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피부과에 가서 점을 제거했어요. 아주 오랫동안 얼굴에 있는 점을 빼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와 헤어지고 나서야 점을 없애러 갔어요.
그가 저를 떠난 뒤 저는 많은 것들을 해치웠어요. 밀린 옷장 정리를 하고 부엌의 묵은 기름때를 지우고 버려야 했던 대형 폐기물을 내다 버렸죠. 읽지 못했던 책들을 읽고 쓰지 못했던 마음들을 쓰고 있어요. 그를 만날 때는 미처 못했던 것들을 해치우면서 그를 만나는 일은 어쩌면 힘을 많이 써야 했던 일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가성비를 좋아해요. 가성비와 효율로 살아요. 처음에는 똑똑한 사람이어서 합리적인 것을 추구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애쓰는 마음이 불편해서 그렇다는 것을 조금 지나고 알았어요. 그는 많은 에너지를 들이는 일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는 모르겠지만 그는 내면의 에너지가 작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효율과 실용성으로 살아요. 그에 비해 저는 항상 무용한 무언가를 애타게 바라고 애쓰고 밤하늘의 별을 보기 위해 수많은 밤을 지새워요.
그는 언제나 욕조 속에서 둥둥 떠다니는 오리 인형같이 살았지요. 속을 비워버리면 가만히 있어도 죽지는 않는, 그런 오리 인형 말이에요. 저는 대자연에 막 태어난 오리 새끼처럼 살았고요. 여유로워 보여도 수면 아래서 살려고 몹시도 발을 굴리는 그런 오리 새끼처럼요.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는 것 같은 그를 보고 있으면 참 신기해서 살면서 무언가를 간절히 원해본 적이 있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는데, 한참 생각하더니 떠오르는 것이 없다고 대답했던 기억이 나요.
저는 비효율 그 자체에요. 약간 비효율적인 것을 본능적으로 좋아하는 것 같아요. 조금은 어렵게 얻은 결과를 좋아하고 애써야 하는 게임을 즐기는 제가 변태가 아닐까 하고 머리가 굵어지고 항상 의심해 왔었는데요. 그를 만나고 나서 나의 변태성을 더더욱 의심하게 되었어요. 언젠가 친한 언니에게 진지하게 말한 적이 있어요.
“언니. 고통은 자극을 낳고 자극은 쾌락을 낳는다잖아. 혹시 내가 정서적인 마조히즘이 있는 변태여서 그를 이렇게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를 사랑할 수 있는 걸까.”
그를 만나면서 모든 정신 병리적 증상들이 내 이야기인 것 같았어요. 혹시 내가 정신적인 어떤 결핍 때문에 그를 이렇게 사랑하는 건 아닌가. 미치지 않고서야 이렇게 슬프고 힘들면서 그를 사랑할 수가 있는 걸까. 하면서요. 유년 시절의 트라우마도 막 서랍 다 뒤져서 끄집어내 오고요. 나의 지난 PTSD들도 생각해 보고 그랬어요. 근데 그를 만나면 병리학적 사건들의 반응이 아니라 그냥 그에 대한 마음으로 배시시. 웃고 마는 내가 있었어요. 그래서 그냥. ‘아. 사랑이구나. 단순히.’ 하고 결론지었지요.
그의 효율 추구형 성격으로는 나를 안 만났어야 맞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저도 몹시 매력적인 사람이라는 자신감이 생겨요. 그를 만나는 내내 자신감을 다 써버려서 나중에는 박박 긁어도 나오지 않았었는데요. 그가 떠나고 나니 자신감이 다시 채워져요. 그는 나를 위해 자신의 삶에 없는 일들을 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거든요. 나와 함께 오래된 시골집으로 여행을 떠나 보고요, 꽃을 보러 산도 가보고요, 밤늦게 한참 떠드느라 잠도 줄여보고요. 그리고 말은 못 했지만, 움찔거리는 그의 입술을 통해 종종 그가 시를 써보려고 했던 것도 알아요.
헤어지고 나서 그가 연락이 오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그가 약한 사람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우리의 사랑은 그곳에서 영원히 미완성된 시로 남았으면 좋겠거든요. 그리고 그가 없는 세상에서야 겨우 저는 슬프지만, 몹시 안녕하거든요. 안녕한 마음으로 미완성된 시를 이제 쓰면서 살 수 있게 되었거든요. 그가 오리 인형처럼 무탈했으면 좋겠어요. 인형은 살아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제야 온몸이 아플 것도 같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