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나의 결핍

by 송유성

한 사람의 결핍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다른 모양으로 비치는 일이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며 자신을 바라볼 기회를 얻고는 한다. 특히 사랑을 하면서 얽히고설킨 애증과 관심과 서운함과 배려와 보살핌 등의 복잡한 감정을 마주하면서 더욱 커져서 내 앞에 우뚝 선,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거대한 결핍의 거인과 마주하게 된다.


나는 “네가 공부를 잘해야 엄마가 욕먹지 않는다.”라는 선량한 폭군 같은 엄마 밑에서 자라났다. 엄마는 연약하고 다정하고 배려심 있는 찹쌀떡 같은 사람이었다. 달콤하고 맛있지만 먹을 때면 바닥에 후두둑, 흰 가루가 너저분하게 들러붙고 옷에도 붙어서 먹기가 꺼려지곤 하는 그런 찹쌀떡 같은 사람이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공부에 두각을 드러내는 아이였다. 넉넉지 않은 집안 사정으로 다양한 학원에 다니느라 하교하자마자 바쁜 친구들과 달리 나는 동네 어귀의 조그마한 ‘ㅇㅇ종합 학원’이라고 붙여진, 원장 선생님 한 명과 영어 선생님 한 명만이 전부인 학원을 겨우, 나도 하교하면 친구들과 손잡고 학원이라는 곳을 가는 즐거운 여정을 하고 싶다는 소망으로 겨우, 조르고 졸라 다닐 수 있게 되었는데, 그때 당시만 해도 일 년에 두 번 정도 부산의 모든 학원이 참가하는 수학 경시대회가 있었고 나는 처음 나가자마자 부산시에서 1등을 하는 어리둥절한 결과를 얻었다. 엄마는 신이 나서 학원에 플래카드를 제작하고 떡을 돌렸다. 어린 나는 내가 잘나서 얻었다기보다 운이 좋았던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저 엄마가 여기저기 전화를 하면서 “글쎄, 그러니까 시험 못 쳤다고 돌아와서 시무룩하더니 일등을 했네.”하고 쑥스럽지만 명확한 자랑을 하는 것을 들으며 엄마가 행복하다면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고는 그 후에도 세 번인가 네 번을 더 나갔지만, 처음만큼의 성적을 얻을 수 없었다. 경시대회에 나가는 횟수가 증가할수록 나는 시험을 치러 가는 날이 공포였다. 나는 단 한 번도 엄마에게서 “우리 딸이 공부를 잘하지 못해도 괜찮아.”라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엄마는 내가 성적이 조금이라도 떨어질 때마다 아무 말 하지 않고 한숨만 쉬었다. 나는 엄마가 한숨을 쉬면서 까드득하고 초록색 소주병을 여는 저녁의 정적 속에서 어디론가 도망치고만 싶었던 것 같다.


그럭저럭 머리는 좋았던 것 같아서 학창 시절 내내 학원에 다니지 못해도 줄곧 반에서 상위권을 유지하는 학생이었고 부산의 국립대에 들어가 졸업을 했다. 성인이 되어서 없던 반항심이 그제야 머리를 들고는 이른 나이에 집에서 나와서 살았다. 그렇게 자취를 한 지 십 년이 넘었다. 나는 스무 살 때 아르바이트를 하며 만난 다섯 살 많았던 오빠와의 첫 연애를 시작으로 짧게는 일 년 반에서 길게는 이 년 반 정도의 연애를 운이 좋게도 계속했는데 연애를 시작하기도 전에 나는 나의 집안환경과 내 결핍을 들어가는 싸구려 소주 몇 잔에 와르르 쏟아냈었다. 혈기 왕성한 그때의 남자들에게 조그만 여자애의 투정 같은 결핍 따위 용맹한 영웅처럼 지켜주리라. 마음먹게 하는 기름 역할을 했겠지만. 그때의 나는 진지했다. 물론 상처받기 전에 시작하고 싶지 않다는 아주 유약하고 두려움 가득한 마음이 있었다. 조건부로 사랑을 받으며 자랐던 아이는 자신의 존재 이유 없이는 사랑을 받을 수 없을 거라는 공포에 내내 시달리며 두려워해야 했다.


나이를 점점 먹어감에 따라 내 결핍을 그렇게 광주리에 넣어둔 곶감을 쏟아내듯이 처음부터 한꺼번에 쏟아내는 것이 좋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고서 미리 그러는 것은 그만두었지만, 애인과는 살아온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또 나는 살아온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시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든 애인이 나의 내막을 알 수밖에 없었는데 사랑은 위대하고 위대한지라 보통의 애인들은 그럼에도 “유성아, 정말 잘 살아왔다. 멋있다.”라고 말해주며 나를 꼬옥 안아주는 해피엔딩의 형식을 선택했다. 그러다가, 만났던 마지막 애인이 처음으로 뻔한 형식에서 벗어난 대답을 했다. “좋아 보이지는 않지요. 당신이 좋아졌다는 것을 증명해야겠지요.” 하고서.


나는 그가 그 말을 하던 초여름날을 아직도 기억한다. 이제 갓 더위가 시작하던 계절이어서 밤낮으로는 아직 선선했는데 그 사람이 운동을 좋아했고 그 사람은 언제나 내 것 같지가 않아서 나는 그에게 늘 잘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저녁을 먹기 전에 건강을 위해서 조금 걸으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던 것 같다. 살아온 이야기를 조잘조잘하면서 걷다 보니 더워졌고 겨드랑이와 이마에는 조금씩 열감이 오르고 있어 더위에 약한 내 머리도, 마음도 어지러운 차에 그가 그렇게 말했다. 나는 쿨하게 “뭐, 지금은 지난 일이니까요.”라고 답했지만, 그가 갑자기 세상을 대변하는 것처럼 느껴지며 극심한 어지러움이 찾아왔다. 세상은 어쩌면 나의 이야기를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하고서 깊은 상처를 받았던 것 같다. 열심히 살아왔고 지금은 좋아졌는데 한번 찍힌 낙인은 계속 남아있을 수 있겠구나. 나는 영영 증명해야 하는 무엇이 있구나. 하고서.


그를 만나는 내내 나는 내 결핍을 어쩌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다. 한 사람이 나고 자라면서 얻은 결핍은 평생 자라지도 않은 채 밥 달라고 내 옷깃을 돌돌 말아 쥐고서 놓아주지도 않는 아이 같은 존재다. 아이는 말도 안 듣고 대화도 통하지 않는다. 그저 어르고 달래서 조금만, 조용한 하루를 보내거나 지친 하루를 보내거나 그것 말고는 방도가 없다. 사랑스럽고 귀엽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의 결핍과 나의 결핍이 닮아서 그랬던 것 같다. 긴 시간을 외면만 받고 제대로 사랑받지 못한 채 자랐던 그가 담담히 살아가는 것 같았지만 옷방에 정갈하게 정돈된 모든 셔츠가, 생활에서 지켜져야 하는 규칙들을 생각해 보면 정갈한 이면에 있는 거대한 불안을 엿볼 수 있었으니까. 계획과 통제에 능한 사람은 사실 누구보다 큰 불안을 지니고 사는 법이니까.


그와 헤어지고 조금씩 무너져있던 나를 일으켜 세우는 것에는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컸다. 나의 모든 장단점을 사랑해 주고 나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다시 한번 일러주는 사람들이 있었고 나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을 한 발짝 멀리서 바라보니 누구의 잘못이라고 정확하게 판결 내릴 수 없는 것들도 많았다. 어떤 애인에게는 사랑스러운 나의 어느 부분이 어떤 애인에게는 불편하기만 한 부분일 수 있다는 것을 연애하면서 많이 알게 되었다.


지금도 나는 내 결핍과 싸우느라 바쁘다. 하지만 불우한 이웃을 보면서 내심 우월에 빠지곤 하는 내 모습 뒤에 있는 나약함도, 누군가와 관계 맺을 때마다 믿어도 되는지 의심하곤 하는 소심함도 모두 다 나니까. 잘 관리해서 어여뻐하고 살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리고 너무 자기 자신을 탓할 필요도 없다. 결국 인연은 절대적 기준에서 좋은 사람보다는 나와 잘 맞는 사람이 있을 뿐이고 어떤 사람의 결핍은 또 나와 꼭 맞는 블록 같아서 아무렇지도 않게 잘 살아갈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나야, 내 결핍아, 앞으로도 잘 부탁해.’ 하면서 잘 안아주며 살아가면 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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