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떠오른 너

by 이지선


문득 떠오른 너


나와 너무 닮아서
아버지와 너무 닮아서
네가 심해에 웅크리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것들
감정의 회오리
감성의 물결
수많은 너들이
서로 다른 깊이에서 헤엄친다


내가 슬플 때 옆에 있었고
아버지의 부고를 들을 때도
곁을 지켜주었다


엄마 울어? 왜 울어? 울지 마
내가 아버지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을
너는 나에게 건넨다


무심한 듯 던지는 말 속에
너무 섬세한 마음이 숨어 있다
중3의 무덤덤한 눈초리
때로는 삐딱해 보이는 시선 뒤로
이 세상 모든 것을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랑스러운 마음이 보인다


아버지는 영원히 가라앉았지만
나는 너를 놓지 않으려 한다
자유로운 너이기를


입에 공기방울 하나 넣어주고 싶지만
가끔은 입마저 열지 않는다
그래도 괜찮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시간이 있다


웅크린 상처와 그 안의 수많은 가능성
웅크린 지구와 움트는 새싹 같은 너


어제 오랜만에 웃는 얼굴을 보았다
잠들어 있을 때
몰래 뽀뽀를 해주었다


소파에서 다리를 붙이고
함께 앉아 있던 순간
같은 온도가 되어가는
그 소소한 행복


문득 떠오른 너
그 모든 순간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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