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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미 Dec 25. 2024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2)

존 던의 시를 통해서 본 소설밖 우리네 현실


어떤 사람도 혼자서는 온전한 섬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대륙의 한 조각, 본토의 일부이니,
흙 한 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내려가면, 유럽 땅은 그만큼 줄어들기 마련이다.
한 곶이 씻겨 나가도 마찬가지고,
그대의 친구나 그대의 영토가 씻겨  나가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의 죽음도 그만큼 나를 줄어들게 한다.
나는 인류에 속해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알려고 사람을 보내지 마라.
그것은 그대를 위하여 울리는 것이니.

                                           - 존 던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라는 헤밍웨이의 소설이 시작되기 전, 작가가 인용한 한 편의 시가 유독 시선을 사로잡았다. 왠지 마음 한 구석에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키던 이 시가 작품에 대해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소설을 완독 한 후였다.


 이 시의 작가는 목사면서 시인이었던 존 던이란 사람으로, 17세기 영국의 형이상학파 시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다. 시인은 죽기 몇 해전 [비상한 때를 위한 기도문] (1624년)이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위에 인용된 부분은 그 내용 중 열일곱째 기도문에 해당한다.

 

 존 던은 사제이자 시인으로서 삶과 죽음에 대한 명상을 시로 표현했는데, 시인이 죽기 전에 직면한 질병과 경제적 빈곤, 친구들의 죽음등이 그의 후기 작품에 음산한 분위기로 녹아들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 시에서 가리키는 종은 누군가의 죽음을 알리는 조종이며 작가 헤밍웨이는 소설의 제목인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이 시에서 차용했다고 한다.  




 헤밍웨이가 굳이 이 시를 작품의 서두에 쓴 이유는 무엇일까? 미루어 짐작해 보면 작품을 읽는 동안 품었던 의구심들이 하나씩 풀리는 것 같기도 다.

소설을 읽는 내내 주인공 로버트 조던의 상황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 면이 있었다. 그가 열정적인 이념주의자도 아닌데 스페인을 사랑하고 스페인어를 가르친다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걸 정도의 위험한 일을 자처하며 생면부지 나라의 전쟁에 참가한다는 설정이 나에겐 충분한 설득력을 갖지 못했다.

 

 주변 인물들이 왜 스페인까지 왔는지 묻는 질문에도 그는

파시스트를 싫어할 뿐이라고 담담하게 말할 뿐이다. 실마리를 하나 더 찾는다면, 스페인 작은 마을의 시장이었던 아버지가 '공화파 만세'를 외치며 파시스트들에게 총살당하는 얘기를 하던 마리아와의 대화에서 로버트는 자신의 가족도 대대로 공화파였고 자신 또한 공화주의자라며 스페인 공화파 정부의 승리를 바라는 마음을 내비친다.


 그리고 소설 중간중간에 남북전쟁에 참가해 용감하게 싸웠던 할아버지에 대한 자부심드러내며, 큰 부상으로 죽음을 앞둔 순간에도 자살을 택하지 않고 마지막 결전을 치를 준비를 하는 자신을 자랑스러워할 할아버지를 떠올리기도 다.


 소설 속 로버트라는 인물은 자신이 맡은 임무를 최우선으로 생각한다는 점에 이성적인 사람이다. 여타 신을 둘러싼 환경은 부수적인 요소이며 자신마저도 임무수행을 위한 도구일 뿐이라고 덤덤하게 말한다.

 반면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현재를 충분히 만끽할 줄 알았다. 3일 동안 이뤄진 마리아와의 짧은 사랑에서도 그는 72시간을 마치 720이나 7200시간처럼 느낄 정도로 진심을 다해 열렬히 사랑한다. 자신이 선택한 일에 대해서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용납하지 않을 정도로 강직하지만 주어진 상황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로버트의 성격은 어떻게 보면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소설 읽기를 끝내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존 던의 시를 수 차례 곱씹고 있노라면, 논리적 설득력과는 상관없이 가슴 저 밑바닥에서 피어오르는 뜨거운 그 무엇과 마주하게 된다.

주인공 로버트의, 그리고 거칠지만 주어진 환경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아갔던 다른 등장인물들의 삶이 가슴 시리도록 아프게 다가왔다.


 주인공이 그랬듯이 가까이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아니, 지금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머나먼 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모든 일들이 결코 우리와 무관하지 않음을, 그 누군가의 고통과 죽음이 나와 전혀 별개이지 않음을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이었다.


 이는  곧 초기 작품과 비교했을 때 작가시선달라졌다는 의미이기도 다. 헤밍웨이의 초창기 작품들이 주로 개인적, 비관적 관점이었던 것에 반해, 비교적 후기작인 이 소설에서는 비극적 결말임에도 불구하고 사람과 세상을 보는 작가의 태도가  긍정적인 것을 너머 희망적이기까지 하다.

 암울하고 빛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어두운 상황 속에서도 주인공은 끊임없는 자신과대화를 통해 자신이 맡은 임무의 정당성과 희망을 잃지 않으려 한다.


 더불어 겉으로 보기엔 합리적이고 냉소적인 성격의 이지만 작품 곳곳에서 함께하는 이들에 대한 애정과 사랑이 느껴지기도 하는데, 이는 작가 헤밍웨이 자신이 인간에 대해, 더 나아가 세상에 대해 따뜻한 시선을 견지하고 있다는 의미의 방증이기도 하다.





 너무나 유명해서 그 내용을 익히 알고 있는 오래된 소설이 유독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소설 속 상황이 현재 우리네 현실과 결코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계엄선포와 탄핵으로 이어지는 혼란스러운 정국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날마다 거리로 나서는 평범한 국민들을 보면서 소설 못지않은 뜨거운 감동을 느낀다.


묵묵히 자신의 일상을 이어가던 소시민들이 생업을 포기하다시피 거리로 뛰쳐나와 투사가 될 수밖에 없는 현 상황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님을, 다른 나라에서 일어나는 숱한 전쟁의 폐해들과 탄압들이 나에게도 닥칠 수 있는 일임을 자각한 데서 온 위기감일 지도 모른다.


 국민들의 삶은 어떻게 되든지 안중에 없고 오직 당리당략과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유지하는데만 혈안이 된 정치 기득권 세력들의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권력인 양 절대군주처럼 휘두르는 독재와 탄압의 칼날은 결국 그들 자신에게 겨누어질 것이다.

참고 참다 생존을 위한 극한 상황에서 떨쳐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민초들의 힘은 들불처럼 타올라 그들의 권력남용을 단죄할 것이며 그때서야 그들은 뒤늦게 깨닫게 될 것이다.

그들의 권력은 신이 아닌 국민들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다시금 존 던의 시를 되새겨본다.

그 묵직한 종소리에 가슴 한 켠이 먹먹해진다.


어떤 사람도 혼자서는 온전한 섬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대륙의 한 조각, 본토의 일부이니.

...

어떤 사람의 죽음도 나를 줄어들게 한다.

나는 인류에 속해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알려고 사람을 보내지 마라.


그것은 그대를 위하여 울리는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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