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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미 Jun 11. 2023

정치에 대한 무관심, 그 최대의 벌은?

민주주의, 그리스에서 꽃 핀 까닭(2)


 보다 많은 사람이 정치에 참여하길 바라며 민주주의 초석을 다졌던  솔론의 개혁조차 이미 부와 권력의 편중으로 극한 대립에 처한 아테네를 안정화시키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참주정치

 시간이 지나면서 솔론의 개혁에 대해 귀족과 평민, 양 쪽에서 불만이 쏟아져 나오면서 다시 어지러워진 상황을 틈타 평민의 지지를 등에 업은 페이시스트라토스라는 인물이 군대를 동원해 쿠데타를 일으킴으로써 참주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 당시 '참주'라는 말은 신분을 뛰어넘어 비합법적으로 정권을 장악한 지도자를 지칭하는 말로 지금처럼 폭군, 독재자로만 통용되는 부정적인 뉘앙스는 없었다.


 여러 번의 축출과 추방, 쿠데타의 부침을 겪으며 참주자리를 꿰차고 앉은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나름 평민들을 위한 정치를 펼치며 죽기 직전까지 20여 년의 장기집권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가 죽고 난 후, 권력을 이어받은 아들 히피아스가 엄격하고 잔혹한 정치를 펼치자, 자유로운 사상을 추구하던 아테네인들은 결국 그를 축출하고 만다.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

 몰락한 귀족가문인 클레이스테네스는 2대 참주인 히피아스가 아테네인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것을 눈여겨보다가 스파르타의 도움을 받아 그를 국외로 추방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기원전 507년, 집정관에 오른 그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한다.

그는 기존의 지연과 혈통위주로 구성된 4 부락 체제를 해체시키고, 혈연이 아닌 거주지를 기반으로 한 10 부락 체제재편했으며, 그곳에서 각각 50명씩을 선발해 400인회 대신, 500인 평의회를 만들어 민회에서 다룰 중요한 사항들을 논의하게 했다.


 클레이스테네스가 만든 또 다른 유명한 제도로는 오늘날의 탄핵제도의  모태라 할 수 있는 도편추방제가 있다. 억압적이고 잔혹한  참주정을 두 번 다시 겪지 않게 위해, 독재를 할 가능성이 는 이의 이름을 도편이라는 깨진 도자기 조각 위에 써서 제출하는 형식이었다. 투표수가 6000개를 넘으면 투표 결과가 유효하다고 인정했으며 그 중 가장 많은 표를 받은 이는 10일 안에 아테네를 떠나 10년 동안 귀국을 금지당했는데 이를 어길 시, 즉시 사형에 처하게 했다.

 

 독재를 막기 위한 방편으로 마련된 제도였지만 정적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악용 되기도 했으며, 클레이스테네스  자신도 이 제도의 첫 번째 희생자로 아테네에서 추방되는 일을 겪었으니, 인생이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기존의 타고난 신분이 아닌, 개인이 형성한 재산 여부로 계층을 재편성(금권정치)한 솔론의 개혁에 이어, 혈연이 아닌 거주지로 기본 부락 단위를 정하고 모든 이들이 평등하게 정치에 참여하도록 한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을 거치면서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단단한 기본기를 다지게 된다.

 이를 근간으로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확립되기 시작한 건 우연히 일어난 어떤 사건을 두고, 고국의 미래를 미리 내다본 한 지도자의 결단에서 비롯되었다.




아테네의 이순신, 테미스토클래스의 선택: 민주주의를 꽃 피게 하다

 기원전 483년, 아테네 근처 라우리온 광산에서 대량의 은광이 발견된다.  오늘날로 치면 수천억 원에 달하는 이 은광수익을 어떻게 배분할 지에 대해 아테네 시민들 사이에서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일반적인 방식으로 이익을 골고루 배분하자는 주장에 맞서, 테미스토클래스는 그 돈으로 함선을 제조하자는 의견을 제시한다.


 이미 페르시아와 마라톤 전투로 힘겨운 승리를 거둔 후였지만 페르시아는 설욕전을 벌이기 위해 호시탐탐 그리스를 노리며 전시체제를 강화하고 있던 터였다.

 당시 해상국가였지만 해군력이 약했던 그리스에서 강한 해군력만이 살 길이라고 판단한 테미스토클래스는 시민들을 설득해 함선 200여 척을 건조하자는 합의를 끌어낸다.

그의 혜안은 적중해, 2년 후 대군을 끌고 온 페르시아에 맞서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뛰어난 전략으로 살라미스 해전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써 위기에 처한 그리스를 구해낸다.




 모든 시민이 국방의 의무를 져야 했던 아테네에서는 전쟁에 필요한 갑옷이나 무기, 말등도 각자가 구비해야 했고, 국방에 헌신한 만큼 정치적 요구와 권한 또한 커졌다.

재산이 많은 귀족이나 시민은 최신식의 화려한 장비들을 갖춘 중장기병이나 보병으로 전쟁에 참여했고, 그 전적 또한 커서 자신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지만 가진 것이 없는 평민들은 그럴 기회조차 없었다.

 

 하지만 테미스토클래스의 지도하에 강력해진 해군력은  이들의 지위를 바꿔놓기에 충분했다. 가진 것 없는 평민들도  함선에서 노를 젓는 테테스로 활약함으로써 그들의 위상뿐만 아니라 정치적 요구와 참여의 기회 또한 높아진 것이다. 이는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 이후 절정에 달했는데, 여성과 노예를 제외한 모든 시민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민주주의가 확립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후 페리클래스 시대에 황금기를 맞았던 민주주의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후 쇠락의 길을 걷게 된 그리스와 함께, 발생한 지 100년 만에 쇠퇴의 수순을 밟는 듯했다.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다시 소생한 곳은 의외의 장소였다.

영국과 독립전쟁을 치른 미국은 1787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미 연방헌법에서 민주공화정을 선포함으로써, 2200년 전, 아테네 민주주의의 부활을 알렸고 지금은 세계 대부분의 나라가 민주주의를 채택해 국정을 이끌어 가고 있다.




 척박하고 험준한 토양 탓에 농사보다 주변 바다를 이용한 해상무역 쪽으로 눈을 돌렸고, 정치적으론 자치가 발달할 수밖에 없었던 그리스에서, 아테네인들은 일찍이 개방적이고 자립적인 기질이 발달했다. 또한, 개인적이고 자유로운 성격의 그들은 일찌감치 정치가 그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과 중요성을 인식하고 끊임없이 자신들의 권리와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투쟁해 왔다. 이러한 정치적 관심은  시민의식을 발달시키는 밑거름으로 작용했고 필연적으로 민주주의가 태동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조성했으리라.


오늘날, 개인의 삶은 치열하게 살면서도 그것을 정치와는 연결시키지 못하고, 각자의 노력만으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는 자본주의의 환상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은 과연 2000여 년 전 그리스인들보다 더 현명하다고 감히 자신할 수 있을까?

 자신의 삶과는 무관하다며,혹은 정치인들의 밥그릇 싸움에 진저리를 치며, 정치에는 여전히 곁을 주지 않는 무관심이 점점 더 극단으로 치닫는 현재의 정치상황에 전혀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작금의 상태를 마치 예언이라도 한 듯 2000여 년 전, 철학자가 한 말이 나의 머리를 강타했다.


정치를 외면한 경우에, 그에 대한 최대의 벌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 통치를 당하는 것이다.
- 플라톤, <국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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