.

그늘진 곳에 소녀가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붉은 머리칼을 한 갈래로 묶은 채, 무릎을 끌어안고 잠든 모습. 열두 살쯤 되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생명만큼이나 오래된 존재였습니다.


인플라마.

염증이라는 이름의 소녀.


미움받는 이름


지나가는 백혈구들이 속삭였습니다.

"쉿, 인플라마를 깨우지 마."

"저 애가 일어나면 다들 고생이야."

"차라리 영원히 잠들어 있으면..."


인플라마는 다 듣고 있었습니다. 잠든 척하며.

나도 안다. 내가 일어나면 모두가 아프다는 걸.

하지만 내가 없으면 상처는 곪고, 감염은 퍼진다.

이게 내 운명인가. 필요하지만 미움받는 것.


태초의 약속


그녀는 기억했습니다. 삼십억 년 전.


생명이 첫 막을 만들었을 때, 작은 불씨 하나가 경계 곁에서 떨고 있었습니다.

"너는 누구냐?"

"저는... 아무도 원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모두가 저를 보면 돌아섭니다. 제가 타오르면 아프다고, 제가 일어서면 괴롭다고..."

경계가 불씨를 끌어안았습니다.

"아니다. 너는 가장 필요한 존재다. 내가 뚫릴 때, 네가 없으면 모든 것이 썩어 들어간다."

"하지만 저는..."

"너는 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가 될 것이다. 인플라마, 정화의 불꽃아."


그날 이후, 인플라마는 경계를 지키는 파수꾼이 되었습니다. 외롭지만 필수적인 존재로.


준비된 악단


소녀는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습니다.

"쉿, 아직은 아니야. 아직은 내가 깨어날 때가 아니야."


하지만 그녀의 내부에서는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분자들이 모이고 흩어지기를 반복했습니다. 마치 악단이 연주 전 조율하듯이.

TNF-α, IL-1, IL-6, 프로스타글란딘...

모두 대기 중.

언제든 깨어날 준비가 된 채로.


-

나는 잠든다

모두가 나를 잊기를 바라며

하지만 상처가 나면

나는 깨어날 것이다

그것이 내 운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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