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해의 지휘관

칼의 노래와 청진기의 시

by 이지선

심해의 지휘관: 칼의 노래와 청진기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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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두 개의 바다


아침 8시 50분. 병원은 꿈틀거리는 물속과 같다.

많은 환자들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모든 직원들은 전열이 잘 된 군대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순신이 출정을 준비하듯, 나 역시 두 개의 전장을 앞두고 있다. 첫 번째 바다는 병원의 아침, 두 번째 바다는 진료실이다.


이순신은 썼다. "나는 왕의 바다에서 유배되어 있었다."

나는 쓴다. "나는 심해에 유폐되어 있다."


전열이 잘 갖춰진 군대를 이끌고 전투에 나서는 지휘관처럼,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간단한 진통제와 혈압약을 삼킨다. 두 개의 모니터 앞에서 환자의 지난 기록과 검사 결과를 번개처럼 훑는다. 간호 직원들이 남겨둔 접수 메모 속 환자의 변화, 주의할 점, 오늘 꼭 짚어야 할 이야기까지 빠르게 읽는다. 아침 첫 10여 명의 환자를 5~10분 만에 정리하듯 파악한다.


전투 전의 정찰이 끝났다. 이제 임해야 할 순간이다.

그런데 출정 직전, 참모들이 달려와 보고한다.


"다음 주 휴미라 환자가 7명인데, 프리필드가 11개뿐입니다. 20개를 추가 주문하겠습니다."

"알코올솜과 리도카인이 소진 직전입니다. 오늘 바로 주문하겠습니다."


그리고 토요일 아침, 주차장 공사로 주차가 불가능하다는 연락. 업무과장, 주차관리소장, 약국과 머리를 맞대어 해결책을 찾는다. 다행히도 여러 직원들이 발 빠르게 움직여 빈 공간을 확보하고, 환자들의 불편을 최소화한다.

그렇게 오늘의 전투 준비가 완성된다.


아침이 되면 새로 합류한 직원들이 인사를 건넨다.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짧게 악수를 하며 "잘해봅시다"라고 답한다.

그 순간부터 속도는 다시 전투 모드로 전환된다.


## 2. 불완전한 지식의 바다


이순신은 매번 변덕스러운 파도와 예측 불가능한 왜군 앞에 섰다. 어떤 무기로, 어떤 전술로 올지, 우리가 어떻게 준비되어 있는지—항상 불완전한 상황 속에서 싸워야 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환자가 진료실 문을 열기 전까지,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간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밖에서 어떤 고통을 견뎠는지, 오늘 무엇을 기대하고 왔는지, 약에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환자를 직면하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안개 속이다.

오늘은 '불완전한 지식의 바다'가 유난히 넓고 짙게 느껴지는 날이다.


첫 번째 환자는 지난번에 검사했던 항핵항체(ANA)가 1:80, 경계선상이다. 다른 모든 검사 결과는 정상. 현재로서는 어떤 질병의 진단 기준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지금은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이게 병의 초기 신호일 가능성은 있습니다. 3개월 뒤에 다시 재검사를 해보죠."

환자는 묻는다. "그 항핵항체가 뭐예요?"


나는 간단한 그림을 그려 면역체계가 자기 몸을 공격하는 과정을 설명한다. 하지만 설명이 끝난 후에도, 내 말이 환자의 마음속에 어떻게 자리잡았는지는 알 수 없다.


두 번째 환자는 섬유근육통 환자다. 불완전한 지식의 바다 중에서도 가장 깊고 안개가 짙은 곳에 속하는 질병. 류마티스 자가면역 질환만큼이나, 아니 그보다도 만성통증 환자들의 영역은 복잡하다. 통증의 원인과 마음의 결까지 파악하기 어렵다. 그들의 증상은 겹겹의 안개 속에 숨어 있다.


"이 병은 약을 먹는다고 바로 좋아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약을 조금씩, 몸에 맞게 조정해 나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 약을 쓰면 이런 장점과 이런 부작용이 있을 수 있어요. 2주 뒤에 다시 뵙고, 그 사이에 불편하면 바로 연락 주세요."


환자들은 '지켜봅시다'라는 말 속에서 불안과 희망을 동시에 느낀다. 그리고 나는 안다. 이 모호한 바다 위에서, 나 역시 그들과 함께 항해 중이라는 것을.


## 3. 매일의 패배


한 번이라도 전투에서의 패배는 환자 개인에게 적용되면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다.

"또 아픈 데가 늘어났어요..."

열심히 일을 해야 하고, 갱년기 호르몬의 변화를 온몸으로 맞닥뜨리고 있는 분. 내가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이 한 달이라는 시간.

변형이 진행되는 시간.

통증과 함께 보내야 하는 밤들.

일상에서 하나씩 포기해야 하는 것들.


"조금 좋아질 거예요."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본다. 그 환자는 한 달 뒤에 보기로 했다.


3초.


나는 표정을 바꾼다.


"어, 잘 지내셨어요?"


진짜 명랑하게 다음 환자에게 인사한다. 방금 전 환자의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가슴에 묻은 채.


이 전투가 끝이 없다. 패배는 있을 수 있고 가슴 아픈 일이지만, 곧 그 환자의 바다도 잠잠해질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중요하다. 그게 다음번에 내가 다시 환자를 볼 수 있게 하는 용기이기도 하다.


## 4. 침묵의 무게


이순신이 영웅적인 침묵을 했을까마는, 나는 내 불안과 고독, 책임으로 침묵한다.


억지로라도 이겨내며 환자와 마주하는 순간, 나는 불안과 수많은 고려에 대해 침묵으로 말한다.


'내가 불안하다'는 것을 숨기는 침묵.

'모든 가능성을 다 고려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지 않는 침묵.

'당신만큼 나도 두렵다'는 것을 삼키는 침묵.


때로는 너무 많은 설명 대신 조용히 전한다.


"조금 더 지켜봐야 합니다. 여러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우리 잘 버텨봅시다."


그 순간, 뒤에서 소음이 들린다.

대기 환자 12명이 14명이 되고.

1시간 넘게 기다린 환자들의 불만이 새어 나온다.


모든 전투를 임할 때, 다음 전투가 내 목을 조른다.


이순신도 그랬으리라. 한 번의 승리 뒤에도 다음 전투를 준비해야 했던 그 무게. 그가 지킨 침묵 속에도 이런 압박이 있었으리라.


## 5. 보이지 않는 전선들


김훈은 썼다. 이순신이 "쌀 석 섬, 콩 두 섬"을 일일이 기록했다고.


나도 기록한다.


"MTX 6알에서 5알로 감량. 진통소염제 감량. 오른쪽 세 번째 손가락 건초염에 주사. 다음 혈액검사 예정."


그리고 때로는 이런 것도 쓴다.


"환자 너무 아파서 울었음. 계속 아프다고 호소."

"다음 달 결혼 예정."

"미술 전공으로 대학원 진학 희망."


영웅적이지 않다. 하지만 이것 없이는 다음 진료도 없다.


결혼을 앞둔 환자, 대학원 진학을 꿈꾸는 환자. 그들의 인생 계획에 맞춰 약을 조절하고, 검사 일정을 조정한다. 손가락이 굳어가는 미술 전공생에게는 더 적극적인 치료가 필요하다.


이순신과 똑같다. 나는 그의 이런 면에 깊이 공감했다.


저녁 6시. 직원들이 퇴근한다. 나는 7시, 8시까지 남는다.


심평원에 청구를 한다. 모든 환자, 모든 치료를 일일이 기록하고 진료비를 청구한다.


"이 환자는 보험 적용 불가"

"이 주사는 더 이상 사용 금지"


꼭 필요한 치료인데도. 한숨이 나온다.


이순신도 그랬으리라. 이런 보이지 않는 전선들을 이겨야 전투에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


## 6. 경영자의 일상


김훈은 이순신의 고독을 "지휘관의 숙명"이라 했다.


전투가 장군의 일상이었듯, 나에게도 고독은 의사의 숙명이고 경영자의 일상이다.


경영과 지휘관의 숙명이 좋은 결말로 끝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경영을 하면서, 진료를 하면서 겪는 고독과 일상은 결국 환자와 함께 질병과의 전투에서 이김으로써 좋은 결말을 맞이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깨달았다. 경영자의 목소리와 의사의 목소리는 같다고.


왜냐하면 환자와 내가 같은 편이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싸워야 할 적은 따로 있다.


나태해지려는 나.

짜증내려는 나.

대충 넘어가려는 나.


"나는 스스로를 적으로 삼아야 한다." 이순신의 말이 여기서도 울린다.


## 7. 심해의 일상


"바다는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는다. 다만 견디는 자를 살린다."


이 말은 나와 모든 환자가 심해에 있음을 말하는 것 아닐까.


심해에서의 이순신.

심해에서의 나.

심해에서의 환자.


우리는 모두 고독하다.


이순신은 왕의 명령과 부하들의 생명 사이에서 고독했다.

나는 불확실한 진단과 환자의 기대 사이에서 고독하다.

환자는 자신의 몸과 싸우며, 아무도 대신해줄 수 없는 고통 속에서 고독하다.


하지만 우리는 같은 심해에 있다.


모든 디테일한 전투에서 승리해야만 전쟁이 끝날 수 있다.


이순신이 못 하나, 쌀 한 섬까지 기록했듯이.

내가 약 한 알의 변화, 환자의 결혼 계획까지 적듯이.

환자가 매일의 통증 일기를 쓰며 작은 변화를 기록하듯이.


심해 속 전투와 진료의 본질, 환자의 버팀 - 이 모든 본질은 같다.


결정적인 일격이 아니라, 기류와 수온을 읽고, 잠수 시간을 조절하며, 하루하루의 생존을 이어가는 일.


아침에 손이 덜 굳는 것.

계단을 한 층 더 오를 수 있는 것.

밤에 한 번 덜 깨는 것.


이것이 우리의 승리다.


이 심해 안에는 이순신과 나와 환자가 함께 있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하지만 같은 심해에서 숨 쉬며.


## 8. 그리고 병원도 이 심해 안에 있다.


병원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다. 나와 환자들이 버틸 수 있게 하는 작은 안전망이다. 심해 속 잠수함처럼, 우리가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는 곳.


여기서 우리는 서로의 고독을 확인한다.

혼자가 아님을 확인한다.

같은 심해에서, 같은 압력을 견디며, 함께 버티고 있음을 확인한다.


바다는 여전히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견딘다.

그리고 견디는 자를, 바다는 살린다.


오늘도 나는 진료실 문을 연다.

"어떻게 지내셨어요?"

대답을 듣기 전부터 안다. 여전히 아프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견디고 있다고도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전투다. 화려하지 않지만 포기하지 않는.


심해는 깊고 어둡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숨 쉰다.

완벽하지 않아도, 불완전한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