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보내고 어쩌면 짝사랑을 했나 싶기도 했어요. 분명히 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듣기는 들었는데요. 왜 그렇게 구걸하듯 졸라 들었던 장면만 떠오를까요.
원래 한 쪽이 너무 큰 사랑을 하면 그 무게중심의 차이 때문에 한쪽은 자꾸 구부정하게 있어야 하잖아요. 그러면 무게가 만든 자세 때문인지 자세가 만든 태도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조금은 비참한 일이 잦아지는 것도 같아요. 자꾸 굴복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도 나는 할 말은 꼬박꼬박 다 했던 것 같아요. 짝사랑하면 할 말 다 못하잖아요. 내 마음을 온전히 드러내면 위협이 될 것 같고 그 위협은 그 사람을 산뜻하게 떠나게 만드는 명분이 될 것 같으니 자꾸 숨기는 기술만 늘어요. 그런데 짝사랑 같기는 해도 난 날 사랑스러워하지 않고서는 그이가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자신감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서운도 말해보고요, 슬퍼도 하고요, 따박따박 따지고도 들었어요. 어쩜 날 사랑하지 않고 배겨요? 하고 말이에요. 근데 짝사랑은 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할 말은 했는데 하고 나서 눈치 봤어요. 말하고서 다음 날 더 잘해주고 더 사랑해 줬어요. 결국 기우뚱한 관계 앞에서는 기울어진 쪽이 더 힘이 쓰일 수밖에 없는 일이더라고요. 그를 만나는 내내 힘을 주고 있어서 몸살이 오래 가는 걸지도 모르겠어요.
그를 만나고 나서 향초를 좋아하게 됐지요. 그를 만날 때 저는 투잡을 했어요. 아침에 일어나 회사를 가고 퇴근 후 저녁에는 맥줏집에서 일을 했죠. 그는 환자예요. 다정한 말을 못 하는 병에 걸렸지요. 사람이 몸이 지치면 말에 다쳐요. 다정과 친절은 마음이 아니라 체력이 하는 일이에요. 그래서 저는 몸이 지치는 날엔 퇴근하고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려 전화를 걸지 않았어요. 그는 그런 지독한 병에 걸려서 저를 자꾸 다치게 했거든요. 근데 또 저는 할 말 다 하는 병에 걸려서요. 그에게 서운하다 말하고 싶지 않았어요. 서운하다는 감정, 참 어른이 가진 감정 중 가장 아이 같은 감정 같아요. 서운하다는 말 뒷면에 있는 마음은 이런 것 아닐까요. 나를 좀 더 봐주세요. 나를 좀 더 사랑해 주세요. 부디. 하는.
하지만 서운하다는 마음은 솔직하지 못함을 내세운 채로 지독해져요. 토라지고요. 상처받은 마음이 달래지지 못해서 화로 표현될 때도 있고요. 솔직한 마음을 지혜롭게 표현하는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나는 나를 온전히 사랑하지 못해서 솔직함이 어려웠던 것 같아요. 자신의 감정을 가감 없이 표현하는 용기는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도 나는 사랑받아 마땅하다는 깊은 자기 신뢰가 필요한 일이더라고요. 나에게 다정해 주세요. 세상이 나를 힘들게 할지라도 당신의 따뜻한 말에 나는 다시 일어나는 당신의 기사입니다. 라고 말하지 못한 마음은 자정 가까이 퇴근하고 누운 내 머리맡 향초에 옮겨 갔지요. 향초는 조명등이랑 달라서 이리저리 흔들려요. 무작위로 흔들려요. 일정치 않은 향초의 흔들림을 보면서 저는 수많은 밤을 울었어요. 그는 몰라요. 내가 그 사람 때문에 빈 향초 병을 몇 개나 버렸는지요. 수많은 밤을 얼마나 흔들렸는지요. 그에게 가지 못한 시선을 얼마나 태워 날렸을까요.
서운한 감정이 마음속에서 터질 것 같은 날이면 와인을 한 병 가져와서 그 앞에 앉아요.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는데 취하기로 작정부터 마셔요. 그러면 삽시간에 와인 한 병을 다 마셔요. 그리고 계획된 주사를 부리죠. 마음이 힘들어요. 저를 좀 봐주세요. 저에게 조금만 다정해 주세요. 하고요. 저를 좋아하던 그 사람은 자신이 하는 말이 절 상처 주는 것 정도는 알았어요. 그러면 술에 취해 우는 저에게 어쨌냐면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봐요. 그냥 보고 있어요. 보통 여자가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울면 다독여주잖아요. 그 사람은 그런 거 몰라요. 모르는 것 투성이에요. 그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마이너스를 만들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요. 근데 바보예요. 때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마이너스 천프로를 만들기도 해요. 사랑하는 사람이 아픈데 부동한 것, 수동태보다 때론 더 나쁜 행동이라고 전 생각했어요. 자신의 행동이 오점을 남길까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그이의 연약함을 슬퍼하면서요.
근데 그렇게 울어서 밤이 길어지는 날이면 나를 으스러지게 안아줬어요. 말은 하지 않고 그렇게 안아줬어요. 어린아이가 아빠 사업으로 망한 집에서 엄마가 엉엉 우는데 부루마블 종이돈 가져와서 이거면 갚을 수 있냐고 하는 것 같았어요. 처음부터 바보처럼 거짓말 못 하는 사람이어서 좋았는지도 몰라요. 삼십 대에 그러면 안 될 것도 같았지만 전 그런 게 좋았나 봐요. 그것만 주냐고 추궁하지 않았어요. 종이돈 꼭 쥐고 고맙다고 며칠을 또 버텼던 것 같아요.
힘들어하는 저를 주변에서 다 알았어요. 사랑으로 힘든 여자는 안 들킬 수가 없어요. 그러면 주변에서 그래요. 사랑하는 여자가 우는데 남자가 진짜 사랑하면 그렇게 두지 않는다고요. 그러면 사실 전 그 사람들 머리털 손으로 다 뽑고 싶었어요. 후천적 대머리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 사람이 절 사랑한다는 것은 제가 마음으로 알았거든요. 다만 우리는 다른 생태계에서 와서 다른 걸 먹고 살아서 그랬어요. 그래서 짝사랑 같았지요. 난 사랑으로 살아지는데 그 사람은 아니었거든요. 그 사람이 주는 사랑은 종이돈이었을 뿐이에요. 같은 모국어를 쓰는 데 통역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어요.
그래도 지나고 나니 그 사람이어서 다행이었어요. 요즘 못된 애인들이 얼마나 많아요. 이렇게 애절하게 쫓아가면 벗겨 먹고도 마음까지도 다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는 애인들이 얼마나 많아요. 근데 그는 아무것도 달라고는 안 했어요. 몰라서 못 준 것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돌아간대도 그 사람이랑 부루마블하고 울면서 사랑할 나라서 좋아요. 저도 못된 애인이 아니어서 더 좋고요. 헤어지고 친구가 저에게 사랑은 서로 하는 거야. 라고 그랬는데요. 사랑은 내가 한 것이 사랑이야. 라고 친구에게 조용히 말해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