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현미 Jun 04. 2023

민주주의, 고대 그리스에서 꽃 핀 까닭 (1)

그리스 아르카익 시대(2)


 민주주의의 태동

 오랜 암흑시대를 거쳐 새로운 문명의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그리스는 다양한 분야에서 변화, 발전하기 시작했는데 그중에서도 예술과 함께 단연 두드러진 부문은 현대 민주주의의 시발점으로 주목받는 정치체제와 관련된 분야였.

 고대 어느 지역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민주주의가 까마득한 옛날, 지중해의 한 약소국에 불과했던 그리스에서 발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혹자는 당시의 민주주의가  전제 군주제보다 더 낮은 단계의 정치형태라고 폄하하기도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숨 쉬고 있는 산소만큼이나 당연시 여기며, 그 이상은 없다고 믿을 정도로 이상적인 제도인 민주주의가 과연 어떤 역사적 배경하에서 잉태되고 발전되었는지 고대 그리스 역사를 통해 알아보고자 한다.


 국토의 대부분이 산지인 그리스에서는, 산 중간중간에 형성된 평야를 중심으로 폴리스라는 독특한 형태의 도시국가세워다. 이러한 지리학적 특성 때문에 모든 지역을 군주의 지휘아래 두고 다스렸던 동양의 중앙집권적 체제와는 달리, 폴리스 별로 그들의 실정에 맞는, 다양한 형태의  자치제도가 발달했다.

 말 그대로 전체를 통합하는 중앙 집권적 권력 없이, 폴리스가 하나의 작은 국가로서의 기능을 대신했는데 폴리스마다 시행하는 정치체제 또한 다양했다.

  

 암흑시대 이전 미케네 문명에서 맹위를 떨쳤던 군주제는 아르카익 시대 초기 이후, 더 이상 그리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제도가 되었다.

 군사력을 우선시했던 스파르타의 경우, 왕을 두었으나 권력이 한 곳으로 치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두 명의 왕을 선출함으로써, 군주제라기보다 소수 귀족에 의해 통치되는 과두제 혹은 귀족정에 가까웠고, 코린토스나 아르고스, 메가라 같은 기타 다른 도시국가에서는 한 사람의 폭력적인 권력 찬탈에 의한 참주제가 행해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또한 세습이나 독재등으로 흐를 경우, 이에 반대하는 시민의 힘을 이용해 참주를 권좌에서 끌어내리거나 또 다른 참주에 의해 권력이 이동하 했다.


[아테네, 민주주의가 꽃 피기까지]

  

 민주주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아테네에서도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기 전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

아테네의 통일과 건국 시조로 알려진 테세우스와 초기의 왕들이 죽거나 물러나자, 더 이상 왕들에 의한 통치를 원하지 않았던 귀족과 민들은 일찌감치 귀족들로 이루어진 집정관이나, 아레오파고스 회의, 시민의회에 의해 여러 가지 정치 사안들이 논의되고 결정되는 절차를 밟고 있었다.


킬론의 쿠데타(BC 630년)

그러나 권력을 쥔 귀족들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는 귀족정 치하의 아테네에서도 서서히 문제점이 드러나기 작했다. 정치권력뿐만 아니라 토지까지 귀족들에게 편중되자 날이 갈수록 빈부격차는 심해졌고, 농민들은 소작농이나 노예로 전락했으며 사회는 점점 불안정해졌다. 이를 틈타 킬론이라는 또 다른 귀족이 쿠데타(킬론의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결국 실패하였고 사회는 점점 더 불안정해졌다.


드라콘 법(BC 621년)

 이즈음 갈수록 피폐해지는 농민들의 삶과 더불어, 무역으로 부를 쌓은 평민들 조차 자신의 경제적 지위에 걸맞은 정치적 요구를 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집정관으로 있던 드라콘은 사회의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해 시민들에게 불리하게 적용되었던 관습법의 일부를 법률로 제정하는, 일명 드라콘 법이라는 아테네 최초의 성문법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 또한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드라콘 법은 법률로 제정했다 뿐이지, 여전히 귀족들에게 유리한 법이었고 '피로 쓴 법'이라 부릴 정도로그 내용은 엄격하고 잔혹했다.

 

 빚을 갚지 않으면 당사자와 가족 모두 노예가 되도록 법률로 정했고, 살인, 방화, 강도, 절도, 심지어 채소나 과일을 훔쳐도 사형이었다. 드라콘 법에서는 '게으름' 또한 범죄로 여겼는데 그에 대한 형량도 법률로 정했다고 한다.


가벼운 범죄도 전부 사형에 처해야 한다. 더 큰 범죄는 사형보다 엄격한 형벌을 찾을 수 없어서 하는 수 없이 사형에 처하는 것뿐이다.

 드라콘 자신이 언급한 것처럼, 누구나 겁낼 정도로 잔인한 법이었지만 사회의 안정을 기대했던 그의 바람과는 달리, 평민들 입장에선  좀도둑이나 살인자나 모두 똑같이 사형에 처해지므로 아예 중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아져서, 사회의 치안은 더욱 나빠졌고 불안도 심화될 뿐이었다.


솔론의 개혁 (BC 594년)

 귀족과 평민들의 갈등으로 인해 사회가  갈수록 어지러워지자,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자구책의 일환으로, 양쪽에서 존경을 받고 있 '솔론'이라는 인물이 집정관으로 추대되었다.

부유한 상인이며, 시인이기도 한 귀족, 솔론은 기원전 594년, 마침내 몇 가지 개혁 조치를 발표했다.


 첫째, 모든 채무관계를 없앴다.

모든 빚을 탕감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빚을 져서 노예가 되거나 추방된 사람의 지위를 회복시키고, 빼앗땅은 돌려주었으며, 돈을 빌릴 때 더 이상 신체나 땅을 담보로 잡는 것도 금지시켰다.


 둘째, 살인죄만 남기고 드라콘의 잔혹한 법률을 모두 없애고 아테네에 맞는 로운 법을 제정했다.


 셋째, 시민의 계층을 새로 정했다.

그동안 신분으로만 귀족, 농민, 수공업자등으로  나누었던 계층을 재산 정도로 재편함으로써 그 당시, 무역등으로 돈을 번 민들의 요구를 어느 정도 반영했다고 볼 수 있다.


 넷째, 400인 의회와 배심 법정을 만들었다.

솔론은 집정관과 아레오파고스등 귀족중심의 정치 체계에서 벗어나 더 많은 시민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각 부락에서 선출된 400인 의회를 통해 민주 정치 제도를 세우고자 했다.  이와 함께 재산에 상관없이 누구든 배심원으로 뽑힐 수 있는 아테네 최고의 사법기관의 모태인 배심 법정을 만들기도 했는데 이는 오늘날 사법 체계의 기원이 되기도 다.


 솔론의 이러한 개혁은 서로의 이익 많이 반영하고자 했던 귀족, 평민 양쪽의 불만을 사기도 했지만, 평민을 에서 벗어나게 하고, 더 많은 시민이 정치에 참여하도록 유도함으로써 귀족들을 견제하는 등 초기 민주주의의 기초를 세웠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

 이를 기반으로 아테네는 새롭게 태어날 수 있었으며, 이후 그리스 최고의 강국으로 거듭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아테네 시민들은 이렇듯 민주주의를 꽃피우기 위해 여러 가지 험난한 파도를 넘고 있었지만, 이러한 과정을 무색하게 만드는 인물이 등장했으니... 민주정을 다시 참주제로 회귀시킨  주인공은 다름 아닌 페이시스트라토스라는 한 비범한 인물이었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고대 민주주의의 토대, 폴리스 시대가 열리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