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에서 온 특별한 약속
진료실 문이 열릴 때, 봄 햇살처럼 먼저 들어오는 낮고 단단한 목소리.
"원장님, 저는 울릉도 선장입니다." 거친 손, 패인 주름, 바다 냄새가 배인 표정
그분의 소개 한마디에, 섬에서 온 긴 여정의 흔적이 묻어 있습니다.
"저녁 10시 배로 들어가야 해요."
울릉도에서 부산까지 오는 길은 멉니다.
새벽배로 포항을 건너, 다시 부산까지 버스를 타고, 하루 일정 속 육지에서 볼일을 보고, 해 질 무렵이면 다시 포항으로 돌아가 저녁 배를 탑승해야 합니다. 바람이 불면 뱃길이 막히고, 파도가 높으면 며칠을 미뤄야 하는 일도 많이 있을것 같습니다.
이렇게 한 번 진료하는 일은 서로 조금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그래서 울릉도에서 온 환자는 곧 진료실 VIP.
첫 번째 선장님을 시작으로 진료실 문을 열면 "선장님 소개로 왔어요."
이 한마디면 모든 사연이 전해집니다.
아마도 먼 바다를 건너왔고, 오늘 안에 돌아가야 하고, 다음 내원은 세 달, 혹은 여섯 달 후일것이라는 것 까지.
울릉도 환자가 오는 날엔 진료는 더욱 신중해집니다.
1~2시간 내에 모든 치료와 처방을 끝내야 하기에, "언제 또 육지 나올지 몰라서…" 저 역시 조금 더 꼼꼼하고, 조금 더 세심해집니다. 다음 내원이 수개월 후란 걸 늘 생각하며, 섬마을 건강을 대신 맡는 마음으로 한 명 한 명 마주합니다.
4~6월이면 진료실도 바빠지고, 명이나물 철이 시작됩니다. "올해 담근 명이나물 절임입니다." 바다를 건너온 절임은 우리 집 냉장고의 VIP—삼겹살날에만 꺼내는 귀한 손님입니다.
한 번은 환자께서 진료 후에 전화를 주셨습니다. "원장님, 명이나물 절임을 드릴러 왔는데 깜빡했어요!" 멀고 힘든 여정에 깜박 잊은 그 마음이 며칠 후, 정성스레 포장된 명이나물 절임이 우편으로 도착하며 다시 이어졌습니다.
첫 번째 선장님은 여전히 3~6개월마다 진료실을 찾으시고, 혼자 오시지만 울릉도 동네 사람들 이야기를 잔뜩 끌어안고 "그때 누구 왔죠. 제가 소개해서…" "김 씨 아저씨 허리는 좀 어떠신지?" "이번엔 박 씨는 못 왔어요. 약 좀 대신 받아가도 될까요?"
섬사람의 끈끈한 정은 진료실까지 이어집니다.
약을 전해주는 메신저가 되고,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건강을 챙겨주는 보호자가 됩니다.
10년이 지났습니다. 봄마다, 여름마다, 바다를 건너온 VIP들은 늘 그 자리에 있습니다.
오늘도, 울릉도에서 온 모든 분들을 VIP로 대합니다.
그것이 첫 번째 선장님께 배운 약속—그리고 앞으로도 지켜가고 싶은 저만의 진료실의 규칙입니다.
저를 믿고 바다를 건너 찾아와 주시는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 신뢰와 마음 덕분에 저 역시 조금 더 나은 의사가 되어갑니다.
울릉도의 바다, 섬마을의 온정, 그리고 먼 길을 마다하지 않는 환자들의 신뢰가 매일 진료실에 작은 우주처럼 펼쳐집니다. 그 특별한 약속을 오늘도, 내일도 지켜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