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카락이 칼날처럼

by 이지선

머리카락이 칼날처럼


[Chart]

환자명: ○○○ (M/71)
진단: Fibromyalgia syndrome (의증) [섬유근육통]
C.C: "머리카락이 닿으면 미쳐버릴 것 같아요"

[15:32]

백발의 한 올이 귀에 닿는다
"이게 칼날 같아요"
(71년 인생, 12개월째 고통)

Lab: All normal
염증 (-) 류마티스 (-) 혈관염 (-) 암 (-)
(노인의 정상 수치, 비정상적 고통)

"그럼 전 뭐가 잘못된 거예요?"

[15:35]

섬유근육통

노년에 찾아온 불청객

증명할 수 없는 아픔


"면도를 못해요"
"옷깃이 목을 조여요"
"이불이 너무 무거워요"


[15:40]

"브레이크 밟는 감각이..."
"발이 내 발이 아닌 것 같아요"
(71년간 믿었던 몸의 배신)

운전 금지!!
[15:43]

"딸이 걱정해요"
"아버지 왜 그러냐고..."
"미친 거 아니냐고..."
(가장의 위엄 붕괴)

"손주들 안아주지도 못해요"
(할아버지 자격 상실)


[15:45]

의사: "이 병은요..."
(어떻게 설명할까)
"죽을 만큼 아프지만"
"죽지는 않아요"

환자: "차라리..."
의사: (침묵)
환자: (침묵)

"파도처럼 왔다가 가요"
"좋아지는 날이 올 거예요"
(71세에게 '언젠가'는 얼마나 긴가)


[15:48]

Pregabalin 75mg → 150mg
"더 졸릴 거예요"
"운전은 절대..."

"집에만 있으라는 거네요"
(은퇴 후의 또 다른 은퇴)


[처방]

Pregabalin 150mg hs x 14d
Alprazolam 0.25mg hs
면허증 (보류)
손주 포옹 (보류)
가장 역할 (재조정)


[기록되지 않은 순간들]

면도 못한 지 2개월

딸의 "아빠, 병원 가보자" × 수십 회

"남자가 별거 아닌 걸로..." 자책

아내 몰래 우는 새벽

운전대신 조수석에 앉는 굴욕

손주 "할아버지 왜 안 안아줘?"

"뭐라도 병명이 나와야..."


[15:50 - 진료 종료]

지팡이 없이도 잘 걸었던 사람이
이제는 공기마저 무겁다

"딸한테 전화하죠"
"모시러 왔어요"
(보호자 동반 외래의 시작)


[딸과의 대화]

"아버지가 많이 예민해지셨어요, 우울증도 있는거 같아요"
"밤에 막 소리를 질러요, 한잠도 안자고 앉아있디고 하고..."
"엄마도 너무 힘들어해요"
(가족의 고통 전이)


[의사의 기록]

M/71 Fibromyalgia
Severe allodynia
운전 금지
Family support (+)


[진짜 차트]

71년 가장의 붕괴
증명할 수 없는 고통
가족의 의심과 걱정
그래도 함께 견디는 것

언젠가의 끔찍함

4주 후
딸이 또 모시고 올... 조심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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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유근육통 환자는 '보이지 않는 비로' '무너지지도 않고 서있는 기둥' 같습니다.

환자분이 하신 "머리카락이 닿으면 미쳐버릴 것 같아요" 은 새삼 낯설지 않지만 매번 새로운 ,

환자가 찾아낸 고통의 개인적 서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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