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나의 로봇

by 송유성

그 사람이 그랬어요. 사람은 소유할 수 없다고요. 그 사람은 저 혼자 멋있는 말은 다 했어요. 우리 교수님이 그랬는데요, 그렇게 멋있는 말만 하다가는 주변에 아무도 남지 않을 거라고요. 근데 그 사람 옆에 자꾸 내가 있었어요. 멋있는 말 하는 남자 조심해야 해요. 옆에 있으면 음지에 핀 민들레처럼 퍼지지도 못하고 시들어가게 되거든요.


그 사람이랑 애인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처음부터 다했어요. 왜요. 우리는 젊은 청춘남녀였고 눈이 맞았고 불같이 사랑을 했죠. 아주 상투적이고 흔한 방법이었어요. 하지만 계속 상투적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클리셰를 벗어난 영화가 시작되었죠. 그 사람이 나랑은 애인은 안 한대요. 우리는 너무 달라서 애인하지 말재요. 그러면 나도 다치고 혼인 적령기에 있는 두 사람의 앞길을 막는 일이래요. 애인하지 말자는 말, 참 웃긴다고 생각했어요. 나를 보러 오면서 가방 가득 세제를, 먹을 것들을 꽉꽉 눌러 담아 오면서, 내가 좋아하는 맥주를 박스로 사서 땀을 송골송골 흘리면서 들어오면서 사랑 애, 사람 인 하지 말자니요. 사실 그때만 해도 잘 몰랐던 것 같아요. 내가 훗날 수많은 날을 울만큼 그 사람은 지키고 싶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요. 그리고 그때는 자신 있었거든요. 전 부산에서 생활력 강한 엄마 밑에서 자랐고 혼자 산 지 오래되어 독립적이고 키는 작지만 옹골찬 여자니까요. 제 매력 발산용 특기만 몇 개 보여주면 금방 넘어올 것 같아서 흔쾌히 알겠다고 했어요. 제 무덤 지가 파고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 같아요.


자신이 가진 무기를 앞에 꺼내놓고 싸우는 사람을 조심하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그건 자신감이거든요. 그는 처음부터 자신이 가진 무기를 다 꺼내놓고 보여줬어요. 이것이 내가 살면서 필요했던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아주 단단하지요. 아마 이것들을 이겨내기에는 당신이 가진 것들이 별로 의미가 없을 겁니다. 하고요. 마음이야 내 것이니 내 의지대로 될 것으로 생각했던 내가 얼마나 오류였는지는 금세 깨달았어요. 마음은 생각으로 하는 일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마음은 그 사람의 단단한 매력보다 옆으로 살풋 보이는 틈 때문에 자꾸 커지는 일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새로운 무기를 만들었지요. 저는 참을성이 없어요. 참을 바에야 안 해요. 그런 저를 바꿔놨어요. 자꾸 참게 만들어요. 저는 참는 일이 무기가 되었어요.


나는 핸드폰에 그 사람을 로봇 이모티콘으로 저장했어요. 그 사람은 인풋과 아웃풋이 명확하게 존재하는 사람이었어요. 감정도 스위치가 있는 것 같았어요. 그런 거 껐다 켰다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안 것 같아요. 근데 다행히도 그 로봇이 절 만나면 종종 고장 났어요. 그 사람이 그랬어요. 이성으로 생각하면 당신을 만나면 안 되는 것 같은데 이성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고요. 그런 말들에 속은 걸지도 몰라요. 나를 더 내던져서 본인을 사랑하라고 날 조종했나 싶어요. 나는 내가 분명히 이기는 게임이라고 생각했는데요. 어느 날부터 계속 연패했어요. 그러면 약간 그가 보이지 않는 흑 마법 같은 것을 쓰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어져요. 나는 그것도 모르고 조종당했고 늘 졌고 지는 줄도 모르고 사랑을 했습니다.


그 사람을 만나고 없던 종교가 생겼어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를 빽빽하게 대는 인문학 책을 좋아했는데요, 세상에 모든 종교를 내가 끌어다 썼어요. 알량한 한 사람에 대한 애정으로 대단하신 분들을 자꾸 소환해서 죄송했지만 신은 대체로 용서하신다고 들어서 아는 신은 다 불렀어요. 그 사람을 만나는 건 신도 필요하고 주변 사람들의 다정도 필요하고 단 음식도 많이, 술도 많이 필요한 일이었어요. 혼자 있으면 또 당당해지고 대쪽 같아졌는데 그 사람을 만나러 가기만 하면 대만 남은 민들레처럼 홀쭉하게 돌아왔어요. 듬성듬성 흩날린 씨는 그의 가슴 어귀에 조금 뿌려놓고 남은 씨앗은 베갯잇에 눈물로 적셔서 심었던 날들이 있었습니다.

로봇은 사랑 같은 건 못할 줄 알아서 포기하려고 돌아서면 날 잡아요. 왜 그런 영화들 있잖아요. 고도로 발달한 AI 로봇이 인간을 사랑해서 도망치는 디스토피아적 영화 같은 것들요. 그 영화의 주인공이 내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주인공은 로봇의 진심을 포기하지 않아요. 대신 영험한 요정을 찾아 나서죠, 그 요정을 찾아가서 소원을 비는 것으로 희망을 대체해요. 제가 그랬어요. 하지만 소원은 이루어지지 못하죠. 그는 영영 살겠고 나는 죽겠죠. 나를 사랑한 로봇은 아마 메모리를 포맷시켰을 거예요. 너무 많은 정보를 저장하면 로봇은 고장 나니까요. 인간인 나는 지금 이렇게 살아남아 넘치는 기억을 두 손위에 쥐고 길을 가다가도 울고, 빵을 먹다가도 울어요. 나의 속성이 조금 수용성으로 바뀐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울어요. 로봇의 세계로 돌아간 그는 잘 살고 있을 것 같은데 나는 조금 억울해서 또 울어버려요. 그에게 정보가 나에게는 추억이에요.


그와 헤어지고 신을 다시 찾아요. 그가 인간이 되게 해달라고 빌어요. 인간이 되어서 내가 준 사랑으로 유한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그와 만날 때와는 다른 소원을 매일 빌게 되었어요. 이렇게 빌다가는 내 손바닥이 남아나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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