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이랑은 그렇게나 걸었어요. 산에도 가고 절에도 가고 강에도 가고 아무튼 걸을 수 있는 곳은 그냥 다 걸었어요. 그 사람이 걷는 것을 좋아해서 나도 좋아하기로 했어요.
사실 나는 무릎 수술을 해서 무릎이 튼튼하지 않아요. 수술해 준 의사 선생님이 그랬어요. 무릎 아껴 쓰라고요. 2시간 이상 걷지 말라고요. 나는 태어나서 그날 처음으로 내 신체를 마음대로 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아껴 쓰라는 말 때문에요.
근데 그가 걷는 것을 좋아하고 특히 등산을 좋아해서 나를 마구 썼어요. 의사 선생님의 조언 같은 건 그 사람 만나면 다 잊었어요. 집에 무릎 보호 관련 용품들이 하나씩 늘었어요. 광고 같은 것에 혹해 이중이니 삼중이니 하는 무릎 보호대도 사고요. 발바닥을 편하게 해줘 무릎의 충격을 완화해 준다는 무슨 인체공학적 설계 어쩌구 하는 깔창도 사고요, 폼롤러도, 압박스타킹도 샀어요. 운동화보다는 단화를 더 좋아하던 나였는데 그 사람 때문에 비싼 운동화를 몇 켤레나 샀지요. 무릎도 돈도 그 사람 덕분에 펑펑 썼어요.
하루는 그 사람이랑 야간산행을 갔어요. 근데 산에 도착해서야 그가 랜턴을 잊어버리고 가져오지 않았단 것을 알았어요. 저는 야맹증이 있어요. 어두운 곳은 저에게 쥐약이에요. 게다가 야산이잖아요. 귀신이 나오면 멀리서 보고 도망쳐야 하는 데 그 사람이 먼저 보고 날 버리고 도망가면 어떡해요. 그렇게 랜턴이 없으면 어찌 산을 오르나 걱정하고 있는데 그 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출발 준비를 했어요. 도심의 불빛과 달빛으로 충분하다 했어요. 저는 믿기로 했어요. 그가 말하면 그냥 다 맞는 말이니까요. 도심의 불빛과 달빛 말고 그 사람을 믿었어요. 인적 드문 야산, 나를 잡아드시오. 하고 저를 내맡긴 것 같아서 좋았어요. 저는 언제나 그 사람에게 잡아먹혔지만 스스로 잡아먹히길 각오하고 잡아먹히는 건 본질적으로 다른 일이잖아요. 난 항상 그가 날 온전히 뼈 하나 남김없이 먹어주었으면 했던 것도 같아요.
산을 오르는데 무섭고 힘들어서 내려가고 싶었어요. 알 수 없는 소음들이 간간히 들릴 때마다 그 사람에게 꼭 붙어서 땅만 봤어요. 시선을 멀리 두면 무언가 보일 것 같아서 움직이는 제 운동화만 보면서 산에 올라갔어요. 그 사람을 만나고 막 싫은 걸 다했던 것 같아요. 땀나는 운동도 언제든 떠나갈 것처럼 구는 그 사람의 태도도 옆에만 있다면 다 괜찮아지는 것 같았어요. 같이 뭘 하는 것 같아서 다 좋아져요. 그리고 그게 사랑이 아니면 뭐겠느냐고 오히려 사랑의 증거 같아서 마음도 더 단단해졌던 것 같아요.
어둑한 산길을 한참 걷다 보니 어둠에 익숙해져서 그의 얼굴도 조금씩 보였어요. 달빛에 비친 그를 힐끔힐끔 쳐다보면 그가 나를 보며 머리를 쓰다듬어 줬죠. 공포영화로 시작했는데 로맨스가 되었지요. 이른 겨울이었고, 등에는 약간의 열이 나기 시작했고, 당신의 이마엔 송골송골 땀이 맺혔죠. 정상에 오를 때까지 도심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어요. 정상에 올라서 당신과 함께 멋진 부산의 야경을 보고 싶었거든요. 속으로 생각했어요. 우린 영화를 찍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하지만 그런 생각은 숨겼어요. 아마 그가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반만이라도 알았으면 일찌감치 떠나갔을 것 같아요. 이상한 망상을 하는 사람이라고 여기면서요. 그를 만나면서 내가 좋아하는 건 숨길 수 있으면 숨겼어요. 내가 좋아하는 건 그 사람한테는 무용한 것들이라 몽상가처럼 여겨질 것이 뻔했거든요. 그래서 현실적인 여자처럼 행동했어요. 그러면 미처 감추지 못한 욕망이 꿈으로 나와요. 그에게 고백하지 못한 꿈들은 눈을 뜨면 일기장에 쓰고 혼자 읽고 감추었어요. 미주알고주알 떠들고 싶은 욕망은 노트에 꼼꼼하게 덮어두었습니다.
그래도 알뜰하게 사랑하지 않아서 다행인 것 같아요. 무릎도, 나도 그 사람을 사랑하면서 많이 써버려서 말이에요. 만약 아껴 썼으면 그날, 황령산에서 그와 함께 본 마법 같은 야경이 없었겠죠. 그리고 기적처럼 그가 낭만적이네. 라고 중얼거리는 것을 듣지 못했을 거니까요.
사랑은 아껴 쓰면 모르는 일 같아요. 나를 막 내던지고 흥청망청 거덜이 나야 아는 일 같아요. 그러고 나면 나도 내가 좋고 떠나간 애인에게도 감사하고 그런 일 같아요. 살면서 처음으로 배운 일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