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건너는 가장

레이노 증후군 [전신 경화증]

by 이지선

1. 겨울을 건너는 가장의 손
처음 그분이 진료실에 들어선 건, 기대와 조심스러움이 묻어있는 겨울날이었다. 장갑을
벗고 내민 손끝은 희고 메말라 있었다.
“밖에서 계속 일하다 보니 손이 시리고, 어디에 닿으면 찢어질 것 같이 아픕니다.
그런데 가족 먹여살리려면 쉴 수가 없어서요. 아파도 매일 현장에 나가야 해요.”
내가 치료와 관리 방법을 하나씩 설명해도,
환자분의 눈에는 생계에 대한 걱정이 가득했다.
‘손을 쉴 수 없다는 것’, ‘아파도 버텨야 한다는 것’—
그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짧은 대화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시작한 치료.
하루아침에 모든 게 달라질 순 없었다.
그래도 환자분은 한두 달에 한 번씩 꼬박꼬박 내원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손끝 상태를 세심하게 살폈다.
“선생님, 이번 겨울은요… 진짜 다릅니다.
처음 진료 올 땐 손이 너무 아파 밤마다 잠을 설쳤는데,
요즘은 손끝 궤양도 안 생기고, 밤잠도 푹 자요.
밖에서 계속 일하긴 해도 예전만큼 무겁지 않아요.
덕분에 가족도 제가 건강 챙기는 걸 더 이해해줍니다.”
환자분의 말에 담긴 묵직함, 그리고 안도의 표정이
내 마음을 오래도록 울렸다.
나는 그분의 현장 삶,
참아낸 날들,
가장이라는 책임과 가족에 대한 사랑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싶었다.
부족한 조언일지라도,
“손이 심하게 시릴 때는 꼭 쉬어가세요,
장갑이나 핫팩 하나 챙겨 든든하게 보호하세요”
늘 덧붙이며 보냈다.
또 한 겨울이 지나간다.
이제 손끝이 조금씩 덜 아프고,
그 혹독하던 계절도 견딜 만하다고
한결 편해진 얼굴로 말하는 환자분

나는 오늘도 그런 성실한 손, 삶의 무게를 매일 짊어지는 환자분들을 위해
진료실 문을 조용히 열고 앉는다.
가끔,
‘몸을 돌보는 일이 곧 가족을 지키는 일’
이라는 내 말이
삶의 겨울을 견디는 작은 위로가 될 수 있기를
조심스럽게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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