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내 삶에서 필요한 일이었던 것 같아요. 사람이 각자 살면서 꼭 치러내지 않으면 안 되는 일들이 있지요. 각자 주어진 그런 일들을 겪어내며 신념이 되고 다짐이 되고 목표가 되곤 하는 식이죠. 하필 말이에요, 다음 사랑은 아주 잘 사랑하고 싶다고 다짐하던 끝에 ‘하필’ 그를 만났으니까요. 앳된 이십 대의 연애와 정말 이 사람이 끝사랑 같던 진지한 몇 번의 연애를 끝내고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읽으면서 연애 말고 ‘진짜’ 사랑 해볼 거라고, 네가 나에게 치킨을 사주었으니 나는 커피를 사겠다, 네가 두 시간을 내게 시간을 썼으니 나는 이 정도의 사랑을 주겠다, 식의 계산법 말고 그 사람을 사랑하는 일을 통해서 더 사랑스러워진 나를, 그 사람을 사랑하는 일로 삶을 더 벅차게 사는 지금을 사랑하겠다고, 그런 다짐을 하고 있던 겨울이었습니다.
그를 만나는 동안 흘린 눈물의 양을 압축시키면 이제껏 사랑으로 흘렸던 눈물보다 많을 것 같습니다. 그는 촌스러운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난 촌스러운 것들을 사랑해요. 본능적으로 잘 정돈된 대리석보다는 결이 살아있는 거친 나무와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져 울퉁불퉁한 컵들과 종류가 일정치 않은 꽃을 좋아해요. 촌스러운 것들은 마음이 더 잘 보이거든요. 그래서 거짓말은 죽어도 하지 못해 상처 주고 마는 그를 사랑했는지도요. 나는 그가 사랑을 아주 다 해버리면 안 된다고 다짐하는 것도 잘 알았습니다. 담금질하듯이 하루는 뜨겁고 하루는 차가운 마음의 반복이었죠. 담금질의 반복이라면 강해져야 하는 데 사랑을 할수록 왜 마음은 더 말랑해질까요. 말랑해진 마음은 말랑하다 못해 그의 아주 사소한 손짓에도 투둑. 하고 눈물이 흐르는 지경에 이르렀어요. 삼십 대의 연애는 날것의 이십 대의 연애와 달리 아주 스무스하고 농염하고도 자연스럽게 마음을 추스르고 거리를 두면서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마, 사랑에 빠지면 호호 할머니가 되어도 초연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사람이 살면서 사랑에 빠지는 일만큼 무서운 일이 있을까요.
오늘도 새벽에 요가를 다녀왔습니다. 언제나 하지 못했던 동작이 있었는데요. 그를 생각하며 이 악물고 버텨보았더니 거의 성공했습니다. 그가 내 곁을 떠나고 사랑은 둘이서 했는데 갈 곳 잃은 마음은 혼자 절절 버텨내야 하더라고요. ‘절절’이 중요해요. ‘절절’ 사랑해 내고 ‘절절’ 울어내야지 온전히 내 것이 되는 것 같아요. 요가 선생님이 동작을 카운트하시는데요. 열 번 카운트하시고선 마지막 카운트에서 ‘이것이 정말 나의 것이 되는 겁니다. 이제까지의 과정은 이번을 위한 것입니다.’라고 하시거든요. 버티고 이 악물고 해내던 사랑이 떠나가도 그 후의 이별까지 버텨내야 그 사랑, 어디 가지 않고 내 것이 되는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절절’ 울고 있어요. 아주 많이 충실하게 슬퍼하고 있어요. 휘리릭 모른 척, 없던 척, 또 다른 사랑을 허겁지겁 찾아내는 일 따위 하지 않아요. 그건 내가 했던 사랑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밥 먹다가도 투둑, 버스 안에서도 투둑, 여기저기서 투둑, 맘 놓고 울어요. 막 울어내요.
헤어지는 날 그 사람이 한 말을 생각해 봅니다. 날 사랑하지 않느냐는 나의 질문에 사랑한다고 대답했어요. 하지만 고통이 더 크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어떨까요. 제가 없는 세상에서 고통 없이 평온을 찾았을까요. 전 당신을 만나는 동안 고통을 친구처럼 안고 지냈습니다. 아마 제 고통이 훨씬 더 나이가 많은 친구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고통으로 떠난 건 그 사람이 떠나갔지요.
그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마음이 지옥인 일이었어요. 아무리 물을 부어도 채워지지 않는 독이 있습니다. 그를 사랑하는 일은 그런 일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사랑은 속절없이 그런 일들을 가능하게 합니다. 지옥을 걸어도 당신이 있는 지옥이 낫죠. 아마 그는 사랑을 선택하는 것보다 고통을 버리는 쪽을 택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그가 살아가는 방법임을 모르지 않아 비난하지는 않습니다.
바보 같은 생각이지만 이 모든 것이 업보인가 라고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한때 저도 많은 사랑을 받았고 지나간 연인에게 최선의 사랑을 주지 못했을 때가 있었으니까요. 일생에서 고통의 양과 음의 총량을 생각해 보면 사람이 겪어내는 고통의 총량은 평균값에 수렴하는 걸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피하고 싶어도 쏟아지는 장대비에 다 막아내지 못하고 젖어 드는 몸처럼, 당신에게 젖어 들어 가면서 저는 많이 울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업보라면 하고 기꺼이 젖어갔던 것 같아요. 총량이 있다면 언젠가 겪어내야 하는 일이 아니겠어요. 그리고 그것이 당신이라면 그럼에도 다행이었다고 여겼습니다.
그를 만나면서 기도하듯 사랑했습니다. 그 사람과 헤어지고 무너지는 마음을 친한 언니에게 말했죠.
‘언니, 너무 그 사람이 무쇠의 뿔처럼 혼자 살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는 삶을 투쟁하듯 살아서 창과 방패만 가지고 있었어요. 언제나 전쟁에 나가서 무언가와 투쟁하듯 사는 삶은 척박하고 꽃 한 송이 피지 못할 것 같았어요. 저는 먼지투성이인 그의 발을 닦고 그 위에 작은 씨앗 하나를 심었죠. 아마 훗날 그 사람도 모르게 피어날지도 모르겠습니다. 꽤 깊숙이 심어뒀으니까요.
지는 시간인 줄 알면서도 시절처럼 사랑했습니다. 알알이 굴러가는 내일의 우리를 주워 담지 못해 속상해하며 발만 동동 구르던 날들을 긍정합니다. 오늘의 우리를 왜 내일을 보며 당신은 이별을 상정하는지 어떤 날의 일기에 의문이라고 적었던 것 같습니다. 시지프스의 신화를 아시나요. 저는 그를 사랑한 일을 그런 일이라고 오래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삶은 저주를 건 쪽이 원래 항상 지는 일이더군요. 그가 너무 이기려고 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늘 지는 사람은 항상 더 여유롭고 많은 풍경을 보며 살아가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