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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미 Feb 01. 2023

'르네상스'가 꽃 핀 건 경제적 이유였다?

경제와 예술의 융합, '르네상스'를 다시 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르네상스'는 부활, 재생의 의미로 중세적 종교관에 갇혀 오직 신에 관점만을 고집하던 사회 분위기가 인간에 대한 관심과 탐구로 옮겨지면서 고대 그리스나 로마예술을 부흥시키고자 했던 사회 전반적인 하나의 큰 흐름이었다.

 

14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일어났던 르네상스는 특히 문학과 예술분야에서 두드러졌는데 그 유명한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걸출한 예술인들이 배출되면서 화려하고 휘황찬란한 작품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온 시기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예술분야에서 두드러진 성과를 보여 소위 '문예부흥기'로도 불리는 르네상스가 발생한 배경에는 의외로 경제적 측면이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얼핏 보면 생경한 이 두 분야가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예술'이 아닌 그 시대의 '경제적 흐름'을 중심으로 한 번 살펴보았다.


무역과 상업의 발달, 상인계급이 급부상하다.

 

 서기 1100년을 전후한 이탈리아에서는 신성로마제국에서 자치권을 얻어 독립한 200여 개가 넘는 도시국가들이 난립하고 있었다. 그들은 오랜 시간 서로 경쟁하면서 자체적인 통폐합을 거쳐 1300년 무렵에는 50여 개의 도시국가로 재정비된다. 그중  몇 개의 강력한 도사국가가 등장하는데 밀라노, 베네치아등과 함께 그 중심에 피렌체가 있었다.


15C 이탈리아의 주요 도시국가

 지리적으로 무역에 유리했던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은 무역의 범위가 확장되어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를 잇는 지중해무역이 활발해짐으로써 경제적으로 큰 이득을 얻게 된다. 


 거기다 1096년부터 1291년까지 벌어진 십자군전쟁에서 엄청난 수의 군인과 식량, 무기 등을 지중해의 동쪽과 서쪽으로 실어 나르면서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게 된다.

이탈리아의 이러한 전반적인 경제적인 호황으로 엄청난 부를 쌓은 상인들은 당시 '길드'라는 상인조직을 통해 막강한 권력집단으로 부상하게 된다.


단테의 <신곡>, 상인들에게 천국의 문을 열어주다.


 피렌체 태생인 단테가 1320년경에 출판한 <신곡>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주인공 단테가 지옥, 연옥, 천국으로 이루어진 지하세계를 방문하는 이야기이다.

 책에는 현대인들에겐 다소 생소한 '연옥'이라는 장소가 등장한다. 이곳은 천국과 지옥의 중간단계로 당시 사람들은 죄를 지어도 연옥에서 일정시간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면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믿었다.


단테와 세 개의 왕국(천국,연옥,지옥)


 제의 호황으로 부를 축적한 상인들은 이 '연옥'이란 개념에 환호했다. 기독교적 종교관이 투철했던 당시 분위기에서 돈에 대한 인식은 아주 부정적이었다.

성경에도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라는 구절이 있는 것처럼 돈 많은 상인들은 결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인식이 팽배했으며 신앙심이 깊었던 중세 상인들에게 이러한 사실은 매우 큰 스트레스로 작용했다.


 이 때문에 그들에게 '연옥'은 죽어서도 천국에 갈 수 있는 통로가 된 셈이다. 특히 생전에 죄를 지었더라도 선행을 많이 했거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영혼을 위해 기도해 주면 연옥에서 천국으로 가는 대기 시간이 줄어든다고 생각했다.

 자연히 상인들은 열심히 일해 재산을 불려 나가면서도 다른 한 편으론 사후에 천국으로 가는 대기 시간을 줄일 방법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구원에 대한 욕망, 예술을 부흥시키다.


 그 당시 무역업뿐 아니라 금융업(일명 고리대금업)으로  성공한 상인들이 많았는데, 이들이 자신들의 죄를 참회하고 연옥에서 천국으로 갈 수 있는 구원을 받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바로 예배당을 짓는 일이었다.


 자신이 가진 부에 따라 성당이나 자신의 저택 내에 가문의 예배당을 짓고 성심껏 참회함으로구원받으리란 생각에, 내로라하는 가문은 자신들의 예배당을 짓는데 열을 올렸다. 그들은 저마다 최고의 예배당을 짓기 위해 천장을 비롯해 예배당 전면을 아름다운 그림으로 채우고자 다투어 당시 제일 잘 나가는 화가들을 섭외하기 시작했다.


예배당을 지어 신에게 바치는 스크루베니 가문의 예배당 벽화

 무역과 상업활동을 통해 쌓은 부로 특권층에 편입된

상인들의 구원에 대한 욕망이, 마침내 르네상스 시대 미술작품의 생산량을 어마어마하게 증가시킨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메디치 가문, 상업으로 쌓은 부로 문화귀족이 되다.


 이러한 상인들 가문은 예술의 후원자로서도 명성을 떨쳤는데 그 중심에는 메디치 가문이 있었다.

가문의 문장이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의사나 약재상에서 시작해, 직물업, 무역업등을 하다가 14세기 은행업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한 메디치 가문은 비슷하게 부를 쌓은 여느 상인들과는 다른 길을 걷는다. 


 일찍부터 예술의 가치를 알아보고 재능 있는 예술가를 발굴해 아낌없는 후원을 펼친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행보는 다른 가문들이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걸을 때도 건재를 과시하며 오랫동안 유럽의 명가로 남을 수 있는 저력이 되었다.


 그들이 후원해 대가로 성장한 예술가들은 또 어떤가?

100년 이상을 끌었던 피렌체 두오모성당의 돔을 완성하고 원근법을 알아내 르네상스의 포문을 열었던 브루넬리스키, 도나텔로를 비롯해 보티첼리,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등 메디치 가문은 르네상스를 빛낼 천재 예술가들을 배출해 내는 산실이었다.

메디치 가문의 문장과 주요 족보,문장의 변천사

 

 메디치 가문의 후원으로 꽃 피웠던 르네상스가 가문의 몰락과 함께 쇠퇴한 걸 보면 홀로 고고하다 생각했던 문화와 예술의 번성 또한 경제적 밑받침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르네상스의 설계자'라 할 수 있는 코지모 메디치는 친구로부터 왜 그렇게 많은 돈을 미술에 쓰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요즘 우리나라 정치가 돌아가는 걸 보면 반세기가 지나가기 전에 우리 집안은 쫓겨날 것 같네. 비록 우리 집안이 쫓겨나더라 나의 미술품들은 여기에 계속 남아 있을 것이네.”

 그의 말대로 1494년, 그의 가문이 피렌체에서 추방된 후에도 사람들은 남아있는 예술작품을 보면서 그 시대를 그리워하며 옛 영광을 되살리고 싶어 했고, 1512년 결국 그들이 다시 피렌체로 입성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세상의 모든 것은 연관되어 있다고 했던가?

들판에 핀 꽃 한 송이 또한 그를 둘러싼 한 줄기 공기와 한 줌의 흙, 물, 햇빛등의 보살핌이 없었다면 그렇게 아름다운 자태로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으리라.

 잇속만 차린다고 신조차 꺼려했던 경제가 탁월한 비전과 만났을 때,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와 수준이 선순환한다는 걸 일찍 감치 알아본 메디치 가문은 이미 돈 많은 상인 수준을 너머 시대를 꿰뚫어 본 혜안의 소유자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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