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둘 다 너무 겁쟁인 채로 만났어요. 처음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부터 전 생각했어요. 이 남자랑 엮이고 싶다고요. 근데 동시에 깨달았어요. 그랬다간 내가 남아나지 않겠다고도요. 조심해야지 하고요. 근데 사랑이 어디 마음먹은 대로 되나요.
그 남자는 조금 이상했어요. 나랑 엮이고 싶지 않다고 말하면서 다 엮이고 싶은 것처럼 행동했어요. 우리 집에 자꾸 왔고요. 제가 좋아하는 술을 사 오고요. 부족해 보이는 생필품이 있으면 박스채로 사 왔어요. 애인은 하지 말자, 사랑은 하지 말자. 해 놓고 자꾸 우리 집에 와서 나를 보러오고 자꾸만 부족을 채워줬어요. 내가 손으로 요리 만지고 조리 만진 요리들을, 집밥을 수십 번을 먹어 놓고 돌아서면 또 애인은 하지 말자, 사랑은 하지 말자 했어요. 지는 이미 이 집 남편처럼 오고 자고 있으면서 몰랐나 봐요. 사랑이 옴팡 빠진 사람처럼 날 보면서 정말 몰랐나 봐요.
그 사람이 좋아서 볼수록 자꾸 더 사랑이 되어서 그의 말들이 아프고 불편해지기 시작했어요. 우리는 기역으로 보나 니은으로 보나 사랑하는 사이였는데 저는 그와 니꺼 내꺼 놀이를 못 해서 발이 동동 굴러졌지요. 그래서 냅다 같이 놀자고 했어요.
“나랑 만나요. 결혼하자는 거 아니잖아요.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는데 왜 당신이 오버에요.” 하면서요.
막 21세기 신여성처럼 당당히 말하고 대답을 해주기까지 며칠을 마음 졸였어요. 큰이모가 언젠가 연근조림은 오랫동안 약불에 바글바글 졸여야 맛있고 반짝반짝 윤기가 돈다고 했는데요, 내 마음은 졸일수록 푸석푸석 맛없었어요. 자꾸 쪼그라들기만 했어요.
한참 졸이다 마음이 땅콩처럼 쪼글쪼글해졌을 때야 그가 대답을 줬지요.
‘사귀는 건, 가능은 할 것 같다.’고요. 고백에 대한 대답이 뭐 이래요. 그런데도 전 입을 삐죽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어요. 사실 저는 살면서 인기가 없는 편이 아니었어요. 그는 제 가치를 잘 모르는데요. 저도 어디 가면 꽤 인기가 많은 여자거든요. 근데 항상 그의 앞에서는 콧대 못 높였어요. 콧대 높이면 그러면 말고. 하고 코 납작하게 만들 남자인 것을 알았거든요. 저는 언제나 그 사람 앞에서는 초보운전자처럼 허둥대기만 했어요.
그렇게 드디어 그와 사귀게 되었어요. 사랑은 다해 놓고 한참을 지나서 그의 애인이 된 것 같기도 했어요. 그런데 뭔가 사귀면요, 니꺼 내꺼 하면서 마음 그만 졸여도 될 줄 알았는데요. 그 사람은 혼자 산 지 너무 오래되었어요. 딱딱하게 굳어 떨어지지도 않는 아스팔트에 붙은 껌 같았어요.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죠. 자기가 껌인지 바닥인지도 모르는 사람이에요. 제게는 다정했지만요. 그 사람 삶에 끼워주진 않았어요. 나도 같이 껴서 주사위도 던지고 말도 앞으로 전진해 보면서 재밌게 사랑하고 싶었는데 주사위 던지려고 하면 저 멀리 도망갔어요. 그럼 저는 항상 그 사람이 조금 내어주는 옷자락만 잡고 있었어요. 그리고 가끔 머리도 쓰다듬어 주고 안아줄 때도 있었죠. 그것 말고는 별다른 수가 없다는 것, 그게 날 무력하고 아프게 했죠. 그래도 행복했어요. 옆에 있을 수는 있었거든요. 아무도 옆자리 내어주지 않는 사람인데 그래도 나한테는 옷자락이라도 줬으니까요.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단순히 옷자락이 아니라 그 사람이 줄 수 있는 최대를 줬던 것 같기도 해요. 옷자락 잘 못 잡아당기면 나체가 되니까요. 그러면 그는 벌거숭이가 될 거고 그건 그 사람이 무너지는 일일 테니까요. 그 사람은 세상을 옷 한 벌 입고 싸워가며 살아요. 단벌 신사죠. 근데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행복을 축소해요. 그래야 살 수 있는 사람임을 모르지 않아 늘 마음 아팠어요.
근데 사랑은 어쩔 수 없이 소유욕을 낳는 것 같아요. 모든 사람의 허황하고 어리석지만, 또 아름다운 욕망이잖아요. 그래서 사람은 결혼이란 것을 하는 것일 지도요.
그래서 내가 그 사람 모르게 옷자락을 조금씩 조금씩 더 당겼는데요. 그러다 벗겨지면 와락 안아버려서 모르게 하려고 했는데요. 눈치채버렸어요. 그래서 갔어요. 눈치 안 챘으면 나랑 같이 나체로 자유로워져서 여기도, 저기도 날아다닐 수 있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해요. 근데 알아버려서 갔어요. 그 사람 아마 옷 추스르고 단정하게 잘 살 거예요.
나를 떠나간 그는 아마 그는 덜 불편하고 덜 행복하게 살 것 같아요. 그가요, 제 생각을 안 했으면 좋겠어요. 한밤중에 눈을 떠서 그의 눈썹을 쓰다듬어 보곤 하던 내가 있었다는 것을, 그가 평생 모르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가 꿈에서 한 번도 깨지 않고 단잠만 자며 그렇게 살기를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